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사냥꾼 235화
짧은 시간 휴식을 가졌다. 재정비도 재정비지민 기존의 마수들이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이대로 마계의 문을 여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게다가…….
“완성했습니다.”
오스웬이 흐뭇함을 말투에 담고서 나를 찾아왔다. 오스웬의 손에는 목걸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느껴지는 마력이 참으로 오묘했다. 하지만 아무리 오묘해도 내 눈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신의 눈, 이제 의도하지 않고 그저 보고만 있어도 자연스럽게 발동이 된다.
곧 목걸이에 대한 정보가 상세하게 떠올랐다.
이름: 파마의 목걸이(10/10)
설명- 특정한 저주로부터 사용자를 지키는 목걸이. 10번을 막아내면 파괴된다.
방어하는 저주 목록- 고통, 빙정, 인형 의식, 골렘의 영혼, 혼의 파괴자, 파멸의 인도, 영혼의 불꽃, 가시의 저주, 기사왕의 폐해…… 신의 앓음.
무수히 많은 저주의 목록이 떠올랐다. 내가 아는 것도 있지만 모르는 게 더 많았다.
“나락 군주의 대비용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나락 군주가 사용하는, 사용할지 모르는 모든 저주를 막을 수 있도록 설계했지요.”
자부심이 가득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나락 군주가 이만한 저주를 사용할 줄 안다고?”
“예! 그는 한 가지에 몰두하면 끝을 보는 자이고, 말년에 저주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배우는 속도는 신들도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지요.”
“저주술사가 따로 없군.”
솔직히 놀랍다. 저주 목록의 개수는 100개에 가까웠다. 한 명이 이만한 저주를 알고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한데 나락 군주는 저주로써 유명해진 인물이 아니었다.
검술의 천재, 마도의 대가. 한마디로 마검사였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저주까지 능수능란하게 펼친다면 확실히 상대하기 까다로울 듯싶었다.
“지금 황제 폐하의 몸에 어지간한 저주는 정착하지 못하겠습니다만…… 목걸이는 목록에 적힌 저주들의 효과도 반감시킵니다. 혹시 모르니 착용하십시오.”
내 지능은 무려 174에 이르렀다. 저주 따위는 결코 나를 해할 수 없다. 오스웬에게 명령하기 전이었다면 모르겠으나 지금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오스웬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락 군주에겐 커다란 원한이 있었지.’
오스웬은 본래 인간이었다. 불을 좋아하는 실력 좋은 대장장이. 그러던 어느 날 나락 군주의 눈에 띄어 강제로 7대 죄악을 만들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지저 세계로 끌려가 본래의 모습조차 잃어버렸다.
원한이 없다면 거짓이다. 그 증거로 오스웬의 눈이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고맙군.”
부하의 충고다. 들어서 나쁠 건 없었다.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목걸이를 착용한 채 발길을 돌렸다.
나는 던전의 꼭대기에 서서 가만히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신들과의 약속은 거의 이행했다.
나를 과거로 되돌려준 대가로 지구와 인류의 생명을 장담해 주었다. 비록 많은 인간이 죽었지만 살아남은 그들은 서로 모여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이것이 인간의 저력이다. 바퀴벌레 같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 역시 저런 끈질김을 좋아한다. 내가 그래 왔기 때문이다. 욕심이 없고 끝까지 버티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터.
하여간 인간들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더욱 강하게 결속하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리라.
이제 나만 떠나면 이 지구는 안전했다. 혹여 문제가 생겨도 의지의 각성자들이 있는 한 쉽사리 쓰러지지 않을 것이었다.
카마엘을 흡수하고 벌써 50여 일 가까이가 지났다.
더는 지구에서 얻을 게 없었다.
정비를 끝냈으며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건 무의미하다. 아직 마계가 점령했다는 메시지는 뜨지 않았다. 녀석이 마계를 완전히 정복한 뒤 준비할 시간을 주어선 안 된다.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겠지만 누군가가 뒤를 치리라곤 쉽게 예상하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던전으로 돌아왔다.
