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새벽 무렵까지 잠을 자지 못했던 탓에 시그리드는 하루 종일 계속 나른함에 시달렸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온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하반신에도 아직 둔통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겨우 목욕을 마치고, 식욕이 없는 탓에 식사는 따뜻한 수프로 때웠다.
야채를 삶아서 끓인 수프의 푸근함과 따뜻함이 마치 피폐해진 마음에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시그리드는 시트를 새로 간 침대 위에서 살며시 몸을 뒤척였다. 벌써 밤이 깊어지고 촛대의 불빛도 어두워져 있었다.
──오늘 밤은 오지 않을지도 몰라.
몸은 피곤해서 잠을 원하고 있는데도 의식은 묘하게 또렷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휴식을 취하고 싶지만 마음이 편하지 못한 것이 지독하게 힘들었다.
얼떨결에 방까지 주어졌지만 이곳은 임시 거처일 뿐이다. 볼일이 없어지면 대신전으로 돌려보내거나 쫓아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겨우 하루 만에 자신의 물건을 옮겨놓은 이 방도 왠지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문득 침대가 세차게 삐걱거렸다.
“얌전히 지냈던 것 같군. 상으로 오늘 밤도 듬뿍 안아주지.”
“레온하르트 님……?”
시그리드는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들어온 걸까. 문이 열리는 소리는 전혀 못 들었는데.
“스스로 침대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꽤나 음란하군. 어제까지는 남자를 몰랐던 신녀님께서.”
“오늘 밤은…… 안 오실 줄 알았어요.”
“내가 겨우 하룻밤 정도로 만족할 줄 알았나.”
마물처럼 별안간 침입해 온 레온하르트는 당황하며 도망치려고 하는 시그리드를 붙잡았다.
침대 위에 있는 사냥감을 붙잡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그녀를 두렵게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지만 겁에 질린 시그리드를 보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부러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주고 싶을 만큼.
하루 종일 일에 집중해도 오늘 아침 느꼈던 짜증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 아침보다 훨씬 크게 부풀어 올라 청년을 흉포하게 만들었다.
“버둥대지 마.”
레온하르트는 치밀어 오르는 가학심을 이성으로 달랬다. 그가 진심으로 난폭한 짓을 하기라도 하면 이 여인은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밤새 남자에게 안겼던 향기로운 육체의 무의식적인 유혹에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었다.
몇 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얇은 침의를 힘껏 찢었다.
“시…… 싫어……!”
“자신의 입장을 잊었나? 너에게 거부권은 없어. 어젯밤 네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서 조사해봤더니 대신전 경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삭감되었더군. 약초원 외에 밭을 더 만들어서 어떻게든 꾸려나갔던 것 같다만.”
“내가 했던 말……?”
시그리드의 소지품은 전부 고급스럽고 우아했지만 드레스 같은 것은 몇 번이나 빨아서 입었던 것들이 많았다.
대신전에서 짐을 옮겨온 에일린의 병사가 증언한 말에 의하면 드레스는 뜯어서 다시 꿰맨 흔적이 있고 보석류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기이한 일이다.
대신전의 재정사정은 궁핍함을 넘어 신녀의 드레스조차 새로 장만할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시그리드가 사치를 알 턱이 없다.
“……너만 순순히 나를 따르면 대신전의 경비는 부족하지 않게 책정해주지. 청빈한 건 좋지만 식비도 부족할 정도는 너무 심하지 않나.”
“……고, 고맙습니다……! 그리고 귀중한 약초를 말리고 관리하는 작은 방의 천장이 비가 새서 곤란을 겪고 있어요. 재료비만이라도 주시면 고칠 수 있어요. 병을 고치는 약초는 이 나라의 보물이에요……!”
레온하르트는 희색을 띠는 시그리드를 시큰둥하게 내려다보았다.
──조금 기뻐하나 했더니 역시 머릿속에 대신전 생각밖에 없나 보군. 조금은 내 생각도 해주면 안 되나.
애교를 부리며 조르면 비싼 드레스도 보석도, 산더미처럼 안겨줄 수 있는데.
“재료비뿐인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게 해줄 수도 있어. 그 대가는…… 알고 있겠지?”
“……네, 에.”
나라를 점령당한 상황에서 대신전이 박해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파격적인 대우다.
시그리드에게는 레온하르트에게 사례할 의무가 있다. 그녀는 대신전의 사람들을 다스리는 신녀니까.
그에게 줄 것은 이 몸밖에 없다. 달리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몸이 떨렸다. 보라색과 은색 눈동자에 두려움이 깃들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이제부터 무슨 일을 당할지 알지 못했던 어젯밤과 알게 되어버린 오늘 밤은 공포의 질이 달랐다.
