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219화
악이 있다. 그렇다고 모두 같은 악은 아니다. 그중에도 강도의 차이가 있었다.
나는 악이다.
다만 선택에 따라 차악 정도는 될 수 있었다.
서로가 마족의 멸족을 원하고 있다면 나 이상의 선택지는 없었다. 나는 지구에 미련이 없었고, 대공들을 이기고 마계에 돌아가 왕의 좌에 앉는 게 꿈이었다. 그곳에서 크게 웃어 재끼며 모든 이를 오시하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다.
그 목적에 비하면 지구 따위는 별로 정복하고픈 마음도 안 드는 장소다. 72명의 신들과 계약한 내용도 있었다. 하여…… 안심해도 좋다. 내가 승자가 되었을 때 지구는 무사할 것이다.
유은혜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결론은 내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외에 더 좋은 선택지는 없는 탓이다. 다른 마족들은 손 자체를 잡을 수 없었고, 자력으로 돌파구를 찾기엔 이미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천족? 그들 역시 인간의 말 따위는 가볍게 씹어 먹으리라.
나는 느긋한 눈초리로 시선을 옮겼다.
수레에 담긴 희망.
거대한 철제 상자 속에 담겨 있었다.
이름과는 안 어울리는 외관이다.
심안을 열었다.
이름- 희망(Legend)
설명: 1회용 아이템. 전 인류의 희망이 담겨 있는 지보의 폭탄. 수많은 스킬과 코어, 자기희생 주문이 섞여 있다. 주의할 것.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닿는 모든 존재를 지운다. 자연 친화적. 부작용이 없다.
* 체력, 힘, 지능의 합이 250 이하일 시 100% 확률로 소멸.
* 체력, 힘, 지능의 합이 250 이상 260 이하일 시 80% 확률로 소멸.
* 체력, 힘, 지능의 합이 260 이상 270 이하일 시 60% 확률로 소멸.
* 체력, 힘, 지능의 합이 270 이상 280 이하일 시 40% 확률로 소멸.
* 체력, 힘, 지능의 합이 280 이상 290 이하일 시 20% 확률로 소멸.
* 체력, 힘, 지능의 합이 290 이상일 시 알 수 없음.
체력과 힘, 지능은 모두 방어적인 능력치다. 힘은 약간 경우가 다르지만 대략 10에 체력 1 정도의 효율을 가지고 있었다.
난 이미 저 세 가지 능력치의 합 290을 넘겼다. 알 수 없지만 소멸하진 않을 터. 대공들도 크게 타격은 받지 않을 듯했다.
‘인간들이 용케 이런 걸 만들었군.’
나도 제법 놀랄 수밖에 없었다. 레전드 등급이라니. 인간의 절박함이 만들어 낸 결과물은 상당히 훌륭했다.
자기희생 주문이란 말 그대로 자신을 희생시켜 사용하는 1회용 스킬을 말함이다. 그런 게 여럿 섞였다면 낮은 등급이 나올 수도 없었다.
턱을 쓸었다. 상당히 강력한 무기가 될 듯싶었다. 아주 강한 존재들이나 초월자에겐 소용이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적의 세력을 줄이는 데 이만한 폭탄은 없었다.
이곳엔 수백만에 달하는 마수가 모여 있었고, 대부분이 마족들의 주력이었다. 효과적인 장소에서 적절한 시간에 터트릴 수만 있다면 상당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로제가 폭탄을 설치할 장소를 알려 주고 안내할 것이다. 설치를 끝내면 탈출하여 내 신호를 기다려라.”
그리니치 천문대의 중심부에 설치하겠다는 발상은 좋지만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 그보다 전장의 한가운데 투하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나는 유은혜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았다.
무슨 결정을 내릴지는 뻔했고, 설령 잘못되더라도 지금의 이야기를 쉽사리 전하진 못할 것이다.
‘김용우, 일부러 입을 닫고 있었군.’
천명회의 길드 마스터. 녀석은 득과 실에 대한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이다. 내 정체를 얼추 알고 있을 것이면서 유은혜에게조차 입을 닫았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큰 혼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겠지.’
데빌 헌터 공격대의 위상이 떨어지고, 한국은 혼란에 휩싸일 게 자명했다.
당사자들이 알아서 입을 닫는 형국이었다.
나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어쨌든 이곳에 온 목적은 모두 이뤘다.
고급 수련의 방에서 얻은 조각과 희망, 그리고 유은혜와 에드워드의 성장 속도. 모두 매우 만족스러웠다.
특히 유은혜와 에드워드의 성장은 굉장히 가파른 편이었다. 전생에서보다 두 배 이상 빨랐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웬만한 마족들도 둘을 꺼리게 될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모든 걸 끝낼 순 없다.’
조금 더 길게 봐야 한다.
이 혼란을 이용해 처리할 수 있는 적은 처리하겠지만 너무 무리하면 도리어 역풍을 맞는 법이었다.
‘허나…….’
걸음을 올리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전황이 바뀌었다. 희망은 생각 이상으로 훌륭했다. 터트리는 데 성공만 한다면 아주 재밌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 * *
수십만의 대군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1만이 되지 않는 아리엘 디아블로의 군세를 둘러싸며 조금씩 압박해 들어갔다. 하지만 생각처럼 빠르게 일이 진행되진 않았다.
번쩍!
은색의 기사들에게서 하얀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빛은 은색의 기사들을 연결했다.
모일수록 강해지고, 피해를 공유하는 스킬.
‘거대한 산맥(Epic)’이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도 은색의 기사가 100에 달했으니 그 전부를 처리할 충격을 줘야 없애는 게 가능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은색의 기사들은 개개인의 역량도 매우 뛰어났다. 능히 최상급의 마수와도 맞서 싸울 수준이었다. 우파가 모은 마수는 급의 차이가 현저했고, 단지 숫자상의 절대적 우위만 있을 뿐이었다.
