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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224화 (224/242)

던전 사냥꾼 224화

아무래도 내가 기절한 데 유은혜가 크게 일조했다고 이히는 착각하고 있는 듯싶었다. 그래서 혹시 몰라 유은혜를 저렇게 결박해 놓은 것이다.

나는 작게 혀를 차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일일이 쇠사슬을 풀었다. 바닥에 떨어지려는 유은혜를 붙잡고, 눕혔다.

이후 마법 주머니에서 물약 하나를 꺼냈다.

엘릭서!

죽지만 않으면 살릴 수 있다는 희대의 물약.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선까지라는 걸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판데모니엄의 기습이 있고 엘릭서를 마셔 봤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던 탓이다.

내가 초월자가 된 것과 엘릭서의 효과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내겐 효과가 없으니 딱히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다. 나는 거리낌 없이 유은혜의 입가에 엘릭서를 부었다.

“콜록!”

유은혜가 기침을 하며 정신을 찾았다. 그러나 나는 엘릭서를 들이붓는 걸 멈추지 않았고, 유은혜는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그것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근원이 많이 상했군.’

이곳까지 오며 근원의 마력까지 몽땅 사용한 것 같았다. 엘릭서라면 그 근원의 마력을 상당히 회복시켜 줄 것이었다.

엘릭서를 모두 붓고는 유은혜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마력의 순환을 돕기 위함이다. 텅 빈 장소에 억지로 마력이 채워졌으니 부작용이 날 가능성이 컸다. 하여 내가 마력을 부드럽게 감싸 주고 반죽해 줄 필요가 있었다.

1시간가량을 그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이후 적당히 덮을 것을 내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라. 이곳은 네가 있을 장소가 아니다.”

“저…….”

유은혜가 뒤에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왜 다시 돌아온 것인지 솔직히 이해도 되지 않았다.

이윽고 나는 방 밖에서 오스웬에게 눈길을 줬다. 오스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웬이라면 유은혜를 경계의 바깥까지 어련히 잘 데려다줄 것이다.

‘내 마력도 얼추 회복되었군.’

목을 양옆으로 한 차례 움직였다. 뼈 소리가 나며 근육이 풀렸다.

그 뒤 황제의 검과 분노를 챙기고 시계탑을 내려갔다.

“마스터, 몸을 더 추슬러야 돼요!”

이히가 즉시 따라붙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전황을 살펴야겠다.”

내가 쓰러지고 하루가 더 지난 듯싶었다. 그사이 양상은 크게 변해 있었다.

우선, 아리엘 디아블로가 우파 블레넌의 뒤를 완벽하게 잡았다. 무슨 뜻이냐면 내가 만들어 놓은 빈틈을 용케 알아차리고 우파의 군세를 반으로 쪼개 버린 것이다.

판데모니엄과 천족의 전투도 마찬가지였다. 판데모니엄은 상당수의 전력을 내게로 돌렸고, 거의 성공할 뻔했다. 전력에 구멍이 났고, 하쉬가 포착하여 역공을 가했다. 덕분에 전장은 더욱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판데모니엄도 기습이 실패했음을 알게 되었겠지.’

쉐도우 헌터는 집요했다. 별것 아닌 마수지만 숫자가 많아지자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게다가 개조된 마족들은 재생 능력이 극대화되어 좀처럼 죽지를 않았다.

모두 멸하는 데 성공했지만 나도 그만한 타격을 입었다.

쓰러진 나를 데려온 게 유은혜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에 따른 고마움은 별로 없었다. 왜 사지로 되돌아온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 것이다.

‘머지않아 승패가 갈릴 것이다. 그 틈에 희망을 터트린다.’

승리를 확신할 때가 가장 방심하게 되는 순간이다. 패자는 다른 데 신경을 쓸 수가 없다. 그러니 그사이 희망을 터트린다면 최대의 피해를 입힐 수 있을 터.

판데모니엄의 기습은 끝났다. 그는 현재 천족을 막는 데도 급급했다. 나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면 반 이상 목적을 이룬 것이겠지만 실패했으니 앞으로 판데모니엄이 건질 건 그다지 없었다.

줄어든 군세로는 우파나 아리엘조차 잡아먹지 못한다. 지리멸렬한 미래뿐이 기다리지 않았다.

‘판데모니엄, 네놈은 나를 노리면 안 되었다.’

만약 그만한 전력을 그대로 놔두고 천족을 상대했다면 오늘 벌써 승패가 갈렸을 수도 있었다. 판데모니엄의 압도적인 승리로 말이다. 그렇다면 더욱 많은 이득을 취했을 게 분명했지만 실패했으니…… 후회해 봤자 늦다.

