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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210화 (210/242)

던전 사냥꾼 210화

“그래서 대공이지요.”

김유라였다. 하이 프리스트 자매 중 언니로 보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평정심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왜인지 복잡하기 그지없는 태도다.

공포보다는 왠지 모를 회한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미묘한 차이를 유은혜는 깨닫지 못했다.

“격이 다르다는 걸까요?”

“같은 레벨이라도 대공이 훨씬 강해요. 분명…… 그래요.”

파티에서 살아남은 인원은 스물셋. 김유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 모두가 침묵했다.

그저 전투 장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넋이 나간 탓이다.

후우우우우우웅!

거대한 검은색 태풍이 종이 쪼가리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 태풍이 쓸고 간 지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가공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홀로 산을 움직인다 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늘에 떠 있는 검은 태양은, 블랙홀처럼 꾸준히 주변의 천사들을 빨아 당기는 중이었다. 홀로 천사 대군과 맞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 그 무위는 재는 게 불가능했다.

“크흐흐흐!”

그 순간 대공 우파가 크게 웃어 젖혔다.

태풍에 크게 위협을 안 받으며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 천사 하나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세 쌍의 날개를 지닌 천사. 중급의 위계를 가진 능품천사(能品天使)였다.

그녀의 주변으로는 환하기 이를 데 없는 빛이 마구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이 모든 공격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는 것 같았다.

우파가 웃으며 말했다.

“그 빛이 언제까지 네년을 보호할 수 있을까?”

“신의 가호는 마족 따위가 뚫을 수 없는 견고한 것이다!”

“그거참 대단한 가호로군.”

이윽고 우파가 검은 태풍을 손에서 놓았다. 그러자 태풍이 수백, 수천 갈래로 나뉘며 능품 천사의 주변을 감쌌다.

우파는 잘게 갈린 검은 태풍 중 하나를 타고 천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빛무리 속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치이이이익!

악한 것을 물리치는 빛. 우파의 손이 닿자마자 강렬하게 반항하며 태웠다. 그러나 우파의 입가엔 미소가 만연했고, 손에 닿는 면적은 빛을 잃어 가며 어둠으로 대신 채워졌다.

“커헉!”

우파가 능품 천사의 목을 죄었다.

“네년은 내가 친히 먹어 주마.”

빛무리가 모두 사라지자 우파는 우아한 손짓으로 능품 천사의 몸을 쓰다듬더니 목덜미에 입을 가져갔다.

“…….”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유은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천사가 마족에게 생으로 잡아먹히는 광경을 보고 만 것이다. 그야말로 악이 승리하는 광경 그 자체였다. 아무리 천사가 인간에게 도움 안 되는 족속이라 하더라도 그 신성성은 여전했건만…… 왠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여기서…….’

유은혜는 고민했다.

그들이 가져온 폭탄.

‘희망’이란, 전혀 안 어울리는 이름을 가진 물건이다.

이 거리에서 터트린다면 대공 우파쯤은 죽일 수 있지 않을까?

하나만 잡아도 대단한 성과다. 그가 끌고 온 수십 만의 마수들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교환이다.

‘최후의 보루다. 들킨다면 그때 폭발 스위치를 눌러도 늦지 않아.’

다시 눈을 뜨고 숨죽였다.

천사들을 모두 쓸어버린 우파가 무슨 행동을 보일지에 따라 맞춰 갈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우파는 등을 돌렸고, 그의 뒤를 따라 모든 마수가 우르르 몰려갔다.

“갔군요.”

우파가 보이지 않은 지 한참 뒤에야 유은혜가 입을 열었다.

“후우!”

“미친,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지?”

“우리 이길 수 있는 거죠, 공대장?”

남은 파티원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급격히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어요. 희망이 있는 한 이길 수 있습니다.”

최면을 걸 듯 유은혜가 말했다.

그리고 모든 파티원들이 그녀의 뜻에 동조했지만 김유라와 김민지는 전혀 다른 기색을 내비쳤다.

특히 김유라의 눈빛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대공…….”

