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228화
나락 군주가 소멸되지 않고 그저 갇혀 있었다니. 공허에까지 손을 뻗친 어둠의 정령이 그를 손수 꺼내 주었다는 말이었다.
“나락 군주는 마족들을 죽이기 위한 검이로군.”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선 그 이름조차 별로 나오지 않았던 자. 갑작스럽게 마계를 점거하고 1년이란 기간을 준 게 이상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나.
“랜달프 브뤼시엘, 너는 시스템의 보호를 받으니 어둠의 정령들이 시스템을 통해 무언가를 시도하는 건 불가능하다. 직접적인 무력의 개입이 있을 수밖에 없다.”
구스타르테는 확정하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처럼 어둠의 정령들이 균을 심지는 못할 것이라고. 중급 신을 해할 능력. 나로서도 조금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 부분에 있어선 안전한 모양이었다.
“계획을 수포로 되돌리고 내 꿈을 이루는 계획이라는 게 무엇이냐, 구스타르테.”
하여 진지하게 물었다. 시스템을 이용해 건드리지 않는다면 나 혼자서도 이 역경을 헤쳐 보리란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방법 정도는 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준비는 철저하게 해서 나쁠 게 없는 탓이다.
“나를 흡수해라.”
“신 따위가 될 생각은 없다.”
단호하게 거부했다. 신, 울림은 좋으나 구색뿐이다. 내가 바라는 그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게 신이라는 위치였다.
허나 구스타르테는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신이 되라는 게 아니다. 그러면 데스브링어가 손을 쓸 수 있게 되지. 가장 최악의 경우다.”
신은 본래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필멸자에게 개입하지 않는다. 고금의 역사가 그러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멸망인데, 그 정도가 아니라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데 같은 신이 되면 전혀 달라지는 듯싶었다. 하지만 구스타르테를 흡수하면 어마어마한 신위를 몸에 지니게 된다. 잘은 모르지만 몸이 버티지 못하고, 혹은 격을 높이고자 육체가 스스로를 죽일 가능성마저 있었다.
구스타르테가 자신의 가슴을 한 차례 쓸었다. 열쇠는 돌려진 이후 몸속으로 녹아들 듯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달의 화살, 이것은 균형의 열쇠이니라. 그분에게 받은, 데스브링어조차 갖지 못한 나만의 무기다. 이 열쇠를 가슴에 담고 있는 한 너는 영원불멸하리라. 신격은 얻으나 신이 되진 않는다. 너의 의지가 현세에 강한 미련을 두고 있다면 말이다. 다만 그 의지가 꺼지는 즉시 육체는 생을 잃을 것이니.”
마치 주문 같았다.
나는 턱을 쓸며 말했다.
“그것만으로 데스브링어의 계획을 수포로 돌릴 수 있단 말인가?”
“네가 가진 씨앗을 시스템에 심어야 한다. 결과가 등록되지 않은, 등록할 수 없는 창조의 씨앗. 필히 강력한 오류를 불러오리라. 데스브링어의 신격 대부분은 그 시스템에 투입되었으니 놈 역시 지상으로 떨어질 테지. 대지에 흩어진 신격을 수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니, 그사이 놈을 멸해야 한다. 아니라면 너는 계속해서 그의 계략에 오랜 세월 고통당할 터.”
구스타르테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감정 한 줄기 느껴지지 않고, 무표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희로애락 중 무엇 하나 가진 게 없어 보인다.
완벽한 ‘신’이란 이런 건가?
‘불멸자를 죽이는 최초의 마족이 되겠군.’
피식 웃고 말았다. 신을 죽인 마족이라. 신살자라는 업적도 꽤 요긴해 보였다. 틀림없이 레전드 등급, 혹은 그 이상으로 등록될 것이다.
데스브링어는 구스타르테보다 격이 높은 신이었다.
“시간이 없다. 그가 눈치챘노라.”
구스타르테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던전의 천장이 막고 있지만 그에겐 내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쿵- 쿵- 쿠우웅- 콰르릉!
하늘이 울렸다. 수없이 번개가 쳤고,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 강력한 마력의 소용돌이가 근처에서 느껴졌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러나 고민은 적었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구스타르테는 데스브링어에 의해 최후를 맞는다. 고생은 고생대로 해 놓고서 나는 별로 건지는 게 없게 되는 것이다. 수지가 안 맞는 장사였다.
“받아들이지.”
결단하자 구스타르테가 즉시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이어 열쇠가 나타났고, 그것을 거리낌 없이 뽑았다.
콰아아아아아악!
열쇠의 빈틈으로 신격이 쏟아졌다. 구스타르테는 쏟아 낸 신격을 내 몸에 강제로 퍼부었다. 머지않아 그의 육체가 조금씩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끄윽……!”
허나 나는 구스타르테를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의 신격을 받아들인 육체가 무너져 갔다. 버티기 힘들 정도의 힘이 마구 흘러들어 왔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곧 강한 무력감이 들었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포기할 수 없다.’
포기해선 안 된다. 여기서 포기하면 육체는 생을 잃으리라. 하지만 내겐 미련이 많았다. 미련 많은 자가 신이 된들 제대로 구실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의지를 칼처럼 세웠다. 갈고, 또 갈며 곧 육체의 고통을 잊었다.
“나는 근원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나마 너를 응원하마. 부디…… 강해져라. 약하면 죽는 게 세상일지니…….”
익숙한 말이었다. 어렸을 적, 전장에서 누군지 모를 남자는 내게 그 말을 남기고 죽었다. 나는 그 말을 신조처럼 여기며 꿋꿋이 강해져 왔다.
힘겹게, 눈을 떴다.
푹!
그 즉시 무언가가 가슴에 꽂혔다. 달의 화살. 균형의 열쇠다.