싫은데, 진심으로 괴로운데. 그런데도 몸 안 깊숙한 곳이 멋대로 젖기 시작했다.
“내게서 도망치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거칠게 다루진 않겠다.”
레온하르트가 은밀한 곳에 거침없이 손을 대며 입가를 일그러뜨리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젖었군. 아무래도 내 몸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그 비웃음에 아직 순정을 간직한 소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아니야……. 아니, 에요, 이건……. 아아앗.”
느닷없이 손가락이 삽입되었다. 어젯밤의 여운이 남아있는 몸이 고통을 호소했다.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관능이 눈 깜짝할 사이에 끌려 나와 뭉근하게 달아올랐다.
“너는 몸이 훨씬 솔직하군.”
어느새 셔츠를 벗어던진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몸 위를 뒤덮으며 하반신을 밀착시켰다. 시그리드의 몸이 움찔 굳었다.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남자의 상징은 이미 부풀어 올라서 무서울 만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 성기가 얼마나 거칠게 유린하는지는 어젯밤 진저리가 날 만큼 경험했다.
“어제보다 훨씬 깊은 쾌락을 가르쳐주지, 신녀님.”
“싫어, 싫어어어어……!”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다리를 활짝 벌리고 긴 손가락과 거친 손바닥으로 아직 교합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음부를 애무했다.
은밀한 동굴에서 애액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올 때까지 레온하르트는 집요하게 그녀를 희롱했다.
하얀 허벅지가 움찔움찔 잘게 경련했다.
“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 여기는 기뻐하며 내 손가락을 삼키고 있군.”
부드러움이 엿보이던 어젯밤과는 전혀 다르게 그는 그저 거칠기만 했다.
“싫어어……!”
손가락을 거칠게 빼낸 직후 뜨거운 성기가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아, 아…….”
순간 그대로 깊숙이 꿰뚫고 들어올 것을 각오했지만 그의 성기는 곧 천천히 빠져나갔다.
“이걸 되풀이하면 어젯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쾌락을 얻을 수 있지. 네가 나에게만 매달리며 교태를 부리게 될 때까지 얼마든지 울려주마.”
“아앗.”
다시 성기가 삽입되고 선단이 민감한 곳을 자극했다.
그리고 시그리드가 절정을 맞이하기 직전에 움직임을 멈췄다.
“흐……윽.”
성기가 다시 세차게 빠져나갔다.
성기는 시그리드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올 때까지 비부를 음란하게 꿰뚫더니 이번에는 더 깊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절정에 달하기 직전까지 몰아붙이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의 의도를 눈치챈 시그리드는 눈가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어쩌면 이렇게 음란한 짓을……?
연인끼리라면 분명 이토록 거칠게 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지금 시그리드의 가느다란 허리가 도망치듯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즐거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에블리야인이라서……? 단순한 장난감이라, 서……?”
그 힘없는 물음은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에 뒤섞여 레온하르트의 귀에 뚜렷하게 전해지지 못했다.
“뭐라고?”
느닷없이 가장 깊은 곳까지 격렬하게 꿰뚫려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에게 시그리드는 마음이 없는 인형이나 마찬가지다.
욕망을 처리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한──. 그저 그뿐.
가냘프게 신음하며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자 그녀를 정복하고 있는 청년이 작게 숨을 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분명 기분 탓일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의 몸을 갖고 놀고 싶은 것일 뿐, 마음에는 흥미가 없을 테니까.
──어제 부드럽게 대해준 건…… 분명히 그냥 변덕이었을 거야…….
훌쩍훌쩍 목을 떨며 이제부터 찾아올 고문 같은 쾌감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
느닷없이 레온하르트의 입술이 시그리드의 뺨에 와 닿았다.
연인에게 하는 것처럼 애정이 담긴 입맞춤이었다.
“……?”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몸을 움찔 움츠리자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는 레온하르트의 움직임이 느리게 변화했다.
대담하게 다리를 들어 올리긴 했지만 시그리드의 몸에 느껴지는 부담이 한결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 님……?”
청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뭔가를 말하고 싶은 눈빛으로 시그리드를 바라보며 천천히 시간을 들여 그녀의 몸을 정복했다.
그런 밤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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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무에 쫓겨 아무리 바빠도 레온하르트는 깊은 밤이 되면 반드시 찾아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시그리드를 안았다. 시그리드는 그런 그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시그리드는 매일 밤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행위가 끝나고 축 늘어져 있는 동안 레온하르트는 또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첫날 같은 대화는 거의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에게 시종일관 화가 난 듯한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뭔가 몹시 화가 나서 그 감정을 레온하르트 스스로도 억제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사나운 젊은 말처럼 시그리드를 거칠게 안을 때가 많았다.
