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200화
* * *
우파.
네 명의 대공 중 하나이며 ‘파괴자’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마족.
그는 자신의 던전을 성처럼 꾸미며 그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자신이 마계에서 가지고 있었던 거대한 성 ‘블레넌’을 그대로 재현시키고자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덕분에 그의 던전은 항상 음산한 분위기를 띤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진열된 검은 갑주들, 벽을 장식한 그림과 검들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톡톡히 공헌을 하였다.
비대한 몸집과 하늘로 바짝 솟은 머리칼, 그와 반대로 집요하기 짝이 없는 두 눈이 반개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눈에 익군. 크리슬리라고 했던가?”
그리고 우파의 앞,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두 명의 인영이 서 있었다.
크리슬리와 오스웬!
둘은 사자로서 우파의 던전을 찾아온 것이다.
크리슬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았다. 반면 오스웬은 나름 여유로운 듯이 몸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흐음, 너는…….”
“오스웬! 우리는 대공 랜달프 브뤼시엘 님의 사자로서 이 자리에 당도했소.”
“재미있군. 대공 랜달프 브뤼시엘이라.”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는 뼈로 만들어진 거대한 의자 위에서 턱을 괸 채 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크르르!
키이이.
계단에 깔린 붉은 융단이 길게 늘어져 있고, 그 주변으로는 온갖 마수들이 침을 흘리며 도열해 있었다. 우파의 기분에 따라 마수들은 이빨을 드러내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장했다.
그 숫자만 족히 천은 되어 보였으며 모두가 상급은 되어 보이는 무력을 갖췄다.
뿐만 아니라 오스웬과 크리슬리의 주변 온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열이 솟았고, 특히 크리슬리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격하기 그지없었다. 우파의 손가락이 미묘하게 움직이며 둘이 있는 공간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참다못한 오스웬이 나섰다.
“우리는 사자요. 대공 랜달프 브뤼시엘 님의 말씀과 초대장을 건네는 게 우리가 맡은 바. 대공 우파는 지금 정당한 자격으로 온 사자를 겁박하겠다는 거요?”
“정당한 자격? 나는 그대들을 초청한 기억이 없다만. 게다가 랜달프 브뤼시엘 놈과 나는 엄연한 적대 관계이지.”
툭. 툭.
의자를 두드리는 우파의 손동작이 조금 빨라졌다. 심기가 좋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여기서 한 발 잘못 디뎠다간 그 끝이 최악으로 향할 것임은 분명해 보였다.
오스웬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만나 줘서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대가 적절할 때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이곳에 서 있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가 가져온 초대장은 충분히 받아 볼 가치가 있다고 자신하오. 적어도 손해는 안 볼 테니!”
이곳은 던전이다. 올라가려면 마수를 처리해야 한다. 아무리 크리슬리와 오스웬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둘이서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사자의 입장으로 마주하려면 피해를 최대한 줄여야 했고, 정말 우여곡절 끝에 우파에게 닿은 것이다.
우파도 반쯤은 궁금증에 둘을 들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천하의 랜달프 브뤼시엘이 자신에게 사자를 보냈다? 한 번쯤 만나 봐도 나쁠 건 없겠지. 딱 이 정도의 생각으로 말이다.
덧붙여서…… 만난 다음 살려 보낼 생각은 없었다. 오스웬과 크리슬리 둘 모두에게도 우파의 의도가 그대로 전해졌다.
둘을 살릴 수 있는 건 오로지 초대장뿐이었다. 허나 오스웬은 이 부분에 관해선 제법 자신이 있는 태도로 일관했다.
“흠…… 하필이면 지금과 같은 시기에 초대장이라. 나와 아리엘이 전쟁 중인 것을 놈이 모르진 않을 터인데…….”
우파가 몇 차례 턱을 두드렸다.
“조용히 결과만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건만…… 쯧, 어디 한번 보지. 가져오라.”
우파도 자신과 아리엘의 전쟁이 끝난 후 먹이를 노리고 달려들 이리가 있다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전쟁이 멈춘 지금 순간에 초대장을 보내올 줄은 상상도 못한 듯하다.
