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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사냥꾼-239화 (239/242)

던전 사냥꾼 239화

그럴 만도 했다. 그와 마지막으로 마주했을 때와 지금의 나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저 겉으로만 봐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하물며 가랏쉬는 초월자의 격에 든 정령왕이다. 내 본질을 조금은 꿰뚫어 봤을 것이다.

가랏쉬는 내 전신을 훑어보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마족이 맞는 건가? 이제 신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겠군.”

“신을 죽이려고 하고는 있지.”

“흥미롭군. 아주 흥미로워. 바쁜 일만 아니었으면 나도 동참하고 싶을 정도야.”

“가랏쉬, 어둠의 정령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지 않나?”

나는 가랏쉬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불의 정령계는 반 이상이 망가져 있었다. 남은 숫자도 적었고, 이대로 있다간 결과가 뻔하다. 몇 번 더 어둠의 정령들이 침범해 오면 끝내 파멸하고 말 것이다.

가랏쉬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리고 내 힘을 본 가랏쉬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명확했다.

동아줄이 내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동시에 가랏쉬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무엇을 원하나?”

그는 합리적인 왕이었다.

나는 그에게 전체 정령계가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균열이 열리고 어둠의 정령들이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것, 어둠의 정령들의 격이 몰라 보게 높아져 있었다는 것, 무엇보다 놀라운 건 어둠의 정령왕 아도니스가 반신의 영역에 들었다는 이야기다.

“놈은 균형을 무너트렸다. 정령들은 저마다 영역에서 정령계의 균형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지만 놈은 그저 파괴적인 욕망에만 사로잡힌 미치광이가 되었다.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정령계는…… 후우.”

가랏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전신에서 내뿜는 불은 강렬하기 짝이 없었지만 왜인지 힘이 없어 보였다.

“그 외에 이상한 건 없었나?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텐데.”

가랏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연합을 했다. 살아남은 정령들은 힘을 합쳐 어둠의 정령계로 향했다. 그리고 전멸했노라. 돌아온 이는 나 하나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모르겠다. 그저…… 아도니스에게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밖엔…….”

공격이 통하지 않는 대상을 이길 수는 없다. 그래서 반신의 자리에 올랐다고 표현한 것이다. 차마 신이라고 하지 않는 걸 보면 마지막 자존심인 듯했다.

“그게 끝인가? 무언가를 본 건 없나?”

“무언가? 이상한 표현이군. 글쎄, 내가 신경 쓸 정도의 것은…… 문. 그래, 문이 있었노라. 하늘에 뜬 거대한 문이었다. 힐끗 비춘 것에 불과했지만 분명히 본 것 같군.”

문?

어둠의 정령계는 나도 익히 아는 장소다.

그곳의 중심부에 존재하는 성에서 몇 번이나 경매를 진행한 덕이다.

하지만 하늘에 뜬 문은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새롭게 나타난 문이라는 뜻이었고, 시스템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여튼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어둠의 정령들은 훨씬 강해졌고, 숫자도 많고, 아도니스도 강력하기 짝이 없지. 그런 그들을 이길 묘수가 있는가?”

“묘수는 필요 없다.”

나는 날개를 활짝 폈다.

이야기가 그게 전부라면 차라리 잘되었다.

신경 쓰지 않고 마구 날뛸 수 있겠다.

시간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어둠의 정령계에 정말 시스템이 있고, 내가 그 근처에 있는 걸 눈치챈다면 데스브링어가 즉시 찾아올 것이다.

그나마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나락 군주와 빙의가 제대로 되지 않아 극심한 혼란을 느낄 지금밖에 없었다.

“혼자 처리할 셈이로군.”

가랏쉬가 혀를 내둘렀다.

“돌아오거든 창고를 개방해야 할 것이다.”

“그건 정령들이 돌아오면 성과에 따라…… 알았다. 창고 정도는 얼마든지 개방하지. 마음대로 가져가라. 대신, 놈들을 없애고 돌아와야 한다.”

가랏쉬가 포기했다.

본래는 정령들을 돌려주는 대가로 무구를 줄 셈이었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언뜻 나와 함께 싸우고 싶어 하는 것도 같았지만 그는 남은 정령들을 추스를 의무가 있었다.

나는 다시 균열로 향했다.

속전속결.

놈들이 알아차리고 준비할 시간 따위는 주지 않는다.

모든 걸 빠르게 해결할 셈이었다.

