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80화
전생에서도 ‘성녀’라 불리는 인간 각성자는 많았다. 그들은 불특정 조건에서 각성했으며 심지어 각성자인 상태에서 다시 한번 각성한 사례마저 있었다. 요컨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녀라 불린 각성자들은 하나같이 강했다. 성스러운 힘을 사용하며 마수와 마족들을 몰아내는 그들의 힘에 매료된 인간들은 하나같이 성녀를 따랐다.
물론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성녀가 성스러운 힘을 사용하는 존재라면 천사, 천계와도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고.
실제로 지구에 하강한 천사들은 성녀와 동맹 관계 비슷한 것을 맺기도 하였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타당하지만 마족들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본질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믿고 따르는 신이 다르다. 성녀는 지구에서 파생되었고, 천계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장소에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신’이 개입했는지는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저 태초부터 존재한 지구의 누군가가 손을 써서 성녀가 탄생했다, 정도만 추측할 따름이었다.
‘나는 마족들이 몰랐던 사실을 알고 있지.’
늦은 저녁. 나는 서울특별시의 가장 높은 건물 위에서 느긋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대부분의 인간이 모여 있는 이곳 어딘가에서 성녀가 탄생할 게 분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가만히 턱을 쓸었다.
‘지구의 신들은 모두 던전에 봉인되어 있다는 사실. 어쩌면…… 던전의 파괴와 성녀의 출현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성녀는 신의 부름을 받은 여인을 지칭한다. 천신이 아니라면 지구의 신밖에 없었고, 지구의 신은 모두 던전에 봉인되어 있었다.
확실히, 전생에서도 그랬지만 성녀의 출현은 던전이 파괴된 다음이었다. 현생은 내가 던전의 파괴를 앞당겨서 성녀의 출현도 빨라질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 특정한 조건이 더 붙어야 한다는 게 정설이었고.
시기의 차이가 있는 건 그 탓이다.
그리고…… 징조는 있다.
성녀는 반드시 ‘무기’, 혹은 ‘신수’와 함께 나타난다는 것.
‘마르틴은 성녀를 이용해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
처음에는 판데모니엄의 지시로 움직인 줄 알았다. 하지만 반응을 보아하니 마르틴이 거의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듯싶었다.
성녀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정작 성녀로 무엇을 할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지를 상실시켜 자신만의 인형으로 만들 속셈일까?
“수, 숲이다! 북쪽에 숲이 생겼다!”
“그게 무슨 소리야? 숲이라니?”
“허허벌판이던 장소가 숲이 됐다고!”
돌연 인간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외부에서 정찰을 돌고 온 인간이 호들갑을 떨며 열변을 토한 덕분인데…… 이에 의아해하며 시선을 북으로 돌려 시야에 집중했다. 곧 시야가 넓어지며 북쪽에 생성된 거대한 숲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지?’
나도 조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생명과 죽음의 나무는 한창 자라는 중이다. 숲을 만들어 낼 힘은 없었다. 내가 따로 지시한 적도 없으니 다른 영향을 받았다는 뜻.
“어쩌지? 일단 보고를 할까?”
“저 말이 사실이라면 따로 정찰대를 꾸려야 할 것 같은데…….”
“조심해. 사방이 다 벌이야. 킹 비도 돌아다니고 있다구. 급은 낮아도 숫자가 장난이 아니야.”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숲이 생겼고, 거기에 벌떼밖에 없다면 범인이 짐작되었다.
‘이히.’
정원과 벌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게 이히 말고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거의 99.9% 이상의 확률로 이히가 범인일 터였다.
문제는 어떻게 던전 외부에 숲을 만들었냐는 거다.
‘격이 높아지며 이제 던전 외부에도 지형을 설정할 수 있게 된 건가?’
이 부분은 확실하지 않았다. 세계수를 틔운 것도 아닌데 광활한 숲이 생겨났으니 이와 비슷한 것이리라 예상만 할 뿐이었다.
‘그래…… 이걸 징조로써 이용해 봐야겠군.’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 하나.
