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201화
그 말에 은백의 기사가 레이피어를 향한 순간.
사라졌다. 눈 깜빡할 사이에 오스웬에게 도달하여 레이피어를 놀리고 있었다.
솨악!
하지만 얕다. 오스웬도 다소 놀라긴 했으나 만만치는 않은 자다. 몸이 먼저 반응하여 레이피어를 피해 낸 것이다.
그러나 막상 피했음에도 오스웬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질적인 탓이다. 그게 무어라 말은 못하겠지만…….
‘쉽지 않겠군.’
그래도 이긴다. 오스웬은 자신이 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저 세계에서보다 강해진 자신을 이길 자는 손에 꼽을 터. 그중 하나가 저 은백의 기사이진 않을 것이다.
츠츠츳!
오스웬이 여섯 개의 검을 겹쳤다. 그 사이로 레이피어가 막혔다.
‘미친 황소가 따로 없어.’
그야말로 저돌적이었다. 그러나 속도에 비해 힘이 크게 실리진 않았다. 균형이 안 맞다는 느낌이 강했다. 허나 작은 공격도 중첩되면 강해지는 법이다.
은백의 기사는 오스웬에게서 작은 틈을 만들어 내고자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작은 틈 하나면 거대한 바위도 부술 수 있다는 신념이 눈에서도 느껴졌다.
“나를 아주 우습게 보셨군.”
오스웬은 본래 대장장이였다. 그리고 대장장이는 의외로 승부욕이 높다. 명검을 만들고자 하는 강렬한 집착이 없다면 명장이라 불리지 못한다. 검을 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인정하지 않은 자에 한해서 지기는 싫었다. 강렬한 승부사의 기질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무작정 공격하면 뚫릴 것이라는 발상.
자신을 우습게 보지 않는 이상 할 수 없는 행위다.
‘지옥도.’
자아를 되찾고, 오스웬은 여섯 개의 검을 만들었다. 던전 마스터에게서 받은 신의 철을 주재료로 삼아서 지옥을 재현하는 여섯 개의 기둥을 세운 것이다. 이름은 모두 지옥도였으며 완성한 즉시 ‘스킬’이 떠올랐다.
여섯 개의 검을 겹치자 지옥불이 피어올랐다. 검은색의 지옥불은 오스웬을 집어삼켰고, 하나처럼 융화되었다. 곧 지옥에서 찾아온 사자같이 흉포한 기세를 띠었다.
그것을 본 은백의 기사가 찔러보기 식의 공격을 멈췄다. 대신 레이피어를 한 점에 모아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점 하나에 모든 파괴력을 집중한 공격.
오스웬도 즉시 알아보았다. 피하는 게 상책이겠으나 서로 길게 끌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한 방에 건다. 서로가 이런 식의 공격에 대해서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이윽고 두 인영이 서로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오스웬이 발을 옮길 때마다 떨어진 검은 불이 퍼져 나가며 지옥을 연상시켰고, 은백의 기사는 레이피어에 탄환처럼 마력을 모아 쏘아졌다.
그리고…… 서로가 부딪힐 찰나.
채에엥! 칭!
검과 레이피어가 날아갔다.
“거기까지 하거라.”
눈으로 뒤덮인 섬. 발자취를 남기던 두 인영 사이의 한 여자!
이마에 난 염소의 뿔이 인상적인, 새하얀 눈과는 대비되는 화려한 색감을 지닌 마족.
아리엘 디아블로의 등장이었다.
아리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모두의 앞에 섰다. 오스웬과 크리슬리를 딱히 해할 의도는 보이지 않았지만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말을 걸기도 애매했다. 그저 조용히 따라가는 수밖에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들어간 던전은, 그야말로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마수는 일체 보이지 않았다. 듣기로는 주인을 몰아내고 이 장소를 차지했다는데, 아무런 대비도 안 되어 있는 모습이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적대적이지도, 우호적이지도 않으니 더욱 좌불안석이었다. 특히 오스웬은 한 번에 자신의 공격이 막힌 일에 대해서 제법 충격을 먹고 있었다.
