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225화
* * *
귀가 멍했다. 감각도 얕았다. 시야는 흐릿했으며 전신이 따끔거렸다.
폭발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마력이 증발해 버렸군.’
고개를 저었다. 겨우 회복한 마력이 지금은 채 2%도 남지 않았다. 이 정도면 육체를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아슬아슬하다.
그만큼 육체를 지키는 데 들어간 마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방증이다. 물론 그 전부터 마력의 잔여량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의 경관을 살폈다.
대지 곳곳에 분화구가 생겼다. 깊게 파인 곳, 낮게 파인 곳,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하늘의 구름은 전부 걷혔고, 궤적 같은 것만 남아 있었다.
마수들은 증발했다. 뼈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많던 시체들도 모두 사라졌다. 그중에는 적지만 최상급 마수도 섞여 있는 듯싶었다.
‘대단하군.’
혀를 찼다.
상상 이상의 파괴력이다.
지형이 바뀌었고, 살아남은 이는 나 혼자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대단한 파괴력이지만 온전히 대공을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휘하 마수나 마족들을 멸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공작쯤 되었다면 충분히 육체를 지킬 수 있었다.
물론 본래의 상태가 멀쩡하다는 가정하에.
나는 분화구를 딛고 올라왔다. 내 육신은 가장 깊은 낭떠러지에 위치해 있었다. 녹아내린 대지가 지금도 뜨거웠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하였다.
‘마법 주머니가 먹통이 됐나.’
도움이 될 만한 아이템을 꺼내고자 마법 주머니에 손을 가져갔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폭발이 일어나며 마법적 조치가 취해진 아이템들이 잠시 먹통이 된 듯싶었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내저으며 걸었다.
치익. 치이익.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이 녹아 들어갔다. 마치 용암처럼 대지가 불타며 녹고 있었다.
촤아아악!
분화구를 거의 올라왔을 즈음이었다.
무언가가 날카로운 것에 베이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데구루루!
곧 분화구로 떨어진 그것은 누군가의 머리였다. 내게도 익숙한 존재.
대공 우파 블레넌의 머리였다.
머리가 잘린 채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분화구에 전부 올라, 나는 우파 블레넌을 처리한 이를 바라봤다.
“빌어먹을 놈.”
욕지기와 함께 바닥을 차는 누군가가 있었다. 내 예상대로 아리엘 디아블로였다. 그녀의 주변으로는 수백 마리나 되는 마족과 마수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희망으로부터 살아남은 강자들을 그녀가 모두 죽인 것이었다.
마력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서, 순수한 육체의 힘으로 이뤄 낸 성과였다. 과연 웨폰 마스터. 모든 무기를 다루는 병장기의 달인다웠다.
“랜달프 브뤼시엘, 내게 용무가 있느냐?”
아리엘 디아블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자랑스러운 뿔의 3분의 1가량 잘려 나갔고, 어깨에 누가 후벼 판 듯 깊게 베인 상처가 있었다. 배 한쪽엔 창이 꽂혀 있었다.
누가 봐도 한계에 달한 모습이다. 지금 내가 검을 들고 아리엘 디아블로를 공격한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끝장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도 그것을 안다. 나 역시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지만 그녀는 더욱 심각했다.
“지금이라면 어렵지 않게 끝낼 수 있겠지. 나도 당해 주고 있지만은 않겠다만…… 내 휘하의 다른 마족들이 이곳에 당도하기 전까지 끝내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친 야수는 건들지 말라고 하더군.”
가능성은 높지만 나도 마력을 거의 상실했다. 게다가 순수한 검술 실력에서 그녀는 나보다 몇 수 앞서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상처를 크게 입었다간 나도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아리엘 디아블로는 약화될 것이다. 자연적으로 치유되기엔 상처가 너무나 많았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쓰러지거든 죽여도 늦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보다 그녀의 원군이 빠르게 도착할 것이었다. 그리니치 천문대에 가장 먼저 입장한 게 그녀이지만 그녀의 휘하 마족이나 마수는 띄엄띄엄 도착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하여 한 번에 들이지 않은 듯싶었다.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
“후후, 생각보다 너는 겁쟁이인 것 같구나.”
