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206화
모든 대공이 모인다.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도 그들에 대한 실례다. 최소한 왕들이 만나는 자리답게 꾸며 놓을 필요가 있었다. 이는 초대장을 보낸 내 위상을 보여 주기도 하는 작업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는 없었다.
드워프와 드워킹을 모두 불렀다. 물론 이런 자리에 오스웬이 빠질 리는 없었고, 그리니치 천문대에 도착한 오스웬이 가장 먼저 투덜거렸다.
“황제 폐하, 제게 주어진 일이 무척 많습니다.”
“안다.”
“특히 다크 엘프 하이어의 저주를 푸는 건 황제 폐하께서 제게 명하신 가장 중요한 작업이 아니었습니까? 그 강력한 저주를 반감시킬 무구를 만드는 것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안다.”
“마침 쓸 만한 발상이 떠올라서 실험 중이었단 말입니다. 고작 이런 성 하나 만드는 일에 저의 실력이 필요할 거라고는…….”
“오스웬.”
“흠흠, 말이 조금 헛 나왔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지요.”
오스웬에게서 다소 무리하는 기색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다크 엘프 하이어의 저주를 푸는 일이 생각처럼 잘되지 않는 모양이다.
크리슬리의 친모이자 진마룡 아오진의 연인. 상태로 보건대 아주 강력한 존재에게 죽임을 당하고 저주에 먹혔다. 천하의 오스웬이라도 쉽지 않을 일.
이해는 하지만 과열된 머리를 조금은 식힐 줄도 알아야 했다.
대장장이의 그 심오한 영역을 내가 알 리는 없지만 만류귀종이라 했던가? 전생에서 얼핏 들은 단어에 불과하지만 모든 흐름은 하나로 통한다던 그 뜻에는 제법 공감이 되었다. 나 역시도 일이 잘 안 풀릴 때 휴식을 갖고 더욱 높은 도약을 한 바가 있었다.
“이틀 안에 완성하라.”
“이틀이면 조금 빠듯하군요. 드워프가 200명은 필요합니다.”
태세를 바꾸고 성을 만드는 데 임하기로 했는지 오스웬이 눈을 빛냈다. 일이 다소 안 풀린다 하더라도 무언가를 만드는 것 자체는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400가량이 있으니 알아서 배치하고 활용하면 될 것이다.”
“그럼…… 좀 호화롭게 꾸미는 것도 가능하겠군요.”
“일주일 전, 내가 부탁한 건 완성했나?”
“아아, 그것 말입니까. 진즉 완성했습니다. 정확히 200개.”
턱을 쓸었다. 보다시피 오스웬에게 맡긴 일이 많다. 이는 오스웬을 제외하면 가능한 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는 오스웬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다.
실제로 ‘쓸모 있음’을 논하자면 오스웬은 당당히 두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었다. 능청스럽고 능글맞을 때도 있지만 나는 철저한 능력 주의자였다. 내게 반하는 것이 아닌 한 별다른 일에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쨌든…… 다크 엘프 하이어의 저주를 푸느라 바쁜 오스웬에게, 나는 한 가지 일을 제시했다. 다행히 바쁜 와중에도 내가 시킨 일은 모두 완수한 모양이었다.
“절반은 성 내에 설치하라.”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하면 되겠습니까?”
“잘 알고 있군.”
“필요한 것들은 요정님에게 따로 말하겠습니다.”
“그러도록.”
“그럼…….”
허락한 즉시 오스웬이 고개를 조아리곤 자리를 떠났다.
시킨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따로 대체할 자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능력이 뛰어남을 탓할 수밖에.
그렇다고 오스웬은 자신이 맡은 일을 대충 처리하지도 않는다. 시작한 이상 최선을 다하고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어찌 기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마력은?’
때마침 불현듯 느껴지는, 바람을 타고 흘러온 마력의 향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내가 눈치채고 얼마 안 있어서 같은 마력의 향을 풍기는 존재가 내 옆에 떨어졌다.
“꽤 괜찮은 장소 아닌가.”
익숙한 얼굴이다.
