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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215화 (215/242)

던전 사냥꾼 215화

방주는 천족들이 만든 히든카드다. 신성 지대에 모이고 그들이 키워 낸 식물과 날개 등으로 감싸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어둠에는 물들지 않도록 온갖 마법과 신성력을 쏟아부은 결과물이니 대공의 공격에도 쉽게 부서질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 방주에 5만에 달하는 천족이 탑승해 있었다. 천족들은 하늘에서 신성탄을 쏘며 마수들을 휩쓸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쿵! 콰아앙!

배에서 쏟아진 포탄에 직격당한 마수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공중형 마수들이 하늘에 오르며 공격을 시도했지만 신성력으로 둘러싸인 막이 가장 먼저 가로막았다. 악한 것이 손을 대면 타들어 가는 고통과 함께 치유 불가의 상처를 입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뚫고 지나가는 고위 마수는 천족의 가더들이 도맡았다.

배를 지키는 2만의 천족들. 배 주변을 배회하며 보호막을 뚫고 들어오는 마수들을 차근차근 제거해 나갔다.

여태껏 그저 학살만 당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극적인 반전을 이뤄 낸 것이다.

“멍청한 녀석들.”

대공 우파는 자신의 휘하 마족들에게 공격권을 맡긴 채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족이라는 것들이 방주의 공격에 허둥대는 게 여간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좋은 마수들을 맡겼음에도 정작 방주에는 흠집 하나 내지 못하는 중이었다. 마족들의 기량도 다른 대공의 휘하 마족에 비하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마음에 안 들어.’

휘하의 마족 중에 마음에 드는 놈이 없었다. 마수들은 소모품에 불과하니 그렇다고 치지만 휘하 마족들은 자신이 죽기 전까지 평생을 같이할 놈들이 아닌가. 한데도 이 모양이다.

유능한 부하가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구스타르테는 최고의 검이자 방패이지.’

말만 좀 잘 듣게 만들면 최상이다. 마족은 아니지만 무려 신이었다. 신을 거느리는 마족이라!

생각만으로도 몸이 뜨거워진다.

콰앙!

그러나 방주의 함포 소리에 우파는 현실로 돌아왔다.

와이번 수십 마리가 줄지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있었다. 떨어진 와이번으로 인해 다른 마수들이 압사했다.

물론 쓸 만한 부하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고위 마족의 경우 방어막을 뚫어 내고 천족들과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거대한 비행형 마수 ‘골곤’을 이용해 방주 위에 마수들을 밀어 넣는 이도 있었다.

유능하지 않다 뿐이지 시킨 일만 하는 부하쯤은 있다는 의미다. 그게 개인적으로 우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켜라. 내가 하겠다.”

바로 앞에서 지휘를 내리던 백작 하나의 머리를 옆으로 밀어내곤 우파가 나섰다. 앞에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이대로는 시간만 잡아먹을 듯싶었다.

자고로 전투란 속전속결이다.

빠르게 시작해서 빠르게 끝내는 게 제일 좋다.

그리고 그 빠르게 끝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 주는 것이다.

휘이잉-

우파가 손을 휘젓자 조금씩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머지않아 수십 갈래의 태풍이 생겨났고 우파의 손 위에 춤추듯 놓였다.

그것을 하나로 합치자 거대한 검은색 태풍이 탄생했다.

“배는 좋아 보이는군.”

태풍을 타고 우파가 허공을 날았다.

그나마 위안인 점이라면 이제 곧 얻을 배의 상태가 썩 쓸 만하다는 것이었다.

* * *

그 시간…….

판데모니엄은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의 군세를 세운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싸움에는 하등 관심이 없다는 듯 그의 시선은 오로지 천문대 쪽으로만 향해 있었다.

랜달프 브뤼시엘은 요주의 마족이다. 저딴 천족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위험성이 높다. 당장 대공 중 하나인 오쿨루스를 처리하지 않았는가. 다른 대공들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가장 나이 많은 노장답게, 오쿨루스는 매사에 신중한 편이었다. 혹자는 겁이 많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 조심성이 그를 대공의 위치에 오랫동안 머물게 한 것이다.

