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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214화 (214/242)

던전 사냥꾼 214화

“……?”

은색의 기사가 멈칫했다. 고작 꿀물을 마시러 자리를 비웠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부하들에게 시키면 꿀물보다 더한 것도 즉시 대령할 터인데.

게다가 ‘이히’는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을 생각하느라 다른 잡념이 모두 멈췄다.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이히가 재빨리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흠흠, 이히에게 다녀왔다는 말이다. 이히! 는, 내 사랑스런 요정이지.”

“사랑스런?”

은색의 기사는 불신의 기색을 비췄다. 보일 듯 말 듯 한 당황스러움도 섞여 있었다.

대공 랜달프 브뤼시엘. 마족 중 현재로선 가장 유명한 이이며 모두 한 번씩은 그의 수작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마족 자체에게도 그렇지만 사랑이란 단어는 그에겐 너무나 안 어울렸다.

그러나 은색 기사의 반응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이히가 신이 나서 말하기 시작했다.

“일도 잘하고 말도 잘 듣지. 그야말로 이히! 는…… 최고의 요정이다.”

“……잘 알겠습니다.”

할 말이 없는지 은색의 기사가 두 발자국 더 물러났다. 이 정도의 거리는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듯싶었다.

“그럼…… 아리엘 디아블로 님에겐, 랜달프 브뤼시엘 님께서 사랑스런 던전 요정 이히와 꿀물을 마시러 갔다고 전해 드리지요.”

비꼬는 투가 역력했지만 이히는 입을 꾹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은색의 기사는 도리어 놀란 듯 경직하고 말았다.

“정말 그리 전해도 되겠습니까?”

이히는 그저 조용히 은색 기사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에 은색의 기사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도 모두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랜달프 브뤼시엘이다.’쯤의 생각을 가진 것 같았다.

그간 보여 준 모습과는 너무 달랐던 탓이다.

마족 중에서도 특출 난 마족, 압도적인 카리스마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었다.

혹시 계략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이히는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고, 마스터의 모습으로 그저 자신을 칭찬하고픈 마음뿐이 없었지만 은색의 기사는 명백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이후 은색의 기사가 무겁게 고개를 숙이곤 자리를 박찼다.

“이히히.”

그제야 이히의 입가가 풀렸다.

고비를 넘었다고, 정말 현명하게 헤쳐 나갔다고, 다시는 없을 훌륭한 임기응변이었다며 이히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허나 이 일로 말미암아 아리엘 디아블로가 무슨 생각을 가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 * *

작은 천사가 있었다. 수많은 날개를 가지고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천사는 얇은 베일과 풀잎으로 만들어진 관을 쓰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수많은 천사들이 밀집하여 마수들과 치열한 대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작은 천사는 굉장히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김새는 큐피드처럼 귀여웠으나 왠지 모를 기품마저 느껴졌다.

바로 상위 위계의 지천사 하쉬였다.

현재, 모든 천족을 대표하여 그들을 이끌고 있으며 지휘의 역할도 함께하는 중이었다. 전략을 잘 모른대도 다른 천사들이 도와서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어리다지만 상위 위계의 천사는 과연 다른 법이었다.

“93번 부대, 우파 블레넌에 의해 소멸했습니다.”

“77번 부대, 아리엘 디아블로와 교전 중. 근처의 부대들을 모두 집합시키겠습니다.”

“33번…….”

지척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나 그들은 보고하고 지휘하는 걸 잊지 않았다. 수많은 지휘 계급의 천사들이 하쉬 주변에서 현 상황을 입에 담으며 재빨리 다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하쉬는 그저 승낙만 하면 되었다.

말을 할 수 없대도, 하쉬의 의지는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졌다.

“하쉬 님.”

상위 위계의 좌천사 오피니언. 거대한 날개를 가진 그가 표정을 굳힌 채 다가왔다.

하쉬가 시선을 옮기자 오피니언이 이어서 말했다.

“전황이 좋지 않습니다. 제가 부대를 이끌고 어둠의 종자들을 토벌하겠습니다.”

그의 말처럼 전황은 최악이었다. 특히 아리엘 디아블로와 우파 블레넌의 존재가 여간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두 대공은 파죽지세로 천족들을 몰살시키는 중이었는데, 그 기세가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 꺾일 줄을 몰랐다.

이대로 놔뒀다간 피해만 커진다. 차라리 좌천사 정도의 그가 직접 움직여 전황을 뒤집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리라.

오피니언이라면 대공과의 대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하쉬는 눈을 감았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하쉬는 모든 것을 누구보다 빠르게 흡수하는 중이었다. 전장, 삶과 죽음, 리더에게 필요한 자질이 무엇인지까지도 모두 파악을 끝낸 뒤였다.

애당초 상위 위계의 천사는 천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밖에 없었고, 그중 지천사는 고작 셋 정도에 불과했다. 그 위에 단계로는 치천사와 천왕밖에 없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수준이다.

치천사는 둘뿐이 없다. 천왕은 하나이며 오피니언과 같은 좌천사는 다섯이다. 그야말로 최정예 중의 최정예. 배움의 속도가 남다른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곳은 한 번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전장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결단이다.

그리고 최상의 결과였다.

그 최상의 결과라 함은, 당연히 최대한 많은 마족과 마수들을 죽이는 것이다.

자신의 주인, 랜달프 브뤼시엘로부터 받은 메시지가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오피니언을 내보내는 건 최악의 수였다. 그는 최후의 최후까지 전장을 지휘해 줄 필요가 있었다. 하쉬보다도 전장에 대해서 잘 아는 백전노장이 그인 까닭이다.

