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96화
달의 마법사가 굽힌 허리를 폈다. 치렁치렁한 머리칼이 하늘을 향해 솟자 까맣기 그지없는 두 눈동자가 드러났다. 밤을 그대로 눈 안으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안 되어 보이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몸과 얼굴이었다.
이어서 달의 마법사가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으로 어둠이 몰려오며 곧 주변은 완연한 밤이 되었다. 태양의 빈자리에 달이 떠올랐고, 까맣기만 하던 두 눈이 노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본 드래곤들은 순간적으로 몸을 틀었다. 이곳에 모인 모든 마수 중에 가장 강한 자가 나타났음을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달의 마법사가 손을 뻗으니 달이 더욱 환하게 물들었다.
위아아아앙!
그의 손끝으로 빛의 입자들이 모였다. 잠시 후 빛들은 분산되어 수천, 수만 개로 늘어났다. 마치 밤하늘에 떨어지는 별똥별을 연상시키듯 본 드래곤들을 향해 입자들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콰르르르르릉!
본 드래곤이 브레스를 토해 냈다. 용족이 기본적으로 갖춘 스킬. 그중 본 드래곤의 숨결은 최상위권에 들어가는 강력함을 자랑한다. 정면으로 맞을 경우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별빛에 닿은 브레스는 자연스럽게 흡수되어 힘을 잃었다. 평범하게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내 위험을 눈치챈 본 드래곤이 브레스를 멈춘 뒤 날개를 활짝 펼치고 강하하였다. 작은 마수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으나 이빨로 물어 죽이고, 크게 날갯짓하여 떨쳐 낸 후 밤의 영역을 빠져나가고자 빠르게 날았다.
달의 마법사가 무표정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그 뒤를 좇았다. 그 속도는 본 드래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밤의 영역도 함께 이동하며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미약한 별빛만 남았다.
아르엔투와 거리가 멀어졌음에도 달의 마법사는 아랑곳 않았다.
그가 받은 명령은 오직 하나. 본 드래곤들을 상대하는 것이었기에.
* * *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산의 정상에서 신호가 닿기를. 내 인식은 상당히 넓은 범위까지 닿아서 누군가가 영역 안에 들어오면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막시움은 달의 마법사가 지척에 다가와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이것은 시험이다. 그 달의 마법사라는 녀석이 몰고 오는 ‘밤’을 내가 인식할 수 있을지 없을지.
정상에서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명상에 잠겼다. 벌써 며칠째나 이어진 흐름이었고,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그저 몸을 움직이는 것만이 수련이라 생각했거늘.’
몸을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더욱 강해지는 비결이라 생각했다. 남보다 배로, 안 되면 그의 배로 매진하면 반드시 강해질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실제로 어느 수준까지는 그게 사실이고, 진리였다.
하지만 근원의 나무에서 나 자신과 맞붙으며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이제는 단순히 명상하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실전 이상의 효율이 나왔다.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게 가능해지며 기술이나 움직임이 조금씩 다듬어졌다.
이는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능력치를 올리는 걸 제외하고는 더 강해질 수 없다 판단했는데, 같은 능력치로도 한 발 더 앞서 갈 수 있는 게 증명된 것이다.
아니…… 아니다.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잊어버렸다.
전생의 나는 어땠는가.
지구로 오기 전의 나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고자 약한 힘으로 강자를 제압하던 나는 그 방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터다.
그런데 지구로 오고 상태창이란 게 생겨나며 능력치와 스킬에 너무 집중을 했다. 왜냐하면 그 둘은 눈에 보이는 것이었고, 확실한 지표가 되어 준다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내 그림자는 나와 같은 능력으로 나를 압도했다. 같은 능력이라도 차이가 있다는 걸 그때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상태창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부분의 발전을 반쯤 방치해 버렸다. 내 책임이다. 그러니 고쳐야 한다.
‘이 느낌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미간을 좁혔다.
이질적인 느낌이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소름…….
피식 웃어 버리고 싶었으나 그러질 못했다. 내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내가 의식하며 생각하기도 전에!
이런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강자를 만났을 때!
나는 이미 대공들을 만났고, 전생에서 그들이 얼마나 강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적응된 정신과 몸은 웬만해선 꿈쩍도 하지 않는다. 불의 정령왕을 만났을 때 다소 놀라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상정 범위였다.
한데…… 지금 다가오는 존재는 다르다.
이런 경우는 무척 오랜만이었다. 허나 왜인지 압도적이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냥 다르다. 모든 게 달랐다. 이해가 되지 않았고, 좁혀진 미간이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나는 눈을 떴다.
시선을 돌려, 이 이질적인 느낌을 가져다주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도착했군.’
저 멀리서 밤이 몰려오고 있었다.
육안으로 겨우 확인되는 장소.
‘인지했다.’
막시움은 하지 못했으나, 나는 해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인지만 했을 뿐 저게 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미약하게 존재하던 예지의 능력도 지금은 아무런 쓸모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고자 나는 오만의 불꽃을 일으켰다.
‘네놈은 누구냐.’
밤을 몰고 오는 달의 마법사. 우파가 무엇을 꽁꽁 숨겼는지 이제 두 눈으로 새길 시간이었다.
본 드래곤을 맹렬하게 쫓고 있는 한 인영.
놈이 가까워질수록 내 주변이 새까만 밤으로 물들어 갔다.
그러나 놈을 보는 나의 눈빛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강한지, 약한지, 무슨 종류의 마력을 품고 있는지도…….
완성된 듯하면서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는 것만 알았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흐름은 마치 태초의 세계가 태어날 때 일어난 폭발과 같았다. 저런 류의 마력 흐름은 본 적이 없기에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일단 부딪혀 봐야겠군.’