나는 다시 지하로 향했다. 더는 습격이 없으리란 확신을 가지고서.

* * *

다시 밤하늘에 달이 떴을 때 승패가 갈렸다.

“크흑!”

아리엘 디아블로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입가에 혈선이 그려졌고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우파도 비슷한 모습이긴 했지만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

“비겁한 놈!”

아리엘은 이를 갈았다. 길을 뚫고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역시나 숫자의 절대적 차이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여태껏 어찌 버티던 은색의 기사들이 단번에 쓰러졌다. 그 틈으로 마수들이 몰려와 아리엘을 협동하여 공격했다.

자고로 숫자 앞에 장사 없는 법이다.

아리엘은 강했지만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우파와 마수들이 더해지자 체력의 소모가 극심했다. 결국 우파는 아리엘을 무릎 꿇리는 데 성공했다.

“허억…… 빌어먹을 년, 이 역시 나의 힘이거늘. 비겁을 운운해?”

실상 우파의 상태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아리엘이 약간 앞서는 상태로 몇 날 며칠을 싸웠고, 그간 상처가 누적된 탓이다. 그래도 최후에 서 있는 자는 우파였다.

물론 엄청난 피해를 입긴 했다. 수십만의 마수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고작 5만 안팎이나 될까? 휘하 마족도 상당수 잃었다.

“깔끔하게 죽여 주마. 우리의 악연을 끝낼 때가 되었다.”

우파와 아리엘은 마계에서부터 사이가 지극히 안 좋았다. 지금, 드디어 그 악연의 사슬을 끊을 때가 된 것이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우파의 입가에서 웃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리엘은 애써 일어나 상아검을 들었다. 대동한 대부분의 마수와 휘하 마족이 죽었다. 몇몇은 탈출시킬 수 있었지만 아리엘은 빠져나갈 수 없었다. 다른 놈들이 탈출해도 신경 쓰지 않고 우파가 아리엘만큼은 집요하게 노려 왔기 때문이다.

빠져나가긴 힘들 듯했다. 그래도 싸우다가 죽는다면 조금은 낫다.

마왕의 적통.

진정한 마왕의 피를 지닌 그녀이지만 언제나 승자일 수는 없었다.

“무기를 들어라, 우파 블레넌. 우리가 대화를 나눌 만큼 친한 사이였던 건 아니지 않나?”

아리엘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우파는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끝까지 입만 살아서는……. 오냐, 그렇다면 세상에서 제일 참혹하게 죽여 주마.”

우파가 태풍을 소환했다. 검은 구도 수십 개를 나열했다. 한 번에 모든 걸 걸어서 끝장을 내겠다는 태도였다.

이윽고 둘은 부딪혔다.

그리고…… 부딪치는 동시에 온 세상이 하얀빛에 휩싸였다.

판데모니엄은 천족의 본진을 공격했다. 난전으로 끌고 가기엔 병력이 부족했고, 단번에 적의 기지를 쓸어버리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하지만 천족의 본거지라 여긴 장소엔 피라미들뿐이 있지 않았다. 좌천사는 자신이 죽였으나 가장 중요한 지천사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를 간 거지?”

판데모니엄이 인상을 구겼다.

자신이 오리라는 걸 알아차렸나?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계획은 완벽했다. 아주 조금씩 마수를 빼내 눈치채지 못하게끔 포위했다. 먼저 알아차리고 빼내는 건 미래를 읽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빠질 계획이었나?

대체 왜?

무슨 이유로?

판데모니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지천사뿐만이 아니라 주요 천족들 또한 보이지 않았다. 계급이 높은 천족들만 자리를 내뺐다는 말. 보통 이런 경우는 패배가 확정되었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천족은 대등했다. 크게 밀리지 않았다.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었거늘, 벌써부터 발을 뺄 필요가 있단 말인가?

고심의 고심을 이어 갔다.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왜 그랬는지를 알게 되었다.

세상이 환해졌다. 백색의 마력이 주변을 좀먹었다. 이 느낌…….

‘빠져나가야 한다!’

본능이 경고했다.

위험하다고!

이 흰색의 빛은 결코 정상적인 게 아니라고!

그러나 이미 한발 늦었다.

빛은 순식간에 그리니치 천문대 반경 천수백 킬로를 좀먹었다.

* * *

나 역시 폭발에 휩쓸렸다.

내가 미리 발을 빼지 않은 이유는…… 대공들을 이곳에 꽁꽁 묶어 두기 위함이다.

