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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229화 (229/242)

던전 사냥꾼 229화

강력한 적들이 있다는 게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휘하 마수들 대부분이 이곳에 있었다.

오스웬, 크리슬리, 타쉬말, 로이와 로제, 이히까지.

걱정하고, 경악하며 침중한 분위기로 일관하는 등 모두가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공통된 감정이라면 바로 안도다.

“내가 얼마 만에 깨어난 거지?”

“정확하게는요. 139일이에요, 마스터.”

이히가 말했다.

허! 나는 쓰게 웃었다.

139일이라니. 거의 반년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급격하게 변하는 추세에 따라 무슨 결과가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기간이었다.

나는 그간의 일을 모른다. 하여 의아한 부분을 입에 담았다.

“막시움이 안 보이는군. 여전히 우파의 던전을 차지하는 데 힘쓰고 있는 건가?”

막시움.

나를 나락 군주로 알고 충성을 맹세한 기사.

내 명령에 따로 홀로 오지에서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

모두가 모였다면 그 역시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이윽고 주변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모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마스터…… 막시움은 죽었어요. 나쁜 판데모니엄한테요.”

어쩔 수 없이 나선 게 이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기로 판데모니엄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따로 병력을 빼내서 무언가를 할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나는 막시움에게 막대한 군세를 안겨 줬고, 막시움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적들을 베어 갔다. 막시움을 제거하려면 내가 준 군세 역시 없애야 했다.

그런데 판데모니엄이 막시움을 제거했다고?

적어도 상식선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표정을 굳힌 채 물었다.

“내가 없던 139일 간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라.”

초기에는 별일이 없었다. 나의 부재가 있었지만 어차피 상황의 반전은 힘들었다. 판데모니엄은 약체화했고, 크리슬리를 필두로 승승장구를 이어 나갔다. 막시움 역시 우파의 던전 중 절반을 차지했다. 잔여 능력치만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이득을 취했는지 알 수 있다.

아리엘 역시 판데모니엄을 견제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자신의 세력을 빠르게 불렸으며 은색의 기사들 역시도 복구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대로 간다면 판데모니엄은 파멸할 게 분명해 보였다. 아리엘 디아블로와의 정식 대결이 성사되기까지 몇 걸음이 남지 않았다.

그렇게 판데모니엄의 모든 손과 발을 잘라 냈다. 이제 마지막 던전만 남겨 두고 있었다.

“이히가 아는 건 판데모니엄이 수세에 몰리는 척 뒤로 물러나며 다른 수를 썼다는 거여요. 나머지는 크리슬리가 말해 줄 거예요, 마스터.”

시선을 돌려 크리슬리를 바라봤다. 크리슬리는 참담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즉시 말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판데모니엄이 노리는 건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하쉬였지요. 신경을 썼다면 보였겠지만 연이은 승리에 취해 발견하지 못한 저의 잘못입니다.”

“판데모니엄이 하쉬를 노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야 하쉬가 지구에 있는 천족 중 가장 높은 위계를 가졌지만 난데없니 납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쉬를 납치한다고 천족이 판데모니엄을 도울 리도 없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천족은 칼과 같았고, 그것을 판데모니엄이 모르진 않을 것이었다.

내 의아함을 안다는 듯 크리슬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판데모니엄은…… 자신의 던전 바로 앞에서 하쉬를 제물로 사용했습니다. 지천사의 순수한 피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좌천사의 정혈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의 던전을 공격했을 때 그는 눈앞에서 문을 열었지요.”

좌천사 오피니언. 나도 이름은 안다. 하쉬를 제외하면 가장 급이 높았고,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천족들을 지휘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둘의 정혈을 제물로 바쳤다니. 심상치 않은 일이 진행됐음이 분명했다.

“판데모니엄이 무엇을 연 거지?”

“소환. 천계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때를 회상하는 것처럼 크리슬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몸서리가 처칠 정도의 광경이 연출된 듯싶었다. 타쉬말도, 오스웬도, 모두가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그때 타쉬말이 끼어들었다.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그녀가 강하게 말했다.

