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220화
* * *
그리니치 천문대의 위에 올랐다. 보름달이 뜬 저녁. 전투는 몇 날 며칠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천문대 안에 배치한 마수들을 불러 모았다.
숫자 자체는 얼마 되지 않았고, 내가 보유한 마수들 중에서도 질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구색을 맞추기엔 괜찮은 조합이다.
샤벨 타이거 500과 오크류의 마수 500, 트롤과 오우거도 적당히 섞었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추가한 게 바로 ‘도플갱어’다.
‘겉모습을 베껴낼 뿐이지만 난전인 상황 속에서 깊게 신경 쓸 이는 없겠지.’
도플갱어는 상대의 모습으로 변하는 마수다. 중급의 마수로서 그다지 강한 축에 속하지는 못하지만 활용도는 나름 뛰어난 편이었다. 지금처럼 ‘사기’를 치려는 상황에선 더더욱 그 쓰임새가 빛을 발한다.
나는 300의 도플갱어를 그리니치 천문대 지하에 숨겨 놓고 있었다. 그들 모두를 데스 나이트로 변신시켰다. 30가량의 진짜 데스 나이트도 섞어 넣었다. 그러자 그럴싸한 데스 나이트 부대가 완성되었다.
‘굳이 피해를 늘릴 필요는 없지.’
내가 보이려는 건 어디까지나 구색에 불과하다. 저들의 장단에 놀아 주려는 것뿐이다. 아예 전장에 참여하지 않을 수는 없었고, 이런 식의 보여 주기 용도로 나름의 영향권을 얻으려는 셈이었다.
“난전이라…….”
벌써 이틀째.
방주 주변에서 4파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리엘, 우파, 판데모니엄, 그리고 천족이 벌이는 핏빛 향연!
저들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내게 시선을 돌리기 전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둬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희망을 터트리기엔 시기상조였다.
‘승자가 정해지는 순간, 모든 게 끝났다고 여겼을 그때 최후에 웃는 자는 내가 될 것이다.’
심안을 통해서 아이템의 효과를 보기는 했지만 희망이 얼마나 강력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니 모험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했다.
기다림. 인내는 내가 잘하는 것이었다.
‘재밌겠군.’
몸을 돌렸다. 오스웬이 선두에서 모든 준비를 마무리한 상황이었다.
“황제 폐하, 명만 내려 주신다면 신 오스웬이 적들을 쓸어버리겠습니다.”
오스웬의 능글맞은 목소리는 여전했다. 진지함이라곤 별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가 나를 따르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그를 구하고 나락 군주에게 타격을 줬기 때문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막시움과 비슷한 말투로군. 그래, 막시움과는 연락이 닿았나?”
“우파 파벌의 던전 두 개를 손에 넣었다고 합니다.”
“일이 잘 진행되고 있나 보군.”
오스웬이 어깨를 으쓱했다.
“황제 폐하께서 강력한 원군들을 붙여 주신 덕분이지요.”
본래 막시움은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활동하며 우파를 방해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우파가 자리를 비운 지금에는 던전을 차지하는 새 임무를 부여한 것이다.
병력도 충원해 주었다. 최상급 마수인 마고와 본 드래곤, 해골류의 병사 1만!
구스타르테를 잡는 데 사용하지 않은 상급의 마수 전부를 붙였다.
그야말로 난전, 그 속에서 또 다른 난전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었다.
‘아리엘과의 싸움이 우파의 판단력을 흩뜨려 놨다.’
본래라면 지금쯤 이 소식을 접하고 병력의 상당수를 돌려보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현재 우파는 아리엘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럴 여유가 없다는 의미다.
덕분에 던전을 차지하는 작업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중요한 거점을 차지하는 건 힘들겠지만 조무래기 마족 몇몇의 던전 정도는 더 얻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였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했지만 모두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황제 폐하, 누구의 편을 드시겠습니까? 아리엘 디아블로, 우파 블레넌, 아니면 판데모니엄입니까? 혹, 천족의 편을 드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지금 바깥은 모두가 적이었다. 암묵적인 약속은 깨졌다. 한 번 불이 붙었으니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멈출 수 없으리라.