“멀지 않은 시기에 너와 정상적인 환경에서 맞붙을 날이 올 것이다. 굳이 확실하지 않은 일을 재촉하고 싶지는 않을 뿐이다.
“그런 것을 겁쟁이의 변명이라 하지.”
대놓고 도발이었다. 그녀도 태생적으로 약한 소리를 못하는 마족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대도 본능은 어쩔 수가 없었다.
피식 웃으며 나는 아리엘 디아블로의 눈을 바라봤다.
“마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지?”
이것만큼은 알아야겠다. 대공들이 본래 모인 이유. 갑작스러운 천족의 침입과 전투로 일이 어그러졌지만 그 경위를 듣고 싶었다.
아리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한 방 맞은 듯 작게 미소 지었다.
“네놈, 이제 보니 네놈에겐 특수 퀘스트가 전달되지 않은 것이냐?”
“비슷하다고 해 두지.”
“하하! 쿨럭……! 제대로 한 방 맞았군. 오냐, 특별히 알려 주마. 지금 마계를 휘젓고 다니는 아주 흉흉한 놈이 하나 있다고 했다.”
“너희 대공들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녀석인가?”
“내 세력의 절반은 놈에게 먹혔다고 들었다. 우파도, 판데모니엄도…… 마계에 존재하는 오쿨루스의 세력은 완전히 궤멸되었지.”
뭐라고?
나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미간만 찌푸린 채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계에 그만한 세력이 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이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마계는 본래 네 등분 되어 있었다. 아리엘, 우파, 판데모니엄, 오쿨루스가 대공으로서 마계를 정확히 네 등분하는 중이었다.
그런 상태만 수백, 수천 년을 이어 왔다.
한데 고작 몇 년 자리를 비웠다고 저만한 타격을 받는다?
말도 안 된다. 불가능한 일이다.
“세력조차 아니니라. 놈은 단 하나에 불과하다.”
“하나? 신이라도 된다는 건가?”
“아주 먼 과거 신이 되려고 했던 자이지.”
아리엘은 침착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 그럴 수 있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내가 인상을 구기자 아리엘이 피식거리며 이어서 말했다.
“랜달프 브뤼시엘, 네놈은 그림자 황제를 아느냐?”
그림자 황제.
나락 군주.
그를 부르는 여러 가지 수식이 있지만 아리엘의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리엘은 살짝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나도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 그저 퀘스트의 내용에 그러한 것들이 쓰여 있었을 뿐이지. 하지만 그림자 황제라면 조금 알고 있노라. 그리고 마계에 그림자 황제가 진실로 존재한다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게 되겠지.”
아리엘은, 아리엘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공들도 그림자 황제를 알고 있는 듯싶었다. 그의 무서움을 알기에 바삐 행차한 것이다. 아니었다면 이처럼 빠르게 모여들었을 리가 없다.
과연 그런 이유였나.
나는 잠시 다크 엘프 하이어 쉴라를 떠올렸다. 본래 크리슬리의 친모인 그녀이지만 동상이 된 채 마계 옥션에 나타났다. 얼음으로 꽁꽁 싸여 있었고, 강력한 저주의 마력이 느껴졌다. 천하의 오스웬도 아직 그 얼음을 녹일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러면서 내가 가진 마력과 흡사하다는 소리를 늘어놨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자 황제의 그것과 굉장히 비슷한 힘이었다. 그로 인해 그림자 황제가 마계에 있을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해 보기도 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이미 죽은 자가 어찌 마계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아리엘은 마계에 그가 있다고 말한다. 나락 군주가 마계에서 대공들의 세력을 집어삼키며 힘을 기르고 있다는 것이다. 쉽사리 믿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림자 황제, 나는 놈을 본 적이 없다만 판데모니엄이라면 봤을 수도 있을 터다. 어쨌거나 그 이상으로 오래 산 마족은 마계에 없으니 말이다. 언제고 판데모니엄은 ‘필멸자 중 가장 강한 자는 그림자 황제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대공들 모두가 달려들어도 겨우 맞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며.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그가 인간임을 알고 무시했지. 어차피 신들에 의해 처형당해 볼 수 없는 자이니. 그러나…… 기억하고 있었다. 다름이 아닌 판데모니엄이 누군가를 인정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노라. 어찌 기억하지 못할 수 있을까.”