“치천사 카마엘 님께서 강림하셨다. 114만의 군세와 함께 친히…… 카마엘 님께서 강림하실 거란 예지를 보았지만 설마 마족의 손에 의해 이뤄지는 것인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타쉬말은 분노로 가득했다. 마족에 의한 소환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녀는 타락했지만 마음만큼은 아직 천족이었던 영향이다.

치천사라면 천계의 최고 위계다. 천왕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천계를 지배하는 가장 강한 존재였다.

“판데모니엄이 소환했다 해서 카마엘이 그를 도울 것 같진 않은데. 자폭인가?”

“놈은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다른 자들이 왕의 자리를 갖는 걸 볼 수 없다는 심보였겠지.”

타쉬말의 말은 그럴싸했다. 판데모니엄은 욕심이 많았다. 우파와 비슷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위에 서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게다가 가만히 있으면 파멸이 확정되어 있었고, 마지막 수로써 천계의 문을 연 것이다.

판데모니엄은 마도의 정수를 모두 익혔다. 고대의 마법도 알고 있었다. 천계의 문을 여는 방법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상할 건 없지만…… 카마엘이라.

“그간의 피해는? 전황은 어떠한가.”

다시 크리슬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크리슬리가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막시움은 흙으로 돌아갔고, 그가 지휘하던 군세가 전멸했습니다. 제가 이끌던 군세 역시 7할이, 카마엘이 소환된 이후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미간을 찌푸렸다.

전부 사라지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이만한 피해를 입은 건 예상외였다. 상정하지 못했다. 그만큼 카마엘이 강력하다는 방증이었다.

내가 침묵하자 크리슬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다행히 판데모니엄은 카마엘에게 찢겨져 죽었습니다. 또한 카마엘은 세계를 정화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생명체를 소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마수를 한국에 모으고 저항하는 중이지만 언제 카마엘이 총공격을 해 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나 역시도 수세에 몰렸다는 뜻이다.

이 모든 게 139일 안으로 일어난 일이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리고? 보고할 게 또 있나?”

이제 웬만한 이야기를 들어도 놀랄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시선이 뚫어질 듯 박히자 크리슬리가 작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나의 던전 마스터시여, 대공 아리엘 디아블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리엘 디아블로.

북아메리카를 기점으로 힘을 기르던 대공.

전생에선 최후의 승자가 되었으며 이번 생에서 역시 최후까지 살아남았다.

한데 이런 시국에 홀로 내가 있는 곳까지 찾아온 건 의외였다.

말을 들어 보니 2주일 전부터 던전 근처에 대기하며 내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나와 반드시 나눌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수는 한 마리도 대동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찾아온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오랜만이로구나, 랜달프 브뤼시엘.”

아리엘은 던전의 바깥에 있었다. 예전 인간들이 만든 전초기지에 머물며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가만히 아리엘을 쳐다봤다. 139일 간 그녀는 더욱 강해졌다. 이 기세로 보아 ‘벽’을 넘어선 것 같았다. 초월자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부러졌던 이마의 뿔도 회복되어 있었다. 오히려 전보다 커졌다. 뿔은 그녀의 힘을 나타내는 상징과 같았다.

나는 표정을 지우며 말했다.

“이곳은 무슨 일로 찾아왔지? 심심해서 놀러 온 건 아닐진대.”

“후후, 나도 그렇게 한가로운 마족은 아니니라.”

아리엘도 천천히 나를 살펴봤다. 견적을 재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말에는 은은하게 언령이 녹아들어 있었다.

언령이란 말의 힘이다. 그녀가 말하면 격이 낮은 이들은 그 말에 따르게 된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말이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너 역시 벽을 넘었지. 허나 초월자가 된 지금도 너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과연, 괴물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

아리엘은 순수한 의미로써 놀라고 있었다. 초월자가 되면 내 역량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듯싶었다. 전이었다면 모르겠지만 구스타르테의 신격을 흡수한 지금, 그녀 정도로 내 모든 걸 파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용무는?”