* * *

나는 성의 중심부인 시계탑 위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 감각은 천지에 닿아 주변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읽어 내는 게 가능했다.

‘우파가 힘을 쓰는 데 주저함이 없군.’

아리엘 디아블로와 전쟁 중인 녀석, 우파 블레넌. 어느 정도 전력이 들통나 있으니 거리낌도 없다는 건가? 그래도 나는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전생의 힘을 대부분 찾았어.’

지금 우파가 행한 이적은 모두 전생에서 한 번 겪은 것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수준의 차이는 별반 없는 듯싶었다. 어느 사이에 이만한 변화를 이룬 걸까?

‘초월자의 벽을 넘으면 거대성 블레넌도 소환할 수 있을 테지.’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초월자에 근접했을 뿐 진정한 초월자는 없다는 것. 우파도 마찬가지였다. 그 가공할 성 ‘블레넌’을 소환하기엔 자격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블레넌…….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처지는 공포의 거성이었다.

마계에서 제일 큰 산을 깎아 만든 것이니 그럴 만도 했지만 그곳에 우파가 탑승하면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힘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건 판데모니엄뿐이로군.’

아리엘조차 자신의 기사단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천사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저 순백의 기사들은 모이면 모일수록 강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아직 모두 성장한 게 아니라서 완전체가 된다면 어떨지 자못 기대가 되기도 하였다.

반면 판데모니엄은 천사를 제거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나를 견제하듯 성 주변에서 잘 나가지조차 않았다.

“내가 도망이라도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판데모니엄.”

얇게 웃고 말았다.

이번 판은 내가 만들었다. 당연히 내가 빠질 수 없는 노릇이다.

나를 감시하고자 지근거리에 마수들을 남겨 놓기도 하였다.

“헥헥! 마스터! 마스터!”

돌연 익숙한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이히가 헐레벌떡 내 쪽을 향해 날아오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지?”

즉시 마력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차단시켰다. 감시의 눈이 있는지라 그럴 필요가 있었다. 혹여 내가 지시한 ‘그 일’이 적들에게 전해지면 여간 골치가 아파지는 게 아닌 탓이다.

이히는 한 손으로 이마를 닦아 내곤 작은 입을 열심히 열었다.

“마스터, 방금 이히한테 통신이 왔는데요. 그니까 크리슬리한테서요. 이히가 들은 그게 뭐냐면요…….”

“뜸 들이지 말고 말해라.”

“달의 마법사를 포획했대요.”

“그렇군.”

고개를 끄덕였다.

달의 마법사!

역시나 생각대로였다.

우파가 이곳까지 불안정한 달의 마법사를 데려올 리 없다고 생각했고, 위치를 추적하여 나는 꽤 긴 시간 동안 달의 마법사를 잡고자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 그 계획이 통한 듯싶었다.

달의 마법사에게마저 통했다면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다.

‘저들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대공들이 말한 특수 이벤트.

나는 아직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저들이 불안해하고, 나를 원하는 이유의 명확한 목적을 모른다.

그렇기에 불확실한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인지하고 바라는 것들은 하나하나 손에 넣어 가고 있었다.

나는 지평선 너머를 바라봤다. 쉴 새 없이 공간이 일렁였다. 짙은 연기, 피의 향연이었다. 천사들은 밀리고 있었다. 우파와 아리엘의 공세는 매우 가팔랐다.

이대로 가다가 천사들이 멸하면 하쉬도 위협을 받는다. 걱정을 할 법도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천사들도 멍청이는 아니지.’

이대로 밀린 채 끝날 리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하쉬를 통해 알게 된 천사들의 일면. 숨겨 둔 비장의 수는 제법 있었고, 그로 인해 마족들은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나는 품을 뒤졌다.

곧 날카로운 화살촉이 만져졌다.

이면 세계로 향했을 때 0001이 건넨 아이템.

레전드(Legend) 등급 ‘달의 화살’이다.

달의 마법사, 정확히는 중급 신 ‘구스타르테’를 속박하기 위한 필수적인 아이템이었다.

