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사냥꾼-198화 (198/242)

던전 사냥꾼 198화

“나는 버그 따위가 아니다.”

해변가의 토끼는 맞는 모양이었지만 취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토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야 자기를 버그라고 칭하는 버그는 없지. 그래도 여긴 강력한 백신이 작동 중이어서 못 들어올 텐데…….”

“다른 녀석들은 나를 인식하지 못하더군. 오로지 너만이 나를 인식했다. 말해라. 너는 누구고, 여기는 어디냐?”

“백신!”

토끼가 고개를 돌리며 크게 외쳤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토끼는 굉장히 당황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백신 반응이 없지? 잠깐, 정말 나만 인식할 수 있다고?”

나는 팔짱을 낀 채 토끼의 다음 움직임에 주목했다. 이곳의 토끼 중에선 나를 위협할 힘을 가진 자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직 부족하긴 했지만 미약하게나마 마력을 회복한 상태였고, 만에 하나의 일에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다.

그때 토끼의 눈이 좁혀졌다. 내 머리 위를 유심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ID는 없고…… 버그가 아니면 뭐야?”

“랜달프 브뤼시엘. 마족이다.”

당황하는 녀석을 위해 선심을 써 주었다. 먼저 나를 소개했으니 개념이 있는 이라면 자신의 소개를 이어 나갈 터.

“마족? 아아! 선생님이 몇 번 말씀하신 적이 있어. 그런데 마계의 존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설마 선생님께서 프로그램을 짜 놓고 가신 건가? 어디 보자.”

하얗고 기다란 귀를 몇 번 털자 안경과 같은 게 튀어나왔다. 이내 안경을 주워 쓴 토끼가 허공에 손짓하기 시작했다.

마치 혼자서 춤을 추는 거 같기도 하였다. 정신 나간 녀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외부에서의 침입을 강제로 차단했습니다.]

‘음……?’

메시지 하나가 눈앞에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토끼가 착용한 안경에서 연기가 뿜어졌다.

토끼는 재빨리 안경을 벗곤 버벅거렸다.

“뭐, 뭐야. 이 프로그램은? 전혀 타입이 다르잖아? 게다가 보안 레벨이…… 선생님 수준을 뛰어넘었어! 이럴 수가!”

두 눈에 경악이 들어찼다. 믿기지 않는 듯 나를 바라보며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나 이내 두 눈은 경악에서 공포로 뒤바뀌었다.

“네가 외부에서 들인 바이러스라면 정말 너무 무서울 거야. 백신을 무효화시키고, 부관리자인 내게만 인식…… 어쩌면 나는 이미 감염되었을지도 모르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비슷한 단어를 인간에게서 몇 차례 들어 본 것도 같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랜달프 브뤼시엘이라고 했지? 혹시 어디서 왔을지 들을 수 있을까?”

토끼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너는 나를 알지만 나는 네가 누구인지 모르는군.”

“아아, 미안해. 내 아이디는 0001. 이 이면 세계의 부관리자야.”

“이면 세계?”

토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달! 우리는 달의 뒤편이라고 불러.”

0001과 가볍게 소개를 주고받은 뒤 나는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하지만 방 안은 우주처럼 수많은 달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지구에서 왔다고 그랬지? 미안해. 난 너가 영락없이 프로그램인 줄 알았어. 하여튼 지구라면, 그니까 여기를 말하는 거지?”

0001은 우주의 지도에서 한 지점을 가리켰다. 몇 번을 검지로 누르자 우주 지도가 확대되며 푸른 지구의 모습이 나타났다.

“맞는 것 같군.”

“그래? 여기가 맞단 말이지……. 아우, 곤란하네.”

“곤란하다?”

“여기는 우리가 관리하는 규칙에서 벗어난 행성이야. 최고위 관리자가 강제로 그렇게 만들었지. 한…… 그니까 지구의 기준으로 5년 좀 넘었나?”

5년이 조금 넘은 시간. 마족들이 지구에 막 들어왔을 시기와 겹친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네가 말하는 관리자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거지?

