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86화
이히는 신이 났다.
기간테스의 만류에 반쯤 억지로 만든 정원. 던전 마스터의 화를 사게 되리라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도리어 칭찬을 받았다. 한데 그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일의 ‘뒤처리’를 해 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을 받았다.
“이히히히~”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이히가 기간테스의 머리 위를 배회했다.
일을 맡겼다는 건 그만큼 신뢰한다는 증거다. 크리슬리보다도 자신을 찾은 걸 보면 어쩌면 믿음의 순위가 역전된 건 아닐까?
드디어 자신의 진정한 값어치를 던전 마스터가 깨달은 것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미소가 입가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작은 요정! 시끄럽다!”
하지만 기간테스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 왜, 뭐, 이히는 하나도 안 시끄럽거든? 이히히히!”
“내 머리 위에서 꺼져라!”
“대머리 주제에! 흥! 이히는 마스터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분이란 말씀이야. 이히가 머리 위에 있음을 고맙게 여기진 못할망정 말이야!”
“미친 요정!”
“이히한테 지금 욕을 한 거야? 씨잉…… 못된 대머리!”
이히가 고사리 같은 주먹을 들어 기간테스의 머리를 마구 내리쳤다. 격이 오르며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이히다. 주먹 하나에도 상당한 힘이 실렸다. 기간테스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마구 털어 냈다.
“대머리! 평생 대머리로 살아라, 나쁜 대머리야. 흥, 이히는 이제 던전 마스터께서 ‘직접’ 맡기신 뒤처리라는 걸 하러 가야겠어. 대머리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 지 알라나 몰라? 이히히히히히!”
“정신 나간 요정.”
정작 무엇을 해야 될지 감은 잡히지 않았지만 이히는 일단 기간테스를 놀리고 보았다. 기간테스는 그런 이히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이히히히히~”
그래도 마냥 좋기만 한 이히였다.
* * *
마수들의 습격, 그리고 이어진 싸움. 서울특별시에 있었던 각성자들이라면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 연달아 치는 번개 소리와 화염의 날개를 본 이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진절머리가 쳐지는 마력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대체 무엇이었을까.
각성자들은 즉시 팀을 꾸려서 탐사를 나섰다. 그리고 마수들의 사체가 산처럼 쌓여 있는 걸 목격하곤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서로 싸우다가 죽은 모습이군요.”
“현장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죽어 나간 마수들…… 마치 누군가, ‘한 명’을 상대하다가 죽은 모습이지 않습니까?”
“이만한 마수를 상대로 혼자요?”
“멀리서 화염의 장막 같은 걸 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번개 소리도 연달아 쳤고요. 그런 힘을 사용하는 자…… 구세주입니다. 구세주께서 마수들을 쓸어버린 겁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현장 탐사를 시작하며 여러 의견이 나왔다. 가장 유력한 건 역시나 ‘구세주의 출현’이었다. 수만의 마수를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자는 구세주 외에 없다.
“마족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양쪽 눈이 뽑혀 있습니다.”
“일단 확보해 두지요.”
마족의 시체를 확보한 건 처음이었다. 탐사에 나선 대원들 모두가 흥분했다. 일반적인 마수의 시체도 재료가 되거나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거나 하는 데 사용되었다. 한데 마수들을 이끄는 마족의 시체는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침이 고이는 것이다.
대원들은 각자 마수의 숫자를 세거나 마수의 종류를 수첩에 적어 나갔다. 보고할 내용으로 사용하기 위험이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가 지났을까.
“……쿨럭!”
몇몇 대원이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얼굴은 순식간에 환자처럼 새파래졌고, 손과 발이 떨려 댔다.
난데없이 이런 증상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한 가지밖에 없었다.
“독……!”
“무슨 독이죠? 시독?”
“시체들이 죽은 지 이틀이 넘지 않았습니다. 시독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독을 살포한 게 분명합니다.”
그것도 아주 강한 독이었다.
