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226화
쟁탈전의 서막이 열렸다. 대공 우파의 부재는 다른 이들에게 커다란 기회를 제공했다. 약해진 세력을 보강하고, 우파가 이룩한 업적을 가로챌 절호의 기회.
나는 누구보다 발 빠르게 움직였다.
막시움을 필두로 우파의 던전을 휩쓸었다.
무작정 집어삼키면 관리하는 데 문제가 생기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아리엘이나 판데모니엄이 우파의 던전을 차지하는 것보단 관리가 허술해도 내가 갖는 게 훨씬 나았다.
세 대공은 간간이 부딪치며 우파의 던전을 차례차례 지배해 나갔다.
인간들도 대대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파의 부재를 그들 역시 아는 듯싶었다. 보다 많은 각성자를 준비하고 던전 하나를 정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던전 코어…… 인간들에게 있어선 굉장히 유용한 에너지원이다. 그리고 던전 하나가 사라졌다는 건 새로운 영웅이 한 명, 어쩌면 그 이상 출현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던전에 인간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부산물은 차고 넘쳤다.
하지만 인간의 활동이야 내가 크게 신경을 안 써도 될 부분이었다. 내가 바라는 건 남은 대공들이 우파의 던전을 흡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인간들이 던전을 파괴하면 그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일치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여, 나는 한국의 각성자들을 부추겼다. 기린과 성군으로 정해진 ‘에드워드 윈저’를 필두로 던전 정복에 나서게 만들었다. 성군이 정해지며 얻은 칭호와 버프는 에드워드 윈저를 인류 최강의 각성자로 추켜세웠다.
한국은 세계의 어느 인류 국가보다 안전했고, 강자가 많았다. 몬스터 웨이브 또한 그다지 일어나지 않았으며 안정적으로 던전에서 자원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에드워드가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하자 그로 인해 해외의 수많은 난민들이 한국으로 들이닥쳤다.
희망이 터지며 인류는 진정으로 희망을 얻었다. 그중 가장 주목받는 게 한국이었다. 한국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하고 성장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판데모니엄을 압박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 * *
아프리카에서 아시아까지가 판데모니엄의 주 무대였다. 대부분의 휘하 마족들이 이곳에 존재했고, 탄탄한 성처럼 세력을 굳세게 지탱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강력한 유대, 우월한 정보력으로 아프리카에서 아시아까지 모든 영역을 거미줄마냥 엮어 놨다.
북아메리카를 차지한 아리엘 디아블로와 남아메리카를 차지한 우파 블레넌이 피 튀기는 전쟁을 벌일 때 그는 유유자적 힘을 쌓을 수 있었다.
아리엘과 우파의 싸움이 끝이 나면 그가 새로운 강자로서 부상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과거의 이야기다.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그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본래 가진 군세의 절반에 해당하는 손실이었다.
우파는 죽었고, 아리엘의 피해는 그다지 막심하지 않았다. 하여 희망의 여파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게 판데모니엄이었다.
그리고 아프리카 이집트는 판데모니엄의 휘하 마족 중 가장 세력이 강성한 공작 베일라가 주둔하는 곳이었다.
그리니치 천문대에 대공들이 모일 때 참여하지 않은 마족 중 하나이기도 했다. 혹시 몰라 후방에서의 지원을 맡았던 것이다.
당연히 공작 베일라는 판데모니엄의 세력 중 가장 강한 힘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이집트. 모래바람만 휘날리는 너른 대지.
크리슬리가 내 발치에 엎드려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나는 시선을 들었다.
10만에 달하는 마수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렬해 있었다.
모든 포인트와 업적 점수를 아끼지 않고 사용한 결과였다.
본래 이 두 배에 달하는 군세를 가지고 있지만 나머지는 던전을 지키거나 막시움에게 배정해 주었다. 우파의 던전을 차지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리슬리의 곁에 3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인간과 흡사한 외견을 가진 대머리 마수가 있었다.
