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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184화 (184/242)

던전 사냥꾼 184화

김유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대답할 수 없는 건가?

하지만 눈빛을 보면 안다. 난데없이 나타난 나로 인해 아직 헤매고 있었다.

“대답이 늦으면 살릴 수 없다. 기껏해야 20초 정도로군.”

나는 대답을 재촉했다. 실제로 김민지는 숨이 끊긴 지 얼마 안 됐다. 살리려면 충분히 살릴 수는 있었다. 물론 전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진 못할 테지만 생명을 이어붙이는 건 가능하였다.

“아……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김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을 살리면 넌 내게 무엇을 줄 거지?”

그렇다고 공짜는 아니었다. 내 것도 아닌 이에게 무언가를 줄 만큼 나는 아량이 넓지 못했다.

나는 마족이었고, 이 행위는 엄밀히 말하자면 계약과 같았다.

정상적인 상황에서의 계약이 아니라 내가 아주 유리한.

시간마저 촉박하니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김유라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이라면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자신의 전부.’

김유라는 그처럼 말하는 듯했다. 오로지 동생을 살리고자 하는 욕망만이 두 눈에 담겨 있었다.

전생에서 김유라는 반쪽짜리 성녀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마르틴의 침략은 온전히 나로 말미암아 발생된 것이다. 원래는 있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전생에서 김유라는 온전히 각성하여 마족과 마수들을 무참히 격살한 성녀 중 하나로서 자리를 잡았다. 비록 크게 이름은 떨치지 못했어도 성녀 그 자체가 가져다주는 무게감은 확실히 있었다.

반쪽짜리 각성이 무슨 효과를 일으킬지 알 수는 없지만 과거의 성녀를 손에 넣었다는 것만으로도 남는 장사였다. 저 동생이라는 여자도 어떻게든 ‘살리기만’ 하면 된다지 않은가.

나는 마법 주머니에서 약병 하나를 꺼냈다.

‘본래라면 호문쿨루스의 제조에 사용 될 것이었지만.’

어깨를 으쓱했다. 가파람이 만든 물약이었다. 근원의 나무에서 얻어 낸 최상급의 재료와 주어진 연구비로 갖가지 비싼 재료를 구매해서 6개월간의 노력으로 만들어 낸 결실.

엘릭서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 말 그대로 숨이 멎은 지 얼마 안 된 이라면 살려 내는 게 가능할 수준이다. 상당한 격을 갖춘 존재에겐 이런 약도 잘 통하지 않지만 고작 인간 하나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총 두 개를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내게 왔다. 나는 이 약병에 나의 피를 살짝 섞었다.

약물이 피와 섞이자 동시에 검붉게 변했다.

이후 철근을 치워 내고 절반을 억지로 먹였다. 김민지의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 간 약물이 전신에 퍼지며 빠르게 재생되기 시작했다. 잘려 나간 하반신의 경우엔, 다시 붙일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과정까지 전부 소화하려면 약물을 다 써야 했으므로.

나머지 절반은 김유라의 것이었다.

피가 멎고 김민지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조금씩 생명이 깃들었다.

이윽고 눈을 뜬 김민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

“아아……!”

김유라가 동생을 껴안곤 내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마르지 않았으나 과연 이 고마움이 끝까지 갈지는 두고 볼 일.

“마셔라.”

약물의 나머지 절반이 들어 있는 약병을 건넸다.

김유라가 잠시 멈칫하자 내가 이어서 말했다.

“너의 상태를 호전시켜 줄 것이다.”

김유라는 지금도 계속해서 기포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미 화상을 심하게 입은 피부에서 기포까지 올라오니 그다지 좋은 광경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머지않아 자멸하리라는 게 빤히 보였다.

문제는 내 피가 섞임으로써 생겨날 부작용인데…….

‘종속의 계약이다. 내 피를 마시게 하는 건 필수 행위이지.’

여동생을 볼모로 잡아 두고 사용하는 걸 고려하긴 했지만 그래선 100% 온전하게 움직일 수 없다. 자발적으로 나를 돕고 나서게 만들려면 계약은 필수 조건이었다. 만약의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으니 말이다.