어둠의 정령들은 본래 상인에 지나지 않았다. 마족들의 포인트에 기대어 겨우 힘을 키우던 존재다.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을 일으킨 건 전생에서조차 수십 년이 걸린 일. 하지만 고작 10년도 안 된 시간 내에 일을 벌였다. 무엇을 믿고?

균열은 균열일 뿐이다. 균열을 통해 조금씩 힘을 비축할 순 있겠지만 정령계 전체를 상대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할 순 없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 원인…….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시스템뿐이다.

나는 균열을 넘어가 어둠의 정령계에 들어섰다.

어둠의 정령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속도를 높여 심장부에 다다랐다.

이곳에서 나를 막을 자는 없었다. 내가 가진 격의 발끝이라도 따라온 존재 또한 없었다. 마계 옥션에서 마족들이 전전긍긍한 것은 마신의 계약에 따라 힘이 잠시 봉인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한 존재는 마계에 훨씬 많았다.

어둠의 정령들이 아무리 강해졌다 하더라도 내 눈에는 거기서 거기일 따름이었다. 급 자체가 기본 하나씩은 높아진 것 같았지만 그래 봐야 도토리 키 재기라는 소리다.

‘아도니스.’

내가 문제로 삼는 건 아도니스였다.

가랏쉬가 반신이라 표현했다면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역시 문제는 되지 않으나 겨우 초월자의 한계를 없앤 게 얼마 되지 않았다. 상식의 선을 벗어나는 성장이었다.

이윽고 나는 어둠의 정령계 중심부에 들어왔다. 거대한 성, 그리고 하늘에 떠 있는 문!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내 심장이 더욱 격하게 뛰었다. 저 문이야말로 ‘시스템’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내 안에 깃든 구스타르테가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으로 가는 길목은 수많은 어둠의 정령이 막아서고 있었다. 하늘로 향하는 계단을 만들고 곳곳에 또 다른 성들을 배치했다. 허락받지 않은 자가 문으로 향하는 걸 철저히 막고 있었다.

‘무시하고 통과할 순 없겠군.’

한 차례 볼을 긁었다.

처음부터 얌전히 있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아도니스는 반드시 잡을 계획이었다. 녀석에게서 원하는 게 있다.

‘7대 죄악.’

녀석이 가지고 있는 7대 죄악 전부를 원한다. 내게 있는 건 세 개, 그리고 탐식의 모방품이다. 탐식은 제외하더라도 세 개가 더 남았다.

모두 모으면 그 효과가 어떨지 궁금했다. 나락 군주가 신을 죽이고자 직접 만든 무구이니 결코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이었다. 천하의 오스웬마저 그 위험성을 깨닫고 균열 속에 숨겼다고 하지 않았나.

촤르르르륵!

나는 뇌신을 깨웠다.

뇌신이 길게 하품을 내뱉으며 튀어나왔다.

“조용히 인사하도록.”

가볍게 인사만 할 요량이었다.

귀찮은 듯 뇌신이 흐물흐물 어둠의 정령들이 쌓아 놓은 성을 향해 돌격했다.

그리고…….

콰릉! 콰콰콰콰쾅!

순식간에 성을 박살 냈다.

어둠의 정령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였다.

몇 번이나 본 정령들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들과 나 사이에 정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저 상인과 손님의 관계였고, 지금은 온전히 적이 되었을 따름이었다.

적에게 인정을 봐줄 정도로 나는 착하지 않다.

마치 개미를 밟듯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어둠의 정령들은 버텨 내질 못했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넘지 못할 벽이 있었다. 내가 권능을 사용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렇게 몇이나 박살을 냈을 때일까.

“……랜달프 브뤼시엘. 나는 너에게 초대장을 보낸 기억이 없다만.”

아도니스!

그가 두꺼운 검은색 망토를 걸치고 나타났다.

그리핀의 깃털이 달린 가면, 레전드 등급 이상으로 보이는 장신구들.

어둠의 정령 주제에 꽤 멋을 부렸다.

“아도니스, 생각해 보니 너에게 맡긴 게 있어서 잠시 들렀다.”

“맡긴 거라니?”

“7대 죄악의 나머지와 저 문!”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문. 저 속에 시스템이 있다.

아도니스가 하! 하고 웃음을 토해 냈다.

“강도가 따로 없군.”

“아니, 나는 공손하게 부탁하고 있는 거다. 내놓으면 살려는 주겠노라고.”

어둠의 정령들은 판매할 물품을 구하고자 무슨 방법이든 사용했다. 내가 하는 일이 그와 같다. 게다가 데스브링어와 결탁한 확정적 증거를 잡았다.

