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간단하게 몸을 단장한 후 대신전 부지 안에 있는 약초원으로 향하는 것이 에블리야의 신녀 시그리드의 하루를 여는 일과다.
대신전은 약초신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약초를 다스리는 신을 섬기고 있다. 에블리야의 백성들이 믿는 이 약초신은 귀중한 약초를 이 세상에 내려주신 자비로운 신으로 널리 숭배받고 있다.
시그리드는 그 신을 섬기는 신녀다.
대신전에는 약초를 키우고 관리하기 위한 설비가 갖춰져 있다. 한마디로 약초원 같은 느낌인데, 한 바퀴 돌려면 빠른 걸음으로 15분이 넘게 걸릴 만큼 매우 광대하다.
시그리드는 매일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약초원을 둘러본다.
약초원을 관리하는 것은 대신전의 젊은 신관과 무녀들의 일이고 시그리드가 직접 약초에 손을 댈 일은 없다.
좌우의 색이 다른 신비로운 눈동자──신의 눈을 갖고 태어난 신녀는 대신전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이며, 신분이 낮은 자들처럼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철이 들 무렵부터 철저하게 가르침을 받았다.
시그리드는 자신의 출신을 모른다. 에블리야에서는 태어난 딸이 신의 눈을 갖고 있다는 걸 알면 즉각 부모와 떼어놓기 때문이다.
신의 눈을 지닌 신녀가 나타나면 그야말로 온 나라가 축제라도 열린 것처럼 들뜬다. 그리고 아이는 대신전에 바쳐진다. 물론 기억나진 않지만 시그리드가 대신전에 바쳐질 때 신녀의 눈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신전으로 몰려왔다고 한다.
역대 신녀들은 대신전에서 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그래서 시그리드는 육친의 애정을 모른다.
많은 신관과 무녀들에게 둘러싸여 자란 시그리드는 가족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신녀의 역할은 제사를 드리고 에블리야를 위해 매일 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신녀는 신의 신부로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이성과는 말 한마디도 나눠서는 안 된다.
쓸쓸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다. 하지만 그 쓸쓸함에도 이젠 익숙해졌다.
법도와 계율에 꽁꽁 얽매여 있는 시그리드에게 아침 일찍 약초원을 산책하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싱그러운 아침 공기를 듬뿍 머금은 약초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즐겁고, 계절마다 피는 꽃들 덕분에 기분도 늘 새로웠다.
지금은 초여름.
부드러운 색채의 봄꽃들이 지고 생명력 넘치는 녹음이 짙게 자라나는 선명한 계절이 시작되었다.
겨울이 길고 눈이 내릴 때가 많기 때문에 에블리야의 백성들은 모두 여름이 찾아오면 밤새 춤을 추고 놀며 기뻐한다.
“원래는 슬슬 초여름 축제 준비를 해야 할 시기인데…….”
국내 정세가 급변한 탓일까, 요 반년 동안은 대신전도 왕궁도 경비가 삼엄하다. 축제는커녕 백성들이 약초를 구하러 대신전을 찾아오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야말로 대신전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왕도에 유통되는 값비싼 약초를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이곳의 약초가 유일한 의지일 텐데.
무거운 세금을 견디다 못해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그 폭동을 지휘하는 용맹한 청년들이 있다는 것은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다. 왕족들이 지금 그 진화작업에 애를 먹고 있다는 것도.
이른 아침의 산책은 제대로 숨도 쉴 수 없는 생활 속의 작은 휴식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상황이 달랐다.
생각에 잠겨있던 시그리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궁 쪽에서 연기가……?”
아침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신전과 에블리야의 왕궁은 같은 부지 안에 자리 잡고 있기는 하지만 왕궁으로 가려면 말을 전속력으로 몰아도 최소한 30분은 걸린다.
대신전은 숲에 둘러싸여 있다.
시그리드의 경우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가마를 타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찾아갈 만한 용건 따윈 없었기 때문에 왕궁에 가본 적은 없다.
제사가 있을 때에는 설령 국왕이라 해도 대신전으로 오는 것이 관례다.
“시그리드! 여기 있었구나!”
“푸셰르, 안녕.”
푸셰르는 대신전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소녀로, 시그리드처럼 비단을 듬뿍 사용한 드레스가 아닌, 산뜻한 면 옷에 청결한 에이프런을 걸치고 있었다.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카락과 또랑또랑한 갈색 눈동자를 지닌 이 밝고 활발한 소녀는 시그리드의 비밀 친구이기도 하다.
광대한 약초원 저편에서 달려온 푸셰르의 얼굴을 본 순간 시그리드는 가느다란 눈썹을 의아한 듯이 찡그렸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니?”
대신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때문에 주방은 늘 몹시 바쁘다.
아직 아침 식사 준비를 해야 할 시간에 주방 담당인 푸셰르가 약초원에 있는 것은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시그리드와 푸셰르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친구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큰일이 벌어지기 때문에 보통은 복도에서 얼굴을 마주쳐도 절대 말을 걸지 않는다.
오후 무렵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나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푸셰르가 시그리드를 몰래 찾아와야 겨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조금은 복잡한 관계다.
시그리드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알려지면 푸셰르는 목이 날아가고 말 것이다. 대신전의 계율은 엄격하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시그리드도 푸셰르도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며 우정을 쌓아왔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불행해지는 것은 이제 두 번 다시 싫어.
“큰일……났어!”
꽤 긴 거리를 달려왔는지 푸셰르는 어깨를 들썩이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초여름이긴 하지만 아침은 아직 쌀쌀한 날씨인데도.
시그리드는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한 푸셰르의 어깨를 허둥지둥 붙잡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왕궁에 불이라도 났니?”
마른 등을 쓰다듬어주며 묻자 푸셰르가 기침을 삼키며 시그리드의 팔을 움켜잡았다.
“도망쳐, 빨리……!”
“뭐?”
“왕궁이, 함락됐어……. 어젯밤 에일린의 전 왕자가 병사들을 끌고 왕궁을 공격했대.”
“뭐……!”
에일린.
그 이름은 시그리드도 알고 있었다.
강대한 군대를 거느린 에블리야가 10여 년 전 영토 확대를 위해 급습이라는 비겁한 수단으로 침략한 나라다. 에일린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폭동을 일으키기 전까지 에블리야는 온갖 나라와 호전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압정에 시달려 자유를 추구하는 반란군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에일린의 왕자.
폭정을 견디다 못한 에블리야 백성들을 위해 반란군을 조직한 청년으로, 지금은 에블리야에 흡수된 전 에일린의 백성들도 반란군에 가담하고 있다.
처음에는 에일린의 잔당들이 주축이 된 소규모 세력이었으나 왕자의 인품과 행동력, 뛰어난 지력과 무력에 이끌려 에블리야 백성들도 일어서서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이미 몇 번의 싸움으로 무훈을 세운 왕자는 양국의 백성들로부터 영웅이라 불리며 칭송받고 있다.
“그럼 국왕 폐하는?”
교활하고 욕심 많은 에블리야 국왕은 마음대로 나라를 조종하고 친아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도 절대 허락하지 않았지만 요 몇 년 동안 완전히 노쇠하여 병석에 눕고 말았다.
그가 자랑하던 군대는 완전히 통제력을 잃었으며 병사들 중에는 군을 배신하고 반란군에 투항하는 자들도 많다는 사실을 시그리드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물론 제일 먼저 도망쳤어. 마차에 실을 수 있는 만큼 재물을 싣고. 왕세자와 다른 왕족들도. 왕궁에는 이제 왕족들은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을 거야, 틀림없이.”
푸셰르가 비아냥을 듬뿍 담아 내뱉듯이 말했다.
대신전에서 관리하는 귀중한 약초를 판매해서 벌어들이는 이득을 독점하여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던 탓에 에블리야 백성들은 대부분 왕족들에 대해 회의적이다. 대신전에서 일하는 푸셰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시그리드는 그런 정보도, 일반적으로 상식이라고 불리는 지식들도 전부 푸셰르에게 배웠다. 대신전에서 배운 것은 제사와 예의작법, 그리고 약초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뿐.
다른 것들은 아마 갓난아기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수준일 것이다.
“에블리야 군대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도망쳤대. 기가 막혀서. 평소에는 그렇게 잘난 척하던 주제에 정작 중요할 땐 도망치다니, 한심하긴.”
왕도의 대가족 틈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푸셰르는 시그리드와 같은 나이인데도 세상물정에 무척 밝았다. 시그리드는 그것이 부러웠다.
태어나자마자 대신전에 바쳐지는 바람에 시그리드에게는 부모님의 기억도, 따뜻한 가족의 기억도 없다. 다만 부모님은 마지막까지 시그리드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반항했다는 얘기만은 들은 적이 있다. 그 후 부모님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럼 왕궁은 이제 에일린의 손에 떨어진 거야? 시녀와 하인들은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을까.”