이 화살이 무슨 작용을 할지는 몰라도 효과가 없지는 않을 터.

속박에 성공했다면 나도 움직일 차례였다.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다.”

“예? 그러기엔 주변 시선이 조금 따갑지 않을까요? 이히는 그렇게 생각해요…….”

나를 감시하는 감시자들. 우파 외에 다른 대공들도 숫자의 차이만 있을 뿐 남겨 두고 떠났다. 나를 읽는 게 가장 어렵다는 걸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일 테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오스웬을 불러라. 나머지는 그가 알아서 해 줄 것이다.”

“예, 마스터. 부르기만 하면 되나요?”

이히가 고개를 갸웃했고, 나는 그런 이히의 어깨를 약하게 두드렸다.

“잘 해낼 것이라 믿는다.”

파앗!

나는 텔레포트 주문서를 꺼내어 찢었다. 마력의 흐름을 차단시켜 두었으나 이 주문서는 급이 다른 특제였다. 멀리까지 이동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마력의 흐름을 어지르지 않고 조용히 이동할 수단으로는 이것뿐이 없었다.

잠시 후 조용히 내 모습이 사라져 갔다. 그런 나를 당황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히만 내버려 두고서 말이다.

* * *

“마스터?”

이히가 눈을 깜빡였다.

텔레포트 스크롤을 썼다는 건 알겠다. 문제는 워낙 창졸지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히잉. 별말씀도 없이 어딜 가셨지?”

이히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믿는다.’는 한마디만 남기고서 사라졌다. 그야 믿는다니 이히로선 절로 어깨가 으쓱하지만 무엇에 대한 믿음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아! 이럴 때가 아니야. 오스웬한테 말하면 된다고 그러셨지?”

손뼉을 치며 이히가 재빨리 날개를 움직였다. 어쨌든 오스웬을 만나면 모든 전말을 알 수 있게 되리라는 작은 희망을 갖고서.

오스웬은 성의 지하 창고에서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오스웬! 이 죽다 만 시체야!”

“이미 죽어서 해골밖에 안 남은 이한테 죽다 말았다니…… 말이 심합니다, 요정님.”

“그게 아니라 마스터께서 이히를 너한테 보내셨어.”

“왜요?”

“이히도 몰라. 마스터가 갑자기 어디로 가셨거든.”

이히가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답답했는데 오스웬도 짐짓 모른다는 표정이다.

“너도 모르니?”

잠시 고민하던 오스웬이 팔짱을 꼈다.

“대충 짐작은 갑니다만 요정님이 잘 해낼 수 있을지…….”

“뭐야, 이히는 전부 다 잘할 수 있거든?”

“그래요? 그럼 참 다행입니다. 요정님이 마스터의 흉내를 내셔야 하니깐 말이지요.”

“웅……?”

“변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적들이 속지 않겠습니까? 마스터의 빈자리를 느끼면 저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이히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그 반응을 본 오스웬이 씨익 웃었다.

“설마 자신 없으십니까?”

“아, 아니 이히는 자신 있는데. 그런데 이히는 이렇게 작은데 어떻게 마스터의 흉내를 내니?”

“그야 다 방법이 있지요.”

“방법이 있어?”

“제가 누굽니까, 마스터의 왼팔 오스웬입니다. 물론 오른팔은 요정님이시죠. 하여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완벽하게 요정님을 마스터처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오스웬이 창고에서 책 하나를 꺼냈다.

“이 책엔 마스터에 대한 정보들이 꽤 자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더불어서 이 책에 적힌 인물로 잠시 변하게도 만들어 줍니다.”

“으, 응…….”

“그럼 시작해 볼까요?”

오스웬이 책을 펼쳤다. 그리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우자 이히의 주변으로 회색빛이 감돌았다.

약 3분 후 이히는 랜달프 브뤼시엘과 흡사한 외견을 가지게 되었다.

마력의 흐름도 흡사 비슷하게 보였다. 질 떨어지는 마수쯤은 속일 수 있으리라 사료되었다. 정작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나중에야 오스웬이 이 역할을 해도 되었다고 생각한 이히였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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