얌전히 내놓으면 살려 주겠다는 말은 거짓은 아니다.

단지 그 대상이 아도니스가 아닐 뿐이다.

다른 어둠의 정령을 살리면 그만 아닌가.

물론 아도니스가 얌전히 내놓을 일도 없겠지만…….

“어디선가 힘을 얻고 기고만장 하는 것 같다만, 죽고 싶어서 안달이라면 그 소원대로 해 주마.”

아무래도 아도니스와 데스브링어 사이에 정보 교환 같은 건 안 되는 듯싶었다. 아도니스는 내가 무엇을 흡수해서 얼마나 강해졌는지 정확히 감을 못 잡고 있었다.

하기야 데스브링어가 아도니스 따위에게 정보를 전한다는 자체가 이상하다. 그저 필요에 의해 시스템을 맡기고 나락 군주의 육체를 허무에서 빼 온 것에 불과했다.

가랏쉬는 그래도 알아는 봤다. 한데 아도니스는 자신의 힘에 취해 나와의 격차를 알아보지 못했다.

알아봤다면 이렇게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멍청한 놈이라 다행이군.’

어깨를 으쓱하며 분노와 황제의 검을 쥐었다.

이놈은 다른 스킬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마침 하늘엔 달이 떠 있었다.

‘하이엔달의 검술이면 충분하다.’

순수한 검술로 박살 낼 작정이었다.

놈에겐 발가락 때만큼의 마력조차 아까웠다.

아도니스는 애당초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공격이 통하지 않은 건, 반신급의 스킬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엘리멘탈 실드(Demigod)’는 지정한 상대의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내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아무리 반신급의 스킬을 가지고 있어도, 그 대상으로서 나를 지정했대도, 격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무기가 아무리 좋으면 뭐 하겠는가. 사용하는 자가 형편없는데. 제대로 된 효율조차 끌어내지 못한 것이다.

심안의 싸움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심안도 지정한 상대의 상태창 등을 보는 스킬이지만 방어 스킬이나 지능, 마력의 차이로 실패할 때가 있었다.

마찬가지다.

압도적인 능력치의 차이 앞에선 엘리멘탈 실드도 소용없었다.

“이건…… 말도 안…….”

아도니스의 눈이 함지박 하게 커졌다.

자신이 알던 나와 지금의 나는 믿기지 못할 만큼 큰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까지 말을 잇진 못했다.

내 검이 아도니스의 정수리를 쪼갰다.

촤악!

나는 검을 한 차례 털고 주변을 둘러봤다.

수많은 어둠의 정령이 나를 감싸고 있었지만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가만히 이쪽만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랏쉬와 약속했지.’

어둠의 정령들은 모두 같은 죄를 저질렀다.

그들 역시도 균형이긴 할 것이니 소수만 제외하고 모두 불살라도 상관은 없을 듯했다.

화르륵!

쿠르릉!

뇌신이 날뛰었다.

오만의 불길은 어둠의 정령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쌌다.

그들은 갇힌 채 나 하나에 의해 농락당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눈에 띄게 숫자가 줄었다.

이후 공격을 멈춘 뒤 처음부터 끝까지 떨고 있었던 정령에게로 다가갔다. 코볼트의 모습을 한, 가장 멍청해 보이는 정령이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스, 스니…… 딸꾹! 스니퍼입니다.”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스니퍼. 지금부터 네가 살아남은 정령들의 우두머리다.”

“따, 딸꾹! 예, 예?”

“우두머리 스니퍼. 7대 죄악의 나머지를 가져와라. 안 그러면 너의 충직한 부하들이 아도니스를 따라가게 될 것이다.”

간단하게 해석해서 죽는다는 말이었다.

다행히 멍청해 보여도 알아들었는지 스니퍼가 열심히 머리를 흔들었다.

“예, 옙!”

스니퍼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벗어났다. 도망칠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나머지 살아남은 소수의 정령들을 바라봤다.

어둠의 정령들은 그저 고개만 숙인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전의를 완벽하게 상실한 것이다.

“너희는 패배했다.”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

다시금 패배를 각인시키고자 함이었다.

소수지만 살려 준 건 승자의 자비요, 정령계의 균형을 위해서다.

내가 굳이 균형을 지켜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어둠의 정령은 잘만 써먹으면 요긴 한 존재다. 그들이 물건을 구해 오는 능력은 뛰어나기 그지없으니까.

후에 모든 일을 끝낸 뒤, 소수만 살려 둬서 수족으로 사용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나는 시선을 들었다.

시스템으로 향하는 거대한 문이 두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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