“당연한 소리를 묻는구나.”
나는 검을 뽑았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내 적은 나를 적대하는 모든 이들이다.”
촹! 촹!
히이이잉-!
우우우우-!
모든 마수가 울부짖었다. 도플갱어가 아닌 진짜 데스 나이트들은 일제히 검을 뽑았다.
보여 주기에 불과한 출전식이라지만 내게 적당히란 없었다.
한 번 나선 이상 확실하게 할 생각이었다.
“가자.”
화르륵!
오만의 불꽃이 타올랐다.
가장 먼저 노린 건 천족이다. 가만히 있어도 천족은 달려들었다. 손을 쓰기 싫어도 쓸 수밖에 없었다.
“오스웬.”
“예, 황제 폐하.”
“누가 이길 거라 보는가?”
거대하기 짝이 없는 배. 그 근처에서 우파와 아리엘은 피 튀기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접전이었고,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우파입니다.”
“아리엘이 약간 우세하지 않나?”
“전쟁은 강한 사람 한 명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오스웬은 지저 세계의 사령관이었다. 비록 자아를 잃은 상태였지만 그 경험은 그대로 녹아 있는 듯싶었다.
나는 미간을 톡톡 두드렸다.
우파와 아리엘의 1:1 싸움은 아리엘이 약간 우세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그 격차는 조금씩 커질 것이다.
반대로…… 마족과 마수의 대결에선 우파가 앞선다. 아리엘은 소수 정예를 고집했고, 덕분에 숫자가 너무 적었다. 절대적인 숫자의 우위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아리엘과 우파의 대결 이상으로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특히 저 은색의 기사들…… 대활약을 펼치는 중이지만 나는 심안을 열어 저들의 스킬을 살핀 적이 있었다.
‘동시에 무너질 테지. 그러면 끝이다.’
거대한 산맥(Epic) 스킬은 확실히 좋지만 100명분의 체력이 모두 소비되었을 때 동시에 쓰러진다는 단점 아닌 단점이 있었다. 조금씩도 아니고 단번에 벽이 허물어지면 그 빈자리를 채우고자 훨씬 많은 병력을 소비해야 한다.
“천족과 판데모니엄의 싸움은?”
“판데모니엄이 승리하겠지요. 그는 난전을 아주 훌륭하게 다룰 줄 압니다.”
의견이 일치했다.
가장 오래 산 마족.
마도의 정수를 익힌 자.
그것이 판데모니엄이다.
이런 상황에도 익숙할 터.
반대로 천족은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이대로 승부가 갈리는 건 순식간일 것이었다.
“판데모니엄이 승리하면 어디에 가세하리라 보는가?”
“둘 다 처리하거나, 아니면 우파에게 붙겠지요. 판데모니엄과 우파는 비슷한 경향이 있습니다.”
우파와 판데모니엄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일 테다.
아리엘 디아블로의 저력을!
전생에서 그녀는 승리자였다.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았다.
“그럼 우리는 아리엘 디아블로를 도와야겠군.”
“처음부터 그러실 작정 아니었습니까?”
이 전장에서, 적어도 한 명은 탈락한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리엘 디아블로여서는 조금 곤란하다.
전생에서 승리한 절대자에 대한 예우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그녀와는 마지막에 겨룰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파와 판데모니엄은 까다롭다. 그러니 까다로운 편을 먼저 쳐 내는 게 맞지 않겠는가.
대동한 군세 자체는 얼마 되지 않지만 바람을 약간 틀 정도는 될 것이다. 아리엘 디아블로가 회생할 수 있는 기회 한 차례는 만들어 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장 먼저 보이는 행동이 제일 중요했다.
우파냐, 판데모니엄이냐…….
노리는 목적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터였다.
“우파를 노리십시오. 하쉬는 생각처럼 녹록한 아이가 아닙니다.”
“천족의 지휘 체계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그 정도는 문제가 안 됩니다. 지금쯤이면 하쉬도 난전에 대해 완벽히 파악했을 겁니다.”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닌가?”