‘진화된 호문쿨루스.’
구스타르테를 연구하며 실마리를 잡은 가파람의 결과물이다. 신의 육체를 직접 재조명함으로써 가파람의 생명 마도 실력은 몇 수나 상승했다. 그가 만든 이 결과물 역시도 웬만한 최상급 마수를 씹어 먹을 정도로 강력했다.
재료와 시간이 들어가 대량 생산은 하지 못하지만 이런 마수가 조금만 더 추가된 대도 상당한 힘이 되어 줄 터였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말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고개를 주억였다.
크리슬리가 끝났다고 한다면 정말로 끝난 것이다.
나는 진홍빛의 망토를 휘날렸다. 이어 마수들의 사이를 유유자적 걸어갔다.
쿵. 쿵. 쿵.
말은 필요 없었다.
크리슬리를 비롯한 10만의 마수가 조용히 나의 뒤를 따랐다.
연이은 승리가 계속되었다. 판데모니엄, 놈은 수비에 급급했다. 아리엘 디아블로마저 약속이라도 한 듯 판데모니엄을 압박했으니 아무리 그라도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판데모니엄의 휘하 마족이 가진 던전 절반 정도를 지배한 시점이었다. 내 군세는 20만에서 28만으로 늘어났고, 상급 이상의 마수도 천을 넘겼다.
나는 여기서 한 차례 숨 고르기를 시도했다. 군세를 재정비하며 그간 미뤄 논 일들을 처리하고자 다짐한 것이다.
오랜만에 한국의 던전으로 돌아온 이후 마법 주머니에서 나는 다섯 개의 조각을 꺼냈다.
크리슬리, 타쉬말, 하쉬, 유은혜, 에드워드 윈저가 고급 수련의 방에서 하나씩 가져온 물건들. 그것들은 하나의 퍼즐처럼 나뉘어 있었다.
나는 나눠진 퍼즐 조각을 하나로 모았다.
[균형의 조각, 깨달음의 조각, 성장의 조각, 믿음의 조각, 용맹의 조각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해석 중…….]
[다섯 개의 조각은 다섯 가지 균형을 의미합니다.]
[해석 중…….]
[조각이 합쳐지며 하나의 씨앗으로 변형됩니다.]
[‘창조의 씨앗’을 획득했습니다. 창조의 씨앗은 진정한 ‘신’의 자격을 얻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입니다. 씨앗에서 태어난 종족은 모두 씨앗의 주인에게 귀속됩니다. 창조자는 그들의 신이 되고 그들을 이끌 책임을 갖게 됩니다.]
턱을 쓸었다.
‘창조의 씨앗이라.’
예상외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이내 납득했다.
이것은 나락 군주가 의도적으로 ‘숨겨 놓은’ 아이템이리라고.
자신이 부활하며 신위를 얻었을 때 오로지 자신만의 종족을 창조할 생각조차 그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신으로서 거듭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얇게 미소 지었다. 당장은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신의 격을 갖는 데 필요한 아이템이라니. 이런 게 있다는 것도 지금 처음 알았다.
‘근원의 나무.’
그때 불현듯 근원의 나무가 떠올랐다. 근원의 나무는 내가 자격을 갖추길 바라고 있었다. 나를 시험하고 그림자를 내보이며 나 스스로가 완벽해지길 바랐다.
완벽!
완벽이란 무엇인가?
흔히들 진정으로 완벽한 존재는 신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근원의 나무는 내가 신이 되길 바란 걸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조의 씨앗을 보고 근원의 나무가 무슨 대답을 내릴지 퍽 궁금했기 때문이다.
근원의 나무.
던전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뿌리를 길게 내린, 거대한 나무.
나는 녀석의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줄기들이 내 주변을 감쌌다. 나는 아무런 적대심 없이 줄기들을 받아들였고, 곧 근원의 나무가 가진 내부 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었다.
