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202화
영국 런던, 그리니치 천문대.
인간들은 이곳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부른다. 앞으로의 회의 장소는 바로 이 중심이 될 예정이었다.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가서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다.
초대장을 보낸 이가 나인 만큼 이곳을 정돈하고 꾸밀 필요가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주변의 인간이 너무나도 많았다. 물론 어찌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기간테스와 히드라가 등장한 순간 인간들은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그 뒤를 따라 범접하지 못할 강력한 마수들이 줄줄이 나타나자 아예 반항할 생각도 않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그럼에도 남는 자들. 지키려는 인간들을 향해 나는 싸늘하게 한마디만을 남겼다.
“짓밟아라.”
나는 천문대 위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요한 분위기.
불과 수 시간 전만 해도 수많은 인간이 드나들던 장소다.
‘벌써부터 감시하는 자들이 있군.’
하지만 고요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살기를 품고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다수 있었다.
‘판데모니엄의 마수들.’
아시아와 유럽은 거의 판데모니엄의 영역이라 봐도 이상할 게 없다.
그의 영역 속에서 회합을 열었으니 가장 먼저 도달하는 것 역시 그의 휘하 마족, 혹은 마수일 것이었다.
“정말 이 숫자로 괜찮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명하신다면…….”
“되었다.”
때마침 크리슬리가 걱정 가득한 어조로 물었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말마따나 이곳에 들인 마수의 숫자를 최저로 맞췄다. 최정예라고 하나 백이 넘지 않는다. 다른 대공들은 필히 수천, 수만…… 어쩌면 그 이상의 군세를 대동할 터.
만에 하나의 사태에서 몸을 지킬 여력이 부족하다 여길 수도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많을수록 피해만 커질 테니.’
대공들이 모인다. 사상 초유의 상황.
아무런 문제없이 지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모두 그걸 알고 있을 것이었고, 그에 따른 대비도 해 올 것이었다.
당연히 데려온 마수가 많을수록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잃을 숫자가 많아진다. 게다가 나는 이 회합을 단순한 대공의 장으로만 끝낼 생각이 없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최소한 마법진이라도 설치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크리슬리는 걱정이 많았다. 이미 한 번 사라진 전례가 있어서인지 대공들이 모일 장소에 유유자적 있는 게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판데모니엄은 마도의 정수라 불리는 놈이다. 마법진이 있다면 단번에 파악하고 발동되지 않도록 만들 수 있지. 괜히 설치하여 오해를 살 필요는 없다.”
세간에는 잘 안 알려졌지만 우파도 만만찮은 실력자다. 크리슬리나 내 휘하 마족들의 솜씨로는 그 둘을 속이기 역부족이었다.
“……알겠습니다.”
크리슬리가 물러났다. 나도 따로 말을 건네진 않았다.
전생에선 몰랐지만 누군가가 나를 걱정해 준다는 기색이 썩 나쁘진 않았다. 어색하긴 해도 기분 좋은 측에 들었다.
‘슬슬 시간이로군.’
회합이 시작되는 시간은 내일모레다. 이틀이란 시간을 남기고 내가 이곳을 찾아온 건 단순한 정리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움직이자 다시금 크리슬리가 따라붙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어딜 가십니까?”
“버킹엄 궁전.”
“……?”
“지금쯤이면 다 모였겠군.”
차갑게 미소 지으며 발을 놀렸다.
* * *
영국,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
여왕이 기거하는 장소로써 영국의 매우 상징적인 곳이다. 영국의 수상이 몬스터 웨이브로 죽은 이후 그녀가 대부분의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허울뿐인 자리에서 실무가 된 것이다.
하여 특별한 일이 생기면 대부분 버킹엄 궁전에서 회의를 거치곤 했다.
“그리니치 천문대가 마수들에게 점령당했습니다.”
탁!
육군 대장의 보고에 메리 여왕이 책상을 내리쳤다.
“보고는 이미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에게 바라는 건 이미 들은 보고가 아닌 앞으로의 해결책이에요. 세상의 중심지에 괴물들이 들어찼단 말입니다.”
문제는 그 괴물들이었다.
그저 그런 괴물이었다면 이런 회의가 소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나 마수 분류표에서 아득히 윗자리를 차지하는, 진정한 괴물들이 우글대고 있었다.
이에 땀을 뻘뻘 흘리던 육군 대장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총력을 기울여서…….”
“그만. 일반적인 군대로 해결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요. 각성자 부대를 육성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지요? 지금 성과가 어떤가요, 칼스 중장?”
호명된 칼스 중장이 절도 있게 앞으로 한 걸음 튀어나왔다.
“적이 누구인들 박살 낼 자신이 있습니다. 설령 상대가 최상급의 마수일지라도 우리 ‘백사자’ 부대를 이길 순 없습니다. Ma‘am.”
“듬직하군요. 혹시 이 자리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여왕 폐하!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각성자들을 이 신성한 자리에 들일 수는…….”
해군 대장이 나서봤지만 메리 여왕은 요지부동이었다. 한결같은 눈빛으로 칼스 중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수차례 패배를 맛본 기본 병단보단 각성자 부대에 거는 기대가 더욱 크기 때문이다.
수많은 정부에서 각성자의 전문적인 육성을 시도했지만 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인간은 힘을 얻으면 엇나가기 마련이었고, 쉽게 통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칼스 중장은 최고 레벨의 각성자였다. 이곳에 모인 이 중 각성자가 없는 것은 아니나 외면당하는 게 현실이었는데, 그중에서 칼스 중장만은 예외였다.
