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197화
‘어디까지 무시할 수 있는지 보겠다.’
공격이 아예 안 들어갔다면 모를까 분명히 재생이 제대로 되지 못할 정도의 타격을 줬건만 시선을 던진 건 3초가 전부였다.
사실상 아예 안 본 거나 마찬가지다.
해서 얼마나 배포가 커다란 녀석인지 시험을 해 보기로 하였다.
아예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무작정 맞기만 하는 놈이라면…… 어려울 건 없었다. 나 역시 무작정 공격을 퍼붓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므로.
분노와 황제의 검에 마력을 때려 박았다. 저 재생력으로 보건대, 단순히 목을 자르는 정도로는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아예 육신 자체에 커다란 상흔을 남겨야 조금이라도 영향이 간다.
촤르르륵!
검과 검 사이에 뭉친 거대한 마력의 기운이 썰물같이 빠져나가 달의 마법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
오랜만이다. 입에서 단내가 나왔다. 육체를 움직이진 않았지만 마력이 거의 고갈 상태였다. 1시간 이상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은 대가다.
그쯤 되자 놈도 나를 무시할 순 없었다. 공허하기 짝이 없는 눈동자가 본 드래곤을 대신해 내게 향하는 중이었다.
다만 달의 마법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몸의 3분의 1가량이 재생 불가한 타격을 입어서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솔직히 나도 믿기지가 않았다.
지금까지 퍼부은 공격을 직격으로 맞는다면 천하의 치천사도 멀쩡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불의 정령왕이나 전생의 대공들도 이미 가루가 되어 사라졌을 막대한 공격이었다. 어디까지나 정통으로 직격당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한데, 달의 마법사는 직격을 당하고도 육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백, 수천, 어쩌면 수만 번 재생을 반복했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에 다다른 듯싶었다.
“너는 누구냐?”
가만히 다가갔다. 달의 마법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눈만 내게 향하고 있을 뿐. 조금이지만 눈 안에서 약간의 ‘혼란’이 느껴졌다.
아마도 놈은 나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위험하긴 한데, 어찌해야 할지 결정이 안 된 모습이었다.
‘항상 아르엔투의 옆에 있다고 했지.’
어쩌면……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꼭두각시일지도 모르겠다. 본 드래곤을 처리하란 명령만 받고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 내가 공격해도 명령은 어디까지나 본 드래곤의 말살이었으니 아예 신경을 접은 것이었다.
‘이만한 능력을 가진 인형이라.’
대관절 우파는 어떻게 이만한 존재를 손에 넣은 건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단순한 소환으로는 불가능하다. 공허의 존재, 내가 만난 콘테고놈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내가 근원의 나무의 싹을 틔우고 던전을 유니크 등급으로 올린 업적과 비슷한, 혹은 그 이상의 업적을 달성했다면 모르겠으나 지금 시기에 그만한 이벤트를 발견했다니,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달의 마법사.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녀석은 적어도 전생에서도 출현하지 않은 놈이었다.
‘위험하다.’
본능이 경고했다.
놈이 본 드래곤을 공격하는 모습을 봤다. 마구잡이로 가진 힘을 휘두르는 것에 불과하여 효율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공격력 하나만큼은 발군이었다. 거기에 이만한 재생력까지 둘렀다면 막시움이 말한 ‘무적’의 의미가 전혀 퇴색되지 않는다.
나조차 위험을 느낄 수준이었으니.
만약 아르엔투가 나타나 어떻게든 나와 대결할 것을 명하면 어찌 될까.
냉정하게 판단해 보았으나 확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저 인형처럼만 움직인다면 내가 조금 더 유리할 테고, 놈이 조금이라도 제대로 싸운다면 역전될 테다.
‘지배의 권능이 발동하지 않는다.’
이만한 위협을 주었다. 빈사 상태에 가까운 상태가 수없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지배의 권능은 전혀 발현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파의 지배력이 더욱 커서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우연찮게 권능이 발현되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저 단순히, 달의 마법사라 불리는 이 녀석의 존재가 지배의 권능을 가진 지고한 불과 같거나 더욱 크다는 방증이었다.