“한두 마디 잡담 정도는 나눌 사이가 되는 걸로 알았는데…… 나만 그리 생각했나 보군. 오냐, 내가 찾아온 이유를 말하마. 너도 짐작은 하고 있을 것이다. 카마엘…… 천계의 문을 열고 찾아온 놈에 대한 대책 때문이다.”

“상황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군.”

“숨기지 마라. 너 또한 그러지 않느냐? 카마엘은 마족만이 아니라 인간들도 멸하는 중이노라. 그야말로 폭주 중이지. 판데모니엄이 소환한 게 영향을 끼쳤을 터. 놈은 견제하려거든 힘을 합쳐야 한다.”

힘을 합치자?

아리엘로서는 놀라운 발언이었다.

그녀는 마왕의 직계다. 마왕의 피를 고스란히 이었다. 마계의 대공들이 서로 반목하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진즉 그녀는 마왕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타협을 잘 몰랐다. 누군가에게 동맹을 신청한다는 발상 자체가 없어 보였다. 그 우직함 탓에 전생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아는 한, 적어도 그녀가 먼저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 적은 없다.

한데 지금 내게 동맹을 요청한 것이다. 한국까지 직접 찾아와서!

놀라운 일이었다.

확실히 합리적인 선택이라면 먼저 외부의 적을 제거하는 게 옳다. 나 역시도 정상적인 상황에서 그녀와의 대결을 바라고 있었다.

허나…… 그러기엔 여유가 없었다. 카마엘을 제거한대도 그게 끝이 아니다. 어둠의 정령들, 그리고 데스브링어가 남았다.

생각을 정리하곤 말했다.

“아리엘 디아블로, 너와 내가 싸워 이긴 쪽이 모든 걸 가진다.”

“마왕의 자리를 두고 여기서 겨루자는 것이냐?”

“시간을 끌어서 좋을 건 없지 않은가?”

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고, 곧 아리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발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후의 한 명이 모든 걸 가져야만 카마엘을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좋다.”

“일정은 네가 정하라. 그래도 이왕이면 가까운 시일 내에 싸웠으면 좋겠군.”

둘 다 최상의 상태가 아니었다. 나도 조금 더 몸을 요양할 필요가 있었고, 설령 지금 싸운대도 그녀의 휘하 마족들이 납득할 리 없었다.

아리엘 디아블로의 모든 휘하 마족이, 나의 휘하 마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대결은 펼쳐져야 한다. 그래야 별다른 불협화음 없이 일을 끝맺을 수 있었다.

나는 등을 돌렸다. 머지않아 아리엘도 전진기지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정확히 7일 후.

그녀는 충직한 다섯 명의 부하를 이끌고 한국을 찾았다. 일정과 위치를 정하는 것 모두를 아리엘의 판단에 맡겼는데, 그녀는 부득불 한국에서 대결을 펼치겠다고 주장했다. 내가 다른 술수를 사용하지 않으리라 확신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멍청할 정도로 우직하지만 이번에 한해선 맞았다. 나도 다른 술수를 사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신격을 소유했고, 내가 내뱉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지 깨달았다. 신격을 더럽히는 짓을 하면 스스로의 격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런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결판을 짓자꾸나, 랜달프 브뤼시엘이여.”

아리엘은 발록의 뼈로 만든 검과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뼈 꼬리가 마치 발록의 그것을 보는 듯했다.

나는 진홍빛 망토를 걸치고, 인피니티 아머를 착용한 채 나섰다.

분노와 황제의 검이 부를 떨었다.

이 싸움의 결과로, 마왕이 정해지는 것이다.

나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이러한 순간을 얼마나 꿈꿔 왔던가. 이제 단지 꿈만 꾸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이뤄 낼 차례였다.

“그러지.”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고르는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나는 자세를 잡았고, 이어 부딪혔다.

쿠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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