오스웬이 초대장을 쥐고는 계단을 올랐다. 중간쯤 올라서자 리치 한 명이 불쑥 나타나 길을 막았다.
“뭐냐?”
“초대장, 을. 검사.”
초대장에 혹시 무슨 조치를 해 뒀을까 의문이 드는 모양이었다. 오스웬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초대장을 건넸다.
리치는 초대장을 특별한 거울에 비추고, 몇 가지 주문을 외더니 고개를 끄덕인 뒤 초대장을 그대로 우파에게 전했다.
촤악!
우파가 밀봉된 초대장을 뜯었다. 빠르게 내용물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
침묵의 시간.
오스웬과 크리슬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자신이 있더라도 우파가 변덕을 부리면 그대로 둘의 목을 날리는 게 불가능하지 않은 탓이다. 호락호락 당해 줄 생각은 없지만 살아서 나갈 확률은 매우 적었다.
꽈악!
초대장을 읽어 나갈수록 우파의 얼굴이 점점 굳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이윽고 초대장을 와락 구겨 버렸다.
“랜달프, 브뤼시엘……!”
꽈드득!
우파가 이를 갈았다. 활화산이 터지는 듯 새빨간 눈을 그대로 오스웬에게 쏟아 냈다.
“참가하겠다고 전하라. 그리고…… 다시 한번 이딴 싸구려 도발을 내게 날린다면 아리엘이 아니라 랜달프 네놈의 목부터 따 주겠다는 말도 함께 전하라!”
우파가 고개를 돌렸다. 축객령이었다.
하지만 ‘전하라.’라고 한 것은 살려 주겠다는 의미도 함께 내포하고 있었다.
오스웬과 크리슬리가 서로를 쳐다봤다.
이내 오스웬이 손가락으로 V를 그렸다.
그리핀이 창공을 날았다.
크리슬리와 오스웬이 그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우파의 성향은 던전 마스터께서 말씀하신 그대로군.”
“한바탕 격전을 치렀지요.”
크리슬리가 조소를 흘렸다.
둘은 초대장을 가지고 세계를 배회하며 대공을 만나는 중이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게 만날 리는 만무했다. 대공, 그리고 모든 마족은 던전의 가장 높은 곳에서 대소사를 처리하기 때문이다. 초대장을 가져왔다고 무작정 대공을 만날 수는 없었다.
현재 만난 건 대공 우파뿐이었지만 둘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사자’의 자격으로 갔기에 무작정 던전을 파헤칠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우파를 불러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정작 만나서도 죽을 뻔한 기회를 숱하게 겪었다.
“그래도 무서운 자였소. 초대장의 내용이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우리를 제거하려 들었겠지. 실제로…… 지금도 뒤에 따라붙고 있으니.”
우파는 대인인 척을 하나 대범하지 못한 마족이었다.
어떻게든 말꼬리를 붙잡으며 논지를 흘리려고 들었고, 한 번 실수를 하면 그걸 빌미로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까딱 잘못했으면 우파의 면전에서 목이 잘렸을 것이었다.
“다른 대공의 던전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곤란하군. 저런 걸 붙이고 갔다간 초대장이고 뭐고 필요가 없을 터인데.”
와이번 킹!
창공의 지배자라 불리는 마수가 그리핀의 뒤를 따라붙고 있었다.
딴에는 거리를 둔다고 하지만 오스웬이나 크리슬리의 기감에 걸리지 않을 순 없었다.
우파의 휘하 마수인 와이번 킹을 붙이고 갔다간 다음 만날 대상인 아리엘에게 같은 수족으로 판명되어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우파와 아리엘이 전쟁 중인 만큼 그 둘이 서로의 던전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나.
“속도를 올리지요.”
그리핀이 더욱 빠르게 날개를 펄럭였다.
머지않아 와이번 킹의 기척이 사라졌고, 오스웬이 입을 열었다.
“아리엘 디아블로는 제발 호탕한 마족이었으면 좋겠군. 후! 심력을 너무 썼어.”
“다음은 제가 해 보겠습니다.”