이히의 이런 의외성은 독이 되기도 하지만 사용하기에 따라서 득이 될 수도 있었다. 그저 숲이 생긴 게 전부이지만 나는 이걸 징조로써 이용하자고 마음먹었다.
내게 느닷없다면 마르틴에게도 느닷없는 일일 것이다. 이히의 즉흥적이고 즉각적인 행위를 마르틴이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여…… 이 갑작스럽게 생겨난 숲에 그럴싸한 무기가 놓이게 된다면 어떨까?
아마도 마르틴은 ‘숲에 특이한 무기가 생겨났다.’는 정도만 읽게 될 것이었다. 놈의 능력은 만능처럼 보여도 이처럼 애매모호한 점이 많았다.
그리고 즉시 마수들을 파견해 주변을 감시하기 시작하리라. 어쩌면 마르틴 본인의 위치가 발각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최대한 조용히 처리해 주마.’
계획을 세우곤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 * *
각성자들은 12인이 1조로 팀을 이뤄 숲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총 다섯 개의 조가 투입되었으며 이들의 임무는 숲이 생겨난 원인과 위험도를 측정하는 일이었다.
“으슬으슬하네요.”
에드워드가 중얼거렸다.
밝은 낮에 왔음에도 숲 안은 어두웠다. 높은 나무가 우거져서 빛이 들어올 틈새가 거의 없었다.
“젠장, 이만한 숲이 갑자기 생겨날 수가 있는 건가?”
김용우는 이제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죽을 듯이 내뱉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세상사라지만 그동안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을 연달아 겪어서인지 김용우의 얼굴에는 만성 피로가 함께하고 있었다. 적응은커녕 겪을 때마다 새롭고 지옥 같은 게 사실인지라 이제는 조금 쉬고 싶다는 게 김용우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조사해 봐야죠. 길마, 차라리 피크닉 왔다고 편하게 생각하는 게 어때요?”
이지혜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김용우의 무리한 일정을 모르는 그녀가 아니지만 그것이 길드 마스터의 숙명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위로는 못할망정…… 에효. 제발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가자 조용히. 싸움은 지긋지긋하다.”
“길마가 이런 상태여서야 다른 길드원들이 본받을 수 있겠어요?”
“아서. 너희 나 없어도 알아서 다 잘하잖아.”
김용우가 씁쓸히 읊조렸다. 그리고 맞는 말이기도 하였다.
천명회는 다른 길드에 비해 일이 많았고, 덕택에 길드원 하나하나가 나름 성숙해질 수 있었다. 자기가 벌인 일의 뒤처리를 스스로 해결할 정도는 되었다.
길드 마스터 중심으로 모여 있는 다른 길드에 비하여 특화된 점이지만 정작 길드 마스터의 입장에선 이걸 좋아해야 할지 나빠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게 사실이었다.
“길마, 삐쳤어요?”
“뭐, 인마? 이게 진짜 놀러 온 줄 아나. 조용하고 주변 경계나 철저히 해.”
그래도 길드 마스터로서의 자각을 완전히 놓은 건 아니었다. 김용우가 면박을 주자 이지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잘 어울리네요.”
“그렇지?”
에드워드가 말하고 유은혜가 동의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끔찍한 소리 그만해라.”
“은혜야, 뚫린 입이라고 못하는 말이 없구나?”
즉각 반응이 나왔다. 김용우와 이지혜가 두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유은혜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작게 말했다.
“정말 잘 어울리는데…….”
중얼거림을 무시한 채 탐사가 재개되었다. 하지만 벌써 1시간 이상을 들어왔는데 정작 발견된 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킹 비 무리와 꿀을 따는 벌들을 발견한 게 전부다.
긴장도 반쯤은 풀려 버렸다. 딱히 위협이 될 만한 마수는 없었다. 도리어 이곳의 생태계에 인간들이 더욱 위협이 될 수준이었다.
그렇게 30분가량을 더 들어갔을 때였다.
“멈춰요.”
유은혜가 앞서 나가며 일행들을 제지했다. 잔뜩 긴장한 눈초리로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김용우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묻자 유은혜가 말했다.