“대부분 무저항으로 투항했고 군의 병사들도 거의 배신하고 그들 편으로 돌아섰다고 왕궁에서 일하는 친구한테 들었어. 에일린의 병사들도 저항하지 않으면 험하게 굴지는 않겠다고 했대. 하지만 시그리드 넌 달라. 빨리 도망쳐.”
일반 시민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시그리드는 에블리야 대신전의 정점에 서 있는 신녀다.
그래서 푸셰르는 왕궁의 친구에게 소식을 듣자마자 시그리드에게 달려온 것이다.
“시그리드 넌 잡히면 무슨 일을 당하지 몰라.”
방탕한 왕족들과는 달리 시그리드는 에블리야 백성들의 존경과 친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신의 눈을 지닌 신녀의 영향력은 아마 시그리드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왕족이 아닌 자가 대신전을 찾아가는 것이 금지된 후에도 귀중한 약초는 조금씩 조금씩 기회를 봐서 확실하게 백성들에게 전달되었다.
병들고 고통받는 백성의 가정에는 약초 사용법과 달이는 법을 알기 쉽게 자세히 적은 쪽지와 함께 상당한 액수의 금품이 곁들여져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계획을 짜거나 실제로 약초를 운반하는 것은 푸셰르와 그 가족들이었다.
이름도 밝히지 않고 다정한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이 누구인지 에블리야 백성들은 모두 알고 있다.
푸셰르는 시그리드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왕궁에서 대신전으로 이어지는 길은 숲에 가려져 있으니까 안내인이 없으면 당장은 찾아올 수 없을 거야. 이 틈에 도망쳐. 약초원 안에 있는 비밀통로를 이용해서 일단 왕도를 떠나면 널 도와줄 사람은 잔뜩 있으니까.”
푸셰르가 허둥대는 이유는 이제 알았다. 하지만.
시그리드는 걸음을 멈췄다.
“미안해, 푸셰르. 난 도망치지 않을 거야.”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되묻기 전에 길 앞쪽에서 한 청년이 나타났다. 푸셰르는 흠칫 숨을 삼켰다.
한순간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본 푸셰르는 허둥지둥 줄무늬 드레스 자락을 움켜잡고 무릎을 굽혔다.
“살림 왕자전하……! 아직 도망치지 않으셨습니까……!”
허드렛일을 하는 소녀가 왕족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라도 했다가는 무례하다며 당장 목을 베어버릴지도 모른다.
시그리드는 무릎을 꿇고 몸을 굽힌 푸셰르를 감싸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 앞에 섰다.
신전을 다스리는 신녀는 국왕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굽힐 의무가 없다.
서늘한 눈매를 지닌 살림 왕자는 왕궁에서 미모로 칭송이 자자한 청년이다.
갈색으로 보일 만큼 짙은 색의 곱슬거리는 금발과 초록색 눈동자를 지닌 이 왕족 청년을 시그리드는 예전부터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족들이 참석하는 제사에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해왔다.
“신의 눈을 지닌 신녀여. 아무래도 그 표정을 보니 사정을 들은 것 같군요. 그렇다면 굳이 설명은 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신녀의 계율에 따라 왕족들과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살림 왕자는 용건도 없으면서 때때로 훌쩍 신전을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푸셰르 같은 아랫사람들을 험하게 다루거나 실컷 혹사시키는 등 거만한 태도를 보여서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
제멋대로 구는 거만하고 난폭한 남자에게는 왕족이라 해도 호의를 품을 수 없었다.
살림 왕자가 오만하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시그리드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살림 왕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이 핥는 듯한 시선도 불쾌했다. 오만하고 난폭한 행동과 어우러져서 시그리드는 그가 어딘가 뱀 같다고 생각했다.
“놔주세요! 이게 무슨 짓이죠!”
손목을 사정없이 움켜잡힌 시그리드는 당황하며 그를 비난했다.
시그리드는 본래 남자와 대화를 나눠서는 안 된다.
또한 살림 왕자는 시그리드에게 손을 대서는 안 된다. 그것이 계율이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요!”
시그리드의 의연한 항의에 살림 왕자는 코웃음을 쳤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상상태입니다, 신녀님. 평소에는 경비가 너무 엄중해서 손도 대지 못했지만 제게는 오히려 좋은 기회지요.”
“무슨, 말씀이죠……?”
살림 왕자는 시그리드에게 설명해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는 눈치였다.
시그리드는 최대한 힘을 주며 저항했다.
“어쨌든 손을 놓아주세요!”
“왕도로 나간 후 그곳에서 마차를 탈 겁니다. 허름한 싸구려 마차지만 조금만 참으십시오. 어차피 곧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 테니까요.”
“살림 왕자전하, 신의 눈을 지닌 신녀님께 무슨 무례이십니까!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푸셰르가 용감하게 항의했다.
이미 에일린의 병사들에게 점거당한 왕궁과는 달리 대신전에는 아직 사람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렇게 큰 소리를 내면 누군가 달려올지도 모른다.
“내게 대들다니……. 용서할 수 없군. 시녀 주제에 건방진 것.”
다음 순간, 작고 가냘픈 푸셰르의 몸이 옆에 서 있는 정자의 대리석 기둥에 처박혔다. 살림 왕자가 인정사정없이 뺨을 때린 것이다.
“꺄아아악, 푸셰르!”
푸셰르는 힘없이 그 자리에 쓰러져서 눈을 감고 축 늘어졌다.
혹시 머리를 부딪친 건 아닐까. 시그리드는 재빨리 살림 왕자의 손을 뿌리치고 푸셰르에게 달려갔다.
고급 비단을 듬뿍 써서 만든 드레스가 흙에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시그리드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의식을 잃은 푸셰르의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이런 난폭한 짓을! 푸셰르, 정신 차려!”
“하녀 한 명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보다 빨리 따라오십시오. 이제 곧 놈들이.”
“전 여기 남겠어요. 당신과 함께 가지 않을 거예요!”
발끈하며 시그리드도 때리려는 것처럼 주먹을 움켜쥔 살림 왕자는 다음 순간 흠칫 숨을 삼켰다.
두두두. 규칙적으로 울리는 말발굽 소리.
에일린의 기마병들이 대신전에 도착한 것이다.
에일린의 왕자가 지휘하는 군대는 에일린인과 에블리야인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명령체계가 잘 잡혀있고 통솔도 완벽했다.
“할 수 없지. 지금은 일단 물러가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신의 눈을 지닌 신녀님.”
살림 왕자가 원망스럽다는 듯이 시그리드를 노려보며 그런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는 대체 뭘 하러 찾아온 것일까. 시그리드는 도통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숲 근처에 말을 매어뒀는지 난폭한 채찍 소리와 말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늘 정적에 감싸여 있던 대신전도 이변을 눈치챈 사람들의 당황과 불안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시그리드는 좀처럼 의식을 찾지 못하는 푸셰르의 몸을 감싸듯이 계속 끌어안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는 약을……. 라우하우 잎을 따야 되는데…….”
라우하우 잎의 즙을 짜서 입 안에 몇 방울 떨어뜨리면 의식을 되찾을 수 있다. 하지만 푸셰르의 몸을 안은 채로는 멀리 있는 잎을 따러 갈 수도 없다.
무녀와 신관들이 시그리드를 발견하고 삼삼오오 약초원으로 몰려왔다.
무녀들은 시그리드가 소중한 듯이 감싸고 있는 푸셰르의 모습을 보고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녀님, 그 하녀는 대체……?”
“……다쳤어요. 치료를 부탁해요.”
시그리드는 푸셰르를 무녀들에게 맡긴 후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대신전에는 성직자나 약초와 관련된 사람들밖에 없다. 아마 병사들의 숫자는 그 3배 정도는 가볍게 넘을 것이다.
에일린의 병사들은 결코 난폭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똑같은 군복을 입고 절도 있게 행동했으며 움직임에도 군더더기가 일절 없었다.
병사들은 시그리드와 신전 사람들을 조금 멀리서 둘러싸듯이 서 있었다.
무기를 들고 있지만 함부로 공격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에블리야 대신전의 신녀님이십니까?”
병사 한 사람이 정중하게 물었다.
“그래요.”
병사들이 신속한 태도로 시그리드의 손을 뒤로 꺾어서 구속했다. 당사자인 시그리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굳이 이러지 않아도 난 도망칠 생각도, 숨을 생각도 없어요.”
오른쪽은 보라색, 왼쪽은 은색 눈동자.
각각 최상급의 아름답고 신비한 눈동자에 병사들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시그리드는 이런 순간에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신의 눈. 즉 두 눈의 색이 다른 것은 신에게 사랑받는 특별한 증거라고 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에게 이 색이 다른 눈동자는 기이하게만 비쳐질 것이다.
