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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218화 (218/242)

던전 사냥꾼 218화

고르고 고른 정예.

세계 최강자라 칭송받는 각성자.

비밀리에 키워진 비밀 병기…….

그들은 싸우는 방법을 안다.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대항할 방법 역시 익혔다.

어느 상황에서건 최상의 결과를 내도록 잔혹한 시간을 견뎌 왔다.

엄청난 악조건 속에서도 생존하게 설계되었다.

덕택에 패배를 몰랐으며 실력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바위를 뚫는 물줄기처럼 시간의 차이일 뿐 이기지 못하는 상대는 없다고 여기는 자들.

하지만 그 모두가 부질없는 상대를 드디어 만났다.

바위가 아니라 강철, 그보다도 단단한……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하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비명을 내지르는 일밖에 없었다.

“컥!”

단말마가 퍼졌다.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하고 절명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한 남자에게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는 것이다.

남자는 잔혹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손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한 번의 움직임, 하나의 생명이 꺼졌다. 움직임을 놓치는 일도 허다했다. 그럼에도 그는 본심이 아닌 듯싶었다. 그야말로 ‘가지고 논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파마의 화살!”

무기를 든 자 중 세 명이 남았을 시점.

궁수 직업을 가진 여자 각성자가 비장의 스킬을 사용했다. 화살촉에 주변 대기의 모든 마력이 모여들었다. 보랏빛을 띠며 강렬하게 타올랐다.

“정확한 사격!”

움직임을 예측하여 적을 맞추는 유니크 등급의 스킬.

곧이어 화살이 허공을 타고 날아올랐다.

화르륵!

하지만 그 역시 소용없었다.

남자의 몸에 닿기 전 거센 불길이 일어나 화살을 태웠기 때문이다.

“……!”

활을 쏜 각성자는 눈을 부릅떴다. 이 기술이 막힌 적은 처음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당황은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아니, 준비하려고 했다.

활대에 손을 걸쳤다. 거기까지가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 세상의 모습이었다.

콰득!

남자의 몸에서 정체불명의 번개가 튀어 올랐다. 용 형상의 번개는 여인을 집어삼켰고, 순식간에 재로 만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용이 먹이를 잡아먹는 것과 같았다.

“그만……! 그만 하세요!”

돌연 유은혜가 나섰다. 불과 1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다섯이 넘게 죽었다. 가만히 있다간 그나마 살아남은 대원들도 죽게 된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다소 흥미로운 눈초리로.

“그들은 나를 죽이려고 했다. 내가 멈춰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건 공정하지 않아요!”

“죽고 죽이는 데 공정함 따위가 왜 필요하지?”

올바른 소리였다.

작금의 세상에 이유 있는 죽음은 별로 없다.

공정함 따위를 챙기는 자들은 진즉 땅속에 묻혔다.

착한 이들은 빨리 죽고, 악인만이 판을 치고 있었으니 그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은혜는 마지막 양심 중 한 명이었다.

“한 번의 실수가 목숨으로 연결된다면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그만한 아량을 베풀 역량은 지니셨을 텐데요.”

유은혜는 인정했다.

그가 데빌 헌터 공격대를 이끌던 공격대장이며 구세주이며…… 마족이라는 사실을.

대원들을 상대하며 보인 스킬들은 납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의 움직임도 과거의 흔적이 간혹 보였다. 여기서 외면하는 건 현실을 도피하겠다는 의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여, 유은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철 같은 정신력으로 무장하여 최대한 피해를 줄였다. 과거는 과거에 불과하다. 1분 1초가 바쁘게 돌아가는 작금의 세상에서 과거를 돌아보기엔 너무나도 여유가 없었다.

“내가 아량을 베풀면 너는 내게 무엇을 해 줄 셈이지?”

교환을 하자는 것이다.

유은혜는 내심 어이가 없었다.

어차피 그는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었다.

이곳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에드워드와 유은혜가 합동을 하더라도 무리다. 옷깃이나 스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게 바로 강자의 권리라는 것이다.

허나 그는 그 권리를 행하지 않았다.

기회라면 기회인데…….

그의 마음에 들면서 대원들을 살릴 물건이 자신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조각을 드릴게요. 수련의 방을 통해 얻은 물건입니다.”

그가 구세주 행색을 하고 있을 때 헤어지기 전, 유은혜에게 고급 수련의 방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그곳을 통과하자 모종의 조각을 얻을 수 있었다.

에드워드도 마찬가지다. 혹시 몰라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두 개의 조각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얌전히 조각을 받았다. 허나 마음에 들어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이건 내가 잠시 너에게 맡긴 것이다. 이걸로는 교환이 성립하지 않는다.”

“무엇을 바라시죠? 대체, 이곳까지 와서…….”

