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175화 (175/242)

던전 사냥꾼 175화

‘이동 마법진은 그대로 이용이 가능하다.’

나는 ‘층의 통폐합 가능’ 기능에 관해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고, 그 결과 이동 마법진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리어 몇 개의 지점에 마법진을 추가할 수도 있었다.

이동 자체에 어려움은 없다는 것이다.

“그거야 가능한 일이지만요, 마스터. 층을 갑자기 줄이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고 이히는 생각해요.”

나는 가만히 턱을 쓸었다.

이히의 말도 타당하다.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마수가 나올 터. 하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 판단했다.

‘내 던전의 마수는 강하다. 다른 던전의 마수보다 능력치 면에서 우수하지. 그리고 스스로의 문화를 만들려는 기색 또한 있다. 적응력도 무척 높고.’

근원의 나무의 영향인가, 던전의 등급이 올라서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몰라도 내 던전의 마수는 타 던전의 마수에 비하여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우월하다고 할 수준은 아니나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 층을 합침으로 인해서 서로가 자극받게 된다면 층이 분리되어 그저 존재만 하던 시간에서 벗어나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강한 확신이 들었다.

만약 시행한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막시움과 로이, 로제, 크리슬리가 외부에서 시선을 끌고 있는 사이 결판을 짓는다. 그 정도면 마수들이 적응할 여유로는 충분할 것 같았다.

‘자극 없는 발전은 없다.’

고개를 주억였다. 괜히 층의 통폐합과 관련된 문구가 나타나진 않았으리라. 이를 염두에 두고 짜인 게 분명했다.

먹고 먹히는 사슬 관계가 형성되며 종을 초월한 마수가 나타나리란 바람을 가져 보았다. 성공할 경우 나는 거의 대부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마계 옥션에 목을 매거나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사라진다.

“실행하라.”

“알겠어요, 마스터. 그런데 그 전에 먼저 경고를 하고 대비할 시간을 주는 게 낫겠죠?”

“그러는 편이 낫겠지.”

“이히히. 네에~”

이히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명령을 받아 들었다. 하기야 조금이라도 여파를 줄이고자 경고를 하는 게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히가 움직이자 날개에서 작은 빛 가루 같은 게 떨어져 내렸다. 전에는 없던 현상. 빛 가루는 자체적으로 빛을 내며 떨어진 자리에 ‘조화’를 만들었다.

‘스스로 요정왕의 격에 도달할 가능성도 있겠군.’

그저 문헌으로 보았을 따름이지만 요정왕이 저와 비슷한 현상을 일으킨단 문구를 본 적이 있었다. 요정왕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항상 생명이 넘치며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고.

아직 그 수준에까지 미치지는 못했지만…… 몇 번만 더 이와 같은 일을 겪으면 요정왕의 격을 갖추는 게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요정왕.

수만 년간 비어 있었고, 어느 요정도 되지 못했다.

이에 하는 수 없이 요정들은 마신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다.

새로운 요정왕을 기리고자.

만약…… 이히가 요정왕이 된다면 다른 던전의 요정들은 어떠한 선택을 할까?

새로운 요정왕의 탄생을 축하할까? 염원을 이뤘으니 굳이 마족과의 계약을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억지로 파기했다간 혼의 소멸을 맞이할 테고, 그러한 강심장을 지닌 요정은 거의 없을 테지만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리란 건 확실했다.

행동이던 태도이던 간에.

‘혼의 소멸이라.’

다시금 그림자 황제의 이름이 뇌리에 새겨졌다. 다크 엘프 하이어 쉴라와 그 저주에 관해 알지 못했다면 진즉 소멸한 것으로 판단하였을 것이다. 처음 이스터 에그가 발동하고 나락 군주의 심장을 얻었을 때 그가 발악하는 목소리를 들었고, ‘소멸’되었단 메시지를 본 탓이다.

허나…… 마계에서 그의 흔적이 발견됐다.

최측근이었던 막시움이 인정했다. 그림자 황제의 마력과 비슷하다며.