“레온하르트 님, 이쪽입니다! 신의 눈을 지닌 신녀를 잡았습니다!”
젊은 병사가 그렇게 외치자 대신전 안에서 한 청년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내부를 자세히 점검하며 돌아다녔는지 뒤에는 몇몇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쓸데없는 장식이 없는 군복을 입고 허리에 커다란 사벨을 차고 있었다. 검을 뽑지는 않았다. 허둥지둥 도망쳤다는 에블리야 왕족들과는 달리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사벨 외에도 시그리드의 키만 한 커다란 활을 등에 메고 있었다.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청년이 느닷없이 시그리드의 턱을 움켜잡았다.
시그리드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병사에게 뒤로 팔을 잡혀 있어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아파…….”
“네가 신의 눈을 지닌 신녀인가. 눈을 보여라. 가짜인지 진짜인지 확인해봐야겠다.”
가짜……?
──실례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가짜가 아니다.
시그리드는 각오를 하고 상대에게 신의 눈이 확실하게 보이도록 고개를 들었다.
뺨에 흘러내렸던 금발이 바람에 사라락 흩날려 하얀 얼굴과 그 안에서 빛나는 보석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청년은 시그리드의 두 눈을 보고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눈을 깜빡거리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그녀를 응시했다.
“레온하르트 님, 신의 눈을 지닌 신녀가 틀림없습니까?”
측근인 듯한 장년의 남자가 물었지만 레온하르트라고 불린 청년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오로지 시그리드를 계속 응시할 뿐. 그 눈빛은 시그리드의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 정도였다.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시그리드는 지지 않겠다는 듯이 등을 꼿꼿이 펴고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에일린 왕가의 특징인 검은 머리에 검은 눈. 피부는 햇볕에 그을린 갈색. 온몸이 탄탄하게 단련되어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장신의 남자.
이목구비는 야성적으로 보일 만큼 날카롭고 늠름했으며 입술은 그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처럼 일자로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그리드의 눈길을 끄는 것은 뺨의 커다란 상흔이었다.
단정하고 남자다운 얼굴 속, 오른쪽 눈 아래에서 뺨에 걸쳐 커다란 칼자국이 비스듬하게 새겨져 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몹시 무서워 보이는 그 상처가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한층 예리하고 사나워 보이게 만들었다.
사내다운, 젊은 매 같은 청년이었다.
──이 사람이 에일린의 왕자, 에블리야 백성들에게 영웅이라고 불리는 사람……?
레온하르트는 목 안으로 낮게 으르렁거리며 느닷없이 시그리드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시그리드의 팔을 구속하고 있던 병사가 황급히 손을 놓았다.
“꺄악.”
갑작스러운 상황에 발이 긴 드레스 자락에 걸렸다. 시그리드는 그대로 레온하르트의 품속에 쓰러지고 말았다.
“저런.”
긴 왼팔이 그녀를 단단히 받쳤다. 남자의 품에 안겨있다는 사실에 시그리드는 귀까지 새빨개지고 말았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시중을 드는 자나 교육 담당은 물론 의사조차 모두 여성이었는데.
“놔줘요……!”
군복에 감싸인 탄탄한 가슴을 밀치며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시그리드를 구속하고 있는 그의 한쪽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그리드의 저항 따윈 모기에게 물린 것만큼도 느껴지지 않는지 점점 더 힘을 줘서 끌어안았다.
남자의 힘은 시그리드가 지금까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했다. 시그리드의 가느다란 팔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왕궁을 제압했다. 에블리야는 내 손안에 있다.”
“……알아요.”
레온하르트가 시그리드를 내려다보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밤 시중을 명한다. 거절은 용서하지 않겠다. 전리품을 얻는 것은 승자의 당연한 권리니까.”
그 의미는 세상물정 모르는 시그리드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정확하게 이해할 때까지는 잠시 시간이 걸렸지만.
“그런……! 나는 에블리야 대신전의 신녀예요. 남성과는 본래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몸이에요.”
“에블리야의 계율 따윈 나와는 상관없어. 이제 이 나라는 내가 지배한다. 대신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고 싶으면 내 명령을 따라라. 성스러운 신녀를 장난감으로 만드는 것도 하나의 여흥이지.”
고압적인 그 말에 시그리드는 레온하르트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일부러 시그리드를 품 안 깊숙이 끌어안은 채 그녀가 항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파렴치하게 시그리드의 허리를 끌어안고 부드러운 목덜미에 멋대로 코끝을 묻었다.
처음 겪어보는 청년의 무례한 행동에 지나치게 충격을 받은 나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군복 한 겹 너머로 닿아있는 몸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이 비겁한……!”
분한 마음에 이를 악물긴 했지만 시그리드는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그리드뿐만이라면 몰라도 대신전 사람들 모두의 목숨과 바꿀 수만 있다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태양이 완전히 떠오르고 약초원을 감싸고 있던 아침 안개가 걷혔다.
밝은 햇살 아래 청년의 품속에서 저항하는 시그리드의 길고 풍성한 엷은 금발이 반짝반짝 빛났다. 하얀 피부도 햇살에 녹아들어 이 세상 모든 신들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성스럽고 아름다웠다.
초라하리만치 장식 없는 드레스도,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도 그녀의 매력과 사랑스러움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못했다. 신비로운 눈동자와 누구나 첫눈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기적처럼 섬세한 미모.
레온하르트는 목 안으로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거리며 냉혹하게 덧붙였다.
“뭐라고 해도 상관없다만…… 내 기분을 상하게 하면 어떻게 될지는 알고 있겠지. 나는 참을성이 많은 편이 아니야.”
움찔. 시그리드가 몸을 떨었다.
작은 동물처럼 겁에 질린 눈동자가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제가 시키는 대로 하면 대신전 사람들은…….”
“약속하지.”
레온하르트의 대답은 간결했다. 더 이상은 망설일 수 없었다.
“안 됩니다, 신녀님!”
“그래요. 저희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경애하는 무녀장들과 대신관들의 말도 이번만큼은 들어줄 수 없었다.
깊고 천천히 숨을 내쉰 후 시그리드는 조용히 무릎을 굽혔다.
“당신의 뜻대로──.”
레온하르트가 시그리드를 다시 찾아온 것은 밤이 깊은 후였다.
그 후로 시그리드는 레온하르트와 함께 말을 타고 반쯤 납치되듯 왕궁의 처소로 끌려갔다.
넓지만 쓸데없는 장식품은 아무것도 없는, 커다란 침대만 서둘러 가져다 놓은 듯한 방이었다. 아마도 왕족들이 도망칠 때 방 안의 재물을 챙길 수 있는 만큼 챙겨 갔기 때문인 모양이다.
대신전에서 시그리드의 잡다한 소지품을 옮겨와도 방 안은 아직 넓었다.
검소함을 중요시하는 대신전에서 살아온 시그리드에게는 그 넓이만으로도 망연해질 정도였다.
이어져 있는 방도 몇 개나 되고 안쪽 침실 창문 너머에는 광대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대신전의 방은 이렇게까지 넓지 않고 오히려 아담한 편이었지만 오랫동안 살아온 익숙한 방인 만큼 나름대로 애착도 있었다. 낮에는 기도실에 있을 때가 많기 때문에 방에서 혼자 조용히 지내는 시간은 귀중한 휴식 시간이었다.
시그리드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왕궁 중앙의 집무실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소란스러움과 격리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익숙해지면 나름대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방이다. 정원과 마주하고 있어서 바람도 잘 들고 지내기에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본래 귀한 손님을 위해 마련해놓은 객실인 듯했다.
정원에 샘이 있는지 공기 속에 희미하게 물 냄새가 섞여 있었다.
물 냄새는 좋아하지만 동시에 슬픈 기억도 되살아났다.
“방에서 나오는 건 금지다. 당분간 편하게 지내라.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라.”
몹시 간결한 명령을 남기고 레온하르트는 서둘러 방을 떠났다. 시그리드는 하루 종일 오로지 대신전을 걱정하며 시간을 보냈다.
계속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던 푸셰르도 걱정되고, 대신관을 비롯한 사람들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난폭한 짓을 하거나 귀중한 약초원을 짓밟지는 않을까.
시그리드의 시중은 왕궁에서 일하는 시녀들이 아닌 에일린의 병사들이 맡았다. 제압한 지 얼마 안 돼서 에블리야인들은 어디론가 한꺼번에 쫓아낸 모양이다.
일상적인 물품과 기호품 등이 에블리야 병사들의 손에 차례차례 운반되었다.
