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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188화 (188/242)

던전 사냥꾼 188화

이동하는 동안, 김유라는 침묵을 지켰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간혹 나를 쳐다볼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나는 구세주였고, 동시에 던전의 주인이었다.

이는 변치 않는 사실이며 굳이 첨언하고픈 마음도 없었다.

그런 분위기를 풍겼기에 김유라도 재차 묻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것이다.

“여기다.”

다크 엘프들이 모여 사는 곳.

근원의 나무가 존재하는 대지에 나는 발을 디뎠다.

도중 만난 수많은 마수보다 이 하나의 존재감이 더욱 컸다.

김유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나무, 성녀로 각성하며 더욱 마력 등에 친화되었기에 근원의 나무가 주는 신비함을 알아보았다.

“신의 나무…….”

김유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런 거창한 게 아니다.”

관점의 차이다. 누가 보면 신의 나무라 칭할 수도 있겠지만 내 관점에서 근원의 나무는 조금 특이한 나무일 따름이었다.

나는 마신을 만났고, 회귀하며 지구의 신들을 만났지만 그들에게서 이렇다 할 느낌은 받지 않았다. 압박감 정도야 느꼈지만 그게 전부다. 굳이 그들을 높이 사고 우러러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오셨습니까, 던전 마스터시여.”

가장 먼저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 나타난 건 줄리엄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마을의 모든 다크 엘프가 줄줄이 나타났다.

그 숫자가 어림잡아 1천. 아이가 눈에 띌 정도로 많았는데…… 확실히 다크 엘프의 규모가 그간 늘기는 늘었다.

동시에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다른 어떤 마물보다 충성심이 깊었다. 이들에게 그만한 혜택을 주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김유라는 그것을 퍽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다크 엘프까지…….”

다크 엘프는 누군가를 따르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들이 따른다면 그 주인 된 자는 당연히 던전의 주인뿐이었다.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듯 김유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인간 여자를 맡겨 뒀을 것이다.”

“예, 안 그래도 막 정신을 차렸습니다.”

줄리엄이 답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보도록 하지.”

“저를 따라오시지요.”

줄리엄이 앞장서며 길을 안내했다. 던전답지 않게 숲이 우거진 중심부. 아기자기한 건물들 사이를 오가며 잠시 걷자 줄리엄의 집이 나타났다.

‘너스레를 떨었나 보군.’

잠시 맡으라고 한 게 전부인데, 줄리엄이 직접 족장인 자신의 집에 김민지를 두고 치료를 병행한 듯싶었다. 엘프나 다크 엘프들은 인간을 극히 싫어하건만…… 내가 명했다고 해도 확실히 과장스러웠다.

안으로 들어서자 풀잎으로 만든 침상에 김민지가 누워 있었다. 그 옆에서 다크 엘프 몇몇이 번갈아 가며 죽 같은 것을 먹이는 중이었다.

“……민지야!”

김유라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김민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김민지는 아예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무슨 문제가 있나?”

김민지의 이상한 태도에 내가 묻자 줄리엄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게…… 중요한 것들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상실했다?”

“마음, 이라고 하지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인형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눈길을 돌려 김민지에게 시선을 주었다. 김민지는 힘 빠진 마리오네트처럼 아무런 표정 없이 누워 있었다.

마음, 마음이라.

원래는 정상이었다. 물리적 충격 외에 더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각성하며 문제가 생긴 건가?

“백치가 된 건 아닌가?”

솔직히 마음이라 하면 나는 그게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저런 식의 반응은 보통 백치가 된 이들에게서 나왔다.

그러자 줄리엄이 고개를 저었다.

“백치는 아닙니다. 미세하긴 하지만 몇몇 가지에 반응을 했습니다. 한데…… 저 인간 여자는 피가 이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반응이 있을 것인데 없군요.”

김유라는 목이 터져라 김민지의 옆에서 울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잠시 후에 데려오라. 나는 근원의 나무 근처에 있겠다.”

“살펴 가십시오, 던전 마스터시여.”

줄리엄이 눈짓하자 다크 엘프 둘이 내 뒤로 따라붙었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그들의 동행을 거부했고, 홀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히가 근원의 정령이 되며 근원의 나무와 소통이 가능해졌지만 정작 나무의 주인인 나는 별다른 소통을 한 적이 없었다. 되지도 않았고, 특별히 도전을 해 본 기억도 없었다.

하지만 카마엘과 달을 삼킨 태양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잠깐 생각을 정리하며 쉴 장소가 여기뿐이 생각나는 게 없었다.

‘나답지 않군.’

나답지는 않았지만 한 번쯤은 감성적이 되어도 나쁠 건 없다고 판단했다. 하여 근원의 나무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카마엘, 달을 삼킨 태양…….’

전생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강자들. 그들의 출현도 결국 나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었다.

‘내가 모든 걸 변화시키고 있다.’

변화란 결코 나쁘지 않다. 나는 오히려 이 변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변화는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치천사 카마엘을 잡고 마왕의 확고한 자리를 잡겠다는 인식은 변함이 없지만 과연 그 정도로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나로서는 치천사를 이길 수 없었다.

‘지저 세계를 다녀오고 나는 강해졌다. 누구보다 더. 여기서 멈출 생각도 없고, 계속해서 강해질 건 확실하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카마엘, 달을 삼킨 태양은 아주 큰 변수다.

그리고 나는 이 변수가 내 손안에서 움직이길 바란다.