아무리 기습적인 막아섬이었다고 하더라도 기척을 아예 느끼지 못할 줄이야. 이곳이 전장이었다면 진즉 목이 날아갔을 일이다.
“랜달프 브뤼시엘이 보냈느냐?”
이동 마법진 위에 서자 처음으로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우리는 대공 랜달프 브뤼시엘 님의 초대장을 건네고자…….”
“긴말은 되었다.”
그 하나만 확인하면 되었다는 듯.
무심하기 짝이 없는 손짓으로 이동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밝은 빛이 주변을 휩쓸며 작은 균열이 열렸다. 이어 빛이 사라지자 전혀 다른 공간에 모두가 위치하게 되었다.
동시에 오스웬과 크리슬리는 상당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은백의 기사들…… 스물은 되어 보이는 은백의 기사가 두 열로 도열해 있었던 것이다.
크기는 제각각이었다. 전신 갑주를 입어서 안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 어려 보이는 아이의 기척도 느껴졌다. 확실한 건 입구를 막고 있던 은백의 기사가 가장 연식이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무력의 강함도 쉽사리 측정이 되지 않았다. 최상급은 아니더라도 최소 상급은 되어 보였다.
“돌아오셨습니까, 아리엘 디아블로 님.”
“상을 차리거라. 손님이 왔으면 대접을 해 줘야지.”
“예.”
머지않아 오스웬과 크리슬리는 거대한 탁자 옆에 앉았다. 은백의 기사들이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둘을 안내한 것이다.
음식들이 나오기 전까지 오스웬과 크리슬리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우선 아리엘 디아블로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무지 속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많이 당황하고 있나 보군.”
아리엘은 얕게 미소 지었다. 강자의 여유가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리라. 몸짓 하나하나에도 여유와 자신감이 배어 있다.
후천적으로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분위기다. 태어날 때부터…… 태생부터가 마왕의 핏줄이기에 가능한 몸짓이었다.
오스웬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한 사람, 나락 군주도 그랬으니까.
“랜달프 브뤼시엘이 내게 전하라 한 물건이 있을 테지?”
“이거…….”
“이거요.”
크리슬리가 나서려고 하자 오스웬이 제지했다.
아직 크리슬리는 이런 자리에 약하다. 강자를 대하는 법, 유연한 대처가 불가능하다. 웬만하면 기회를 주려고 했지만 이 여자, 아리엘 디아블로는 그 정도로 가볍게 넘어갈 자가 아니었다. 어쩌면…… 우파보다도 위험한 자라고 오스웬의 본능이 외쳐 대고 있었다.
초대장을 받아 든 아리엘이 밀봉하여 읽기 시작했다.
“흠…….”
허나 우파와 달리 짜증을 내는 기색은 없었다. 도리어 매우 흥미로운 눈초리로 초대장의 내용을 읽어 나가고 있었다.
길지는 않았다. 대략 30초 만에 모든 내용을 훑은 아리엘이 오스웬을 바라봤다.
“재밌는 일을 저질렀군. 다른 대공에게도 이와 같은 초대장을 건네주었겠지?”
“그렇소.”
우파를 먼저 만났다고 하면 괜히 아리엘의 심기를 상하게 할 가능성이 있었다. 애써 숨기며 오스웬이 말하자 아리엘은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유례가 없는 일이다. 선대 마왕이 죽은 이후 대공들은 척만 질 줄 알았지 모인 일이 없었다. 한데 오쿨루스의 자리를 차지했을 뿐인 대공이 모든 대공을 소집했다! 후후후…….”
아리엘은 매우 신이 난 듯했다.
우파와 전쟁 중이라서 여유가 없을 줄 알았건만 우파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오스웬과 크리슬리를 대하고 있었다.
마치 우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
“음식이 식겠군. 들라. 특별히 너희를 위해 준비했으니.”
적대적이지 않다는 건 확실해졌다.