아리엘 디아블로의 휘하 마족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신하로서 왕을 따르는 자들. 모두가 기사와 같았다. 평소에도 자신을 갈고닦으며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1만이 채 안 되는 숫자로도 팽팽한 싸움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빌어먹을 암캐 년,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보겠다.”
우파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충분히 압도 가능하다고 여겼건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주변에서 천족들도 훼방을 놓는 터라 싸움에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우파 블레넌, 말을 조심하지 않으면 주둥이가 찢길 것이다.”
아리엘은 발록의 뼈로 만들어진 갑주와 무기를 착용했다. 발록은 최상급 Lv5에 달하는, 마수 중의 마수라고 평가받던 괴물이다. 뼈에 깃든 자체적인 마력의 내성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어지간한 스킬은 강제로 무효화하는 기능을 가졌다.
단순 1:1의 대결이라면 아리엘 디아블로가 조금 더 앞서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것이 우파의 화를 돋우는 데 크게 일조했다.
우파가 손을 크게 벌렸다. 그의 품 안에서 검은 구가 무수히 생겨났다. 검은 구는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 당기는 블랙홀이었다. 그것을 하나로 모으며 거대하게 만들었다.
빨아 당기는 힘이 워낙 강해 블랙홀은 적아를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우파는 아랑곳 않았다. 그보단 저 빌어먹을 년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그것을 본 아리엘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저 스킬이 얼마나 위험한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정통으로 맞았다간 가루 하나 남기지 못하고 스러지리라.
“어비스 소드.”
아리엘 디아블로의 전매특허 스킬!
그녀의 검에 곧 혼돈이 담겼다.
우파의 스킬은 위협적이지만 아리엘도 피할 생각은 없었다. 무력 대 무력으로써 놈을 무참히 찢어발길 작정이었다.
어비스 소드가 저 따위 블랙홀에 비하지 못하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곧 허공에서 아리엘 디아블로와 우파가 충돌했다.
쿠우우우우우웅-!
판데모니엄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황이 묘했다. 천족들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우리를 몰아넣고 있다.’
천족들은 방주가 있는 쪽으로 마수를 몰아넣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해졌다.
‘난전을 바라는가?’
방주의 근처에선 아리엘 디아블로와 우파 블레넌이 절찬리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판데모니엄은 둘의 싸움에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알아서 싸워 주면 그로선 좋을 따름이다. 생각보다 둘의 피해가 크다면 이 자리에서 둘을 없앨 계획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족이 끼어듦으로써 계획이 틀어졌다.
방주 근처에서 모두가 각개 전투를 벌이며 난전이 펼쳐지길 바라는 것도 같았다.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거나.
스르륵.
그때였다. 판데모니엄의 주변으로 수십의 그림자가 모여들었다.
“임무는 실패했나?”
스륵. 스르륵.
그림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미묘한 움직임으로 대화를 전할 뿐이었다.
‘실패했군.’
작게 혀를 찼다.
이들은 판데모니엄이 직접 개조하고 만들어 낸 그림자형 마수다.
쉐도우 헌터.
오로지 중요 마족, 마수의 암살을 위해서 창조해 냈다.
3천가량을 보냈는데 이만한 숫자만 돌아온 걸 보면 그만큼 격렬한 싸움이 있었다는 방증이었다.
‘지천사를 잡기엔 역부족이었나.’
상위 위계, 그중에서도 두 번째에 달하는 지천사란 계급.
마계에서도 한 번 경험해 본 적이 있다. 그 놀라운 힘을 말이다. 쉐도우 헌터 3천 정도로 어찌해 보려는 게 이상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 보았는데, 역시나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스륵!
판데모니엄이 실망을 금치 못할 무렵 제일 앞에 서 있던 쉐도우 헌터가 크게 요동쳤다.
“흠, 지천사를 사냥하는 건 실패했지만 좌천사를 잡았다?”
탁. 판데모니엄이 손뼉을 쳤다. 좌천사도 상위 위계의 천족이다. 지천사보다 한 단계 급이 낮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좌천사라면 오피니언을 말하는 거겠군.’
지구에 떨어진 천족, 그중 좌천사 오피니언이라면 판데모니엄도 만나 본 적이 있었다. 천족 중에서도 백전노장의 기색이 강하며 대군을 이끄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장을 보는 눈도 훌륭해서 홀로 10명의 사령관 몫을 해냈다.
놈을 죽였다.
말인즉, 오피니언만 한 사령관이 또 없다면 천족들의 체계에 금이 간다는 것이다.
‘실패는 아니로군.’
절반의 성공이었다. 경우에 따라선 오히려 지천사를 암살한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이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 번쯤은 걸어 볼 때였다.
“모든 마수에게 전하라. 방주로 이동한다. 난전이 얼마나 어려운 전투인지 천족에게 알려 주도록 하지.”
난전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머리를 잃은 적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제대로 병졸을 다룰 수 있을까?
판데모니엄은 그런 경험이 많았다. 하여 자신이 있었다. 오피니언이 죽었다면 이 전투를 별 피해 없이 승리로 이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만 있다면 세가 약해진 우파와 아리엘을 사냥하는 것 역시도 불가능하진 않으리라.
암묵적으로 전투를 피하자 하고 모였지만 모든 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었다.
마계에서의 일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탓이다.
‘랜달프 브뤼시엘, 놈만 조심하면 되겠군.’
판데모니엄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스륵. 스르르륵.
그리고 판데모니엄의 움직임에 호응하듯 1만에 달하는 쉐도우 헌터가 바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