울분이 들어찼다. 유은혜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그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아는 이들은 관련된 자들뿐이다.

영국 정부에 정보를 건넨 이가 그라고 치더라도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해야 정상이다.

한데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정보를 넘겼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역시 그가 바라는 건 하나였다.

“희망을, 가져갈 건가요?”

“헛똑똑이는 아닌 것 같군.”

역시!

그의 목적은 희망이었다.

인류의 모든 정수가 깃든, 오로지 마족과 마수를 배제하고자 만든 폭탄.

고위 마족과 마수들은 어지간한 핵폭탄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그들이 지닌 마력과 관계가 있다는 조사가 존재했고, 실제로 마법 아이템이 마수나 마족에게 훨씬 더 잘 통한다는 기정사실을 통해 온갖 코어와 스킬을 때려 박은 것이다.

‘자기희생’ 스킬을 통해 죽은 이들도 많았다. 모든 마력, 신성력 등을 희망에 불어넣고 말라 죽은 이들이 셀 수 없을 정도라고 들었다.

다시 만들려야 만들 수가 없는, 그런 아이템이 희망이었다.

그는 그 희망의 존재를 알고서 처음부터 계획을 세운 것이다.

유은혜가 입술을 깨물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수레 위에 놓인 희망을 바라봤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걸까?

승산이 없는 건 안다. 하지만 희망을 뺏길 바엔…….

“네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다. 내 목적 역시, 나 외의 마족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니.”

마족들 간에도 파벌이 있고, 사이가 좋지 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희망을 사용해서 그들을 일거에 없앤대도 결국 그가 남는다. 그의 진정한 목적을 알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엇을 얻으려고 그러는 거죠?”

“나는 지구에 욕심이 없다.”

지구를 침략해 놓고는 지구에 욕심이 없다?

이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욕심이 없었다면 애당초 쳐들어오질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불신을 가득 담고 유은혜가 그를 바라봤다.

솔직히 지금은 ‘랜달프 브뤼시엘’이라는 이름이 진짜인지도 긴가민가했다.

정말 그에게 진실이 있기는 한 것일까?

“나는 남은 대공 모두를 꺾고 마계로 돌아가 왕이 될 것이다. 지구는 우리의 싸움을 위한 각축장에 지나지 않아. 마족들은 이곳 지구의 멸망을 원하지만 나는 예외다.”

“……운이 나빴다, 이건가요?”

저 말대로라면 지구에 그들이 들어온 건 전혀 다른 이유에 의해서였다는 것이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었다.

“그래.”

허나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이 다른 마족과 다를 것이라는 소리를. 그렇다면 왜 대원들을 죽였죠? 살리려면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러자 그가 피식 웃었다.

“착각하지 마라. 나는 마족이다. 네가 상상하는 그런 선함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다른 마족과 달리 지구의 멸망에 관심이 없을 따름이지. 내게 대적하지 않는 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죽이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도 없지 않겠나?”

“그럼 다른 마족들은 왜……?”

“오래 산 마족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증오하더군. 짧은 생을 살면서 쉴 새 없이 바뀌는 너희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하는 것이지. 내게도 그런 감정이 없지는 않으나, 지금 지구에 있는 마족만큼이나 강하진 않다.”

“인간의 행세를 하지 않았나요? 데빌 헌터 공격대를 이끌었잖아요. 인간이 미웠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너희에게 버틸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서였다. 더불어서 이용하려는 목적도 있었지.”

“……?”

그는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잠시 침묵하던 그가 이어서 말했다.

“나는 홀로 독보하는 마족이다. 다른 대공들과 달리 내겐 파벌이 없다. 그들이 단기적인 목적에 몰두할 때 나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길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아주 유용한 말이었지. 언제고 인간의 검이 다른 마족의 목에 닿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뚜벅.

그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유은혜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나며 입술을 깨물었다.

“인간의 가능성은 마족의 그것을 능가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개화하기엔 마족들의 공격이 너무나도 매섭다. 나는 그들로부터 너희를 지키고, 고비를 주며 경험을 늘려 왔다. 더불어서 너희를 이끌고자 잠시 인간의 행색을 하기도 했지. 물론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마족이 내 영역에 침범할 줄은 예상 못했지만 말이다.”

“혹시…….”

아아.

그렇다면.

한국의 던전은.

“내 이름은 랜달프 브뤼시엘. 나는 마족이며 네 명의 대공 중 하나이며 지저 세계의 지배자이자…… 던전의 주인이다.”

또 있다.

데빌 헌터 공격대의 공격대장.

구세주!

그를 표현하는 다른 단어들이었다.

굳이 꺼내지 않은 건 그 사실을 유은혜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내가 바로 너희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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