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179화 (179/242)

던전 사냥꾼 179화

그리핀, 기간테스, 히드라…… 그리고 이히!

숫자는 적지만 격만큼은 남다른 네 존재가 던전을 나왔다.

특히 히드라의 몸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 아주 먼 거리에서도 확연히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실상 이히를 제외하면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는 조합이었다.

던전을 빠져나온 즉시 거대한 울림이 지상을 때렸다. 히드라가 지나가는 곳곳에는 거대한 자국이 남았으며 모든 지형물이 파괴되었고, 그리핀은 하늘에서 오연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쿵! 쿠웅!

보랄 듯이 나와서 가장 먼저 서울특별시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최상급의 격을 갖춘 마수 세 마리가 동시에 나서자 어떠한 마수들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으며 인간들조차 발을 동동 굴릴 수밖에 없었다.

“길마, 어떡하죠? 일단 전투 태세 다 갖춰 놓긴 했는데…….”

유은혜가 작게 말했다. 지금 유은혜와 에드워드를 비롯한 천명회의 정예들이 특공대로 나와서 최상급 마수들의 뒤를 쫓는 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가만히 망만 보는 게 지금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다행히 지금까진 서울특별시 주변만 어슬렁거릴 뿐이지만 언제 돌변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끔찍하군.”

그러나 김용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세 존재가 뿜어내는 격을 김용우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세 마수 중에서도 유독 커다란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마수가 눈에 걸렸다.

절대로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쳐다보는 것조차 웬만하면 피하라는 본능적인 경고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울렸다.

“몬스터 웨이브일까요?”

아무리 강해진 유은혜여도 최상급의 마수를 혼자서 사냥할 수는 없다. 시간을 끄는 정도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김용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던전의 변화와 관계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도무지 저의를 알기가 어려웠다. 저만한 마수들이 뭉쳐 다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고, 저 셋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짐작이 되질 않았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세 마수를 살폈다.

그러던 중 미처 대피하지 못한 오크 무리와 마주하게 되었다.

쾅! 쿠르르릉!

가장 먼저 달려든 건 기간테스다. 그 위에서 그리핀이 브레스를 쏘았다. 수십의 오크들이 채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흐믈흐믈 녹아내렸다.

히드라는 공격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간테스나 그리핀보다 강하면 강했지 결코 약하진 않을 것이다.

단 한 차례 부딪치는 걸 봤을 뿐임에도 온몸에 전율이 돌았다.

이는 비단 김용우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정예들 모두가 참담한 눈빛으로 ‘학살’을 지켜볼 뿐이었다.

“미친…….”

굳이 두 번 볼 필요도 없다.

생각을 하기도 전에 김용우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다른 팀들한테 전해.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건들지 말라고.”

* * *

“이히히~”

이히는 신이 났다.

이곳은 자신이 살던 세계가 아니었고, 던전 바깥을 빠져나와 지구를 경험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히에게 처음은 언제나 새롭고 설레는 경험이다. 모르는 것을 탐험할 때의, 미지의 것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지금 이히의 눈에는 모든 것들이 그저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한참이나 히드라의 머리 위에 앉아서 지상을 내려다보던 이히가 대뜸 말했다.

“이 지구라는 곳에도 이히의 정원을 만들면 참 좋을 거 같아. 너희의 생각은 어떠니?”

그 밑에는 오크의 사체가 즐비했지만 이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매일 보는 게 시체인데 이제 와서 감흥이 있을 리가.

“작은 요정! 혼난다! 주인에게!”

기간테스가 만류했다. 이미 이히의 차원이 다른 장난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숱하게 겪은 기간테스였다.

“뭐야, 지금 이히가 나쁜 짓이라도 하려고 한다는 거야?”

“할 거다! 꼭!”

“아닌데. 이히는 앞으로 착한 짓만 할 건데. 정원은…… 음~ 맞아. 그거야, 그거.”

“그게 뭐냐!”

“그걸 몰라? 이히히히. 너는 몸집만 컸지 바보구나? 이히도 아는 걸 어쩜 모를 수가 있을까~”

이히는 기간테스의 약을 올렸다.

사실 이히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다.

그냥 기간테스의 반응이 재밌어서 골려 먹을 따름이었다.

“작은 요정! 혼난다!”

이히는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곳에 자신의 거점을 마련하겠다는 절절한 의지를 나타냈다.

눈을 빛내며 이히가 작은 씨앗 몇 개를 움켜쥐었다.