하는 수 없었다.

하쉬는 눈을 떴다.

곧 자신을 바라보면 수천 개의 눈을 느끼며 하쉬는 그들에게 간결하기 그지없는 내용 하나를 던졌다.

바로 ‘방주의 사용을 허가한다.’는 내용이었다.

* * *

대공 우파가 자리를 휩쓸고 지나간 뒤.

유은혜와 그녀의 파티는 조금 더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중심부에 다다르는 길은 험하고 멀지만 희망을 갖고 있는 한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아쉽기도 하였다.

만약, 실패한다면.

우파와 그의 휘하 마족이라도 데려가는 게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후회가 조금씩 밀려들어 왔기 때문이다.

천족과 싸우고 있을 그 시간은 정말 절호의 기회였다.

우파도, 그 휘하 마족과 마수들도 자신들을 잡아내지 못했다.

여기 있는 인원 전부가 폭발에 휩쓸려 죽겠지만 대공 하나와 다수의 마족, 마수를 바꾸는 거라면 수지가 맞는 장사다.

‘아냐, 고작 놈 하나를 잡으려고 희망을 포기할 순 없어.’

그럴 때마다 유은혜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간혹 정찰하듯 움직이는 마수와 천족들이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천족은 먼저 인간을 공격하는 편은 아니었고, 강한 마수가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었던 덕이다.

“이 속도면 3시간 뒤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목적지에 희망을 심고 최대한 빠르게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표입니다. 뒤처지는 사람은 결코 한 명도 없어야 합니다.”

가장 앞에서 유은혜가 말했다. 벌써 몇 번이나 주의한 사안이다.

3시간.

말이 3시간이지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주변 모든 게 적이다. 하물며 감당할 수 없는 적도 많다.

운이 나빠서 정찰조에 제대로 걸리게 된다면 희망도, 인명도 모두 잃을 수가 있었다.

유은혜는 계속해서 희망적인 이야기를 대원들에게 늘어놓았다.

이길 수 있다느니, 우리가 인류의 희망이라느니 하는 이야기.

안 그랬다간 모두 분위기에 눌려 버릴 것 같았다.

그만큼 적은 강했으며 경이로웠다. 대표적으로 우파가 홀로 천족들을 쓸어버린 광경이 그렇다.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다는 인식을 절로 심게 될 정도였다.

“잠깐…… 저게 뭐야?”

“저게 뭐죠?”

돌연 대원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모두 한 지점을 바라보며 입을 크게 벌렸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최정예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겠지만 유은혜조차 그들이 바라보는 것에 시선을 옮기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하늘 위에 떠 있었다.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모두의 육안에 내비칠 정도로 무척이나 컸다.

“배……군요.”

김유라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선 말했다.

맞다. 배였다.

하늘을 떠다니는 나무배!

태양을 가릴 정도로 커다랗다는 걸 제외하면 그냥 평범한 배처럼도 보였다.

‘부디 나쁜 징조가 아니길.’

유은혜는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막으며 하늘에 있을 누군가에게 빌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하나둘 일어나고 있었다.

과연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착이나 할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 * *

천족의 날개를 거칠게 잡아 뜯던 우파가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제법 흥미로운 게 나타났군.”

우파가 거칠게 웃었다. 안 그래도 평범한 천족의 사냥에 슬슬 지루하던 참이다. 상대는 중위 계급 중에서도 높은 지위의 천사는 전혀 안 보이고, 졸개들만 무작정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사냥할 맛이 나겠는가.

일부러 체력을 소모시키려는, 뻔한 계획.

그러나 우파는 뻔히 보이는 계획에 일부러 동참해 주었다.

적당히 학살을 하다 보면 진짜가 나타나리라 생각해서다.

그리고…… 이제야 진짜가 나타난 것 같다.

“기수를 돌려라. 지금부터 나는 저 배를 점령해 보이겠다.”

검은 날개를 지닌 켈베로스 중 몇 마리는 깃을 들고 있었다. 우파의 상징, 거대한 성 블레넌이 그려진 깃이었다.

깃을 돌리고 우파와 함께 수십만의 마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파의 입가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저 배가 마음에 들었다. 고로, 침몰시키지 아니하고 직접 얻어 낼 셈이었다.

천족들이 만든 배이지만 블레넌이 없는 지금 임시로는 꽤 쓸 만할 듯싶었다.

저 배 중심에 자신의 깃을 꼽을 상상을 하자 벌써부터 몸이 달아오르는 우파였다.

“호…….”

아리엘 디아블로.

그녀는 사냥을 중지하고 잠시 쉬고 있었다.

천족들이 내보낸 아이들은 연약한 것들뿐이었다.

약자를 유린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격의 차이가 너무 나는 탓에 흥미를 잃었다.

하여 우파의 사냥을 그저 방관만 하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상당한 위용의 배 한 척이 나타난 것이다.

아리엘 디아블로가 상아검을 들었다. 발록의 상아로 만든 지고의 검!

그를 들자 아리엘 디아블로의 주변으로 흐릿한 뼈 갑옷이 나타났다. 뼈 갑옷은 전신을 감쌌으며 꼬리가 길게 달려 있었다.

이어 용의 머리를 축소한 것처럼 보이는 뼈 투구를 착용하자 자연스럽게 주변의 마력을 지배하게 되었다.

“가자. 천족의 배라면 떨어뜨려야 마땅하지.”

“…….”

척! 척!

은색의 기사들이 그녀의 뒤로 정렬했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오로지 행동으로 보일 뿐.

이어 아리엘 디아블로가 땅을 박찼다.

먼지바람이 일며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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