“신!”

“신…….”

그러나 언뜻 이해가 안 됐다. 0001은 자신을 ‘부관리자’라고 칭했다. 그럴진대 전혀 신과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신들도 계급이 있어. 이 이면 세계를 관리하는 선생님은 중간 관리자셨지. 참고로 나는 선생님을 보좌할 뿐이야. 신은 아니고.”

고개를 끄덕이자 0001이 이어서 말했다.

“하여간 그중에서도 중간 관리자는 할당된 세계를 관리해. 관리라고 해도 세계의 규칙 같은 게 무너지지 않도록 조율하는 게 전부지만……. 반대로 최고위 관리자들은 직, 간접적으로 세계에 관여하는 것이 허락되지.”

“마신 데스브링어의 위치는 어떻게 되지?”

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 있어서 뜬구름 잡기와 같았다. 그나마 친숙한 마신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묻자 0001이 친절하게 답했다.

“마신이라면 최고위 관리자 중 하나일 거야. 아아, 맞아. 지구를 우리 관할에서 강제로 떼어 낸 것도 마신이었어. 이름도 분명…… 그래, 데스브링어. 그곳의 하급 관리자들이 모두 반발했지만 강제로 진행해 버렸거든.”

불현듯 0001이 입을 닫았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멍하니 내 얼굴만 바라봤다.

“그리고 너는 지구에서 왔다고 했지. 선생님이 사라진 게 마신과도 연관이 있을까?”

“아까부터 선생님이라고 칭하는 자가 누구냐.”

“이면 세계의 최고 관리자님이셔. 네 기준으로 두 달 전에 갑자기 모습을 감추셨어. 선생님이 사라짐과 동시에 누군가가 관리자 권한에 접근해서 이면 세계를 완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지. 덕분에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

0001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턱을 쓸었다.

0001은 이곳이 이면 세계, 달의 뒤편이라고 말했다.

달, 그리고 사라진 관리자. 시기와 장소가 묘하게 맞물린다. 무엇보다 0001에게서 달의 마법사와 묘하게 비슷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네가 선생님이라고 칭하는 자를 내가 알고 있을 수도 있다.”

“뭐……?”

“놈은 달의 힘을 사용했다. 밤을 끌고 다녔으며 수백 번, 수천 번 육체를 파괴해도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그러다가 한순간 주변의 밤을 모두 빨아들이더군.”

“그건…… 맞아! 선생님이야! 선생님은 기분이 나쁠 때 밤을 들여보내. 지금 이곳에 밤이 없는 이유도 선생님이 없어서야. 다 가져가셨거든. 그런데 선생님의 육체가 파괴되었다고?”

몇 가지 없는 정보에도 0001은 확신하는 투였다.

그렇다면 달의 마법사가 신이었단 말인가?

허! 쉽사리 믿기지는 않았다.

신이나 되는 작자가 그런 몰골로 돌아다니는 것도 이해 불가였다. 우파는 대관절 무슨 수를 부려서 그만한 일은 벌인 걸까?

그래도 정말 신이라면 그 말도 안 되는 재생력이 이해가 되기는 하였다.

“놈은 다른 마족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자아를 잃고 명령대로만 따르는 인형이 된 것이다. 나와 적대적이었기에 싸웠고, 파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마지막 접전 끝에 눈을 뜨니 그 해변가에 있더군.”

“신을 해할 수 있는 건 신성을 가진 자만 가능한데…… 너 대단한 녀석이구나! 신성을 모은 다음 죽으면 하급 신쯤은 될 수 있겠는걸? 부럽다……가 아니지! 잠깐, 뭐? 선생님이 조종당하고 계신다고?”

횡설수설이 따로 없었으나 그만큼 0001이 혼란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나와 같은 마족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필멸자가 불멸자를? 말도 안 돼! 세계의 규칙을 거스르는 짓이야, 그건! 그곳의 신들이 방관하고 있을 리가 없어!”

나는 가만히 회귀했을 당시를 떠올려 봤다.