“앞에 뭔가가 있어요. 굉장히 위험한 느낌이 들어요.”
“아직 우리를 눈치채지 못했어요. 먼저 치죠.”
에드워드가 덧붙였다. 스릉. 검을 꺼내 들고는 상당히 호기로운 분위기를 발산했다. 위험한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투쟁심도 생긴 모양. 수련의 방을 다녀온 뒤로 에드워드는 상당한 전사의 티를 내게 되었다.
“에드워드와 제가 다가가 보는 게 낫겠어요. 나머지는 여기서 대기해 주세요. 다른 팀에 무전 넣는 거 잊지 말고요.”
유은혜가 몸을 낮췄다.
임무 중에는 숲의 위험도를 체크하는 것도 있었다. 자신에게 이런 느낌을 주는 게 무엇인지 확인은 해야 좀 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었다.
“알았다.”
김용우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른 각성자들도 강하지만 저 둘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이다. 같이 움직이다가 걸림돌이 될 바에는 뒤에서 서포트를 하는 게 올바른 선택이었다.
이윽고 유은혜와 에드워드가 몸을 감췄다. 특유의 신속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뭐가 뭔지…….”
김용우가 한숨을 내쉬며 무전을 꺼내 들었다.
최대한 이 주변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경고는 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로부터 3분여.
절대로 길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
쾅!
폭발 소리가 가장 먼저 김용우와 일행들을 반겼다.
콰르릉!
땅이 흔들렸고, 나무들이 겁에 질려 떨었다.
“……실패한 건가?”
정말로 싸우려고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인즉, 살펴만 보려는 게 걸렸고 전투 상황으로 이어졌다는 의미인데.
“전투 준비. 유은혜, 에드워드와 합류한다.”
김용우를 포함한 10명의 길드원 전부가 침을 꼴깍 삼켰다.
폭음과 진동하는 마력의 파장. 각성자라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새로이 등장한 적은 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은혜와 에드워드를 놓고 갈 수는 없었다.
이후 10명의 각성자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나…… 채 수십 걸음을 걷기도 전에 그들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피해요!!”
수아악!
콰아앙!
김용우의 뺨을 스치며 지나간 빛의 창.
땅에 박힌 즉시 폭발을 일으키며 환한 빛을 사방에 퍼트렸다.
잠시 눈을 감고 다시 뜨자 부리나케 도망가는 유은혜와 에드워드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다수의 천사가 따르고 있었다.
특히 그중 하나는 무척이나 특이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작은 아기 천사. 아직 젖도 못 뗀 듯 보이는, 네 쌍의 자기 몸집보다 커다란 날개를 지닌 천사가 다른 천사의 품에 조심스럽게 안겨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던 탓이다.
“천사? 천사가 왜……?”
“뭘 멍하니 있어요!!”
김용우의 중얼거림이 끝난 즉시 그 옆으로 유은혜가 지나갔다.
“길마!”
“아, 알았어, 알았다고!”
이지혜가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김용우는 등을 돌리며 외쳤다.
“퇴각! 전속력으로 달려!”
* * *
“헉, 헉, 헉…….”
“케헥! 죽겠다…….”
숲을 빠져나온 일행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천사들은 일행이 숲을 빠져나온 즉시 추격을 멈췄다.
마치 숲 안에서만 행동할 수 있다는 듯이.
“대, 대체, 헉, 헉, 어떻게 된 거냐?”
김용우가 이마의 땀을 쓸며 물었다.
도망치는 와중에는 차마 물을 수가 없었지만 천사들이 사라진 지금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유은혜가 침착한 태도로 답했다.
“바위에 꽂혀 있는 검을 봤어요. 아무래도 천사들은 그 검을 지키고 있는 것 같더군요.”
“뭐? 검이 바위에 꽂혀 있다고?”
“예, 굉장히…… 성스러운 느낌이 드는 검이었어요.”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 숲과 천사들이 그 검으로 말미암아 나타났다는 건가?
김용우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이 정보는 모두와 토의를 해 봐야 할 사안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숲 안에서 성스러운 검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인간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