게다가 최상급 4Lv에 해당하는 다크 엘프 하이어가 저주로 죽었다. 싸우려고는 하였지만 크게 반항조차 하지 못한 기색이 뚜렷했다.

그만한 강자.

대공들은 모두 지구에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림자 황제 본인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아서 예상일 따름이었다. 그림자 황제의 마력을 이은 제삼자 출현의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신들을 속인 채 다시 부활하려 했던 놈이다. 다른 수작을 부렸을 수도 있고, 정말 제삼자가 힘을 이었을 수도 있겠지.’

어깨를 으쓱했다. 하여간 그림자 황제는 지저 세계를 준비하고 스스로 그곳의 온전한 신이 되고자 하였다.

‘신. 모든 걸 준비한 채 신이 되려 했다면 태초의 씨앗도 어딘가에 구비를 해 놨을 것일진대.’

그리고 그것은 보물 창고에 있을 확률이 무척 높았다.

보물 창고의 아이템은 모두 업적 상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초의 씨앗과 비슷한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름은 다를 수도 있다. 연계되는 게 있을 수도 있고. 조금 더 살펴보자.’

이후 몇 날 며칠 나는 업적 상점을 뒤졌다.

* * *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에 다시 모인 사람들은 던전 근처에서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이에 우려를 표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지만 적어도 외국에서 쳐들어온 마족과 마수들의 등장 이후 한국의 던전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전기, 석유 대신 대체되는 ‘코어’를 던전에서밖에 구할 수가 없었다. 가장 힘을 기르기에 적합한 장소이기도 하였다. 몬스터 웨이브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이며 서울특별시는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다.

“젠장, 이것들은 이 바쁠 때 어딜 간 거야?”

김용우. 천명회의 길드 마스터인 그가 이죽거렸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유은혜와 에드워드가 사라진 것이다. 길드의 간판 격 얼굴인 두 사람이 동시에 사라졌으니 길드의 운영에 애로 사항이 꽃을 피웠다.

특히 지금 같이 중요한 시점에서 둘의 부재는 타격이 컸다.

서류 더미를 정리하며 김용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덜컹!

그 찰나 이지혜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마, 일 안 가요?”

로브 대신 활동하기 편한 옷과 삽을 들었다. 얼굴에는 먼지가 더덕더덕 붙어 있어서 일꾼을 연상케 했다.

동시에 김용우는 표정을 굳혔다.

“야, 나 길마야. 내가 꼭 그런 자리에 나가야겠냐? 안 그래도 처리할 게 산더미인데?”

“길마니까 나가야죠. 솔선수범! 인구 유입이 날이 갈수록 많아져서 판잣집 짓는 것도 힘들어요. 이럴 때 멋있는 모습을 보여 줘야 우리 길드의 기강이 서지 않겠어요?”

“말은 청산유수지. 에효~”

“그렇다고 경비대 인원을 뺄 수는 없잖아요? 유입도 많아지고, 테러도 늘어났어요.”

“구정부 기관 놈들 말이지…….”

서울 수복에 나선 이들은 크게 두 무리로 나뉘었다.

기린을 따르고, 그녀의 말처럼 ‘성군’이 나타나길 기다리자는 쪽과.

과거처럼 대통령을 필두로 정부의 힘을 부활시키자는 쪽이었다.

논란은 격했다. 결국 무력시위에 먼저 들어간 건 후자였다. 테러를 서슴지 않는 자들은 서울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날이면 날마다 공격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게 진작 좀 잘하지.”

이지혜가 투덜거렸다. 김용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너무 많이 저질렀지. 대비하려면 대비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나라가 요 모양 요 꼴이 됐고.”

기회는 많았다. 마족과 마수들의 침범은 갑작스러웠지만 힘을 모으고 침착하게 대비하면 그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겁에 질려서 꼬리부터 말았으니 처참하게 뭉개져 버렸다.

그 이후에도 자기들만 살겠다고 벽을 쳐 버리지 않았던가.

과거의 실수까지 더하면 이제는 더 실망할 건더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지혜는 피식 웃었다.

“결국 우리의 왕은 우리가! 그런 결론에 도달한 거죠. 그 성군이라는 자가 빨리 나타나야 할 텐데 말이에요.”