전생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머쥔 대공.
나도 그녀의 검에 일격을 당하고 죽은 기억이 있었다.
“아리엘 디아블로. 약속 시간은 아직 멀었다.”
“약속 시간보다 먼저 나오는 것이 진정한 예의이지.”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군.”
마족이다. 약속 시간을 정하면 그것보다 늦게 나오는 게 당연하다. 예의라 할 것도 없고, 그냥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대공들이 모두 약속의 때에 맞춰서 나타나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아리엘 디아블로는 굉장히 특수한 존재이긴 했다. 마족인 주제에 다른 마족들이 갖지 않고 있는 걸 가지고 있었다.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귀찮게 됐군.’
허나 방금 전 오스웬에게 시킨 일이 걸린다. 미리 준비한 물건을 곳곳에 설치하는 작업. 아리엘 디아블로가 눈치채게 되거든 일이 꼬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리엘 디아블로는 당당히 가슴을 펴며 말했다.
“곧 내 군세들이 도착할 것이다. 그 시간 동안은 느긋하게 이곳을 구경하고 싶구나.”
딱히 적대적인 느낌은 없었다.
그녀는 내게 나름 호의적이었고, 궁금증도 많았다. 가장 먼저 이곳을 찾아온 것도 나를 의식해서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허나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것을 일일이 아리엘 디아블로에게 보여 주고픈 마음은 전무하였다.
‘돌려보내긴 힘들겠어.’
언제까지 오라고만 했지 미리 와도 안 된다는 말을 초대장에 써넣진 않았다. 명분이 없다는 뜻.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손님으로서 얌전히 있겠다면.”
“하하, 우파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놈처럼 야만적이지 않노라.”
둘은 전쟁 중이었다. 서로의 험담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 막시움을 이용해 둘의 전쟁을 방해하고 있는 입장이었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입을 열었다.
“길을 안내할 안내자를 붙여 주지.”
“다른 놈들은 격에 맞지 않아. 함께 걸으며 느긋하게 대화라도 해 보지 않겠느냐?”
“이히!”
작고 우렁차게 이름을 내뱉자 수욱!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며 이히가 나타났다.
“이히히히. 마스터, 이히를 부르셨나요?”
“길 안내를 해 주도록.”
“누굴……! 앗! 마족!”
이히가 이내 눈을 치켜뜨며 황급히 검과 투구, 방패를 소환했다. 요정 기사의 증표이며 이히의 격을 증명하는 무구들이다. 그 모습에 아리엘 디아블로도 다소 흥미로운 눈초리를 보냈다.
“신기한 요정이로군.”
“마스터한테 떨어져! 이 나쁜 마족!”
전투태세를 갖춘 이히가 보석검을 들고 돌진했다. 평범한 요정이라면 마족에게 공격을 가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이히라면 상당한 물리력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마치 파리라도 쳐 내듯 손을 털었다.
툭!
“히잉…….”
바닥에 떨어진 이히가 이마를 문질렀다. 이히는 던전 코어에 귀속되어 있어서 이런 타격을 받은들 사라지지 않는다.
“흠…… 요정의 격을 올리는 방법도 있던가? 상당히 흥미롭구나.”
눈 가득 호기심이 들어찼다. 어느덧 나는 뒷전이 된 듯싶었다.
“이히, 그녀는 아리엘 디아블로 대공이다. 당장 적은 아니니 적당히 길을 안내해라.”
‘당장 적은 아니다.’라는 말을 강조했다.
사실 언제 적이 돼도 이상하지 않았다.
‘외곽을 중점으로 돌아라. 내부는 최대한 피해야 한다.’
그리고 심상으로 이히에게 뒷말을 덧붙였다.
아리엘 디아블로의 눈썰미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는 무구를 보는 데만 국한되지 않는다. 만에 하나 오스웬이 그것을 설치하다가 모습을 들키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오스웬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만에 하나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나.
이히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눈을 깜빡였다.
“네에~ 마스터. 이히가…… 음, 네. 저 나쁜 마족을 이히가 안내할게요. 칫.”
