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208화
내가 바라는 건 하나였다. 그들이 모임으로써 균열이 일어나고, 그사이 천족과 인간이 덮쳐 드는 것이었다. 그리만 된다면 제아무리 대공과 마족들이 모인 자리라도 상당한 피해를 감안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리고 나는 가장 유리한 고지에서 협상 아닌 협상을 시작할 셈이었지만…….
‘틀어졌다.’
저들은 왜인지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특수 이벤트라는 단어가 귓가에 맴돌았다. 내게는 뜨지 않았고, 저들에게만 떴다 하니 연유를 모르겠다.
‘특수 이벤트는 모든 이에게 공통으로 뜨는 게 아니었던가?’
그래서 정리를 해 보고자 마음먹었다.
지금 당장은 머릿속이 어지럽지만 여전히 내가 유리한 고지를 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켜 내가 위에 설 자리로 만드는 것도 능력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예컨대 잔혹한 사령관 막시움의 출현이 그렇다. 모든 마족들, 심지어 인간 각성자들에게도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생에서의 경험도 그렇다고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상적인 일.
틀어졌다고밖엔 할 말이 없었다.
알아내고 싶으나 아는 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모른다 한다면 저들은 이상한 의심을 할 가능성이 높다. 단지 그 가능성만으로 나를 매도하며 떨쳐 낼 수 있는 게 마계의 대공들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단연코 피해야만 했다.
‘마계, 저들은 내가 길을 열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 잘하면 열 수도 있을 테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동쪽에서 쳐들어오는 대량의 천사 따위는 지금 내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마계로 향할 수 있는 방법. 나는 그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히!
이히의 황금 왕관이다.
요정 기사로 격을 올리며 얻은 보물인데, 그 효과로 인해 나는 지저 세계에 떨어진 바가 있었다. 그곳은 나락 군주가 만들어 놓은 모의 세계였으며 그의 보고가 잠들어 있는 장소였다.
예측건대…… 그로 인해 마계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단지 예측일 뿐이지만 가능성은 높았다.
‘내게 특수 이벤트 메시지가 전해지지 않은 이유. 이히가 열쇠라면 내게도 전해졌어야 맞는 일이거늘. 메시지가 전해지지 않는 이는…… 시스템상에 속하지만 특수 이벤트와 전혀 상관없는 이들, 적들, 시스템에 속하지 않는 자들뿐.’
미간을 구겼다.
마신이 만든 시스템은 제법 완성도가 높다.
나는 당연히 시스템 내에 속해 있다. 마신과의 계약으로 지구에 당도하지 않았나.
특수 이벤트와 무관할 리도 없다.
그럼 남은 건 ‘적’일 때뿐인데, 말하자면 토벌 상대일 때 그러한데…… 전생에서 특수 이벤트로 등장한 마수나 막시움은 모두 확실한 메시지를 받지 못했다. 이건 확실하다.
‘나락 군주.’
내게서 다른 가능성을 찾으려면 그뿐이 없다.
물론 던전 마스터로서도 인식은 하고 있을 테다. 아니라면 던전 자체를 운영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나락 군주로 인식해도 충분히 납득은 갔다. 아니라면 이히의 왕관이 나를 마계로 돌렸어야 정상이다.
그래도 의구심이 생기는 점은 많았지만 가지는 모두 쳐 냈다.
나락 군주의 심장을 가지고 있으니 세상이 나를 나락 군주로 인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마족들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동시에 다크 엘프 하이어의 저주를 기억해 냈다. 마계에서 나와 비슷한 힘으로 공격당해 목숨을 잃은 크리슬리의 어미. 나락 군주의 심장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이어받았다고 생각되는 제삼의 인물.
마왕이 되어 마계에 돌아간 이후에나 신경 쓰게 될 줄 알았건만 모든 일은 이어져 있었다는 건가?
내가 아는 한 나락 군주는 최강자 중 하나다. 적어도 전생에서조차 1:1로 그를 대적할 자는 거의 없으리라 사료되었다.
신들의 농간에 의해 죽었지만 부활한다면 과연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어쨌든 마계에 일이 생겼고, 이들은 바삐 돌아가길 바란다.’