이윽고 기간테스의 시선을 피해 몰래몰래 그 씨앗들을 바닥에 뿌리기 시작했다.

“이히히히히히.”

* * *

나는 멀리서 마수들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공작 마르틴. 지켜만 보고 있을 건가? 아니면…….’

3일 동안, 이히에게 시켜서 마수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외부의 마수들을 멸하며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게 전부였지만 그 하나하나의 행동 모두가 마르틴의 눈과 귀로 들어가고 있을 것이었다.

‘어디에 숨어 있느냐. 필시 목표가 있을 터. 움직임을 보여라.’

그리고 나는 마르틴이 숨어 있을 공간의 탐색을 은근슬쩍 해 나가고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던전 주변의 마수들을 청소하는 것쯤으로 보이겠지만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마르틴의 죽음이었다.

‘마르틴은 확정된 미래를 볼 수 있지. 판데모니엄의 휘하 마족 중에선 가장 까다로운 놈이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죽여야 한다.’

미래를 본다는 사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만능과는 거리가 멀다. 제한이 많고 불투명한 미래는 전혀 볼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과 관련되어선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전생에서도 거의 최후까지 살아남은 마족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한데 한참 마수들을 이용해 서울특별시를 공격하던 마르틴이, 최상급의 마수들이 던전을 나서자마자 잠적을 탔다.

그러나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으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딘가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으리라.

문제는 마르틴이 목표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

쉬이 짐작이 가지 않아서 다음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건?’

그러기를 며칠이 더 지났을까.

나는 무언가를 옮기는 일단의 고블린 무리를 발견했다.

옮기는 것은 살아 있는 몇 명의 인간 여자였다. 즉시 각성자임을 알아차렸다.

‘각성자를 잡아서 무엇을 할 속셈이지?’

미간을 좁혔다. 한국의 각성자들이 타국의 각성자들에 비하여 월등한 성장을 이룬 건 사실이지만 굳이 잡아갈 이유가 없었다.

포인트를 수확할 속셈이라면 그냥 시원하게 각성자들을 쓸어버리는 편이 낫다. 각성자가 유전인 것도 아니니 굳이 납치를 해 가며 죽일 필요가 없었다.

그것도 여자만.

단순한 욕정이라면 각성자들만 고를 이유도 없었다.

‘뭔가가 있군.’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고블린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과격한 움직임을 보이면 마르틴이 아예 잠적을 탈 수도 있으니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 * *

산속의 동굴 안.

리치 한 구가 고블린에게 잡혀 온 여인들을 살폈다.

“쯧, 이 구릿빛 피부를 가진 여자들은 도무지 나이를 쉽게 판별할 수가 없군.”

리치의 흉흉한 안광이 여인들을 훑었다.

총 여덟 명의 여인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겁을 먹은 채 최대한 그 시선을 피했다.

살려 달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주변의 환경을 보자면 자연스럽게 입이 닫힌다. 수십, 어쩌면 백을 넘길 것 같은 숫자의 여인들이 발가벗겨진 채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피를 모두 뽑히기라도 한 듯 창백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아직 죽지 않은 이들도 있었지만 모두 창살 안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실성을 했는지 눈이 뒤집혔고, 마수들의 노리개로 이용되는 중이었다. 머지않아 죽을 것이란 사실은 명백했다.

“흐으으…….”

“제, 제발, 살려 주세요.”

보다 못한 여인들이 눈물을 와락 쏟았다.

저런 꼴로 죽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각성자라지만 자신의 생명은 소중한 법이었고, 하물며 최후가 저런 모습이라면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리치가 냉소를 지었다.

“클클, 걱정 마라. ‘적합자’로 판명되면 누구보다 극진하게 대해 주마. 그 전에 먼저 확인부터 하겠다. 솔직하게 답해야 할 것이다. 20대인 인간은 손을 들어라.”

눈치를 보며 여섯 명이 손을 들었다.

리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고블린들이 제대로 데려왔군.”

손을 들지 않은 두 여인에게 리치가 손가락을 뻗었다.

촤악!

잠시 후 두 여인의 목이 날아갔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

여인들은 또다시 굳고 말았다. 비명은 안 지른 게 아니라 못 지른 것이다. 각성자가 되며 지능 수치가 높아진 탓에 정신력도 강해졌지만 죽음과 마주하자 모든 게 부질없었다. 실제로 실금을 한 여인마저 있을 수준이다.

