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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223화 (223/242)

던전 사냥꾼 223화

익숙한 외관의 마족이 벽에 등을 댄 채 쓰러져 있었다. 온몸에 피 칠을 하고서!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해진 상태였다.

가슴의 기복이 없는 걸 보면 죽은 것 같기도 하였다.

유은혜 역시 숨을 멈췄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손이 덜덜 떨려 오자 유은혜는 주먹에 힘을 꽉 주었다. 그리고 이어 급히 다가갔다.

‘제발.’

각성자, 그중에서도 최상위를 달리는 그녀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청각은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심장 소리쯤은 들을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느껴지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 삼키며 유은혜가 남자의 가슴팍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두근!

기다렸다는 듯이 심장이 한 차례 크게 경적을 울렸다.

아아!

유은혜가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왜 눈물이 나오는지 이유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막연하게 나오는 것이었다.

동시에 유은혜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어질러진 흔적들.

죽은 마족들.

‘습격이 있었어. 불시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습격을 받고 반격에 나선 게 분명했다. 아무렴, 그는 호락호락한 이가 아니었다. 적들은 결국 잘못된 선택으로 모두 죽임을 맞이했다. 하지만 남자 자신도 상처를 입고 쓰러진 것이다.

‘한 차례로 끝난 게 아니야. 최소 두 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변의 흔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습격을 받았고, 모두 물리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또다시 습격이 있을 수도 있어.’

유은혜는 즉시 남자를 어깨에 멨다. 여기서 지체했다간 둘 다 죽은 목숨이다. 남자는 지쳤고, 유은혜는 마족을 상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바깥은 마수 천지였다. 혼자라면 모르나 둘이서 이동하며 들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안전한 장소에 숨어야 돼.’

지금은 그 수밖에 없을 듯했다.

유은혜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떠올렸다. 갖은 장애물을 넘어 여기까지 도달하지 않았는가. 그 과정에서 가장 안전해 보이던 장소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시계탑.’

시계탑 주변으로는 마수들이 쉽사리 다가가지 않았다.

도박이었다. 그 이유가 그만큼 시계탑이 위험해서라면 둘은 무사하지 못할 터다.

남자를 둘러멘 유은혜가 사력을 다해 지하로에서의 탈출을 시도했다.

유은혜는 이동하는 와중에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니치 천문대의 지도는 몇 번이나 외웠다. 비록 내부가 개조되었다지만 큰 틀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자신이 지나온 길보다 더 빠르고 안전한 길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치료해야 돼.’

남자의 몸은 불덩이 같았다. 한 번 멈췄던 심장이 뛰기 시작하자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 열기가 어찌나 대단한지 유은혜의 등이 뜨끈해질 수준이었다.

만약 열을 감지하는 마수가 있다면 끝장이다. 하늘에 비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유은혜는 최대한 돌고 돌았다. 전신의 모든 감각을 끌어내 마수들의 위치를 알아내고, 마수가 있는 장소는 에둘러서 돌아갔다. 덕분에 시간이 조금씩 지체되고 있었다.

하지만 모험을 걸 수는 없었다. 자신 하나의 목숨이라면 몰라도 남자의 목숨까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안전을 제일로 두고 움직이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시계탑으로 가는 길이 굉장히 멀게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성 내부에는 마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있어도 급이 높은 마수는 아니었다.

스륵. 스르륵.

절반이나 갔을까?

유은혜는 주변의 마력이 심상치 않게 요동침을 느꼈다.

고개를 홱 돌리자 바닥에서 그림자 같은 것들이 올라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저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림자들은 유은혜를 발견하곤 주위를 포위하듯 감쌌다.

좋은 의도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아무래도 이 그림자 역시 마수의 한 종류인 듯싶었다.

‘어쩔 수 없어. 싸워야 해.’

유은혜가 조심스럽게 남자를 내려놓고, 검을 뽑았다. 하지만 검의 날이 상당히 상해 있었다. 에드워드와의 전투로 날이 다 빠진 것이다.

하이 프리스트 자매가 치료해 준 덕분에 체력은 남아 있는 상태지만 무기가 이래선…….