이것만은 확실했다.
주먹을 약하게 쥐어 보였다. 등을 꼿꼿이 펴고 동쪽을 바라봤다.
쿠릉!
콰콰쾅!
성 바깥은 이미 전쟁터다.
바깥에서 대기하던 마수들과, 동쪽 하늘을 물들이며 쳐들어온 천족들이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전쟁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대부분의 마족들도 마수들을 통제하러 성을 빠져나갔다.
이 상황에 달갑지 않은 듯 최대한 빨리 끝내려는 속셈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곤 얇게 웃었다.
처음엔 복잡했지만 곁가지를 쳐 내고 중요한 부분만 바라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 것이다.
‘여전히 열쇠는 내가 쥐고 있다는 소리로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 * *
지품천사(智品天使)라 함은, 숭고한 지혜를 가졌다고 전해지는 상위의 천사를 말함이다. 9계급으로 이루어진 천사 중 2계급에 속하는 위계로써 그 권능은 매우 강력하기 이를 데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능히 대공, 혹은 그 이상의 권능을 몸에 품었으니 가히 홀로 군단이라 칭해도 반박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지금 지구에 남아 있는 천사 중 가장 위계가 높은 천사가 지품의 위계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대도 위계를 중시하는 천족들에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세계 각지에 나타난 수만의 천사들.
그들은 중국의 한 던전을 신성 지대로 선포하고 모여들었다. 그곳에서 잃은 힘과 권능을 되찾음으로써 한층 더 강해질 수 있었다.
당연히 신성 지대는 천혜의 요새가 될 수밖에 없었고, 마족들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데 지금 그 천사들이 요새를 버리고 지품 천사를 앞세워 마족들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숫자 자체는 차이가 너무 심했지만…… 상성이 극에 이르고 천사들 대부분이 힘을 회복한 만큼 쉽지 않은 싸움이 되리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과 같았지만…….
‘인간들이 없다면 말이지.’
내가 손을 쓴 건 천족뿐이 아니다.
하쉬를 움직여 지구에 남아 있는 천족 전체를 움직인다는 작전은 성공했으니, 이제 나머지 하나를 더 기다리면 되었다.
바로 인간들의 합류다.
날짜까지 정확히 지정해 주었는데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처럼 미련한 녀석들도 없을 것이다.
멸망해도 싸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뒷짐 지고 구경이나 하면 되겠군.’
시계탑 꼭대기 위에서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뒷짐을 졌다.
이제부턴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시간이었다.
* * *
비밀리에 숨어 있던 집단들, 그리고 각성자들, 전 세계의 위대한 인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 계기는 자신을 대공이라 칭한 남자에게서 시작되었으며 처음에는 가볍게 치부되었으나 이제는 ‘세계 존망의 기회’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정보망을 통일시켜 마족과 마수들의 이변적인 움직임을 읽었고, 그들 모두가 그리니치 천문대로 향하고 있음을 확신한 탓이다.
적어도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임은 자명해 보였다. 마족들을 일거에 처리할 기회라고도 여겨졌다.
“여기는 꽃, 여기는 꽃…… 후! 코드네임이 꽃이 뭐예요, 길마?”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수십 킬로 떨어진 지점.
부서진 도시의 잔해 사이에서 유은혜와 팀원들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유은혜가 무전기를 통해 입을 열자 그 속에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럼 짱 센 꽃 해 줄게.
김용우의 목소리였다. 그는 지금 무전기를 통해 작전을 지시하고 있었다.
유은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더 별로거든요?”
―사람들이 너를 ‘전장의 꽃’이라 부르잖아. 구역별로 다 정리했다며? 그럼 대장 꽃이라고 불러 주리?
지하 벙커에 모인 각국의 강자들.
그들 모두를 꺾고 유은혜는 자신이 최강자 중 하나임을 증명했다.
그래서 약속대로 김용우는 ‘대장’이란 말을 입에 담을 것이었다.
당연히 유은혜의 입장에선 달갑지 않았다. 꽃이라니…… 꽃은 너무 연약하지 않은가.