우파를 만날 때 크리슬리는 가만히 있었다. 이런 경험 자체가 적었던 탓이다. 혹여나 실수를 저질러서 만회하지 못할 바에는 그나마 경험이 있는 오스웬을 배우자고 결정한 것이다.
아리엘 디아블로와 그녀의 휘하 마족 대부분은 북아메리카에 위치하고 있었다. 특히 아리엘의 던전은 미국에 있었으나 최근 그녀는 두 개의 던전을 함께 운용하는 중이었다.
그린란드. 세계에서 가장 큰 섬, 국토의 80% 이상이 얼음으로 뒤덮인 그곳!
본래 우파 휘하의 후작 하나가 지배 중이었으나 땅이 아깝다며 아리엘이 단칼에 쳐 낸 것이다. 얼음으로 뒤덮인 그곳의 땅이 그녀에겐 상당히 마음에 든 듯싶었다.
덕분에 크리슬리와 오스웬은 그린란드까지 이동해야 했다. 북아메리카는 우파보다 더 촘촘하고 완고하게 방비를 하고 있어서, 상공에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빈틈이 거의 없군.”
오스웬도 감탄을 내뱉었다. 아리엘의 휘하 마족들은 전략에 대해서도 모두 빠삭한 듯싶었다. 하기야 괜히 ‘기사 대공’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적이 이동할 만한 경로에는 꼭 감시탑이 설치되어 있었다. 감시탑 주변에는 마수들도 대거 대기하는 중이었고, 몇 번이나 추격을 받았다.
“이제 곧 도착합니다.”
크리슬리가 진땀을 흘렸다.
챙겨 온 마법 아이템들, 은신용 스크롤 모두가 동이 나기 직전이었다. 공중형 마수 중에선 그리핀을 잡을 이가 없다지만 사방에서 덮쳐 드는 적들을 피해 나가는 건 과연 힘든 일이었다.
“제명에 못 살겠군…….”
오스웬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죽은 몸이지만 주인이라는 작자가 자신을 너무 막 다루는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던 것이다.
‘끄응, 저주를 풀 장비가 거의 완성 직전이었는데. 살아서 돌아가도 낙이 없어, 낙이.’
* * *
그린란드의 던전 앞.
은백의 기사가 던전의 문을 지키는 중이었다.
한데 오스웬이나 크리슬리로서는 도저히 상대를 떠볼 수가 없었다. 마땅히 느껴져야 하는 마력의 흐름도 이상했고, 향 자체도 처음 맡아 보는 종류였다. 하지만 최상급 마수의 격을 갖췄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누구냐.”
가녀리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투구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순백의 기사는 눈으로 뒤덮인 던전의 문을 지키는 순백의 여자였다.
오스웬이 나서려고 하자 크리슬리가 한 발 더 빠르게 나왔다.
“우리는 대공 랜달프 브뤼시엘 님의 명으로 대공 아리엘 디아블로에게 초대장을 건네주고자 찾아왔습니다.”
“랜달프 브뤼시엘! 들어 본 적이 있다.”
순백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다지 호의적이진 않았다. 알게 모르게 적대적인 느낌이 들었다.
애써 무시하며 크리슬리가 말했다.
“알았으면 문을 여세요. 우리는 당장의 싸움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 문을 넘어서려면 자신의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대공 아리엘 님께선 아무나 만나시지 않는다.”
“우리는 대공 랜달프 브뤼시엘 님의 명령으로…….”
“무기를 들어라, 여자와 남자야.”
순백의 기사가 품에서 레이피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가만히 넘어가 주지 않겠다는 절절한 의지가 느껴졌다.
크리슬리가 고개를 돌려 오스웬을 바라보자 오스웬은 씁쓸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를 가늠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쉽게 질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오스웬과 크리슬리는 모두 최상급 마수로서도 손색이 없는 경지에 있었다.
특히 오스웬은 상상도 못할 오랜 경험이 함께 녹아 있었다. 여섯 개의 손을 회복하고 직접 무기를 만들어 예전의 무력보다 강해진 지금, 은백의 기사가 안중에 있을 리 없었다.
싸우는 상대가 누군들 이길 자신이 있었다.
여섯 개의 검을 든 오스웬이 입을 열었다.
“한 수 부탁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