‘놈이 정말 열쇠를 쥐고 있을까?’

적당히 천족과 싸우는 시늉만 하며 머릿속은 딴생각으로 가득 채웠다.

처음 시작은 편지였지만 진정한 발단은 특수 이벤트다.

허공에 뜬 메시지 몇 줄이 모든 대공을 이곳으로 모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시작된 천족의 습격…….

‘석연치 않아.’

처음 특수 이벤트는 천족의 출현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천족의 습격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크게 이상하진 않았지만 석연치가 않았다. 누군가 작위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가장 크게 이득 볼 자가 누구란 말인가.

‘랜달프 브뤼시엘.’

놈이다. 대공들의 세력이 줄면 가장 득을 보는 건 파벌이 없는 랜달프 브뤼시엘이었다.

그러나 천족이 마족의 말을 들을 리 만무하고, 무슨 방법을 사용한 것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판데모니엄은 최대한 세력을 아끼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었다.

혹시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린다면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니면 아예 그리니치 천문대를 에워싸 놈이 옴짝달싹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인간들이군.’

그러는 사이 판데모니엄의 시각에 열댓 명의 인간들이 들어왔다.

인간들의 정보력은 놀라운 수준이었고, 이 정도 규모의 전장을 못 알아차릴 이유가 없었지만 역시 이상한 일이었다.

‘왜 인간이 이곳에 있을까.’

인간들이 위험을 무릅쓰며 이곳에 올 까닭이 있는가?

하등하기 짝이 없는 생명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받아들이는 것뿐이거늘.

게다가 인간들의 움직임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는 게 분명하다.

‘알아봐야겠다.’

판데모니엄이 손을 들었다. 석연찮은 부분은 알아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다 보면 보이지 않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경우도 있었다.

최대한 조심하며 때로는 일단 행하고 보는 것이 좋다는 걸 그는 오랜 시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콰아앙!

돌연 하늘에서 광음이 났다. 거대한 화염이 유려하게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 방주에 부딪힌 것이다.

문제는 그 불꽃이 발사된 지점이다.

판데모니엄은 고개를 돌렸다.

“제법 잘 버티는군.”

멀지 않은 곳에서, 조촐하기 짝이 없는 마수들과 함께 놈이 있었다.

랜달프 브뤼시엘!

가깝대도 아예 지척일 수준은 아니었지만 놈이 지금 방주를 공격한 것이다. 계속해서 성안에만 썩어 있을 줄 알았는데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판데모니엄, 그대는 천족 사냥에 관심이 없나?”

힐끗 고개를 돌린 놈이 가증스럽게 말했다.

마족은 천족과 대립하는 게 당연하다. 보면 사냥하고픈 욕구가 드는 것 역시 당연하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고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꾸짖음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필 랜달프 브뤼시엘, 놈이 할 줄이야.

여태까지 성안에 처박혀만 있었던 놈이!

“즐기기에 좋은 시간이다. 연회의 여흥으로 이것만큼 괜찮은 것도 없지.”

“지금 나랑 말장난이나 나누자는 것이냐?”

판데모니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놈의 페이스에 말려들어선 이도 저도 안 된다는 걸 안다. 어차피 어린놈이었고, 치기 어리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놈은 의외로 교묘했다. 지금의 이 대화도 따로 목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말장난이라니. 우리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라면 꺼져라. 너에 대한 용무는 천족들을 모두 사냥한 뒤에 있다.”

“그 용무, 내가 불가능하다 하면 어찌할 셈이지?”

“불가능하다……?”

판데모니엄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회심의 일격이라도 당한 듯하다.

그러다가 ‘장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판데모니엄이 열을 올렸다.

“아주 큰일이 벌어지겠지.”

“그 큰일이라는 게 나한테만 벌어지는 건 아닐 것 같은데?”