허나 마족의 피가 신성력에 반발하거든 아예 돌이키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아니, 높은 확률로 그리되리라.

그래도 나는 절반의 각성에 주목했다.

불완전한 신성력이 몸을 집어삼킬 정도다. 내 피가 오히려 중화의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5:5의 도박에 걸어 보기로 하였다.

이미 성녀가 내 손아귀에 쥐어진 이상, 마르틴에게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죽어도 큰 손해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숲과 무기, 방금의 빛으로 ‘징조’는 확실하게 나타났고, 마르틴은 이곳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다른 것을 억지로 내세워도 크게 무리는 없다는 뜻.

꿀꺽!

김유라가 약병을 받아 들곤 거침없이 들이켰다. 동생의 살아난 걸 보았으니 약 자체가 무해하다는 생각을 한 듯싶었다.

하지만…….

“아아아악!”

“어, 언니? 언니!”

마신 즉시 효과가 나타났다.

몸이 뒤틀리며 신성력과 나의 마력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주도권 싸움이로군.’

나는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역시 반쪽의 각성으로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 자리를 비집고 내 마력이 침투하며 즉각 영역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아아아아아악!”

김유라는 몸서리를 쳤다. 마력, 신성력과는 별개로 몸 자체는 조금씩 치유가 되어 가고 있었다. 화상이 사라지고 허리의 신경이 되살아났으며 잘못된 습관으로 뒤틀린 자세마저 조금씩 돌아왔다.

“흠…….”

나는 턱을 쓸었다.

이 변화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싶지만 불청객이 끼어든 탓이다.

‘마르틴, 직접 나섰는가!’

피식 웃고 말았다.

여기서 수 킬로는 떨어진 지점.

천천히 다가오는 강력한 존재가 느껴졌다.

이 익숙한 내음은 마르틴이 분명했다.

‘불안했겠지.’

던전의 마수들이 출병하며 숲으로의 진출을 아예 막아 버렸다. 결국 마르틴은 성검을 갖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 놓였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그때 진짜 성녀의 출현을 알리는 징조가 나타났다.

여기서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뜸을 들였다간 또다시 기회를 놓치리라고!

하여 본인이 직접 이곳으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드러난 이상,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말라.’

여태까진 숨어 있어서 찾지 못했다. 그러나 표면에 나와 이처럼 달려오고 있는 와중이라면 잡지 못할 이유가 없다.

조금 더 뜸을 들일 줄 알았건만.

그만큼 급했다는 방증이다.

그 조급함이 자신의 목을 죄일 것이란 사실조차 모른 채.

서슬 퍼런 미소와 함께 나는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 * *

하늘을 뒤덮은 빛의 향연.

마르틴은 그것을 보자마자 성녀가 출현했음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예지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수의 뱀파이어를 잃었지만 성녀를 얻을 수만 있다면 손해이진 않았다.

“내가 직접 움직이겠다. 모든 마수는 따르도록!”

그는 자신의 던전에서 선별한 마수들과 이곳 한국의 마수들을 합쳐서 총 3만가량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2만에 달하는 마수 대군이 마르틴을 필두로 움직였다.

하늘을 까맣게 물들인 가고일들. 와이번과 킹 와이번 또한 있었다. 지상에서도 온갖 마수들이 꿈틀대며 이동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저 빛이 일어난 장소다.

‘이번에는 놓쳐선 안 된다. 빠르게 성녀를 얻은 뒤 돌아간다.’

한국의 던전, 그리고 그곳의 주인과 맞붙을 생각은 없었다. 애석한 일이지만 자신이 보유한 병력의 숫자나 질 모두가 한참 못 미치는 탓이다. 어떻게 저만한 병력을 모았을까 싶을 정도로 억! 소리가 나오는 대군이었다.

어쩌면…… 판데모니엄 님의 말마따나 랜달프 브뤼시엘의 던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레귤러.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기질을, 놈은 타고났다. 무슨 일을 일으킬지 몰랐고, 설령 일으켜도 이상할 게 없는 놈이 바로 랜달프 브뤼시엘이었다.

하여간 놈이 맞든 틀리든, 성녀를 얻은 뒤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마르틴의 최종 목표였다. 무사히 던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무리 상대가 강력해도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이곳만 무사히 지나가면 된다.