“그래도 납득이 되지 않는군. 놈이 설령 되살아났던들 어찌 마계를 혼자 접수할 수 있지?”
나락 군주가 준비한 힘.
지저 세계는 내가 이어받았다.
놈의 보물 창고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그가 무슨 세력이 있어서 마계를 홀로 주무를 수 있겠는가.
신이라도 되지 않는 한, 설령 신이 되더라도 의아할 정도였다.
“특수 퀘스트엔 앞으로 1년 이내에 마계가 점령당할 것이라 했노라. 우리는 게임에 참가했고, 마계의 상황을 알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처지였지. 오로지 너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문제를 해결할 열쇠?
마계로 돌아간다는 그런 뜻인가?
어쩐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를 통해 마계로 올라가 그림자 황제를 막으란 퀘스트가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끝난 일이지. 내 주력 부대를 잃었고, 우파는 죽었으며 판데모니엄도 정상은 아니다. 그리고 판데모니엄의 말이 사실이었다면 놈은 이제 그림자 황제를 막으려 들지 않을 터. 나 혼자 놈을 막기는 역부족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이곳에서 힘을 기르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대충 알아들었다. 아무래도 아리엘 디아블로는 그 방향으로 노선을 정한 듯싶었다. 네 명의 대공이 모든 마수를 이끌고서 마계에 도착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지금은 가 봤자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후후, 그러니 지금 당장 나를 처리하지 않으면 훗날 아주 귀찮아질 것이다.”
“귀찮기로 따지자면 판데모니엄이 위다.”
턱을 쓸며 시선을 옮겼다. 판데모니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죽었을 것 같지는 않고, 먼저 빠져나간 듯싶었다.
놓쳤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를 습격한 놈의 면상에 칼침을 꼽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그건 그렇겠군.”
아리엘 디아블로도 동의했다. 아무리 귀찮아 봐야 판데모니엄만 못할 것을 인정하는 모양새다. 하기야 우파 보다 어떤 의미로 귀찮은 게 판데모니엄이다. 놈은 능구렁이였다.
나는 등을 돌렸다.
아리엘이 이곳에서 죽을 것 같지는 않았고, 그녀의 휘하 마족이 이곳에 당도하기 전에 먼저 빠져나간 판데모니엄이 손을 쓰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상책이었다.
‘우파가 죽은 걸 판데모니엄이 알고 있다면 바로 움직이겠지.’
여기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나는 이미 우파의 던전을 야금야금 먹는 중이었으나 여기에 판데모니엄이 합세하면 일이 귀찮아진다.
일을 더욱 빨리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나락 군주, 그림자 황제라…….’
길을 걸으며 마계에 있을 놈에 대해 생각했다.
소멸된 줄 알았다. 심장 역시도 내게 있었다. 지금도 빠르게 뛰는 이 심장은 누가 뭐래도 나락 군주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놈은 진짜 나락 군주일까?
아니면 누가 나락 군주의 행세를 하는 걸까?
‘1년.’
특수 퀘스트엔 1년이라 명시되어 있었다. 그 안에 내가 마왕이 되어 마계로 돌아간다면 놈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니면…… 놈이 이곳으로 오는 경우의 수도 조금은 생각해 둬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