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204화
이 일이 비상이 아니면 어느 일을 비상이라 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초비상!
각국의 정상들이 모였다. 불과 며칠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복잡한 절차를 거치고 오랜 공과 시간을 들여야 가능한 일.
그러나 사안이 사안이었다.
특히 이번 모임에 함께하겠다고 한 인물들, 여태껏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던 강력한 집단들이 참석 여부를 밝히자 감히 참가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빌더버그 클럽, 삼각 위원회, 삼합회와 마피아.
그리고 템플 기사단,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가 처음으로 성명을 가졌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와 집단을 천명하며 이목을 모았다. 철저한 비밀로 가려진 조직이 바로 이 세 곳이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든 힘을 행사하던 자들이 이들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지 않을 일…….
그리니치 천문대의 일과 엮이며 각국의 최정상들이 내달리듯 영국으로 향한 것이다.
회의는 엄중하게 진행되었다. 기다란 원탁을 두고 메리 여왕을 필두로 칼스 중장이 그 곁에 함께했으며 주요 인원들이 각자 자리에 앉았다.
“원탁의 기사 흉내라도 낼 셈인가?”
마피아의 대부 돈 골레놈이 피식 웃었다. 그의 자리는 메리 여왕과 매우 떨어진 장소였고, 그의 주변으로 삼합회의 인원들이 앉아 있었다.
반대로 템플 기사단,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는 메리 여왕의 지척에 앉는 영광 아닌 영광을 누렸다. 돈 골레놈의 입장에선 아니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질이 안 좋은 무리들만 따로 떨쳐 낸 셈. 세계가 이 지경이 되고도 과거의 허물에만 집착을 하다니…… 돈 골레놈은 메리 여왕의 어리석음에 조소를 보냈다.
“웬일로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군.”
삼합회의 두목 리 차오슝이다. 그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돈 골레놈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아닐 수도 있지만 그게 자신에게 하는 말일 것 같다고 돈 골레놈은 생각했다. 자신을 제외하고 주변에 격이 맞는 놈이 없기 때문이다.
“값진 냄새가 났거든. 물질로는 살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돈 골레놈이 금으로 전부 때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렇다. 물질 만능주의, 자본사회는 이미 죽었고, 금력으로 세계를 좌지우지 하던 이들의 힘도 약해졌다.
이제는 무력이 최고가 된 세상.
그리고 이번 모임에서 세계의 판도를 바꿀 어떠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돈 골레놈은 확신했다. 일단 참가한 인원부터가 대단하다. 100명 정도이나 그들 하나하나의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속물이군. 난 ‘그놈’이 신경이 쓰여서 찾아왔다.”
“그 마족의 대공이라는 작자 말인가?”
리 차오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회의, 그리고 중점이 된 주제.
대공의 출현과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일어날 일을 논의하기 위함이다.
리 차오슝이 혼잣말을 하듯 말을 이었다.
“던전이 나타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내 동생 라이펑과 타국의 용병들이 합심하여 유일하게 보물이 나오는 한국의 던전을 공략했지. 모두 전멸했다. 아니, 전멸한 줄 알았다.”
“생존자라도 있었나?”
“한 명…… 미국의 용병 중 한 명이 살아남았더군. 전신은 걸레짝이 되고 정신도 정상적이진 않았지만 솜씨가 제법 괜찮아서 의수를 달아 주고 내 호위로 사용했다.”
“아아, 저 뒤의 무식하게 생긴 놈.”
돈 골레놈이 눈을 돌렸다.
다리와 팔에 강철 의수를 착용한 남자가 리 차오슝 뒤에 의연히 서 있었다. 닭벼슬 머리는 제법 눈에 띄었고, 호위는 한 명만 대동할 수 있는데 이곳에 들어왔다는 건 대단한 실력자라는 방증. 허나 침을 질질 흘리는 것이 영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초대장에 그려진 얼굴에 반응하더군.”
메리 여왕이 보낸 초대장엔 몽타주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불타오르는 남자의 형상.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은 듯 흐릿했지만 분명히 어떠한 남자의 모습이 박혀 있던 것이다.
“그럼…….”
“그 대공이라는 자, 한국의 던전을 주무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North Korea)?”
“남한(South Korea).”
돈 골레놈이 턱을 쓸었다.
“한국, 한국이라…….”
대공의 던전이 어디인지 특정해 냈다는 것.
대단한 정보다.
어쩌면 이번 회의에서 쓸 만한 무기가 될 수도 있을 터.
리 차오슝이 자신에게 이런 패를 건넨 건…… 뻔하다. 힘을 합치자는 거다. 세계 정상들이 모인 장소이니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돈 골레놈이 리 차오슝의 어깨를 작게 두드렸다. 이로써 암묵적인 동맹이 성사되었다.
곧이어 모든 이가 자리에 앉았고, 메리 여왕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모여 주신 여러분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메리 여왕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돈 골레놈은 그 미소가 참으로 가식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야 메리 여왕이 영국에서 절대적인 지지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왠지 모르게 껄끄러운 이였다.
“이번 회의는 인류의 명운을 결정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세계에 자리 잡은 암 덩이들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지요.”
그리니치 천문대.
그곳에서 무언가 큰일이 벌어진다. 초대장에는 이 정도만 적혀 있었다.
“암 덩어리라 함은 마수들을 말함이요?”
미국의 대통령이 운을 뗐다. 그러자 메리 여왕은 고개를 저었다.
“마수들을 부리는 자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마족의 존재를요.”
“그렇다면…….”
“마족들이 모입니다.”