“황제 폐하, 타쉬말이 도착했습니다. 그녀가 지금 하쉬의 곁에 있습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스웬의 말이 잠시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타쉬말은 타락했다. 천족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을진대?”
“아주 옆에 있는 건 아닙니다. 그녀는 조금 거리를 두고 조언을 할 따름이지요. 그녀가 기른 천족들을 이용해 메시지를 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쉬는 타쉬말을 매우 잘 따르지 않습니까? 엄마에게 잘 보이려는 아이처럼 열심히 할 겁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요. 물론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겠습니다만, 더 큰 타격은 줄 수 있을 겁니다.”
납득이 되는 듯하면서 되지 않았다.
어쨌든 오스웬은 나보다 전장을 보는 눈이 좋다.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억지를 부리고 홀로 행동하는 건 전생에서 많이 했으니 되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우파를 공략하지.”
결론을 내렸다. 천족들이 더욱 분발하여 판데모니엄을 막는다면 제법 많은 시간이 생긴다. 그사이, 우파의 전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면 나머지는 아리엘이 알아서 할 것이었다.
천족들이 배후를 잡는 걸 대비해 우파는 많은 마수를 뒤쪽으로 물려 놨다. 아리엘의 진영을 둘러싼 상황에서 천족에게 길을 내줬다간 이변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촘촘하기 그지없는 마수의 벽.
나는 그중 가장 약한 곳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제아무리 견고한 벽이라도 틈이 생기면 언제고 무너지는 법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그로기다. 그로기 인피르. 우파 휘하의 마족이며 서큐버스 성애자. 무슨 업적을 달성했는지 서큐버스 퀸마저 소환한 녀석이다.
서큐버스 수천 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본래 서큐버스는 중급 4Lv밖에 안 되는 마수. 그러나 서큐버스 퀸의 영향으로 더욱 강화된 상태였다.
나는 진짜 데스 나이트 30여 기를 앞으로 내세웠다.
나머지, 도플갱어가 변신한 300의 데스 나이트는 뒤쪽에 병풍으로 세워 뒀다. 어차피 싸움에서 크게 도움이 안 된다. 그저 위압감을 주기 위함이었다.
나의 출현으로 서큐버스들이 눈을 돌렸다. 서큐버스 퀸의 가슴을 만지고 있던 그로기도 내게 시선을 주었다.
“허어, 랜달프 브뤼시엘 대공! 성을 지켜야 하지 않나? 성 밖은 너무 위험하니깐 말이야!”
비웃음이 가득한 어조다. 곧 공중에서 그로기와 서큐버스 퀸이 내려왔다.
“이곳이 전망이 좋아 보이더군.”
나는 아랑곳 않고 여유롭게 답했다. 그로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후후! 그럼 얌전히 구경이나 해라. 지금 이 전장에서 네놈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자리가 없다면 만들어야겠군. 오스웬.”
오스웬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예, 황제 폐하.”
“눈앞의 놈을 치울 수 있나?”
“쉬운 일입니다. 대신 서큐버스 퀸은 좀 맡아 주시지요.”
“보통은 반대 아닌가?”
“그편이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스웬이 능글맞게 말했다.
하기야 그로기 인피르 따위를 죽이는 건 격에 맞지 않다. 놈 정도라면 오스웬에게 맡겨도 되겠다 싶었다.
“고작 그 숫자의 마수들을 믿고…… 기고만장하군. 랜달프 브뤼시엘, 방해하겠다면 이 자리에서 네놈을 죽여 주마.”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가장 먼저 입을 잘라 내라. 저 목소리가 너무 역겹군.”
“예, 황제 폐하.”
죽이 잘 맞았다.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에 그로기 인피르의 얼굴이 붉어졌다.
가뜩이나 전장 속에서 며칠을 보냈다. 작은 일에도 흥분하는 건 당연했다.
“오냐, 안 그래도 네놈이 대공의 칭호를 단 걸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진정한 대공은 우파 님뿐이거늘!”
수천의 서큐버스들이 순식간에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