마땅한 듯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이히가 다시 날아올랐다. 이내 아리엘 디아블로를 째려보며 팔짱을 꼈다.
“나는 나쁜 마족이 아니다. 신비한 요정이여.”
“아니거든요~ 마스터를 빼고 모든 마족은 전부 나쁘거든요~ 이히가 잘 알거든요.”
“성격도 제 주인을 빼닮았군.”
아리엘 디아블로가 피식 웃었다. 그러곤 말을 이었다.
“그럼 그 안내라는 걸 받아 보도록 하지.”
“따라오든가 말든가~”
파앙-!
이히가 최고 속도로 날아갔다. 얼마나 빠른지 바람이 일었다.
“재밌는 요정이구나.”
“말썽꾸러기다.”
작게 혀를 차자 아리엘이 신기하다는 듯 턱을 쓸었다.
“너도 그런 눈빛을 지을 수 있었군.”
나는 이맛살을 구겼다.
누군가가 나에 대해 품평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를 아리엘 디아블로도 읽었는지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지금 문제를 일으키고픈 마음은 없노라. 나는…… 저 귀여운 요정과 술래잡기를 하마. 나중에 보자.”
그녀가 뒷짐을 졌다.
이어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파아아앙!
하지만 다음 발을 내디뎠다고 생각하는 순간 쏜살같이 사라졌다.
‘이히가 더 느리군.’
조만간 따라잡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도 자리를 옮겼다.
잡담의 시간은 짧았고, 앞으로 할 일은 많았다.
* * *
“랜달프 브뤼시엘은 어떤 마족이냐?”
이히가 ‘항복’을 선언하며 술래잡기가 끝났다. 이후 잠깐의 정적 끝에 아리엘 디아블로가 물었다.
코웃음을 친 이히가 손가락 열 개를 좌악 펴더니 하나씩 접어 가며 말했다.
“착하시고, 자상하시고, 멋있으시고, 강하시구, 똑똑하시구, 이히한테 잘해 주시구, 마력의 향이 굉장히 매혹적이시구…….”
“알았다. 그만해라. 그가 어떤 마족인지 대충 알겠다.”
끝도 없이 나열되자 정말 끝나지 않겠다는 생각에 아리엘 디아블로가 손을 내저었다.
“알면서 왜 물어보니?”
“후후, 이런 대접은 오랜만이구나. 그나저나…… 그 정도 그릇이면 요정왕의 격을 갖췄다 할 수 있을진대, 왜 이곳에 있는 것이냐?”
“요……정왕? 이히가? 아닌데?”
뭔가 걸린다는 듯 이히는 떨떠름히 답했다.
그러나 아리엘은 혼잣말처럼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요정의 계약은 요정왕이 될 때까지가 아니었던가? 요정왕이 되면 굳이 지금의 불평등한 계약을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 요정들에게 요정왕의 출현은 바라고 바라던 것. 갈망하고 또 갈망하던 것.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 하나의 의지이지.”
“흥, 뭘 안다고 이히한테 이래라저래라야? 요정왕이 그렇게 쉽게 되는 줄 알어?”
“나만큼 요정에 대해서 잘 아는 이도 없을 것이다, 요정 이히여.”
동시에 아리엘 디아블로의 눈동자가 하늘색으로 바뀌었다. 평소의 붉은색에서 순식간에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분위기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이히가 입을 크게 벌렸다.
“너…….”
“쉿, 이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니라.”
“어, 어떻게 마족이 요정의 눈을! 불가능한 일인데…….”
“역시 크게 말해 버리는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리엘 디아블로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나마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게 작은 위안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본래의 붉은 눈을 드러내며 이히를 오연히 바라봤다.
이히는 긴장했다. 마치 자신을 잡아먹을 것만 같은 기세에 주춤인 것이다.
이윽고 아리엘 디아블로가 작게, 그러나 뚜렷하게 말했다.
“요정 이히여, 나는 내 비밀을 하나 밝혔다. 그러니 내게 말해 주지 않겠느냐? 왜 요정왕으로서의 격을 갖추고서도 요정왕이 되지 않는 것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