그동안 모든 임무에서 실패는 해 본 적이 없었고, 영국에 대한 애국심도 매우 높았다. 메리 여왕으로선 기대가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칼스 중장, 볼 수 있나요?”
“당연합니다, 여왕 폐하.”
“그럼 보고 싶군요.”
칼스 중장이 바닥을 두어 번 내리쳤다. 그러곤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 모두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뜰 무렵. 30초나 지났을까?
화아아앗!
회의실 바닥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칼스 중장을 제외한 모든 이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진 바로 그 순간 빛은 하나의 구멍을 만들었고, 그 구멍을 통해 30명의 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서서 메리 여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백사자 부대의 전사들입니다. 모두 일당백…… 아니, 그 이상을 하는 친구들입니다.”
칼스 중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모습.
실제로 이곳에 모인 누구보다 지금 나타난 30명이 가져다준 존재감이 더욱 컸다. 칼스 중장을 제외하면 말이다.
바닥을 뚫고 나타나다니.
심지어 이 버킹엄 궁전 어디에도 저들을 들인 기억이 없다.
한마디로 장소적 제약이 저들에겐 없다는 뜻!
“이들이라면 그리니치 천문대의 괴물들을 몰살시킬 수 있다는 거로군요?”
“한 번에 전부는 힘들겠지요. 하지만 하나씩, 하나씩 제거하는 건 가능합니다. 어차피 그리니치 천문대에 모인 마수의 숫자가 1백 안팎이라 하더군요. 3일. 딱 3일만 제게 주십시오, 여왕 폐하.”
구미가 당긴다.
강력하기 짝이 없는 1백의 마수들을 도발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씩 조용히 처리할 수만 있다면 꼭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다가 마수들을 자극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일거에 처리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육군 대장이 나섰다.
마땅한 지적이다.
괜히 믿고 나섰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시국이 걸린 일입니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저 마수들이 퍼져 나간다면 제아무리 영국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샐 수도 없는 사상자가 나고, 곳곳이 초토화 될 것이다. 이곳인들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세계에서 그나마 영국은 마수로부터 위험하지 않은 측에 속했다. 보유한 각성자들의 레벨이 높았고, 군대 자체도 어지간한 마수는 사냥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5년간 어느 나라보다 마수와의 실전을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시도한 곳이기도 했다.
“육군에도 각성자는 많습니다. 이곳 버킹엄 궁전을 호위하는 이들만 하더라도 백전백승의 진정한 전사들이지요. 굳이 30명에게 시국을 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번 일로 괜히 일이 불거지면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처리할 수 있다면 일거에 처리하자는 말도 꽤 신빙성이 있었다.
누가 봐도 칼스 중장을 저격한 말이었지만 정작 칼스 중장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진정한 전사들이라…… 그런 것치곤 주변이 너무 조용하지 않습니까?”
칼스 중장의 말에 육군 대장을 비롯한 몇몇이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확실히 조용하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이곳의 모두는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어도 심장 소리쯤은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들려오지 않는다.
무슨 일인가?
막 묻기 전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20명 정도의 인물이 새로이 나타났다.
그중 한 명은 쓰러진 군인의 멱을 잡고 끌고 왔고, 또 한 명은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미리 본 30명과는 달리 대부분 태도가 좋지는 않았다.
“백사자 부대의 마지막 전사들을 소개하지요. 아직 교정이 안 끝나 다소 거친 구석이 있는 친구들이지만 실력은 확실합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칼스 중장!”
모든 군인들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신성한 버킹엄 궁전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저 모습을 보아하니 모든 경비병을 정리한 듯싶었다.
자칫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
허나 메리 여왕은 아랑곳 않았다.
“대단한 실력이군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요.”
“대단한 친구들이지요. 어떻습니까, 여왕 폐하. 3일만 주신다면 말끔하게 정리해 보이겠습니다.”
“경비병들을 죽이진 않았겠지요?”
“다소 손이 거친 친구들이지만 제 명령 없이 아무나 죽이고 하진 않습니다. 모두 기절만 시켰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번 임무는 칼스 중장에게 전적으로 맡기지요.”
메리 여왕이 흔쾌히 허락했다. 제법 과격한 일 처리였지만 백사자 부대의 위력을 알려 주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작전이었다. 덕분에 다른 이들은 모두 얼굴만 새빨갛게 물들였을 뿐 섣불리 나서질 못했다.
예전이라면 모르겠으나 시대가 바뀌었다. 지금은 힘 있는 자가 정의다. 그 힘은 거칠수록 더욱 좋았다.
칼스 중장이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메리 여왕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이번 임무만 깔끔하게 해결하면 더 이상 영국에서 걸림돌은 없다. 매번 일을 하려 할 때마다 방해하던 녀석들도 더 이상 그러지 못하리라.
밝기만 한 미래를 상상하며 손을 떼려 할 직전이었다.
“3일로 충분할지 모르겠군.”
“……!”
칼스 중장이 급히 메리 여왕의 앞을 막아서며 목소리의 진원지로 몸을 돌렸다. 그가 반응하기 무섭게 백사자 부대도 전투태세를 갖췄다.
창가 위.
언제부터 있었는지 정장을 입은,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유유자적 창가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