‘이 검으로는 힘들어. 어떡하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그림자들이 일제히 유은혜의 모습으로 변했다.

도플갱어인가?

그런 것도 같지만 조금 달랐다. 일단 도플갱어는 그림자 형태로 남아 있지 않는다. 변신하지 않으면 젤과 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다.

“잠깐 빌릴게요.”

유은혜의 시선이 남자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두 개의 검집. 그 안에서 두 자루의 검을 꺼냈다.

하나는 날이 새까맸고, 다른 한 자루는 보석이 잔뜩 박혀 있는 황금의 검이었다.

비틀!

두 자루의 검을 쥔 순간 유은혜의 몸이 휘청거렸다.

[경고! 분노와 황제의 검이 사용자를 살핍니다. 두 검에는 약한 자아가 깃들어 있어 잘못된 사용자가 사용할 경우 강한 반발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분노와 황제의 검이 사용자 유은혜를 잠시 받아들입니다.]

유은혜는 겨우 자세를 잡았다. 힘을 뺏어 가던 느낌이 전부 사라진 덕이다.

‘에고 소드라니!’

눈이 커다래질 수밖에 없었다. 에고 소드. 말로만 들어 봤지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가지고 있다는 말도 들어 본 적이 없으니 그저 상상 속의 존재일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가 유은혜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자신의 모습을 한 저 그림자들을 제거하고 이동해야 했다. 너무 늦으면 주변의 다른 마수가 합류할 가능성이 높았다.

분신들도 유은혜와 같은 무기를 복사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복사하는 타입의 마수인 듯싶었다.

‘……질 순 없어.’

유은혜는 바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헉! 헉!”

유은혜가 비지땀을 흘렸다. 입에선 단내가 났다. 세상이 빙그르르 도는 듯 어지럽고, 당장에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유은혜는 필사의 의지로 발을 옮겼다.

저 그림자들은 집요했다. 벌써 몇 번이나 부딪혔지만 도무지 포기할 줄을 몰랐다. 덕분에 걸음이 지체되었고, 한참이나 빙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편해질 방법은 안다.

남자를 포기하면 된다.

저 그림자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남자였다.

버리고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추격을 멈출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래선 안 된다고, 심장이 외쳐 댔다.

벽을 짚으며 일어났다. 슬쩍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피에 절어 쓰러져 있음에도…… 왜인지 편안해 보이는 얼굴. 지금의 상황을 알기는 하는 걸까?

그러나 남자는 평소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냉혈한, 그저 상대를 미워하기만 하는 존재는 결코 이런 얼굴을 할 수 없다.

마치 아기와 같이 순수하지 않은가.

유은혜의 입가가 씰룩였다.

유은혜는, 아무리 가면을 써도 사람의 자는 모습에서 그 본성이 나타난다고 믿었다.

누구나 자신의 자는 얼굴을 모르는 법이니까. 가면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조금만 더 참으세요. 이제…… 곧이니까.”

때마침 시계탑이 보였다.

앞으로 조금. 백여 걸음만 더 걸어가면 시계탑 안으로 진입할 수 있으리라.

희망을 안고서 유은혜가 움직였다. 하지만 멀리 가지 못했다.

스륵. 스르륵.

그림자들이 다시금 등장한 탓이다.

유은혜는 진절머리를 쳤다.

죽여도, 죽여도, 어디선가 계속해서 나타난다. 이건 숫제 저주였다. 대상을 말살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

유은혜가 다시 검을 들었다. 쌍검술에 익숙하지 않음에도 몸에 익어 있었다. 정확하게는…… 두 자루의 검이, 검로를 알려 주는 느낌이었다. 여기선 이렇게 검을 사용해야 한다고, 이렇게 움직여야 한다고 속삭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동작은 평소 남자가 행하던 검술과 매우 닮아 있었다.

[‘검의 흐름(U, Passive)’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힘과 민첩이 2씩 상승합니다.]

[검의 소리에 더욱 민감해집니다.]

메시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유은혜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조용히 자세를 잡았다. 전보다 조금 더 유연해진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저 그림자들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촤악!