어두운 공간.
작은 빛이 나타났다.
빛은 곧 나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오랜만이로군.”
쉐도우 헌터와 대치한 지긋지긋한 기억이 떠올랐지만 애써 털어 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분신은 과거 근원의 나무가 나를 각성시키고자 만들어 낸 허상이었다.
허상이었고, 다른 의미에선 본체였다.
전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안다.
저 그림자가 바로 근원의 나무 자체라는 것을!
“깨달으셨군요.”
“여기는 너의 의식 세계인가?”
“맞습니다. 가장 근원과 근접한 장소가 이곳입니다.”
나와 똑같이 생긴 녀석이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이 근원의 나무라는 걸 알았기에 개의치 않으며 이어서 말했다.
“이게 무엇인지 알아보겠나?”
나는 가장 먼저 창조의 씨앗을 꺼냈다. 말이 씨앗이지 그 모습은 손톱 하나 정도로 작은 크기였지만 마치 인간의 태아와 비슷했다.
“신의 자격을 증명하는 것 중 하나이지요.”
과연.
근원의 나무는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신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로군.”
그러자 근원의 나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러기엔 신성…… 신의 격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아주 미약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채울 방법이 바로 근처에 있지요.”
“근처에 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신성, 자신의 격이란 쉽사리 올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한데 근원의 나무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는 채울 수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이윽고 근원의 나무가 웃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중급 신의 육체를 소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구스타르테…….”
작게 중얼거렸다.
구스타르테를 포획하는 데 성공했지만 무엇 하나 정해지지 않았다.
크리슬리의 마도 실력이 일취월장 하고 있었고, 가파람도 덕분에 호문쿨루스를 거의 완성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미 한 번 필멸자의 손에 들어간 신입니다. 신의 격이란 얻기는 어렵지만 잃기는 쉬운 법. 방향을 잃고, 좀처럼 깨어나는 일은 없겠지요. 달의 화살을 이용해 신의 의지를 다시 한번 깨울 수는 있어도 방향을 잃은 신이 어디로 향할까요?”
이면 세계에서 만난 0001과는 사뭇 다른 의견이다. 0001은 달의 화살이 고장 난 것을 고쳐 주리라고 말했다. 반면 근원의 나무는 그래 봤자 이미 늦었다고 말한다.
“제법 잘 알고 있군.”
“공허는 신들이 되려다가 실패한 자들이 향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근원은…… 신의 격을 잃은 자들이 향하는 곳입니다. 구스타르테의 영혼은 이미 반쯤 근원에 걸쳐 있습니다.”
근원의 나무가 하는 말은 전혀 알지 못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너는 누구지?”
“근원의 관리자. 근원의 나무는 모두 제게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신의 격을 잃은 신을 이곳으로 이끌고, 새로운 신의 후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새로운 신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지요.”
근원의 나무.
아니, 근원의 관리자는 숨기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신. 아무래도 근원의 나무가 말하는 게 나인 모양이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 구스타르테를 흡수해라?”
근원의 관리자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모든 건 신의 뜻대로.”
녀석은 이미 나를 신 그 자체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신의 격을 얻고 창조의 씨앗을 터트리면 진정한 신이 된다니.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신이 되어 그만한 격을 소유하면 마왕의 자리는 가볍게 여겨질 것이다. 아리엘과 판데모니엄도 보다 가볍게 꺾을 수 있을 테지.
하지만 그게 전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신은 죽어야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던가?”
근원의 관리자가 빙그레 웃었다.
“맞습니다. 신격을 소유하고 자격을 갖춘 이가 죽으면 사후 신으로 추대됩니다.”
“그 말은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 같군.”
“신이 되는 일은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마왕의 자리 따위보다 훨씬 값진 것이지요.”
“너의 생각은 잘 알았다.”
궁금증이 어느 정도 풀렸다.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근원으로부터의 연결이 끊기며 현실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