“마계로 돌아갈 방법은 찾고자 하면 찾을 수 있다. 네놈이 거짓으로 아니 된다 하는 것이라면 다른 녀석들 모두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

그러자 놈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번졌다.

“마계라…… 나는 그곳에 미련이 없어서 잘 모르겠군.”

“그렇겠지. 네놈은 연고 없는, 홀로 떨어진 마족 나부랭이에 불과했으니. 그렇기에 네놈은 정식으로 대공이라 불릴 자격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 상태창에선 나를 보고 대공이라 그러는군. 그대들이 인정했기에 가능한 일 아닌가?”

“그래 봐야 가상의 것. 마계에서 네놈이 대공으로 인정받는 날은 없을 터.”

“나도 언제까지나 대공에 머물 생각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뜻이 일치하는군.”

대공에 머물지 않겠다는 건, 마왕이 되겠다는 의미다.

놈은 그 말을 남긴 뒤 유유자적 발걸음을 옮겼다. 전장을 돌아다니며 자리 좋은 곳에서 구경이라도 하겠다는 심보일까.

“놈…….”

판데모니엄이 빠드득 이를 갈곤 고개를 털었다.

놈이 성에서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계속해서 이곳에 머물 이유도 없어졌다. 어쨌든 이 싸움 자체를 빨리 끝낼 필요가 있었다.

“천족 사냥을 시작하겠다. 흩어져라.”

“명을 받듭니다.”

“명을 받듭니다.”

판데모니엄의 휘하 마족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할당된 마수를 데리고 움직였다. 다른 대공보다 휘하 마족들의 질에 있어서 판데모니엄은 자부심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유능했고, 굳이 명하지 않아도 각자 할 일을 알아서 했다.

잠시 후 남은 건 소수의 마수와 오쿨루스로부터 인계받은, 영혼 빠진 인형 마족들뿐이었다.

‘언제까지 기고만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판데모니엄이 눈을 감았다.

자신이 합세했으니 사냥은 곧 끝날 것이었다.

* * *

나는 한 차례 어깨를 으쓱했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판데모니엄의 눈에 걸린 인간들. 그들이 옮기는 게 나는 무엇인지 알았고, 그게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최대한 안전하게 옮길 수 있도록 김유라와 김민지를 붙인 것도 나였다.

‘저 희망이라는 폭탄이 얼마나 쓸 만할지는 모르겠지만.’

인간들이 이름마저 ‘희망’이라 붙인 걸 보면 아주 쓸모없지는 않을 듯했다.

어쨌든 마수들을 끌고 전장에 나온 건 정답이었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판데모니엄으로부터 그럴싸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보니 마계로 향하는 방법을 찾고 있었나 보군.’

마계로 가는 방법!

이히의 무구를 이용하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아마도 그것을 노리고 특수 이벤트가 뜬 것일 테다. 이히의 무구에는 상대를 본래 있어야 할 장소로 이동시키는, 요사한 힘이 있었다.

‘마계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저들이 급하게 움직여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

나는 전장의 중심에서 산책이라도 하듯 걸으며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판데모니엄의 말을 곱씹으며 추측을 이어 나갔다.

‘홀로 떨어진 마족 나부랭이라 대공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 반대로 대공들은 마계에도 그만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지. 요컨대…… 마계에 있는 자신들의 세력에 간과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 정도로 볼 수 있겠군.’

그게 당장 돌아가야 하는 이유이고 말이다.

마계의 세력은 자신이 마왕이 됐을 때 뒤에서 받쳐 줄 힘이다. 그런 세력 없이는 이름만 마왕인 꼭두각시가 될 수 있었다. 아니면 다른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그래서 나도 던전을 키우는 데 집중한 것이다. 내가 마왕이 된다면 나를 받쳐 줄 세력으로 일구기 위해서.

‘무슨 일이 생겼을지 잘 감이 안 잡힌다는 걸 빼면 좋은 정보를 얻었어.’

나온 보람이 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판데모니엄이 전장에 합류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냥은 금세 끝날 듯이 보였다.

작은 충돌이 균형을 다시 어그러트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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