레온하르트는 낮 동안 도망친 왕족들을 추적하고 진군할 때 일부 파괴된 왕궁 내부를 수복, 잔당이 숨어있지는 않은지 철저하게 순찰하고 연락계통 등 필요한 모든 수단을 단시간에 놀라울 만큼 효율적으로 정비했으나 물론 시그리드는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당분간 어수선한 것은 어쩔 수 없지. 도망친 것처럼 꾸미고 나라 안에 잠복해 있는 왕족도 많을 거다. 놈들에게는 측근 귀족들도 있다. 대부분 이쪽에 투항했지만 마음속은 과연 어떨까. 이용할 수 있는 놈들은 이용하고 에블리야 국왕과 왕족의 신변은 확실하게 구속해라. 잠복처의 뒷배만 알면 그다음은 어떻게든 교섭할 수 있다.”
“국외로 도망쳤다면 교류가 있는 나라에서 보호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에블리야를 적대하던 나라라면 몰라도 울룰르 근방 국가로 망명했다면 조금 골치 아파집니다. 울룰르에는 선대 왕녀가 선대 국왕과 혼인해서 사적인 교류가 있다더군요.”
레온하르트가 심복 레빅과 이야기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레온하르트의 아버지 연배인 레빅은 레온하르트가 소년일 때부터 그를 모시던 심복 부하다. 대신전에서 왕궁으로 옮겨질 때 레온하르트에게 간단하게 소개를 받아서 얼굴과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다.
문 너머 회랑에는 늘 두 사람의 보초가 서 있다. 이 방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시그리드가 도망치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다.
시그리드에게 도망칠 생각 따윈 없건만.
──내가 알고 있는 건 자유롭게 이 방을 나갈 수 없다는 것뿐.
시그리드는 한숨을 쉬었다.
넓은 방에 혼자 있어도 이래서는 숨이 막혀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본래 대신전의 자유롭지 못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괴롭지는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레빅이 정중하게 머리를 숙인 후 절도 있는 동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문득 시그리드를 힐끔 훔쳐보았다.
그 시선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시그리드는 가볍게 시선을 떨궜다.
에일린 사람에게 나는 별로 달가운 존재는 아닌가 보구나.
에일린은 에블리야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사막을 거느린 풍요로운 국가였다. 뛰어난 기마술과 용맹한 국민성으로 유명하다.
그 풍요로움에 눈독을 들인 에블리야 국왕이 전쟁을 일으켜서 그 땅을 억지로 빼앗고 말았다.
당시 에일린의 왕위계승권을 지닌 자들은 대부분 처형당했으며 그 잔학함에 주변 제국은 두려움에 떨었다고 들었다.
레온하르트는 약초원에서 봤을 때와 똑같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다만 옷깃을 느슨하게 여미고 버튼도 풀어놓아서 안에 입고 있는 하얀 셔츠가 엿보였다.
왕궁을 제압했으면서도 피 한 방울 튀어있지 않고 부상을 당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에블리야 왕족과 군대는 에일린의 군대와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친 것일까. 왕족은 에블리야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왕도와 그 밖에 다른 곳에 있는 에블리야 백성들은 어떻게 됐는지 시그리드는 알 방도가 없었다.
보초병들은 시그리드가 뭘 물어도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저을 뿐.
──평소에는 이럴 때면 푸셰르가 몰래 가르쳐주러 왔었는데……. 괜찮을까. 크게 다치지는 않았어야 할 텐데…….
달칵. 문득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
움찔하고 뒤를 돌아보자 레온하르트가 허리에 차고 있던 사벨을 풀고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고 있었다. 활은 이미 어딘가에 놓아둔 모양이다.
시그리드는 그 일련의 동작을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잠자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군복 안쪽에는 손때 묻은 단도가 숨겨져 있었다.
“나는 에블리야의 국왕 대리로서 나라를 정비할 생각이야. 그리고 시기를 봐서 정식으로 즉위할 거다.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만.”
뒷말은 시그리드를 살짝 비난하는 듯한 어조였다.
“……식욕이 없어요.”
그것도 당연하다.
갑자기 왕궁으로 끌려와서 그 후로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식욕이 생길 리가 없지 않은가.
레온하르트가 이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웃!”
시그리드는 뒤로 물러섰다.
평상복 드레스 위에 날개처럼 가벼운 숄을 걸친 시그리드는 저도 모르게 구석으로 도망쳤다.
문과 멀리 떨어져서 오히려 도망칠 곳이 없어지고 말았지만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그저 레온하르트가 다가오는 것이 무서웠다.
경계하는 새끼 고양이 같은 시그리드의 태도에 레온하르트는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남자다운 입술에도 가벼운 쓴웃음이 떠올랐다.
“잡아먹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겁먹을 것 없어.”
“겁먹지 않았어요.”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벽에 등을 찰싹 대고 서 있던 시그리드는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 같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다리가 자꾸만 후들후들 떨렸다.
밤 시중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다. 레온하르트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녀는 성적인 지식을 일절 배우지 않고 자랐다.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걸까……?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고 강한 척해도 이제부터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음이 불안으로 꺾여버릴 것만 같았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시그리드를 바라보던 레온하르트는 문득 방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시그리드의 허리에 팔을 감고 가볍게 안아들었다.
시그리드를 안아서 애마에 함께 태우고 올 때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몸이 놀랄 만큼 가볍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좀 더 많은 영양을 섭취하라고 강요하고 싶어질 만큼.
품에 안긴 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모든 곳이 작고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하얀 피부에서는 좋은 향기가 풍겼다.
“……좀 더 살이 있어야겠군. 살을 찌워라.”
레온하르트에게 안겨서 뻣뻣하게 굳어있던 시그리드가 놀란 듯이 보라색과 은색 눈을 깜빡거렸다.
레온하르트는 가냘픈 몸을 최대한 살포시 침대에 앉혔다.
맨발에 신고 있던 작은 꽃장식이 달린 실내용 슬리퍼도 커다란 손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벗겨버렸다.
“마셔라. 조금 진정될 거다.”
레온하르트가 침대 위에 한쪽 무릎을 올렸다.
그가 떨리는 산호색 입술에 직접 닿을 정도로 가까이 내민 것은 섬세하게 세공한 유리 고블릿이었다. 바닥은 금 토대로 뒤덮여 있었다.
고블릿에 담긴 액체에서는 익숙한 벌꿀의 부드러운 향기가 났다.
“……고마워요.”
벌꿀로 만든 달콤한 음료수는 시그리드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목도 말랐기 때문에 시그리드는 순순히 고블릿을 받아들고 안에 든 음료를 마셨다.
꿀꺽. 달콤한 액체가 기분 좋게 목을 타고 흘러내려 갔다. 그러나 시그리드는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늘 마시던 꿀물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목 안쪽이 화악 뜨거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 탓일까.
보아하니 침대 위에 한쪽 무릎을 얹은 레온하르트도 같은 고블릿에 담긴 액체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남자다운 목이 아래위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시그리드는 새삼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남자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올 줄이야.
시그리드의 고민을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레온하르트가 한쪽 손으로 병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더 마시겠나.”
“아뇨, 이제 충분해요.”
“벌꿀을 싫어하나? 여자니까 달콤한 걸 좋아할 줄 알고 이걸 골랐는데.”
“……벌꿀은 좋아해요. 달콤한 것도.”
“식욕이 없어도 조금은 먹어라. 가벼운 과자라도 갖고 오라고 할까? 아니면 지금부터 뭔가 만들라고 할까. 뭘 좋아하지? 말해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바람에 시그리드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늦은 밤에 강제로 일어나야 하는 주방 담당이 불쌍하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다들 지쳐 있을 텐데.
“그런 고급음식은 대신전에서는 좀처럼 맛볼 수가 없어서……. 별로 먹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몰라요. 벌꿀에 절인 과일은 좋아하지만 지금은 음료수만으로도 충분해요.”
시그리드에게 달콤한 음식이란 계절마다 먹을 수 있는 과일이 거의 전부였다. 그리고 약초원에 벌이 있어서 벌꿀 음식도 비교적 식탁에 자주 오르는 편이다.
“벌꿀절임? 어이가 없군. 위선을 떨어봤자 소용없어.”
레온하르트가 코웃음을 쳤다.
“너라면 원하는 건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달콤한 음식은 물론 극상의 진미도, 비단도 보석도 뭐든 마음대로 가질 수 있지 않았나.”
“사치해서는 안 된다고 엄격하게 가르침을 받아서…….”
레온하르트는 어이없어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방 안을 훑어보았다.
필요한 것은 대신전에서 가져오라고 말해뒀지만 방 안의 물건은 별로 늘지 않았다.
그나마 가져온 물건은 거울과 빗 등 자질구레한 애용품뿐. 전부 잘 손질되어 있긴 하지만 장식이 없고 에블리야의 신녀가 사용하던 물건치고는 지나치게 소박했다.
방 안에는 촛불도 몇 개 밝혀져 있었다. 그 불빛 속에서 레온하르트는 새삼 신의 눈을 지닌 신녀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끄러미 응시했다.
남자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처럼 길게 늘어뜨린 윤기 있는 머리카락.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부드럽게 남자를 유혹하는 피부.