“……!”
대부분의 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미 알고 있었는지 템플 기사단을 비롯한 신비의 세 집단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인간이긴 한 건가?’
돈 골레놈이 혀를 찼다.
세 집단의 이들은 여태껏 한 치의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야말로 무미한 인간들. 로봇이라고 불러도 동의할 것 같았다.
때마침 러시아의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그 정보를 어디서 나셨소?”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모두 극비에 붙여 주길 바랍니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메리 여왕이 한차례 경고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금 입을 열었다.
“초대장에 그려진 남자가 직접 말하더군요. 자신은 마족의 대공이라고.”
“고작 그 정도 말에 확신을 가졌단 말이오?”
“그 불길한 힘, 대공이나 그에 준하는 이일 것은 확실합니다. 칼스 중장조차 보는 순간 대적을 포기했지요.”
“칼스 중장…… 그가?”
칼스 중장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각성자였다.
그런 그가 일거에 포기를 했다니, 확실히 범상치는 않았다.
메리 여왕이 그때를 상기시키곤 눈썹을 찌푸렸다.
“무엇보다 템플 기사단의 단원분들께서 직접 확인을 해 주셨지요.”
동시에 템플 기사단의 단장이 입을 열었다.
“나는 장소에 적힌 과거를 읽을 수 있다. 내가 읽지 못하는 과거라면 기상천외의 존재가 자리했을 때뿐. 그리고 나는 버킹엄 궁전에서의 과거를 읽을 수 없었다.”
템플 기사단의 단장은 얇은 은빛의 갑옷과 검을 착용한, 묘한 남자였다. 젊은 것 같으면서도 늙어 보이는 얼굴.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런 스킬도 존재한단 말이오? 아니, 읽지 못한다 해서 그가 대공이라 어찌 확신하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수다. 비교적 마수들의 침략에서 자유로워 힘을 키운 나라. 허나 그게 무색하게 템플 기사단의 단장은 무심이 그의 눈을 쳐다봤다.
“‘장소’라 말했지만 그 안에는 인간도 포함되지. 나는 이 장소의 모든 과거를 읽을 수 있고, 어제 네놈이 비행기 안에서 벌인 추잡한 짓거리까지 모두 알 수 있다. 아앙과 라이네리라…… 잘 즐겼는지 모르겠군.”
“…….”
침묵했다.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일 따름이었다.
비행기 안에 무언가가 설치되어 있으리라곤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첨단 감지기와 유니크 등급의 마력 탐지기로 수색을 했으니 말이다.
“우리 템플 기사단은 마족들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그중 가장 심도 있게 뒤를 쫓은 건 대공들……! 다른 마족들은 읽을 수 있었으나 유일하게 그들만큼은 읽지 못했다. 그만큼 위험한 존재라는 의미.”
“동의한다.”
“동의한다.”
프리메이슨의 수장과 일루미나티의 수장이 고개를 주억였다.
마치 다른 대공들을 보기라도 한 듯이…….
대공 중 알려진 이는 아리엘 디아블로를 제외하면 없었건만!
메리 여왕이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단서가 더 있었지요. 랜달프라는 이름입니다. 저는, 저희는 우연찮게 그 이름을 한국에서 접할 수 있었습니다.”
돈 골레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제법 쓸 만한 무기가 될 줄 알았는데, 상대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니?
“그리고 한국 천명회의 총책임자 김용우 길드 마스터도 이 자리에 함께해 주셨습니다.”
“천명회, 들어 본 적 있지.”
모두 한 번쯤은 들어 본 이름이었다. 다른 길드보다 더 대단한 업적들을 다수 남긴 탓이다. 하지만 한국은 다수의 마족과 마수들에 의하여 파멸의 길을 걸었다.
김용우는 메리 여왕의 뒤에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짧게 고개만 숙여 보일 따름이었다.
“랜달프 브뤼시엘이라고 했나요?
메리 여왕이 묻자 김용우가 대뜸 얼굴을 구겼다.
“그 이름,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시오.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 한국을 구한 영웅이오. 감히 마족 같은 것과 비교하다니…….”
“그의 활약은 일반 각성자와 비교하면 놀랍지 않았나요? 그대의 길드원 중 몇몇에게 들은 사실이지만 같은 인간인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더군요.”
“당연하지! 영웅이 평범한 인간과 같을 수가! 각성자들도 각자의 강함이 다르듯 그는 인간의 레벨이 달랐을 뿐이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심히 불편하지만 그분의 누명을 풀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내가 왔음을 메리 여왕께서는 부디 잊지 말아 주길 바라오.”
무례하다면 무례할 수 있는 발언이지만 메리 여왕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김용우의 믿음은 대단했다. 그의 눈을 보면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르는, 대단한 비밀을 간직한 그런 눈이었다.
돈 골레놈도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그런데도 추궁을 하는 건 왜일까? 메리 여왕은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 확신이 맞는다면 랜달프 브뤼시엘이라는 작자는 대체 무슨 인물일지, 심히 궁금하기 그지없었고…….
마족의 대공이 왜 구세주, 영웅이라 불리는지도 아이러니였다.
저 믿음은 척 보아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천명회.
한때 최고의 길드라고 은연중 칭송받던 곳.
그곳의 길드 마스터에게 이런 믿음을 심어 줄 수 있는 자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만약, 만약 모든 퍼즐이 단 하나의 그림을 의미한다면…….
돈 골레놈은 전신의 피부에서 닭살이 올라옴을 느꼈다.
‘그야말로 최고의 사기꾼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