“닥쳐요. 그보다 다음 지시나 내려요. 예정 지점에 도착했으니깐.”
―벌써? 그럼 기다려. 그 지점에 합류할 팀 몇 개 더 있어.
유은혜가 고개를 갸웃했다.
“예? 우리가 하는 게 제일 중요한 일 아니었어요? 비밀리에 움직여야 되잖아요?”
―그야 중요하긴 한데, 지금 긴급 상황이거든. 팀 한 개가 더 있어야 길이라도 뚫을 수 있을 거 같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천사가 등장했어. 숫자가 수만이야.
탁!
유은혜가 이마를 쳤다.
“갑자기 왜요? 아니, 미리 알았어야 되잖아요?”
―신성 지대 안은 모든 전자 기기가 안 통하는 거 알잖아. 게다가 워프라도 한 건지 갑자기 나타났다고. 가련한 인간들이 무슨 수로 그걸 읽으냐?
제갈공명 할아버지라도 못 읽겠다, 김용우가 투덜대는 소리를 듣고 유은혜는 이를 갈았다.
“조용히 들어가려는 계획이 틀어졌네요. 전쟁터 속에서 이걸 무슨 수로 옮기죠?”
유은혜가 뒤를 돌아봤다.
에드워드 윈저가 사람 몸집만 한 철제 가방을 메고 길을 가는 중이었다.
―그게 인류의 희망이야. 어떻게든 옮겨. 터트리기만 하면 된다고. 하늘이나 바다로 침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거 알잖아? 강한 각성자가 직접, 조용히, 안 들키고 옮겨야 돼.
가방 안에는 인류 역사상 다시없을 강력한 무기가 들어 있었다. 그걸 그리니치 천문대의 중심지에 아무 일 없이 가져다 놓는 게 유은혜가 맡은 역할이었다.
저걸 중심부에서 터트릴 수만 있다면 수많은 마수와 마족들을 일거에 멸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과학의 정수, 수많은 매직 아이템의 도움, 헤아리지 못할 숫자의 코어를 들여서 만든 유일한 무기.’
유은혜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만 제대로 터트리면 인류의 승리다.
슈퍼컴퓨터 수십, 수백 대를 동시에 돌려 천조 분의 1 확률까지 계산했으니 틀릴 리는 없었다.
하지만 옮기는 게 문제였다.
마하의 속도로 날아가는 전투기라도 강력한 마수 앞에선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격추되어 떨어질 가능성이 현저히 높다. 바다 역시 마찬가지다.
강력한 각성자가 기척을 숨기고 옮기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선택된 게 유은혜와 그녀가 고른 팀원들이었다.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죠?”
―음…… 곧!
곧? 애매하기 짝이 없는 대답.
허나 유은혜와 에드워드는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은은한 신성력이 먼 곳에서도 느껴진 것이다.
처음에는 천사인 줄 알았으나 분명한 인간이었다.
이상한 점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팀’이라 명한 것치곤 구성이 많이 얄팍하다.
두 명의 여인이 전부였으니…….
아!
아니다. 그녀들의 옆에는 불덩이가 떠다녔는데, 자세히 보면 사춘기의 소녀와 비슷했다.
그럼 정확히 넷인가?
“안녕하세요.”
“…….”
한 명은 활기찼고, 남은 한 명은 과묵했다.
불덩이들은 조용히 곁을 떠다닐 뿐이었다.
“김용우 길드 마스터가 말한 팀이라는 게……?”
유은혜가 얼떨결에 말하자 여인 중 한 명이 웃으며 답했다.
“예, 맞아요. 저는 김유라, 그리고 여기 조용한 아이는 제 동생 김민지랍니다. 둘 다 ‘하이 프리스트’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제법 유용할 거예요. 그리고 저희 파트너 레이와 세라랍니다.”
작은 불로 이루어진 소녀들이 짧게 인사했다.
그 즉시 유은혜는 그 소녀들이 불의 정령임을 알아봤다. 요즘 들어 꽤 많은 숫자의 각성자가 불의 정령과 계약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저는 유은혜. 전사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요.”
그러자 김유라가 생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