작고 하얀 얼굴에 담겨있는 단정한 콧날도, 과일처럼 사랑스러운 입술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도 레온하르트를 감탄하게 만드는 것은 서로 색이 다른 눈동자였다.
제비꽃과 은빛 별.
덧없는 아름다움이 이 눈동자 속에 응축되어 있었다.
드레스는 분명 질이 좋아 보이는 엷은 분홍색 비단으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모양 자체는 무척 간소했다. 반지나 목걸이 같은 장식품은 어울릴 법한데도 일절 걸치고 있지 않았다.
작은 입술에는 연지조차 바르지 않았고 하얀 피부는 지나치게 하얘서 마치 만들어놓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해온 것은 다름 아닌 시그리드 자신이 모두 그 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에블리야의 신녀로서 사치스럽고 방탕하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잘못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레온하르트는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에블리야의 신녀는 신의 아내다. 어느 왕족보다도 우대받으며 때로는 국왕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질 수도 있다. 시그리드는 그 권리를 일절 사용하지 않은 걸까.
“……아니, 알려주지 않은 거겠지.”
조국을 침략당한 적이 있는 레온하르트는 에블리야의 국왕이 얼마나 비열한 자인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시그리드에게서 본래의 권리를 빼앗고 대신전에 가둬두는 것은 그 늙고 교활한 국왕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고블릿을 손에 든 채로 생각에 잠겨있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며 시그리드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레온하르트 님.”
둥글게 퍼진 엷은 색 드레스 자락 안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시그리드는 가련한 꽃의 요정 같았다. 그런 시그리드가 맨발로 침대를 내려와서 레온하르트에게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무릎을 꿇고 가슴 앞에 손을 모으는, 최대급의 경의를 표하는 인사였다.
“대신전의 사람들은 모두 착하고 상냥한 사람들입니다. 결코 당신을 거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귀중한 약초를 키우고 관리하는 것에만 열중하는 조용한 곳입니다. 제 몸과 바꿔서라도…… 부디 관대한 처분을 부탁드립니다.”
“……알겠다.”
레온하르트는 애처로운 것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시그리드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가 시그리드를 가볍게 안아서 다시 침대 위에 내려놓자 그녀는 작게 기침을 하며 물었다.
“푸셰르는 어떻게 됐나요……? 의식은 돌아왔나요? 몸을 굉장히 세게 부딪친 것 같던데, 혹시 다치진 않았나요? 그럴 수만 있다면 제가 간병을 하고 싶어요.”
처음 듣는 이름에 레온하르트는 눈썹을 찡그렸다.
“약초원에 있던 허드렛일을 하는 소녀예요. 당신이 오기 전에…… 사고로 기둥에 몸을 부딪치는 바람에.”
살림 왕자 얘기는 구태여 하지 않았다. 어디로 도망쳤는지도 듣지 못했고 이제 두 번 다시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 후로 계속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돼요. 대신전에 대해서는 보초병들에게 물어도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아서요.”
그들이 시그리드에게 대신전의 소식을 일절 전해주지 않는 것은 아마 레온하르트의 지시 때문일 것이다.
에블리야를 손에 넣은 레온하르트가 대신전을 어떻게 할 생각인지 시그리드는 모른다.
담담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레온하르트와의 대화는 시그리드가 상상했던 것만큼 살벌하지 않았다.
밤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밤은 조용하고 부드럽게 모든 사물을 치유하며 안식을 주는 은혜로운 시간이다.
특히 이른 아침부터 격동의 시간을 보낸 왕궁은 소란과 흥분이 가라앉은 것처럼 평온한 휴식에 감싸여 있었다.
“네가 왜 허드렛일하는 소녀를 걱정하는 거지?”
“소중한 친구니까요.”
시그리드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비밀을 자기도 모르게 털어놓고 말았다.
흠칫. 그 사실을 깨달은 시그리드는 허둥지둥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왜 그러지?”
“아뇨, 저어……. 푸셰르는 친구가 아니에요. 내가 멋대로, 저어.”
“왜 당황하는 거지? 그녀가 네 친구라도 난 아무렇지도 않다만.”
“정말요……?”
시그리드는 보라색과 은색 눈동자에 눈물을 그렁거리며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레온하르트가 다른 사람보다 장신이기 때문일까, 시그리드는 너무나도 작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앳되어 보였다.
“……대신전 사람들은 모두 상냥하지만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계율이 아주 많아요. 내가 대화를 나눠도 되는 건 몇몇 무녀들뿐이었죠. 몰래 만나는 게 발각되면 푸셰르는 참수를 당하고 말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몰래 만나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죠.”
“알았어, 알았어. 너는 그 소녀가 걱정되나 보군?”
레온하르트가 의외로 진지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시그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숨을 삼키며 신중할 정도로 천천히 시그리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윤기가 흐르는 금발을 손가락으로 살포시 쓸어내리는 그 감촉이 싫지는 않았다. 시그리드는 가만히 그 손길에 몸을 맡겼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게 이렇게 황홀한 거였나…….
눈을 감자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저도 모르게 황홀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시그리드는 레온하르트의 두 눈에 뜨거운 정욕이 깃든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내일 그 소녀의 상태를 보고하라고 말해두지. 다쳤다면 의사를 수배하겠다.”
“고맙습니다……!”
안심하며 미소 짓자 레온하르트는 마음이 놓인 것처럼 작게 한숨을 쉬었다.
푸셰르에 대한 것도 그렇고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도 그렇고, 생각했던 것만큼 거칠고 난폭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적어도 레온하르트의 손길은 무섭지 않았다.
“겨우 웃었군.”
“네?”
레온하르트가 문득 시그리드의 손가락 끝을 움켜쥐었다.
지금까지 계속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녀의 손가락은 가늘고 차가웠다.
“……?”
“떨림은 멈췄나……. 하지만 아직 손가락이 차갑군. 좀 더 마셔라. 약한 술이지만 몸이 따뜻해질 거야.”
“아까 그 고블릿 안에 담긴 건…… 술이었나요……?”
“약한 술이라 그냥 꿀물과 별로 다르지 않을 거야.”
레온하르트에게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시그리드에게는 큰 문제였다. 시그리드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작은 동작 하나하나에 풍성한 금발이 한 박자 늦게 흔들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여성스럽고 화려했다.
“술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요. 신녀는 음주의 금기를 깨서는 안 돼요.”
“너는 이제 에블리야의 신녀가 아니야. 귀찮은 계율을 지킬 필요는 없다.”
“하지만.”
“대화는 끝이다.”
“……!”
레온하르트가 시그리드를 힘껏 끌어안고 그대로 비단 시트 위에 쓰러졌다.
그의 팔에 단단히 안겨 있어서 아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시그리드는 놀라서 숨을 삼켰다. 남자가 바로 위에서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천 너머 느껴지는 레온하르트의 체온은 지독히도 뜨거웠다.
“너는 이제 신의 것이 아니야. 너의 남자는 나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거운 레온하르트의 한마디에 시그리드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뭔가 무서운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대신전을 지키기 위해 레온하르트에게 무릎을 굽힌 순간부터.
겁에 질린 눈빛의 소녀를 내려다보며 레온하르트는 또다시 엷은 금발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머리카락 한 가닥을 손가락에 감고 입술로 애무하듯 살며시 입을 맞췄다.
이토록 겁에 질린 모습을 보니 난폭한 짓을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무서워할 것 없어. 넌 그저 내게 얌전히 몸을 맡기면 돼.”
“……네, 네에…….”
긴장으로 목이 굳었다.
시그리드에게 남자 경험이 없다는 것쯤은 본인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시작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온화하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겨우 애타게 갈망했던 것을 손에 넣은 기쁨에 취해 젊은 남자답게 자꾸만 거칠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는 충동에 떠밀려 시그리드에게 입을 맞췄다.
“으읍……. 응, 으읍……!”
시그리드는 한순간 레온하르트의 품속에서 저항했지만 곧 얌전해졌다.
──나, 키스하고 있는 거야……?
책으로 읽은 적이 있다. 연인들은 사랑의 증거로 입맞춤을 한다고.
하지만 시그리드는 레온하르트의 연인이 아니다.
상상했던 것처럼 가볍게 닿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레온하르트의 입맞춤은 너무나도 뜨거워서 어지러울 정도였다.
움찔하고 몸을 긴장하자 레온하르트가 소리 없이 가볍게 웃었다.
서로 닿아있는 탓에 촉촉하게 젖어서 빛나는 레온하르트의 입술이 남자의 숨 막히는 색향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두 번째 입맞춤은 한층 농밀했다. 그의 혀가 작은 입술을 파고들어 강제로 입을 벌리고 안으로 침입했다.
“읍……. 으응.”
──숨을 쉴 수 없어……. 숨 막혀.