열쇠를 꽂은 걸 끝으로 구스타르테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여운이 남는 엷은 미소만 남긴 채.
* * *
뜨겁다. 몸 내부에서부터 피어오른 불길이 전신을 태우는 기분이었다. 스스로의 목을 죄어 당장이라도 이 고통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몇 가닥의 미련이 나를 붙잡았다.
그렇다. 나는 미련이 많다. 이루고 싶은 게 있고, 가진 것 역시도 많았다. 무엇 하나 포기하기엔 지금의 생이 너무나 아쉬웠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빨이 부서지고 잇몸이 아스러져도 삶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억겁의 시간. 후에는 아예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렸다. 점차 고통이 사라졌으며 마침내 안정화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이름마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내게 남은 미련이 나를 강하게 잡아끄는 중이었다.
욕심이라고도 부를 수 있으리라.
육체는 녹아 사라졌다. 허나 다시 재구성되었다. 몇 번이나 계속해서 반복했다. 다섯 번, 열 번, 스무 번…… 서른세 번의 변이 끝에야 육체는 온전히 신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예 새롭게 변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격변을 겪었다.
전신의 세포가 정상화되고, 잊었던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처음에는 미련 하나였지만 다른 여러 것이 나를 현세로 불러오고 있었다. 하여 나는 발을 움직였다.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던 발도 내가 모든 걸 기억해 내자 거짓말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랜달프 브뤼시엘.
네 명의 대공 중 하나이며 마왕이 될 자.
외에도 여러 이야기가 떠올랐지만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열기가 차츰 가라앉을 즈음 나는 눈을 뜰 수 있었다.
눈을 뜨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푹신한 이불의 감촉, 대지를 가득 채운 마력과 익숙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마스……!”
이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그보단 내 몸의 상태를 점검하는 게 먼저였다.
‘나는 변했다.’
무엇이?
정신은 그대로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모든 게 새로웠다.
덩치가 조금 더 커졌고, 머리칼은 발끝을 넘어설 수준으로 길었다. 억지로 잘라 낸 흔적이 있는 걸 보아 몇 번이나 머리를 잘라도 계속해서 순식간에 자라는 듯싶었다.
양손을 들자 손등에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거울을 삼킨 용.’
거대한 용이 세상을 비추는 거울을 삼키는 문양이다. 이면 세계의 신, 구스타르테를 흡수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육체는 강철보다 단단해졌고, 내부에선 용암처럼 힘이 흘러넘쳤다. 잠재력의 한계를 넘고, 초월자의 격을 갖췄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된다.
이것이 신격인가.
진정한 신의 위엄이란 이런 느낌이었나.
‘상태창.’
곧 나는 수치화된 육체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름: 랜달프 브뤼시엘
직업: 마계 대공(던전 마스터)
칭호 :
* 던전 사냥꾼(던전 점령, 마족 사냥 시 잔여 능력치+1)
* 불굴의 전사(Ex U, 모든 능력치+2)
* 최초로 요정의 축복은 받은 자(U, 마력+6)
* 근원의 주인(Epic, 모든 능력치+3)
* 언데드(Ex U, 지능체력+5)
* 지저 세계의 지배자(Legend, 모든 능력치+5, 에픽 미만 스킬의 등급+0.5
능력치 :
힘 110(+20) 지능 120(+15)
민첩 110(+20) 체력 115(+22) 마력 130(+16)
잠재력(585+93/???)
잔여 능력치: 47
전력량: 557GW
특이 사항: 지저 세계의 주인. 나락 군주의 심장이 완전히 각성했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강력한 신격을 얻었습니다.
스킬: 만물 조합(Ex U), 심안(Epic), 다크 소드(Epic), 신검합일(Epic, Passive), 전격의 정령(Epic), 오만(Epic), 타락(Ex Epic), 지배의 권능(Ex Epic, Passive), 정령과의 교감(Epic, Passive), 이면 세계(God)
적용 중인 스킬&아이템 효과: 분노(힘+7), 나태(민첩+7), 오만(체력+7), 신검합일(힘민첩+3)
[전후 비교]
힘 119 지 111 민 105 체 112 마 116 잠재력(470+93/570)
힘 130 지 135 민 130 체 137 마 146 잠재력(585+93/???)
아……!
수치화된 상태창을 보자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졌다고.
게다가 아직 그 강함의 끝을 보지 않은 상태라고!
따로 칭호가 생기진 않았다. 그러나 순수 능력치가 놀랍도록 높아졌고, ‘이면 세계’ 스킬이 생겼다.
나는 이면 세계 스킬을 보다 자세히 쳐다봤다. 잠시 후 그에 따른 설명이 떠올랐다.
이름: 이면 세계(God)
설명- 이면 세계의 신 구스타르테가 가진 최강의 권능. 스킬 두 개를 지정하여 영구적으로 Demigod 등급으로 끌어 올린다. 이면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놀라운 기능.
* 한 번 지정하면 다른 스킬로 교체 불가.
신 등급이 있다는 것조차 처음 알았건만 스킬의 효용도 놀랍기 그지없었다. 이면 세계 스킬 자체는 아무런 효과가 없으나 다른 스킬의 등급을 반신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사용하기에 따라선 엄청난 효율을 얻을 수 있었다.
‘살아 있는 신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겠군.’
나는 강해졌다. 아니, 강해졌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신 자체가 되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신’이란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만약 7대 죄악이 없었다면, 신을 노리고 만든 무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결코 구스타르테를 포획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안정한 모습으로도 나 이상의 기량을 발휘하던 것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이제 그의 힘은 내 것이 되었다.
‘어둠의 정령, 나락 군주…… 마신 데스브링어.’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