유은혜의 모습을 한 그림자들이 사방을 포위한 채 발을 움직였다. 유은혜는 가장 먼저 다가오는 분신의 허리를 끊었다.

밟고 없애며 유은혜는 곧 피로함을 잊었다. 오로지 그림자를 죽이는 데만 치중했다. 그 외의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무아지경(EX U, Passive)’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씩 상승합니다.]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들었을 때 모든 능력치가 5씩 추가로 상승합니다.]

남자의 움직임을 익히고 따라 한 덕일까? 아니면 두 자루의 검이 길을 알려 주는 이유일까. 메시지는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유은혜의 시선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털썩!

이윽고 그림자들을 모두 물리친 유은혜가 바닥에 쓰러졌다.

체력이 다한 것이다. 한 톨 남은 체력마저 사용하여 손가락 하나 꿈쩍할 여유가 없었다.

‘이제 다 왔는데…….’

의식이 점점 흐릿해졌다. 유은혜는 최대한 손을 뻗어 남자의 손을 잡았다. 이대로 그림자가 다시 한번 습격해 온다면 그다음 일은 안 봐도 뻔했다.

죽음.

자신의 목숨보단, 남자를 살리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때였다.

“룰~ 루루룰~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이히가 제일 예쁘지? 네~ 이히 님이 세상에서 제일루 이쁘셔요! 어머, 정말이니? 이히히!”

손거울 하나를 들고 시계탑을 나선 작은 요정이, 유은혜를 보곤 눈을 방울 만하게 떴다.

“응? 못생긴 여자애! 하고…… 헉! 마스터!”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요정이 경악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 * *

판데모니엄은 집요했다. 홀로 조용히 있을 때 가장 유의해서 지켜봐야 했거늘. 그러지 못한 게 내 치명적인 실수였다. 덕분에 수차례 기습을 맞고 상처를 입으며 탈진해 버렸다.

그만큼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지만 이만큼이나 준비한 걸 보면 판데모니엄도 내 무력에 대해선 어느 정도 인정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의식이 날아간 다음부턴 모든 게 희미했다. 언뜻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지만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스터! 마스터! 엉엉! 이히를 버려두고 죽지 말아요.”

“아이고~ 꺼이꺼이! 마스터가 가시면 이히도 따라 죽을래요!”

“으어어어어엉! 으어어어어어엉! 크흐흐흥!”

귀가 아팠다.

누군가가 옆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시끄럽다.”

“훌쩍! 훌쩍! 패에에에엥…… 마스터?”

옷깃에 콧물을 털어 내던 이히를 손으로 밀쳐 냈다. 잠시 인상을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지막으로 본 배경과는 전혀 다른 장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히, 이곳은 시계탑인가?”

“예, 이히가 옮겼어요. 그리고 그 나쁜 기집애는 이히가 묶어 뒀어요.”

이히가 언제 울었냐는 듯 허리에 손을 얹었다.

“누가 있었나?”

“그 있잖아요, 못생긴 기집애. 이히의 기억으론 이름이 유 어쩌구였어요.”

유라는 글자 하나만 가지고 추리를 하기엔 부족한 감이 많지만 나는 곧 그게 ‘유은혜’임을 확신했다. 꿈결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유은혜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유은혜는 어디 있지?”

“저~ 옆방예요. 이히가 꽁꽁 묶어 뒀어요. 저 나쁜 기집애가 마스터를 습격한 거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향했다. 방을 나서자 오스웬이 문 앞을 지키며 서 있었다.

“황제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돌아왔군.”

“요정님에게 급히 돌아오라는 전갈을 받아서 말입니다. 그나저나 판데모니엄이 지독한 수를 썼나 보군요. 황제 폐하를 이 정도로 몰아넣다니…….”

오스웬은 나를 몰아넣은 상대가 판데모니엄이라고 이미 결정짓고 있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주억이며 옆 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유은혜가 발가벗겨진 채 허공에 쇠사슬로 결박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정님이 착각하곤 우기셔서. 저로선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스웬이 씁쓸하다는 기색을 비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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