지구의 모든 신은 봉인당했다. 마신 데스브링어가 그렇게 만들었다. 신들을 봉인한 장소에 던전을 만들고 그곳에 마족들을 초대한 것이다.

지구의 모든 신들이 봉인당했으니 규칙을 거슬러도 제재할 이가 없었다. 마신 데스브링어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데 아무런 제재가 없다는 뜻은 방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신은 규칙 따위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다. 도대체 마신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으…… 어떡하지? 선생님을 데려와야 하는데.”

“나를 지구로 돌려보내라. 그럼 놈을 조종하는 마족을 죽여 주마.”

아르엔투와 우파를 제거하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는 그 둘을 죽여야만 하는 입장에 있었으니 서로에게 득이 되는 조건이었다.

허나 0001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세계에 침투하고 선생님을 오염시킨 거라구. 그것도 모자라 데려가기까지 했어. 필멸자가…… 가능한 일인가? 아으으, 혹시 그 균열이 문제였을까…….”

“균열?”

“대략 2년 전에 프로그램 하나를 짜다가 실수해서 대균열을 열었어. 근 100년 안에 이 세계가 노출될 기회라면 그때뿐이었지. 1초 정도…… 바로 처리했다구. 물샐틈없이 모든 시스템을 다 뒤져 봤단 말이야.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설마 그 1초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 수도……. 아니야, 그게 말이 돼?”

0001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관이 사라지고 조종당하는 게 자신의 책임이란 생각이 들자 양쪽 어깨가 급격히 무거워진 것이다.

토끼가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 통로는 허무로밖에 안 이어져 있었단 말이야. 허무를 통해서 접근해야만 했었는데 고작 1초라구! 1초 안에 그게 가능한 지구의 필멸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 애당초 허무의 존재도 거의 모르고 있을 텐데…….”

대략 2년 전!

그리고 허무.

어쩐지 귀에 익다. 매우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콘테고놈이 소환되고 내가 놈을 없앤 시기가 그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허무의 존재가 나타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아직까지 재차 소환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확률이 아예 0은 아닐 거다.”

“그야 그렇겠지만…… 어쩔 수 없지. 선생님을 돌려놓고 보는 게 우선이겠어.”

토끼가 방의 구석으로 가더니 서랍에서 화살 하나를 꺼냈다.

“부탁이야. 이 백신으로 선생님을 구해 줘. 안 그러면 이면 세계는 끝장나고 말 거야.”

평범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화살.

문득 궁금증이 들어서 심안을 열었다.

[프로그램을 해석 중입니다.]

[해석 완료.]

이름: 달의 화살(Legend)

설명: 달과 시작을 함께했기에 그 기운이 무엇보다 강하게 응축된 화살. 신의 축복과 은총이 함께 깃들어 있다. 달의 신이 가진 분신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 보유하고 있을 시 모든 능력치+2, 모든 경계를 뛰어넘어 꿰뚫음.

* 꿰뚫린 상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작용이 나타난다.

레전드!

나로선 처음 만져 보는 등급이었다. 본 적은 몇 차례 있으나 내 손에 들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건만.

전혀 생각지 못한 장소에서 접할 줄이야.

“통로를 만들어 줄게. 마계와 지구로 향하는 통로를 같이 만들어야 할 거야.”

“마계의 통로를?”

굳이 같이 만들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다. 내 얼굴을 바라본 0001이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네 몸의 코드를 따서 통로를 만드는 거니깐. 원래는 마계에 있었잖아? 그래도 갈 수는 없을 거야. 내 생각이 맞는다면…… 특정 조건하에 지구로 본신을 이동시킨 걸 테니깐 말이야. 대신 그 조건을 완성하기 전까진 마계에 들어갈 수 없도록 했겠지. 마계의 필멸자가 지구에 있는 것 자체가 본래는 말이 안 되거든.”

0001이 귀를 털곤 안경 하나를 더 꺼냈다.

바로 착용한 후 손가락을 움직이며 말했다.

“며칠만 기다려 줘. 그렇게 오래는 안 걸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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