그들은 시계탑을 중점으로 감시의 눈을 깔았다. 내가 이곳에 있는 걸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니치 천문대를 벗어났다간 위험을 느낀 대공 중 누군가가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그물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선 내가 필요했다.

변신을 시킬 수도 있겠지만 판데모니엄이 나를 습격한 걸 보고 깨달았다. 그 정도로 속아 넘어가진 않을 터였다.

위험한 도박.

나는 그리니치 천문대에 설치한 마력 증폭의 진 위에 희망을 설치했다. 폭발의 범위가 두 배 이상 넓어지고 파괴력 역시 강해진다는 계산이 나왔다. 말인즉, 어지간한 마수와 마족은 휩쓸린 즉시 분해되어 소멸된다는 의미다.

‘보다 확실을 기하기 위해서지.’

그냥 희망을 터트리면 범위가 좁다. 이동 스크롤을 통해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었다. 파괴력도 생각만큼 안 나와서, 상상 이상으로 많은 숫자가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도박을 건 것이다.

언제나 모험은 필요한 법이었다. 나는 중요 마수들을 일제히 대피시키고, 이히도 던전으로 복귀시켰다. 희망의 폭발이 이히에게도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이윽고 폭발이 일어났을 때 나 역시 전장에 있었다.

대공들은 갑작스러운 흰색의 빛이 세상을 좀먹자 우뚝 멈춰 섰으며 그게 끝이었다. 피부가 녹아내리듯 조금씩 분해되기 시작했다. 대공이나 공작쯤 되면 위험을 느끼고 재빨리 방어할 방법을 궁리하여 펼쳤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눈 깜빡할 사이에 재가 되었다.

‘대단하군.’

내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계산이 틀린 건가?

마력을 대부분 회복했음에도 희망의 폭발력은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었다.

내 피부도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폭발의 여파로 많은 숫자가 살아남지는 못할 듯싶었다.

나는 다른 이들보다 희망에 가까이 위치해 있었는지라 그 여파가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나도 조금은 위험한 것 같았다.

* * *

유은혜는 저 멀리서 터지는 백색 섬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무사할 것이오.”

그 바로 옆에 오스웬이 있었다.

둘은 백치호를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반나절 이상을 이동해 겨우 폭발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요. 다시…… 돌아가면 안 될까요?”

“폐하께선 내가 그대를 본래의 장소로 데려다주길 바라셨소. 나는 그 명령을 따라야만 하는 입장이지.”

오스웬은 점잖게 말했다.

비록 지금은 끔찍한 마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전에 그는 인간이었다. 철을 다루는 조금 솜씨 좋은 대장장이 말이다. 운 나쁘게 나락 군주의 눈에 띄어 이러한 모습이 되었지만 그래도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참으로 멍청한 여인이군. 왜 다시 돌아왔소? 황제 폐하를 데려다준 건 고맙지만 그대는 인간이 아니오?”

“그가 말했어요. 자신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그 희망이 제가 생각하는 희망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돌아왔어요.”

유은혜는 지체 없이 말했다.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생각한 대답이다.

그러자 오스웬은 잠시 입을 닫았다. 그러곤 조심히 열었다.

“그 희망이 맞는 것 같소?”

“예, 그런 것 같아요. 그가…… 우리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에요. 아무도 몰라주겠지만.”

“허, 황제 폐하의 진면목을 알고도 그리 생각하는 인간은 그대가 유일할 거요. 그럼 앞으로 어쩔 셈이오?”

“모르겠어요. 지금은 모든 게 혼란스러워요. 다만 주변이 적밖에 없는 그가 너무 가여울 따름이에요.”

유은혜는 남자를 동정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오스웬은 어이가 없었다. 이 여자가 미쳤다고밖엔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황제 폐하의 곁에 있는 건 어떻겠소?”

“예?”

“노예의 인장을 찍으시오. 그리하면 황제 폐하는 그대를 온전히 신용하게 될 것이오.”

오스웬으로선 막 던진 말에 불과했다.

실제로 오스웬이 황제 폐하라 부르는 남자 랜달프 브뤼시엘은 그러한 계약이 있어야만 조금이나마 마음을 터놓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는 편이 확실하기 때문이리라.

“……알겠어요. 그러도록 하죠.”

“후회할 텐데.”

“제가 있으면 그가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거예요. 사람들에게도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겠죠.”

“허! 완전 천재적인 발상이로군. 너무 천재적이라 엽기적이기까지 해.”

오스웬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자 유은혜가 힘겹게 미소를 띠었다.

“그는 괜찮겠죠?”

“믿으시오.”

오스웬은 간결하게 답했다.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곧, 폭발이 멈추고 백색의 빛이 저 멀리서 걷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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