자유롭지 못한 팔다리를 필사적으로 버둥거리자 레온하르트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맞춤을 멈췄다.
그리고 그 대신 시그리드의 입가를 늑대처럼 사납게 핥았다. 레온하르트의 혀는 뜨겁고 까슬까슬했다.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에 시그리드는 육식동물에게 물린 토끼처럼 어깨를 흠칫거리며 떨었다.
레온하르트가 지독히 열에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그러지? 이제 와서 싫다고 해 봤자 소용없어.”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술은 산소를 들이마시느라 바빴다.
후아후아. 가슴을 위아래로 바쁘게 움직이며 헐떡이고 있을 때, 눈썹을 찡그리며 의아한 듯이 시그리드를 바라보던 레온하르트가 문득 알겠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남자와 입을 맞추는 건 처음인가.”
시그리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즐거운 듯이 웃었다.
“숨이 막히면 코로 숨을 쉬어라.”
또다시 레온하르트의 입술이 내려왔다. 시그리드는 저도 모르게 눈을 꼬옥 감았다. 그동안 레온하르트의 긴 손가락은 시그리드의 비단 드레스 매듭을 능숙하게 풀기 시작했다.
눈부실 만큼 하얀 가슴이 드러났다. 시그리드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에서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애썼다.
레온하르트는 답답한 듯이 셔츠를 벗고 먼저 맨살과 맨살이 닿는 감촉을 시그리드에게 가르쳐줬다.
몸을 가볍게 찍어 누른 후 옷을 벗기자 부드러운 살갗이 드러났다.
“무슨……. 뭘 하는 거죠……? 안 돼, 보지 말아요…….”
“너는 내 것이 되는 거야.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행위 자체는 난폭하게 느껴질 만큼 강제적이었다.
먼저 이제부터 무슨 일이 시작될지 가르쳐주는 것처럼 그가 부드러운 가슴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시그리드는 가엾을 만큼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싫어……!”
남자의 흥분을 자극하는 저항에 레온하르트의 손은 더욱 강하게 가슴의 탄력을 즐겼다. 동시에 앵두처럼 작고 귀여운 젖꼭지를 꼬집듯이 꾸욱 비틀었다.
“꺄아……!”
가슴뿐만이 아니었다.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고 종아리와 무릎 뒤, 허벅지까지 능숙한 남자의 손이 파고들었다. 그쪽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틈에 가슴에, 목에, 목덜미에 불꽃같은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레온하르트의 입술은 지독히 뜨거워서 살갗에 닿는 것만으로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굶주린 입술로 시그리드의 살갗을 핥기도 하고, 가볍게 깨물기도 하고, 하얀 피부에 붉은 멍 같은 흔적이 남을 만큼 힘껏 빨아올리기도 했다.
시그리드는 움찔움찔 떨면서도 차츰 저항할 힘을 잃었다.
“뭐죠……? 어째서, 이런……?”
가냘픈 목소리는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이 사람에게 잡아먹히는 것 같아…….
달콤하면서도 저릿한 감각에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숨이 가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달콤한 쾌감에 희롱당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하반신의 어느 부분에 저릿한 감각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지만 그것이 너무나 정숙하지 못한 감각이라는 것만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시그리드는 불안한 듯이 무릎을 살짝 세우기도 하고 다리를 뻗기도 하며 그 저릿함을 달래려고 애썼다. 이 저릿함에서 해방될 방법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두려움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달콤한 피부를 더듬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건드린 적 없는 설원 같은 피부를 정신없이 더듬고, 조금 전의 애무로 민감하게 부풀어 오른 작고 귀여운 젖꼭지를 장난스럽게 빨았다.
“싫어……!”
──이대로 계속 더듬으면 어떻게 되어버릴지도 몰라.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갑자기 견딜 수 없을 만큼 두려웠다. 시그리드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이제 핥지 말아요……. 이상해질 것 같아……!”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의 작은 부탁을 들어주기는커녕 점점 더 그녀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사에 익숙한 남자가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을 손안에서 마음껏 즐기며 두 개의 다소곳한 벚꽃색 젖꼭지를 번갈아 핥았다.
능수능란한 남자의 뜨거운 애무에 시그리드의 입술에서 높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읏…….”
젖꼭지를 입에 물고 할짝할짝 핥자 시그리드의 가냘픈 몸이 레온하르트의 품 안에서 움찔움찔 경련했다.
가냘픈 몸에 어울리지 않는 풍만한 가슴은 레온하르트의 손에 딱 맞는 크기였다.
자신에게는 없는 부드러움이 재미있어서, 고운 피부가 손바닥에 달라붙는 것 같아서,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가슴을 실컷 주무르며 즐겼다. 입술로 농밀한 애무를 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젖꼭지를 세차게 빨며 힘껏 주무르자 하복부에 달콤한 저릿함이 퍼졌다. 시그리드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목을 젖혔다.
“응, 으응……. 싫어……!”
“우는 소릴 하기엔 아직 이른데.”
레온하르트는 하반신의 은밀한 곳으로도 가차 없이 손을 뻗었다.
다리를 커다랗게 벌린 순간, 시그리드는 이번에야말로 죽어버릴 만큼 수치심을 맛보았다.
그곳은 시그리드조차 모르는 사이에 축축한 애액에 젖어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남자답게 웃으며 손가락 끝으로 비부에 고인 애액을 훑었다.
“벌써 젖었군.”
“싫어……! 건드리지 말아요, 제발……!”
“그렇게 겁먹을 만한 짓은 하지 않았는데…….”
레온하르트는 혼란에 빠진 시그리드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는 아직 시작에 불과해. 무서워할 것 없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그는 행위를 계속했다.
긴장하면서도 축축하게 젖어있는 그곳에 천천히 손가락이 침입했다.
부드러운 애무로 음부의 긴장이 풀어질 때마다 손가락은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어 질척질척 음란한 소리를 울리며 질 안을 휘저었다.
“싫어…….”
시그리드는 더 이상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레온하르트의 탄탄한 몸 아래에서 몸부림쳤다.
부드러운 내벽을 비비고 휘젓는 감촉. 시그리드의 음부는 레온하르트의 손가락에 지배당했다.
레온하르트가 살짝 부풀어 오른 클리토리스를 간지럽히듯이 자극하며 비틀었다.
“거긴…… 만지지 말아요…….”
축축한 혀가 귓불을 핥았다.
레온하르트의 애무는 너무나도 강렬했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타인과 접촉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달콤하고 강하고 격렬한, 너무나도 강렬한 손길.
레온하르트는 소중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서둘지 않고 차근차근 그녀를 고조시켰다.
“……?”
문득 작은 전류 같은 것이 시그리드의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기이할 만큼 달콤한 감각에 눈물로 젖은 눈을 깜빡거리고 있을 때 레온하르트가 씨익 웃었다. 시그리드의 몸 안에서 한층 민감한 부분을 찾아낸 그는 곧 음란한 장난을 시작했다.
“여기인가.”
움찔. 시그리드의 몸이 떨렸다.
“아, 아아아.”
가볍게 비비는 것만으로도 움찔움찔 경련하는 그곳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문질렀다.
가볍게, 강하게, 누르는 것처럼, 잡아당기는 것처럼. 거칠게 공격하는 것처럼, 애태우는 것처럼.
“아, 안 돼……. 거긴, 안 돼애……!”
하반신을 자유자재로 희롱당할 때마다 몸이 뼈부터 흐물흐물 녹아버릴 것만 같아서 시그리드는 겁에 질려 저항했다. 다리 사이에서 뭔가가 흘러나오는 듯한 위험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만……!”
시그리드의 몸에 뭔가가 찾아왔다. 쾌감의 정점에 달한 것이다.
거부하는 시그리드를 즐거운 듯이 내려다보며 레온하르트는 한층 강하게 그녀를 자극했다.
“아앗, 아…… 아앗──!”
음부에서 흘러나온 음란한 애액이 하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절정에 달한 시그리드는 힘없이 몸을 늘어뜨린 채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가차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절정을 맞이한 순결한 몸을 더욱 자극하여 절정의 쾌감과 육체의 기쁨을 그녀의 몸에 더 철저하게 새겼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하반신이 떨렸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고 쾌감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뺨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싫어, 이젠 싫어어!”
레온하르트의 뜨거운 몸에 깔린 채 시그리드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몸을 뒤틀었다. 그때마다 드레스가 점점 흐트러지는 것을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시그리드가 겁에 질려 칭얼거릴 때마다 레온하르트는 그 이상의 쾌감으로 그녀를 녹여서 사랑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레온하르트의 방법은 조금 투박했지만 그녀의 몸을 확실하게 녹였다. 촛대의 불빛만이 일렁일렁 음란하게 흔들렸다.
시그리드는 온몸을 괴롭히는 저릿한 감각을 견디지 못하고 양팔을 뻗어 도움을 청하듯 레온하르트에게 매달렸다.