난세를 종식시킬 성군의 출현!

서울에 모인 각성자들이 염원하고 또 염원하는 일이었다.

“성군이라…… 우리 길드에서 나오면 좋을 텐데.”

“속물이네요. 어디에서 나오든 무슨 상관이에요? 나오기만 하면 됐지.”

“이왕이면 다홍치마라잖아. 우리 길드가 어디 나쁜 길드냐? 얼마나 대의적이야. 엉뚱한 곳에서 나올 바엔 차라리 우리 길드에서 출현하면 더 넓게 두루두루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뒤에서 팍팍 밀어줄 거고.”

“잘도 밀어주시겠네요.”

“그럼, 밀어줘야지. 그나저나 유은혜랑 에드워드에 대한 소식은?”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사라졌는데 제가 어떻게 알아요? 어련히 돌아오겠죠.”

“느낌이 싸해.”

“길마 느낌은 맞은 적이 별로 없죠? 착하고 다부진 아이니까 걱정은 말아요.”

이지혜는 실제로 별반 걱정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때가 되면 알아서 돌아오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근저에 있었다.

그것을 본 김용우가 쓰게 입맛을 다셨다.

“에라, 일이나 하러 가자. 이런 잡담 나눌 시간이 어딨어?”

“웬일로 바른말을 하네요.”

“야, 넌 꼭…….”

워낙 많이 생사를 넘나들어서인지 둘은 상당히 친해진 상태였다. 둘 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긴 했지만 그게 어울린다는 사람도 있었다.

작게 혀를 차며 김용우가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삽을 든 순간.

쿵. 쿠우우우웅.

땅이 거칠게 흔들렸다.

“지진?”

김용우가 빠르게 이지혜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

쿠르르르릉.

땅이 흔들리는 강도가 더 심해졌다.

“젠장, 무슨 일이야?”

“맙소사…….”

“왜 그래?”

“던전이…….”

던전이?

이지혜는 한 지점을 영혼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김용우는 이지혜의 눈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던전이…… 변한다고?”

던전의 외형이 변했다. 말 그대로 ‘던전’이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던, 북한산을 대신하여 자리 잡은 그곳이 지금은 거대한 ‘성’처럼 변해 버렸다.

얼마나 거대한지 한눈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폭만 수십 킬로는 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높이는…… 상상 불허. 하늘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명확한 원인이 규정될 때까지 던전 탐사는 금지합니다.”

기린이 말했다.

특유의 신비한 분위기를 품은 채로 단상 위에 올랐다.

“코어 비축분이 거의 없습니다. 3일만 던전 탐사를 멈춰도 전부 동이 날 겁니다.”

그에 따라 김용우가 언질했다. 기린과 독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각성자. 거대 길드의 길드 마스터만이 가능하였다.

작은 강당 안에 일곱의 길드 마스터와 기린, 그리고 두 다크 엘프가 있었다.

대책을 회의하고자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게다가 많은 각성자가 던전을 탐사하는 걸로 불안함을 감추죠. 그들이 폭발하면 피해가 클 거예요.”

담비 길드의 마스터 아린. 그녀가 내용을 덧대자 분위기가 역전되었다.

하지만 기린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옆에서 마검을 쥔 로이가 말했다.

“던전 코어의 문제라면 해결할 수 있어요.”

“탐사 없이 코어를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김용우가 입을 열자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의 주인님께서 대량의 코어를 보내 주셨어요.”

“구세주께서……?”

“무기도 하나 보내 주셨어요.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정리하라고요.”

짝!

로이가 한 차례 손뼉을 쳤다. 그러자 작은 인영 하나가 천장에서 뚝! 떨어졌다.

“헙!”

아무도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지라 길드 마스터들은 놀라고 말았다.

키는 고작해야 자신들의 어깨까지나 올까. 털이란 털은 한 올도 없는 맨몸의 남성이었다. 눈자위는 온통 까맸으며 날름대는 혓바닥이 기이하게 길었다.

“호문쿨루스. 실패작이라지만…… 그들을 견제할 수단으로는 충분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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