코어 근처로 수많은 마수가 모여 있었다.
가장 앞에 선 크리슬리와 아리엘도 눈에 띄었다.
나는 주저할 것 없이 입을 열었다.
“마계로 간다.”
마계. 이제는 그리운 단어.
나는 손을 들었다. 마계의 문과 연결된, 보이지 않는 기다란 줄은 항상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 줄을 잡아당겼다.
곧 하늘에 뜬 거대한 문이 열리며 눈앞에 커다란 균열이 생겨났다.
이 균열을 통과하면 마계가 있다.
가장 먼저 발을 옮겼다.
내 뒤를 따라 모두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코끝을 찌르는 역한 냄새.
곳곳에 널린 시체들.
보랏빛 밤하늘과 까마귀 우는 소리…….
하늘에 뜬 세 개의 달까지.
‘마계.’
나는 즉시 마계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이곳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장소이니까. 지구와는 모든 게 달랐다.
‘단번에 중앙으로 왔나.’
주변의 지형은 익숙했다. 마왕성과 멀지 않은 장소다. 이 마왕성을 중심으로 네 명의 대공이 동서남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의 냄새가 너무나도 짙었다.
마계는 항상 전쟁 중이었고, 피가 흐르지 않는 날이 없었다.
전쟁으로 죽어 나간 마족의 수는 셀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내가 죽음의 냄새가 너무 심하다고 한 건 살아 있는 자가 하나도 없어서다. 보통 패자는 죽고 승자는 살아남기 마련이다. 못해도 하나의 생명 정도는 느껴져야 정상인데…….
특히 이곳 마왕성의 근처에는 항상 마수들로 넘실거렸다. 대공들의 견제가 가장 치열한 곳이 이곳 중심부였거늘.
내 기감은 상당히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수백 킬로 바깥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여전히 기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이상한 점은 또 있다.
죽음의 냄새는 지독하기 그지없지만.
“시체가 없군.”
그렇다. 당연히 있어야 할 시체마저 없다. 생자와 죽은 자 모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건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아리엘 디아블로. 지금 마계에 잔존한 세력은 누구의 세력이지?”
아직 나락 군주는 마계를 일통하지 못했다. 그랬다면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특히 아리엘이 가장 먼저 눈치챘을 게 분명하다.
나는 아리엘을 나름 존중해 주고 있었다. 내 안에 깃든 힘 중 하나가 디아블로라서일까. 그녀의 성을 그대로 남겨 주었다. 그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아리엘도 알고 있었다.
고맙다는 듯 짧게 고개를 숙이며 아리엘이 말했다.
“제 세력이 남았습니다. 나머지 세력은 모두 궤멸 상태라 합니다.”
우파, 판데모니엄, 오쿨루스.
세 대공의 세력이 벌써 궤멸되었다니.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너의 성으로 가자. 나락 군주도 그 근처에 있을 터.”
설령 없더라도 잔존 세력의 근처에 있다 보면 나락 군주는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목표가 마계 정복인 듯했으니.
길 안내는 필요 없었다.
나는 아리엘의 성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안다.
전생에서 도전장을 내밀고 찾아가 왕창 깨진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앉고 싶지만.’
나는 마왕성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로지 마왕으로 인정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
그곳의 중심부엔 마왕의 좌가 존재한다. 좌에 앉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놈을 처리하기 전까진 진정으로 마왕이 된 게 아니다. 마계는 마왕이 다스리는 곳이었고, 나락 군주는 현재 마계 정복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괘씸하기 이를 데 없다.
‘나중으로 미루지.’
욕심 없이 발을 뗐다.
나락 군주를 죽인 다음에도 늦지 않는다.