“이제, 더 이상은……. 도와줘요, 제, 발…….”
익숙하지 않은 술기운 때문일지도 모른다. 온몸을 괴롭히는 저릿한 감각은 지독히도 달콤했다.
──나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이런 감각은 처음이다. 머릿속이 흐릿하고 뜨거워서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둥실둥실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물속을 떠도는 듯한 느낌.
──이게 남녀의 정사라는 걸까……?
시그리드는 혼란스러우면서도 도취되고 말았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달콤한 과자를 쥐여준 것보다 더욱 기뻐해 날뛰며 레온하르트가 주는 쾌감에 취했다.
“으응…….”
애써 억누르는 듯한 한숨이 레온하르트의 귀에 들려왔다. 그를 감싸고 있던 공기가 단숨에 거칠게 변했다.
“……이제 괜찮을 것 같군.”
“꺄아……!”
몸 안에서 애액이 듬뿍 묻은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움찔. 시그리드는 몸을 떨며 고개를 젖혔다. 계속해서 주어지는 쾌락을 더 이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땀에 흠뻑 젖은 드레스를 전부 벗겨내는 동안에도 시그리드는 시트에 힘없이 몸을 묻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고 반쯤 일어서서 바지춤을 풀었다.
처음으로 본 남성의 성기는 사납게 솟아서 흉악할 만큼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 순간 지금까지 둥실둥실 떠 있는 듯한 쾌락에 취해 있던 시그리드는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할지 명확하게 깨닫고 진심으로 공포에 질렸다.
“시, 싫어……!”
하얀 등을 휘며 도망치려고 했지만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몸을 찍어 누른 후 다리를 커다랗게 벌리고 자신의 꼿꼿하게 선 욕망을 갖다 댔다.
충분히 풀었으니 고통은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레온하르트도 시그리드의 음란한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이미 한참 전에 인내의 한계를 넘고 말았다.
그녀의 음부는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뜨겁고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 싫어, 안 돼……. 안 돼, 뜨거워…….”
천천히, 신중하게 몸 안으로 침입하자 시그리드가 작은 얼굴을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었다.
능숙한 남자 앞에서 소녀의 저항 따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오히려 점차 관능적으로 변해가는 목소리는 레온하르트를 흥분시키는 극상의 음악과도 같았다.
레온하르트는 신음했다.
“……훌륭한 몸이군. 음란하게 남자를 녹이고 취하게 만드는……!”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얗고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다리에 레온하르트는 감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얗고 순결했다. 지금까지 용케 탐욕스러운 에블리야 왕족의 먹이가 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만큼 이 나라에 신앙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제 시그리드는 레온하르트의 것이다. 신이건 백성이건 누구에게도 시그리드는 넘겨줄 수 없다.
시그리드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레온하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시그리드만을 원했다.
에블리야가 이미 내부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 해도 에일린의 왕자였던 그가 제국에 흩어져서 잠복해 있던 중신들을 비밀리에 불러 모으고, 에블리야의 집요한 수색을 피해 반란군을 조직하기까지는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때로는 배신당하고 때로는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 모든 노력의 결정이 바로 오늘 밤이다.
구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레온하르트는 여기서 시그리드를 가엾게 여겨 행위를 중단할 만큼 미적지근한 사내가 아니었다.
“그만해요. 무서, 워…….”
지금까지의 애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뜨거움과 단단함을 지닌 것이 여태껏 아무것도 몰랐던 부드러운 질벽을 비집으며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반 광란 상태로 고개를 젓는 시그리드가 가엾어서 레온하르트는 하다못해 아픔을 오래 끌지 않도록 단숨에 몸 안으로 침입했다.
“싫어어……!”
범해진다.
레온하르트에게, 몸도 마음도 전부.
찢어지는 듯한 충격에 뒤로 젖힌 시그리드의 하얀 몸이 파르르 떨렸다.
시그리드를 힘껏 끌어안고 있던 청년이 잠시 그녀를 꿰뚫는 움직임을 멈췄다.
레온하르트의 턱에서 땀이 흘러내려 부들부들 떨리는 시그리드의 가슴에 뚝뚝 떨어졌다.
“……아프면 몸부림쳐도 좋아. 할퀴든 깨물든 마음대로 해.”
작은 귓불에 와 닿는 뜨겁고 축축한 속삭임조차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마치 고문 같았다. 이윽고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곧 아픔보다 쾌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사납게 부풀어 오른 성기가 몸 안을 휘젓는 순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아앗, 아, 아아아, 으응.”
레온하르트가 천천히, 차츰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한 후에도 달콤한 비명밖에 흘러나오지 않았다.
스스로도 부끄러워질 만큼 볼썽사나운 신음 소리를 어떻게든 멈추고 싶어서 시그리드는 눈앞에 있는 레온하르트의 단단한 어깨를 가볍게 깨물었다.
“……웃!”
“으응…… 아앗!”
시그리드 안에서 레온하르트의 것이 단숨에 커졌다.
처녀막이 파열되는 말할 수 없는 공포마저도 온몸에 밀려오는 희열 앞에서는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다리를 활짝 벌린 채로 침대가 삐걱거릴 만큼 격렬하게 흔들리며 시그리드는 차츰 쾌감의 정점으로 치달았다.
“아앗……!”
시그리드의 몸이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뒤로 커다랗게 젖혀졌다.
레온하르트도 낮게 신음하며 또 다른 쾌락을 위해 격렬하게 허리를 꿈틀거렸다.
“아……!”
그 감각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시그리드의 몸 안에 작열하는 듯한 욕망이 뿌려지며 두 사람은 동시에 절정을 맞이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쾌락의 폭풍 속에서 함께 떠돌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한순간 숨이 멈추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의 몸 안에 레온하르트가 있다는 것뿐.
레온하르트의 정액을 분명히 이 몸 안에 받아들였다는 사실뿐이었다.
사정을 한 후에도 레온하르트는 몸을 꽉 밀착한 채 시그리드를 깊이 끌어안았다. 몸은 아직도 이어져 있었다.
겹쳐진 피부와 피부가 뜨겁고 축축했다. 마치 맞닿은 부분부터 녹아버릴 것처럼.
흘러내린 애액과 정액은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서로 뒤섞여 시트에 빨려 들어갔다.
“……흐윽.”
시그리드는 흐느껴 우는 것처럼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멍하니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붉게 젖은 입술을 뭔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벌리고 쾌감에 힘없이 늘어진 채로.
좌우의 색이 다른 시그리드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촉촉하게 빛나며 레온하르트의 뺨을 향하고 있었다. 시그리드의 가냘픈 몸이 짓눌리지 않도록 무릎을 세우며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상처 자국이 무서운가.”
칼자국이기 때문일까. 여자들은 대부분 이 상처를 무서워한다.
뭐, 보기에 좋지는 않을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레온하르트 자신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 안 돼. 놓아줄 수 없어.
젊디젊은 레온하르트의 이성이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또다시 천천히 음란하게 허리를 움직이자 죽은 것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던 시그리드의 몸이 움찔 떨렸다.
“싫어, 이제…… 그만해요. 제발…….”
레온하르트는 가련한 사냥감의 애원을 입맞춤으로 막아버렸다.
도망치는 작은 혀를 혀로 옭아매고 충동에 몸을 맡긴 채 젊고 솔직한 욕망을 마음껏 퍼부었다.
소리 없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
너무나도 놀라운 밤이다.
레온하르트의 뜨겁고 사나운 성기가 시그리드의 부드러운 내부를 비비고 휘저었다. 그때마다 귀를 막고 싶어질 만큼 음란한 물소리와 함께 태내에 쾌감이 터져 나와 어지럽게 흩뿌려졌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남성과는 제대로 얼굴을 마주친 적조차 없이 신에게 기도를 바치며 조용히 살아왔건만.
에블리야는 함락되고 대신전은 점거되었다.
그리고 모두의 안전과 맞바꿔 시그리드는 순결을 빼앗겼다.
그러나 지금 시그리드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고 좌절하기는커녕, 달콤한 쾌감에 허우적거리며 물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필사적으로 레온하르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나는 신녀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어리석고 죄 많은 여자일 뿐이야.
하얀 얼굴은 땀과 눈물에 엉망으로 젖어버렸고 온몸의 피부 중에 레온하르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문득 레온하르트가 뭔가를 꾸미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 직후 성기에 꿰뚫려 있는 입구 바로 위, 가장 민감한 클리토리스를 그가 허리의 움직임과 연동하여 손가락으로 끈적끈적하게 비틀듯이 자극하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의 움직임이 시그리드의 몸을 달콤하게 녹였다.
“흐윽……!”
몇 번이나 연달아서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강요당하고 있는 가느다란 허리가 세차게 튀어 올랐다.
그 순진한 두려움조차 젊은 레온하르트를 기쁘게 한다는 것도 모르고.