언저리의 마수들은 독에 의해 피부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가죽이 약한 마수들의 경우엔 진즉에 녹아내렸는지 아예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발견이 늦은 것이다.
이만한 독이 살포된 대지. 다시 살릴 수는 없었다.
“아악!”
허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대원들을 습격했고, 사망자가 속출됐다.
“마수! 땅속에 마수가 있습니다!”
“젠장, 포이즌 고블린입니다!”
포이즌 고블린.
독과 시체를 먹고사는, 그야말로 뒤처리에 적합한 마수의 종류였다. 자신의 영역에 관해선 강한 집착도 있는지라 포이즌 고블린이 서식하는 장소에는 어지간하면 가지 않는 게 답이었다.
결국 대원들을 이끌던 팀장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돌아갑시다. 이곳은…… 죽음의 땅이 되었군요.”
* * *
이히가 어깨를 주물렀다.
“아유~ 귀찮아. 뒤처리라는 게 생각보다 힘들구나.”
이후 숲으로 돌아가 꿀벌들이 열심히 따놓은 꿀통을 솎아 냈다.
그중 가장 맛있어 보이는 꿀통만 손에 들고 나머지는 바닥에 내팽개친 다음 조막만 한 컵을 소환했다.
수많은 꿀벌이 버림받은 꿀통 주위만 서성대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이히는 꿀과 물을 황금 비율로 섞어 즉각 마셨다.
“아, 맛있어. 역시 일을 한 뒤에 마시는 꿀물은 정말 꿀맛이야.”
시원하게 꿀물을 들이켠 이히가 턱을 쓸었다.
“뒤처리라는 말은 광범위하니깐 말이야. 이히에게 설마 시체 처리만 맡겼겠어? 분명히 다른 것들도 포함된 지시일 거야. 그러니깐, 음…….”
마스터의 지시를 들었을 땐 기뻤지만 막상 현장에 당도하자 조금은 실망한 이히다. 하지만 스스로 나름의 타협점을 만들어 또 다른 ‘뒤처리’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마스터가 남기고 간 것들을 처리하는 게 역할이었다.
이히는 슬쩍 고개를 돌려 아까부터 자신을 따라다니던 시선을 마주했다.
“꼬맹이 천사네? 너, 이름이 뭐니?”
“하시.”
입이 짧다. 크기도 이히보다 조금 더 큰 정도였다. 날개만 많았다.
이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시? 아~ 네가 하쉬구나?”
꺄아~
자신을 알아보자 하쉬가 이히의 근처로 날아왔다.
“이히히히. 이히랑 같이 다니고 싶은 거니?”
“우웅.”
하쉬가 동의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자 이히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좋아, 원래는 안 되는데, 특별히 이히가 봐줬다. 그럼 어딜 가 볼까? 음…… 아! 인간들을 보러 가자. 인간들은 정말 재밌거든. 이히히히히~ 로이랑 로제를 골려 주는 재미도 있을 거야. 막 기대되지 않니?”
“우웅.”
“이히히히히.”
뒤처리를 하겠다는 생각이 하쉬를 본 순간 날아간 이히였다.
그렇게, 인간들에게 악몽으로 기록된 ‘하늘을 나는 요정과 아기 천사의 공포’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 * *
김유라와 김민지.
둘을 눕혀 놓고 가만히 살펴보았다.
일단 김유라는 겉모습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불구였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깨끗하고 청순한 이미지로 새롭게 태어났다. 과연 ‘성녀’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는 되었다.
반면 김민지는 어떤가.
하반신을 잃은 채 겨우 살아만 있는 모습이다.
‘인간은 하반신 없이 살 수 없지.’
이미 상처가 전부 아물어서 떨어진 하반신을 붙이는 일은 요원해졌다. 그나마 가능성이라면 아예 만들어 버리는 것인데, 과연 그만한 값어치가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김유라는 조화의 성녀가 되었다. 그녀의 동생은…… 살려는 주었으나 다시 죽는 건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지.’