“마, 마수들이……!”

“살려 줘!”

하늘과 지상을 까맣게 물들이며 몰려오는 마수들. 인간의 입장에선 항거할 수 없는 천재지변과 같았다. 한참을 중앙으로 이동하던 다수의 인간이 마수에 의하여 쓸려 나갔다. 마수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뼛조각조차도 남지를 않았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인간들도 채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소수의 각성자도 도망가는 것이 전부였다.

‘기다림은 끝났다. 성녀의 힘을 갈취하고 보다 완전해지리라.’

완전한 예지!

그것만 가능하다면 두려울 게 무엇이 있으랴.

완전무결한 존재는 없다고 믿는 마르틴이었다. 예지는 곧 정보였고, 상대의 약점 역시 알아낼 힘이었다. 상상 이상의 강한 존재더라도 약점이 있는 이상 언젠가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게 마르틴의 지론이다.

그러니 이러한 위험을 무릅쓴 것이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미약한 경종이 울리고 있었다. ‘위험’이란 글자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숲에서처럼 미적대다간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를 이곳으로 끌고 나왔다.

“저건……?”

거의 다 도달했을 즈음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한 형상을 바라보며 마르틴이 인상을 구겼다.

익숙하다. 마계 옥션에서 몇 차례나 본 적이 있는 얼굴.

느껴지는 마력은 압도적이었다.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못 알아차린 게 이상할 정도로.

“랜달프 브뤼시엘!!”

마르틴이 경악에 차서 외쳤다.

역시!

역시 이곳은 놈의 던전이었나!

하지만 주변에 다른 마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놈이 혼자 있다는 뜻.

자신을 방해한 것도 바로 저놈이었다는 것이다.

“놈을 죽여라. 살을 뜯고, 머리를 잘라 내고, 내장을 비집어 꺼내라!”

3만에 달하는 마수들이 오로지 랜달프 브뤼시엘 하나를 잡고자 달려들었다.

* * *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

과연 3만에 달하는 마수를 홀로 죽이기엔 역부족이다.

초월자의 영역에 들었대도 나는 어디까지나 개인이었다. 물론 어중간한 수천의 마수쯤이라면 상대하지 못할 것도 없으나 제법 격이 높은 마수들이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내가 나선 건, 간단하다.

‘마르틴이 이곳에 있다.’

다른 이유는 필요 없다.

마르틴이, 내 시야 속에 있었다.

굳이 다른 3만의 마수를 처리할 필요가 없었다.

놈만 죽이면 된다.

‘저 중 절반은 한국에 방생되어 있었던 마수다. 마르틴이 죽고 제어권이 사라지면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자멸할 터.’

마르틴만 처리하면 다른 마수들은 굳이 내가 손을 댈 필요가 없었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싸우다가 끝을 맞이할 텐데 무엇 하러 손을 더럽히겠는가.

‘장관이로군.’

미소를 잃지 않으며 나를 향해 다가오는 마수들을 바라봤다.

홀로 저만한 대군과 맞선 적은 처음이었다.

전생에서도 몇 번이나 꿈꿔 온 장면이지만 자신의 한계를 알았기에 실천은 못한 그런 상황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강해졌다.

전생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해진 이후 바라보는 세상은 약할 때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만한 여유가 생겼고, 대처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까.

나는 양손을 펼쳤다.

화르르륵!

오만의 불꽃이 전신에서 솟아올랐다.

동시에 몸속에서 아직은 어색한 권능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지배의 권능’이었다.

‘적을 빈사 상태로 만들 시 낮은 확률로 상대를 지배하는 스킬. 대군과 싸우니 이제야 발동이 되는 모양이군.’

홀로 대군을 상대할 때 이보다 적합한 스킬이 있을까?

크르르르르!

뇌신도 잔뜩 흥분한 기세로 튀어나왔다.

불과 번개가 내 주변을 아롱이며 언제든지 쏘아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럼…….’

고개를 한 차례 꺾었다.

그리고 황제의 검과 분노를 잡았다.

‘시작해 보자, 마르틴.’

네가 이길지, 아니면 내가 이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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