뜨거워.
뜨거워서 견딜 수 없어.
“아……!”
입가에서 시그리드의 것인지 레온하르트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타액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의식이 몽롱해서 더 이상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젠 틀렸어…….
젊은 남자의 땀 냄새, 숨 막히는 살 내음.
입을 맞추고 몸을 꿰뚫릴 때마다 의식이 새하얗게 흐려졌다.
뜨거운 눈물에 젖은 시그리드의 눈동자에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다가왔다.
문득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시그리드가 어린 시절 만났던 소년과 겹쳐졌다.
“뭐야? 왜 그러지……?”
목소리까지 닮았네. 그렇게 생각하기 전에 시그리드의 의식은 어둠 속에 삼켜졌다.
눈을 뜨자 뭔가 무척 따뜻하고 기분 좋은 것에 감싸여 있었다.
꿈과 현실이 잘 구분되지 않아서 시그리드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이미 해가 떴는지 주위는 어렴풋이 밝았다.
초여름의 새벽은 이르다.
시그리드가 정신을 잃었던 것은 불과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모양이다.
“눈을 떴나.”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그리드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순간 하반신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시그리드는 얼굴을 찡그렸다.
레온하르트가 걱정스러운 듯이 시그리드의 허리로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욱신거리는 곳을 따뜻하게 해주려는 것처럼 허리를 감쌌다.
“나름대로 자제한 건데……. 너무 거칠었나? 어디 아픈 곳은 없나?”
“……아.”
레온하르트는 한쪽 팔에 시그리드의 머리를 얹고 가볍게 끌어안은 자세로 그녀의 잠든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레온하르트 자신은 한숨도 자지 않았는지 검은 눈동자도 또렷하게 깨어 있었다.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아침의 맑은 빛과는 정반대로 달뜨고 흐트러진 탁한 공기 속, 이틀 전까지는 얼굴도 몰랐던 남자의 품 안에서 맨몸을 드러내고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그리드는 곧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드레스는……?
설마 전라로 잠들었던 걸까.
당황하며 시선을 움직여 확인해보자 전라의 몸은 가슴 위까지 헐렁헐렁한 셔츠로 덮여 있었다.
낯익은 셔츠였다. 레온하르트가 어젯밤 입고 있던 것이다.
셔츠는 시그리드의 허벅지까지 포옥 덮일 만큼 컸다.
몸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레온하르트가 입혀준 것일까.
“저어…….”
목이 까끌까끌해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갈라진 것을 눈치챈 걸까, 레온하르트가 긴 팔을 뻗어서 침대 옆 테이블에 놓여있는 물병을 들고 물을 따라서 건네줬다.
맑고 차가운 물이 메마른 목을 기분 좋게 축여줬다.
어젯밤은 벌꿀주 병 말고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는데. 그럼 날이 밝은 후에 병사나 시종이 가져온 걸까.
──혹시 내가 무방비하게 잠들어있는 모습을 봤을까……. 게다가 태양의 높이를 보니 아침 예배 시간도 벌써 지난 것 같은데.
당장 대신전 기도실로 가야 되는데. 한순간 새파랗게 질렸다가 곧 자신은 이제 신녀와는 상관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신녀의 순결은 땅에 떨어졌다.
레온하르트를 원망할 생각은 없다. 시그리드는 자신의 음란한 몸이 저주스러웠다.
──그렇게 흐트러지다니. 분명히 음탕하고 천박한 여자라고 생각할 거야.
절망한 나머지 고개를 숙이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괴로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레온하르트가 조용히 물었다.
어젯밤에도 생각했지만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낮고 깊어서 귓가에 황홀하게 울렸다. 한마디씩 끊어서 힘 있게 말하는 것도 그의 솔직하고 곧은 성정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신녀의 순결을 빼앗은 나를 원망하나.”
“아뇨. 내가 괴로운 건 내 책임이에요…….”
시그리드가 중얼거리며 대답하자 천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레온하르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새로 준비되어 있는 셔츠를 걸친 후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을 때 마침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온하르트가 들어오라고 대답하자 곧 레빅이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레온하르트 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음.”
레빅이 재빨리 레온하르트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래?”
레온하르트는 짧게 대답한 후 침대 위에 앉아있는 시그리드를 돌아보았다.
“보고가 들어왔다. 푸셰르라는 소녀는 어젯밤 의식을 되찾았다는군.”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시그리드는 눈을 크게 떴다.
“상처도 몸을 세게 부딪친 것뿐이고 며칠만 지나면 원래대로 움직일 수 있다더군. 대신전의 사람이 치료를 하고 있는데, 서둘러 의사를 수배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다행이다……!”
날이 밝기 전에 레온하르트가 지시를 내렸던 모양이다.
시그리드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레온하르트는 조금 못마땅한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푹 쉬도록 해라. 오늘 밤도 나를 충분히 즐겁게 해줘야 되니까.”
냉혹한 목소리로 그 말만을 남긴 후 레온하르트는 발걸음을 돌렸다.
“나머지 보고는 집무실에서 듣도록 하지. 레빅, 따라와라.”
“알겠습니다.”
뚜벅뚜벅 발소리를 울리며 레온하르트는 모습을 감췄다.
침대에 혼자 남겨진 시그리드는 비로소 추위를 느끼고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레온하르트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집무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보고서를 든 병사들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며 긴급을 요하는 사항부터 정확하게 처리해나갔다. 느긋하게 식사를 할 여유 따윈 없었기 때문에 아침 식사는 레빅에게 지시해서 빨리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
“대신전 쪽은 어떻게 할까요. 신녀님을 돌려달라고 신관들이 탄원을 하고 있습니다.”
“내버려둬. ……아니, 대신전 자체는 이대로 내버려둬도 상관없다. 신녀에게는 절대 알리지 말아라. 연락수단을 완전히 끊어버리도록 해. 그리고 신녀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라. 식사도 꼬박꼬박 챙겨 먹게 해라.”
갈 곳 없는 분노에 청년은 몹시 짜증이 나 있었다.
어젯밤 레온하르트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나름대로 최대한 배려하며 시그리드를 안았다. 아무리 거칠게 다뤄도 불만을 말할 수 없는 입장이긴 했지만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게 그녀를 안았다.
겁에 질린 시그리드가 너무나도 가냘프고 가련해서 거칠게 대하면 당장에라도 홀연히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촉촉하게 젖은 보라색과 은색 눈동자에 속박당하고 말았다. 그가 그토록 부드럽게 여자를 안은 것은 처음이었다.
“……차라리 미워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미워할 수 있다면 시그리드의 목숨을 빼앗아서 에블리야에 복수할 수 있다.
레온하르트에게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워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 간직한 마음을 거칠게 쏟아붓는 대신 조금씩 스며들게끔 천천히, 부드럽게 그녀를 안았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고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보자마자 시그리드의 귀여운 얼굴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한순간이라도 눈을 떼는 것이 아쉬워서 줄곧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그녀는 결코 몸을 기대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허드렛일을 하는 소녀가 무사하다는 얘기를 들은 순간 꽃이 피는 것처럼 웃었다.
──나보다 그 푸셰르라는 소녀가 더 소중하단 말인가.
“그녀에게 나는 그저 난폭한 남자일 뿐일까…….”
레온하르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 레온하르트 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한순간 발끈해서 소리를 지른 레온하르트는 다음 순간 퍼뜩 이성을 되찾고 서둘러 냉정을 가장했다. 그러나 마음속의 안개는 아직 걷히지 않았다.
시그리드에게 레온하르트는 대신전을 방패로 순결을 빼앗은 최악의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받아들인 것은 시그리드다. 설령 비겁한 방법이라 해도 그것은 패자인 레온하르트의 당연한 권리다.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나는 기억도 못하는 주제에…….”
울컥하며 거위깃털을 세공한 펜을 쥔 레온하르트는 눈앞의 서류 다발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처리해나갔다.
한편, 시그리드는 침대 위에 남겨진 채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눈을 뜨고 나서 처음으로 사태를 인식할 수 있게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피부에는 아직 레온하르트의 향기가 남아있었고 몸은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아픔에 시달리고 있었다.
“……흡!”
입을 막으며 필사적으로 울음소리를 억눌렀지만 눈물만은 막을 수 없었다.
방울방울방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시그리드는 몸을 작게 웅크리고 몇 번이나 흐느껴 울었다.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크나큰 상실감에 울음을 터뜨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끝까지 힘껏 저항할 수 있었더라면.
그렇다면 시그리드의 긍지는 상처 입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신전을 위해서라는 대의가 있는 한 몸을 내줘도 마음은 상처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항조차 제대로 못하다니……!
자신의 몸에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시그리드는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심정으로 계속해서 울었다.
병사들이 아침 식사를 들고 방으로 들어올 때까지 시그리드는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