약속은 지켰다. 어디까지나 나는 죽어 가는 김민지를 살려 주었고, 생명이 다해서 다시 죽는 건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묘하게 걸린다.
“타쉬말.”
나는 타쉬말을 호출했다. 계속해서 머리끝을 건드는 감각. 나는 알지 못하지만 타쉬말은 알 수도 있었다.
“무슨 일이지?”
천사들의 양육으로 한창 바쁜 타쉬말이었다. 살짝 피곤한 기색으로 나타난 타쉬말에게 나는 바로 용건을 말했다.
“느껴지는 게 없나?”
“성녀 말인가? 흠, 확실히 묘한 느낌이로군. 일반적인 성녀는 아닌 것 같은데.”
“성녀 말고 그녀의 동생 쪽 말이다.”
“동생 쪽……? 다리 없는 인간 말이냐?”
고개를 주억이자 타쉬말이 시선을 옮겼다.
동시에 타쉬말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이상하군. 성녀가 아닐진대 성녀와 비슷한 신성력을 머금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언니 쪽과 아주 흡사하다.”
“무슨 뜻이지?”
“서로의 신성력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신성력뿐만이 아니라 생명 역시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 그만큼 효율적이며 강하지.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지라 확답은 내릴 수 없겠지만…… 내 생각이 확실하다면 둘의 힘은 성녀로서 상당히 상위 레벨이 될 것이다. 대신 둘이 떨어져 있으면 힘이 줄어들겠지.”
이건 또 뜻밖의 수확이었다.
나를 간질이던 느낌이 바로 그것이었나.
워낙 비슷하고 김민지가 가진 신성력이 적었던지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데 조건이 까다롭다. 몸은 둘이지만 생명은 하나이고, 서로가 항상 밀접하게 있어야 한다는 뜻이므로.
“둘을 훈련시킬 수 있겠나?”
타쉬말에게 물었다. 내가 신성력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 주는 건 불가능하다. 가르칠 이라면 타쉬말 외엔 없었다.
“던전 마스터여, 나보단 그대가 어울릴 것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들이 가진 건 신성력만이 아니다. 마력도 품고 있지. 두 가지 힘이 동시에 존재하는 건 원래 불가능한 일인데…… 동생은 마력을, 언니 쪽은 신성력을 더욱 많이 품고 있다. 두 개의 몸이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아아. 그런 식으로 조화가 되었던가.
그러면 내가 훈련시키는 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반신을 만들어 줘야겠군.’
둘이 하나라는 걸 알았으니 마냥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번거롭지만 가파람과 오스웬에게 말하여 적당히 기능하는 하반신을 만들도록 해야겠다.
“그보다 던전 마스터여. 이번에 공작을 잡았다고 들었다.”
“마르틴을 죽였지.”
“그럼…… 놈의 던전은 어찌할 셈인가?”
“따로 계획한 건 없다. 그런 건 왜 묻지?”
타쉬말의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잠시의 정적이 오갔고, 타쉬말은 매우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 던전을…… 천사들에게 내어 줄 생각은 없는가?”
“신성 지대로 선포하게끔 놔두라?”
“맞다. 나는 틈틈이 세계의 천사들을 주시했고, 그들이 각개격파 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뭉칠 구심점만 있다면 마족 따위에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진대. 아, 그대는 제외하고 말이지.”
급히 갖다 붙인 기색이 역력했지만 넘어가 주었다.
“던전을 얻는 이상으로 내가 얻을 이득이 있다면 생각해 보겠다.”
하지만 단순한 호의로 던전을 넘겨줄 만큼 나는 착한 마족이 아니었다.
물론 신성 지대로 선포될 경우 마족들이 자동으로 견제되는 이득은 있겠지만 부족했다.
타쉬말은 복잡한 눈빛으로 말했다.
“머지않은 날에…… 카마엘 님께서 강림하신다. 치천사의 위계를 가진 7대 천사 중 하나인 그분께서…… 지구의 정화를 위해 몸소 오실 것이다. 그분을 맞이할 장소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