지금은, 확실하게 손 바깥에 있었다.

‘강해진다는 건, 나 혼자만의 의미가 아니다. 세력을 넓히는 것 또한 강해지는 방법 중 하나이지. 던전을 통합하고 강력한 마수를 늘린다면 그 또한 가능하겠으나.’

눈살을 찌푸렸다.

자드키엘.

치천사 중 하나인 놈을 나는 전생에서 본 적이 있다.

얼마나 강력했는지도. 마족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가져다준 적을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수십, 수백만의 마수가 놈 하나에 의해 산화했다. 제아무리 대공이라 할지라도 1:1은 무리였다. 반쯤 연합하여 막대한 희생을 필두로 놈을 없앤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기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기고 싶었다.

홀로 상대하여 카마엘을 쓰러트리고 싶었다.

내 휘하 마수들과 함께 카마엘을 없애도 내 업적으로 기억되긴 하겠지만 나 홀로 쓰러트린 것과는 아예 이야기가 다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욱 빠르게 강해져야만 했다.

‘순수 능력치의 극을 봐야 한다.’

내 잠재력은 555다. 허나 나는 아직 그 전부를 채우지 못했다. 기껏해야 440이 채 되질 않았다. 아직도 100 이상의 능력치를 더 올릴 여지가 있었다.

그것을 전부 채우면…… 가능하다. 가능할 거라고 본다. 보정 능력치를 합치면 650에 가까운 능력치 총합. 가히 ‘신’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능력치이니 천하의 치천사인들 상대하지 못할까!

‘순수 능력치의 격상.’

내 예상이지만 적어도 500 정도까진 무난하게 상승할 것이다. 아니라면 잠재력 한계치가 상승할 리 없으므로. 하지만 무난하기만 해서는 내 욕심을 채울 수가 없었다.

‘기상천외라 하지. 짐작도 할 수 없는 기발하고 엉뚱한 발상…….’

평범한 방법으로는 택도 없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그러나 매우 효율적인 그런 방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누구도 떠올리지 못하는 발상이라는 건, 나에게도 적용되었다. 하늘에 뜬 구름을 잡는 것마냥 잡히는 게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끝없이 가지를 뻗친 거대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근원이란, 순수함과도 비슷하다. 아무 색에도 물들지 않은 본색이야말로 근원이라 할 만하다.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근원의 나무에 가져다 대었다.

“너는 간혹 답을 알려 준다고 들었다. 천계에선 중대한 사안이 있으면 천왕이 직접 근원의 나무와 소통을 했다고 하지. 그렇다면…… 내 고민의 답을 말해 보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와 같다. 신빙성은 없고, 누구도 확인하지 못한. 그러나 나의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내 감각은 분명히 ‘근원의 나무에 여러 답 중 한 가지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마르틴을 죽이고 그의 눈을 수집한 뒤로부터 아주 조금이지만 예지와 비슷한 능력이 생겨났다.

그래 봐야 몇 초 뒤의 당연한 결과를 예상하거나 하는, 예지라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그 느낌이 매우 강했다.

여태껏 근원의 나무와는 굳이 소통을 안 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마력을 개방하며 던전의 주인 된 자로서 말을 걸었으니 근원의 나무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쉬익!

이윽고 가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웅!

땅이 들썩이며 뿌리가 튀어나왔고, 천천히 나를 집어삼켰다.

찰나와 같은 시간.

다시 돌아온 후 눈을 뜨자 나는 여전히 근원의 나무 앞에 있었다.

허나 나를 감쌌던 가지나 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꿈이라도 꾼 기분이군.’

이맛살을 구겼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지 거의 기억이 없다.

‘분명…… 나 자신과 싸웠다.’

억지로 떠올리자 흐릿하게나마 윤곽이 잡혔다. 그나마 생각나는 것이라면 나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 갔다는 것.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정작 싸움의 내용이라거나 결과는 머릿속에서 지워져 있었다.

‘더는 적이 없으니 나 자신과 싸우라는 것이냐?’

근원의 나무를 바라보며 작게 혀를 찼다. 어쨌든 기억이 애매모호하다는 건, 결과가 좋지 않다는 방증일 터였다.

“다시 오마.”

나는 몸을 돌렸다.

어쨌든 답 비슷한 것을 얻었다. 과연 이 방법이 나를 강하게 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나았다.

* * *

세계 각지에 떨어져 있던 천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기다란 날개를 펼친 채 모든 적을 무시하며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계시라도 받은 양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천사들이 모인 곳은 유럽의 우크라이나였다.

바로, 지금은 죽고 사라진 마르틴이 다스리던 곳이었다.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그곳에 십수만의 천사가 모였고, 좌천사 알렉트릴이 자신의 검을 던전의 최상층에 꽂으며 신성 지대의 선포를 알렸다.

후우우웅!

동시에 신성한 빛이 던전에서 빠져나와 하늘 전체를 감쌌다.

던전은 천천히 변형되어 갔으며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요람으로 변했다.

요람은 마력 대신 신성력을 주변에 흩뿌렸다. 존재하던 모든 마수의 피부가 녹아내렸으며 뼛가루마저 남기지 않았다.

오로지 경건한 마음을 지닌 인간들만이 그 장소에 머무를 수 있었다. 악한 자들은 알아서 그 자리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도하는 수녀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빛의 무리는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목격되었다.

마족들도, 인간들도, 그리고 남은 천사들도 그 빛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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