하지만 불안한 자리임에는 여전했다.
오스웬과 크리슬리가 나이프와 포크를 들자 무척 조용하고 긴 식사가 시작되었다.
던전을 빠져나온 오스웬이 한숨을 내쉬었다.
“빈틈이 없는 여자로군. 전대 마왕의 딸이라고 했나? 과연…….”
“그 기사들,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것 같았어요.”
그때 크리슬리가 입을 열었다. 아리엘보단 그 주변의 기사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아, 평범하진 않았지. 확실히 묘한 기분이기도 했고…… 뭐가 섞인 건지는 모르겠더군.”
“어쩌면 그 기사들이 아리엘 디아블로의 최강 무기일지도 모르지요. 우파가 달의 마법사를 길들였듯이요.”
“우리 던전 마스터께서도 저런 괴물들을 상대해야 하니 쉽지가 않겠어.”
오스웬은 질렸다는 듯 혀를 찼다. 뒤에서 수작을 부리지 않는 대공이 없었다. 판데모니엄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터.
“빠르게 끝마치고 돌아가지요. 자세히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이제 한 곳만 두르면 끝이다. 가지.”
그리핀에 오른 두 사람이 빠르게 창공을 배회하였다.
* * *
나는 오스웬과 크리슬리에게 기나긴 보고를 받고 던전 코어의 옆을 서성거렸다. 우파, 아리엘, 판데모니엄 모두와 만난 둘의 표정은 썩 좋지가 않았고, 내용도 내 상상을 제법 뛰어넘어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변하게 했는가.’
우파도, 아리엘도, 판데모니엄도 각각 무언가를 숨긴 채 행동했다. 그나마 아리엘은 전면에 공개했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긴 이르다.
원래라면 무난히 마수를 늘려서 힘겨루기를 했을 그들이다.
‘오쿨루스.’
그들이 변한 계기를 떠올리자면 오쿨루스밖에 걸리는 게 없었다.
금기를 넘어서 모든 대공에게 경고를 날린 오쿨루스. 내 손에 죽었지만 그의 외침은 아직 죽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또 다른 금기에 손을 댄 대공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리엘의 경우 오스웬을 단번에 제압했다고 했다. 마계 옥션에서 확인한 그녀의 상태창으로는 힘든 일이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고 해도 오스웬은 최상급의 마수. 충분히 눈치채고 행동할 수 있었을진대.
변하고 있다. 무척 빠르게. 나 역시 그랬고.
“하지만 승자는 나다.”
승자라는 단어는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입 밖으로 꺼내며 자신을 다졌다. 그들이 아무리 변하고 강해진들 내 속도에는 미치지 못한다.
비록 나는 혼자이나 그들을 상대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허, 설마 그 아리엘이 묘한 것을 키우고 있을 줄이야.’
기사 아리엘!
비록 마족의 틀은 아예 벗어던지질 못했지만 그래도 마족 중에선 가장 청렴하다고 할 만한 이다. 그런데, 순백의 기사라고 했던가.
몇 가지가 섞여서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생명 연금술과는 거리가 멀던 그녀가 그런 것을 만들었으니,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번 회합은 꽤 재밌어지겠군.’
한 가지 확실한 건, 간접적인 힘겨루기의 장이 될 것이라는 점.
마계 옥션처럼 누군가가 제지하지도 않는다. 아무런 페널티도 없었다. 싸우고 싶으면 싸울 것이고, 그러기 싫어도 싸우게 될 것이다.
거대한 파도다. 해일이다. 세상을 뒤엎는.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었다. 내가 벌였으나 솔직히 아주 뒤의 일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들에겐 재앙과 같은 일이겠지만 이제 이 변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은 같은 마족이라도 마찬가지다. 설령 신이 나타나 중재한들 가능할까?
‘마지막 준비를 해야겠군.’
그들을 한자리에서 볼 생각을 하니 손이 간지러워졌다.
고작 5년 차. 그러나 내게는 벌써 수십 년째다.
누가 웃고, 누가 울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