지고한 불…….
불의 정령들이 가진 일곱 개의 불 중 하나.
불의 정령들이 모시는 신이다. 진짜 신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격을 갖춘 건 사실이었다. 실제로 마수들을 상대할 때 수많은 상급 이상의 마수들도 권능의 힘에 무릎 꿇었다.
“여기서 죽여야겠군.”
묵직하게 말했다. 이대로 돌아가서 우파의 힘이 되도록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가질 수도 없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없애야 했다.
진득한 살의를 가지고 놈을 쳐다봤다. 지금이라도 무언가 반응을 한다면 약간의 지체는 가질 생각이었다. 이런 놈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궁금증이 무척 컸던 탓이다.
알 수만 있다면 나도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을 터.
허나 놈의 눈에는 혼란밖에 없었다.
이러한 신체적 타격을 입은 건 처음이고, 명령을 무시하지 않으면 죽고 만다. 죽으면 본 드래곤을 죽이라는 명령을 시행할 수 없다. 그 사이에서 혼란하며 아예 행동 자체를 멈춘 것이다.
나는 놈의 바로 앞에서 마력을 모았다.
분노와 황제의 검이 과열되며 열을 올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모든 마력이 결집된 순간.
놈의 눈빛이 변했다.
가진 건 순수한 적의!
나를 죽여야 명령을 달성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그러나 늦었다.’
이미 내 공격은 완성 직전의 단계에 와 있었다. 지금 와서 깨달은들…….
슈아아아아앙!
‘허…….’
주변을 물들인 ‘밤’이 놈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오로지 달만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밤이 전부 빨려 들어가거든 무언가 광범위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직감.
나는 그 전에 먼저 손을 썼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의 결정체.
모든 마력을 쏟아부은 공격이 마침내 달의 마법사에게 닿았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 *
전신이 타 버리는 것만 같았다. 지독한 고통에 눈을 뜨자 뜨거운 태양이 나를 반겼다.
솨아악! 솨아악!
거친 파도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어렵사리 자리에서 일어난 뒤 나는 이곳이 해변가임을 확신했다.
‘여긴 어디지?’
허나 익숙하지 않은 해변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달의 마법사를 아예 소멸시킬 기세로 마지막 공격을 퍼부었는데, 때마침 놈이 흡수한 밤이 보호막 흉내를 내어 두 기운이 함께 폭발을 일으켰다. 가공할 수준의 폭발이었고…… 아무래도 거기에 휩쓸린 모양이다.
모든 마력이 고갈되고 상상 이상의 타격이 전신에 들어오자 나도 정신을 잃어버린 듯했다.
‘마력이 거의 없군.’
마력이 텅 비어 버렸다. 쓰러지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지 조금도 회복이 되질 않았다. 스킬의 대부분을 사용할 수 없다는 뜻. 마력의 고갈은 육신에도 영향을 끼쳐서 전처럼 강력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냉정하게 몸 상태를 살폈다.
‘최악이다.’
고레벨의 상급 마수만 만나도 힘에 부칠 정도다. 작게 혀를 차며 나는 잠시 요양할 장소를 찾았다. 마력부터 회복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어차피 나는 정복자의 반지를 착용하고 있었다. 영지 하나당 마력 회복률을 10%나 올려 주는 아이템. 어림잡아 3, 4일이면 모든 마력을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 기간 동안 여기에 굳이 머무를 필요는 없었다.
‘이히.’
나와 이히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가 가능하다. 바로 이히가 내게 건 축복 덕분이다.
크리슬리나 타쉬말에게 명해 나를 데려오도록 한다면 길어 봐야 하루였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통신이 닿지가 않았다. 이히에게선 전혀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군.’
지저 세계에 있을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긴 있었다.
허나 이 주변은 아무리 봐도 지구의 형태를 띠었다. 지저 세계와 같이 이질적인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건만.