아리엘의 성은 마왕성을 중심으로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눈으로 뒤덮인 장소이며 그녀가 그린란드에 성을 짓고 머문 이유도 그 익숙한 환경 탓이었다. 새하얗기 그지없는 피부처럼 1년 내내 눈만 내리는 장소에 거대하기 짝이 없는 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성…… 어쩌면 도시라고 할 만한 규모. 조금 더 과장하면 작은 나라라고 해도 이상하진 않을 것 같았다.
이곳이 바로 마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아리엘의 중심 세력이 머무는 장소다. 아리엘이 직접 통치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큰 성도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생명체의 반응은 무수하게 느껴졌지만 그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긴장하는 중이었다.
마족 대부분이 은신한 상태로 있어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듯싶었다. 그래 봤자 한계는 있지만 전형적인 전투태세에 가까웠다.
성문을 지키는 마족들도 모두 들어갔는지 썰렁했다.
‘내 병력을 멀리서 감지한 모양이군.’
내가 이끌고 온 군세는 15만가량.
카마엘을 해치운 업적으로 다량의 포인트를 얻은 덕분에 이만큼이나 불릴 수 있었다. 전보다 조금 전력이 부족해지긴 했지만 모두 중급 이상의 마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군세를 멀리서 감지하고 적이라 판단한 뒤 전투태세를 갖춘 모양이었다.
아리엘은 내게 양해를 구하고 휘하의 마족들과 함께 성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어라. 나 아리엘 디아블로가 명하노라.”
그녀의 목소리가 성문을 타고 전체에 맴돌았다. 은은한 마력이 섞여서 듣지 못할 리도 없었다. 마족의 청각은 때에 따라 인간보다 수십 배 뛰어나다.
곧 성문의 가장 높은 곳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멀건 수염과 약식의 갑옷을 걸친 노구의 마족이었다.
“정말 아리엘 님이 맞습니까?”
“이 뿔을 보고도 모르겠느냐? 당장 문을 열지 않으면 문책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아리엘은 당당했다. 그녀가 본래 이곳의 주인이니 그럴 만도 하다. 아리엘의 부하들은 충신처럼 그녀를 따르는 경향이 있어서, 당장 문을 열어 줘야 옳았다. 하지만 전개는 생각보다 다르게 흘러갔다.
“죄송합니다. 문은 열어 드릴 수 없습니다.”
“……뭐라?”
노구의 마족이 고개를 젓자 아리엘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자신의 성에 자신이 들어가지 못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마왕의 게임에서 패배했대도 아리엘은 여전히 대공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락 군주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한 번의 선택이 이 성을 날려 버릴 수도 있는 바, 신중할 수밖에 없는 점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늙은 마족이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사순! 네놈, 정녕 주인조차 몰라본단 말이냐? 내가 문을 부수고 들어가 너희를 모두 죽이기 전에 당장 열어야 할 것이다.”
아리엘의 기다란 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가 상아검을 들고 그 위에 혼돈을 입혔다. 아리엘의 전매특허. 오로지 그녀만이 쓸 수 있는 스킬이었다. 당연히 알아봐야 정상이지만 그럼에도 늙은 마족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렇다면 뒤의 마수들을 물리고 옷을 벗어 주십시오. 나락 군주에게 당한 상흔이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마력적 조치가 취해졌는지도 확인한 후 제 의견이 틀리다면 기꺼이 저의 목을 내어 드리지요.”
“이 겁쟁이 놈이…….”
아리엘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기사도를 신봉하는 그녀의 성격상 참지 못할 안건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마지막 요충지였다. 게다가 내가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날뛰어도 된다는 허락을 내리지 않았다. 또한 그녀의 성은 나의 성과 같았다. 함부로 피해를 늘릴 순 없는 노릇이다.
아리엘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명했다.
“뒤로 물러난다.”
아리엘이 큰마음을 먹고 결단한 것이다.
나는 그녀의 뜻을 높이 사 군말 없이 마수들을 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