“20대가 아니면 필요가 없다. 자 나머지는 20대가 맞겠지?”

적막이 감돌았다.

리치는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손가락을 옮겼다.

“대답이 없군. 쯧쯧.”

“마, 맞아요.”

“스물……셋이에요.”

살아남은 여섯의 여인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그제야 리치는 다음 단계를 밟아 나갔다.

책상 위에 놓인 하얀색의 점액 같은 것이 들어 있는 작은 물병을 손에 들며 한 차례 흔들어 보였다.

“지금부터 이 물약을 너희에게 먹일 것이다. 적합자라면 몸 어딘가에 표시가 나타날 테고, 적합자가 아니라면 저기 보이는 여자들처럼 이지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지를 상실한 채 마수들의 노리개가 되고 있는 여인들. 두꺼운 칼로 살점을 조금씩 도려내는 놀과 차마 입에 담기도 수치스러운 짓을 일삼는 오크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당하는 여인들은 비명 하나 내지 못하며 조금씩 죽어 갔다.

그녀들은 이곳이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구하고자 마수들을 막다가 끝내 이런 종착역에 도달한 것이다.

“마셔라.”

리치가 억지로 약병을 앞선 여인의 입에 들이댔다.

여인은 최대한 입을 오므리며 마시지 않으려고 저항했지만 리치의 손이 억지로 입안을 파고들자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컥! 커어억!”

입에 물약이 들어간 즉시 여인이 몸을 기괴한 방향으로 틀어 댔다. 바닥에 몸을 내리깔고 마구 문대다가, 대략 30초쯤이 지나자 입을 헤 벌린 채 눈알을 뒤집어 버렸다.

“적합자가 아니로군. 뭐, 그래도 아직 다섯이나 남았으니 희망을 놓긴 그르지.”

“대, 대체, 그 적합자라는 게 뭐죠?”

그 광경을 지켜본 여인 중 하나가 겨우 입을 열었다.

리치는 흥이 나는지 잠시 행동을 멈추고 대답했다.

“공작 마르틴 님은 미래를 볼 수 있노라. 그리고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성녀’가 태어나리라 예언하셨다. 나는 너희가 그 ‘성녀’인지 알아보고 있는 거지. 답이 되었나?”

“서, 성녀가…….”

“클클클, 과연 이 지구에서 탄생하는 성녀가 내가 있던 곳의 성녀만큼이나 강력한 존재일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마르틴 님의 예언이니 결코 틀릴 리가 없다.”

리치는 다시금 약이 든 물병을 흔들었다.

동시에 여인들은 암울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 * *

‘성녀라. 그랬군.’

나는 어둠 속에 숨어서 리치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의도로 인간들을 그토록 집요하게 공격하는 지가 궁금했는데, 이제 보니 명확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성녀, 성스러운 여인. 마족과는 완전 반대편에 놓인 이.

당연히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성녀는 어지간한 천사보다 강력한 신성력을 사용한다.

그런 존재가 대한민국에서 나타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시기가 묘하다.

생명과 죽음의 나무로 말미암아 탄생하게 되는 건가?

그렇다면 아직 성녀는 나타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판데모니엄보단 마르틴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겠어.’

한정적이긴 하지만 미래를 볼 수 있는 마르틴은 사전에 제거하는 게 옳다. 먼 미래를 보는 건 불가능하다고 알지만 당장 내 추격을 피할 정도는 되었다.

‘내가 추격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을 거다.’

알았다면 모든 활동을 멈췄을 것이다. 의심은 하였으나 확신은 못했다는 뜻. 확실히 마르틴의 능력에는 한계가 많았다.

그저 ‘위험’을 감지한 수준이겠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저 리치를 잡고 더 뒤를 잡아 볼 것이냐, 이대로 방치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목표를 알았으니 내가 먼저 찾으면 그만이다.’

성녀를 알아볼 수 있는 물약은 탐이 나긴 했지만 섣불리 건드려서 거점을 없애면 마르틴은 다시 잠수를 타게 된다.

내 추격을 알아차리고 돌아가면 그때는 또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차라리…… 내가 있는 곳에 왔을 때 확실한 기회를 노려서 잡는 게 최선이었다.

‘거점이 이곳 하나는 아닐 터. 거점들을 감시하고 움직임을 파악한다. 성녀를 찾은 뒤 달려드는 마르틴을 잡는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