“으아! 어떡하지! 이러다간 세계가 무너질 거야!”
순간 엄청난 속도로 내 앞을 지나간 생명체가 하나 있었다. 생김새 자체는 토끼와 비슷한데, 그 크기가 2미터 남짓이었다. 순백의 털과 빨간 눈이 인상적이었지만 문제는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지나가자마자 해변의 모래들이 모두 떠올랐다.
내 눈이 아니었다면 못 보았을 수준이다.
‘저건?’
그리고 근처에 도달한 토끼가 힐끗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달려 나갔다.
“666 부근에 버그 발생! 아이씨, 바빠 죽겠는데!”
이상한 말만 남긴 채.
무작정 뛰어가 한쪽 방향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따라가 봐야겠군.’
저런 생명체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비슷한 마수는 있었지만 저만한 존재감을 주지는 못했다.
또한 저 토끼에게선 달의 마법사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렇다면 이곳은 정상적인 장소가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토끼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걸었다.
‘속도가…… 흠.’
마력의 고갈로 속도가 나지 않자 자연스럽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오랜만에 순수 육체만으로 뜀박질을 시작했다.
몇 시간을 뛰었을까.
다행히 토끼가 달려 나간 흔적은 뻔히 남아 있었지만 너무 멀어서 보이지가 않았다.
대신 다른 것들이 보였는데, 모두 익숙하면서도 특이하게 생긴 생명체들이었다.
“811, 544 부분이 고장 났다. 수리해야 한다, 자라!”
“자라!”
거대한 자라들이 망치 따위를 들고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자라들 또한 내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대로 나를 지나쳐 갔다.
자라뿐만이 아니라 누워서 일광욕을 즐기는 커다란 사마귀도 있었고, 바닥을 쪼아 대는 까치 비슷한 새도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중이었는데,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인식을 하지 못했다.
혹시 몰라서 사마귀를 툭툭 건드려 봤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봐, 내가 안 보이나?”
놈의 코앞까지 올라가 말을 거는 대범함을 보였지만 마찬가지다.
아예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역시 그 토끼가 열쇠인 것 같군.’
나를 온전히 인지한 건 처음 봤던 토끼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사마귀의 위에서 내려와 토끼의 흔적을 따라 달렸다.
한참을 더 달렸다. 10시간을 넘게 달린 것 같은데도 하늘은 그대로였다. 아무래도 이곳은 저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육체 자체의 힘은 어지간한 생명체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쉬지 않고 뛸 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더 지나자 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여기다.’
토끼의 흔적이 끊긴 장소.
주변은 숲이었고, 그 중심부에 존재하는 작은 나무 가옥이었다.
나는 지체 없이 가옥 안으로 들어섰다.
“784 부근에 다시 균열 발생!”
“227 지역 폐쇄한다! 모두 대피!”
“으아아! 선생님은 대체 어디를 가신 거야?”
겉으로 보기엔 작은 나무 가옥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끝이 보이지 않는 묘한 생김새의 방이 나타났다.
거대한 토끼들이 비슷한 크기의 화면 앞에 앉아 그것을 보며 쉴 새 없이 조잘대는 중이었다.
나는 그중 처음 만났던 토끼를 찾았다.
마력이 고갈됐다고 마력의 향마저 맡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후 나는 구석에서 수첩을 들고 있는 토끼를 찾을 수 있었다.
“아아, 어떡하지. 선생님이 안 계시면 나 혼자는 감당이 안 되는데…….”
“이봐.”
“시스템이 완전 엉망이 되어 버렸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누가 관리자 권한에 접근한 거지? 나도 아예 접근이 안 되잖아. 이걸 복구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어, 으으으.”
“나 좀 보지.”
툭!
토끼의 다리를 강하게 찼다.
“음?”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토끼가 나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토끼의 눈이 두 배는 커졌다.
“어어……. 666구역의 버그가 왜 여길 들어온 거지? 아니, 어떻게 들어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