미지의 적.
모든 게 베일에 가려 있다면 먼저 벗겨 본다. 한 꺼풀이라도 벗겨 내면 아주 조금이라도 윤곽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분노와 황제의 검을 들었다.
‘다크 소드.’
검이 검게 물들며 모든 걸 양단하는 거친 기세를 품었다.
나는 여기에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마력을 더욱 집중시켰고, 과잉되어 터지기 직전에 달려오는 마법사를 향해 내리그었다.
쿠와아아아아앙!
반경 수백 미터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은 크게 팽창하다가 압축되어 모든 것을 소멸시켰다.
허나 놈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다. 머리칼이 조금 그슬린 수준에 그쳤다.
말이 안 된다. 나조차도 몇 번이나 당한 수였다.
내 시선이 놈의 뒤로 갔다.
달. 커다란 달이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놈은 밤과 함께 달도 끌고 다녔다.
‘라이프 베슬인가?’
간혹 리치들이 사용하는 생명 저장로다. 자신의 몸 안에 품고 다니는 리치가 대부분이지만 불사의 유혹을 떨치지 못해서 따로 생명을 저장하고 숨겨 두는 리치도 있었다. 그를 라이프 베슬이라 불렀고, 저 달에서 비슷한 느낌이 났다.
하지만…… 라이프 베슬을 따로 준비하면 마력의 효율이 나빠진다. 강대한 마법은 사용할 수 없고, 신체가 부서지면 수복이 무척 느리다.
‘찰나의 시간에 부서지고 회복됐다.’
라이프 베슬이라 판단하면서도 확신이 안 서는 이유.
방금 전의 공격으로 나는 놈의 육체가 부서지는 걸 확인했다. 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거의 ‘분쇄’ 수준이라 할 만큼의 육체적 타격을 입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재생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럴진대, 부서지며 동시에 재생했다. 회복이라 했지만 회복의 수준을 넘어섰다. 경악을 넘어서 경이로울 지경이다.
‘그럼 뭐지?’
역시 알 수가 없다. 기묘하기 짝이 없는 놈. 다크 소드는 재생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만 초월자는 예외였다. 말인즉, 일단 초월자의 영역에 들어선 놈이라는 거다.
달의 마법사가 내게 잠시 시선을 줬다. 나는 놈에게서 쏟아질 공격에 대비했다. 공격을 하는 것보다 받아 보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를 지나쳐 갔다. 내 뒤로 이동 중인 본 드래곤을 미친 듯이 쫓기만 하였다.
내 공격 따위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건가?
‘허.’
이번에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런 종류의 무시는 전생에서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공격하면 상대는 반드시 반응을 해 왔기 때문이다.
이를 갈며 달을 바라봤다. 정말 라이프 베슬이라면 저걸 공격하는 순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오만의 날개를 더욱 태웠다. 빠르게 솟구치며 순식간에 모든 벽을 벗어났지만…… 진짜 달이라도 되는 건지 전혀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밤의 영역 안에 달의 모습으로 위장시켜 둔 것이라 판단했건만 그게 아니었다는 거다.
‘판을 깨 버렸군.’
나는 제법 상식의 한도가 넓다. 그런데도 저 달의 마법사는 그 한도를 벗어났다.
혹시 몰라서 상태창을 확인해 봤다.
‘하이엔달의 목걸이 효과가 발동 중이다.’
달이 뜰 때만 한정하여 마력 3이 오르는 옵션이 적용되어 있었다.
진짜 달이란 말인가?
달을 향해 공격을 퍼부어 봤지만 닿지 않았다.
“쯧.”
안 되는 걸 억지로 계속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입맛을 다시며 다시 내려왔다.
어느새 뒤를 잡힌 본 드래곤의 날개 하나가 3분의 1쯤 사라져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면 머지않아 본 드래곤이 소멸할 판국이었다.
‘저놈을 칠 수밖에.’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몇 번이나 저 육신을 파괴시키다 보면 언젠가는 한계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어도 과연 나를 무시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파라노말.”
[파라노말의 축복이 부여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1시간 동안 2씩 상승합니다.]
‘뇌신. 놈을 잡아먹어라.’
나는 한층 더 강도를 높였다. 분노와 황제의 검을 서로 교차시킨 뒤 다크 소드를 발동시켰다. 이후 마력을 집중시켰고, 거기에 뇌신의 힘을 더했다.
실전으로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일. 당장 나조차도 감당이 될까 싶은 힘이 두 검 사이에서 모여 갔다.
나는 그 힘이 폭발하기 직전 달의 마법사를 향해 내리그었다.
놈은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히 내 힘과 부딪힌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나는 듯 압도적인 광경이 연출되었다.
좀 전에 행한 공격보다 10배는 강력했다.
‘몇 번 사용하지 못하겠군.’
엄청난 마력을 잡아먹었으니 몸이 축 늘어지듯 힘이 빠져나갔다. 아직 여력은 있었지만 무작정 반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과연 이번에는 어떨까.
폭발은 수없이 팽창하고 수축하길 반복했다. 나도 안의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이윽고 폭발의 여파가 사라지며 놈의 인영이 나타났다.
팔 한쪽이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팔이 있어야 할 부위에 다리 한쪽이 있었고, 다리에 팔이 나 있었다.
수없이 반복하다가 재생이 잘못된 것이다.
‘효과는 있다.’
이번에는 무시하지 못하리라.
때마침 달의 마법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3초가량.
이후 다시 본 드래곤을 죽이는 데 집중했다.
“…….”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복잡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나는 놈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