레온하르트는 정력적인 청년이었다. 그가 휴식을 취하는 것은 시그리드와 함께 잠을 잔 후 겨우 한두 시간 정도.
그런 생활이 며칠씩 이어지는 동안 에블리야 왕궁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거의 붕괴 직전이었던 국내의 질서를 놀라운 수완으로 정비해나갔다.
왕궁에 머물러있던 에블리야의 시녀와 사용인들도 레온하르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새롭게 고용되었다. 본래 왕족 외에는 레온하르트를 영웅으로 숭배하고 있었던 덕분에 정면으로 반항하거나 비난하는 자도 없었다.
다만 옛날부터 왕궁에서 일하며 오직 왕족에게만 충성을 바쳤던 몇몇 충실한 사용인들은 자리에서 물러나 왕궁을 떠났다.
침공에 성공했을 때에도 왕궁의 건축물을 의도적으로 파괴하지 않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원래대로 평화로운 생활이 돌아와 있었다.
──다들 생기가 넘치고 행복해 보인다. 국왕 폐하가 계실 때처럼 무거운 분위기는 아무 데도 찾아볼 수 없어.
시그리드의 방에도 시녀 몇 명이 상주하게 되었다. 시그리드는 그녀들을 통해 여러 가지 얘기를 들었다.
함구령이 내린 것일까, 대신전에 대해 물어보면 다들 일제히 입을 다물어 버렸지만 그 외에는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세상물정 모르는 시그리드와는 달리 시녀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수다를 좋아하는, 작은 새처럼 재잘거리는 젊은 시녀 몇 명. 그리고 그녀들을 이끄는 시녀장. 나이는 40대 정도일까. 엄격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부드럽고 세심하며 무엇보다도 왕궁 내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레온하르트 님은 정말 신녀님을 아끼시나 보군요.”
시녀장이 시그리드의 머리카락을 정성껏 빗겨주며 말했다.
대신전에 있을 때는 청결하게 감기만 했을 뿐 달리 손질은 하지 않았지만 왕궁에 온 후로 늘 꽃향기가 나는 향유를 발라서 빗질을 해주는 덕분에 본래 탐스러웠던 머리카락은 놀랄 만큼 윤기가 흘렀다.
에블리야에서 나고 자란 그녀들은 시그리드를 지금도 신녀님이라고 부른다. 오랜 세월의 습관이 그리 쉽게 바뀌진 않을 거라는 생각에 시그리드도 딱히 주의는 주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그 사람도 나를 신녀님이라고 부르니까…….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건 푸셰르뿐이네.
시녀들은 신녀였던 자신이 왜 왕궁에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녀들은 레온하르트가 시그리드를 찾아오는 것을 기뻐하는 눈치였다. 시그리드는 의아했다.
──나 같은 건 새로운 국왕 폐하 곁에 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데.
시그리드는 의아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아무리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라지만 좀 더 요염한 여성은 에블리야에도 에일린에도 셀 수 없이 많을 텐데.
그런 여성을 상대할 생각은 없는 것일까, 레온하르트는 매일 밤 시그리드의 방을 찾아왔다. 아무래도 아직 쫓아낼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신녀님. 오늘도 머리장식은 하지 않으실 건가요? 잔뜩 보내셨는데.”
젊은 시녀들이 조금 아쉬워하며 말했다.
요즘 그녀는 매일같이 각종 장식품과 드레스를 선물받고 있다. 전부 레온하르트가 보낸 것이다.
“네.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리면 안 되니까요.”
“어머나, 그런 건 신경 쓰실 필요 없는데.”
옷은 간소한 드레스에 장식은 일절 하지 않는 것이 대신전의 계율이었기 때문에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길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은 곱게 빗어서 늘어뜨리는 것만으로도 눈부시게 빛났다.
본래 머리카락 자체가 아름다워서 장식 따위 하지 않아도 빛의 입자를 뿌린 것처럼 반짝거렸다.
드레스도 모양 자체는 비슷하지만 장식이 늘었다. 색도 다양해지고 장식 띠와 꽃 장식 등으로 좀 더 화사해졌다.
“보석이 싫으시면 하다못해 꽃이라도.”
지금 입고 있는 하얀 비단 드레스에 맞춰서 시녀들이 하얀 꽃으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장식했다.
작은 꽃이 몇 겹이나 겹쳐진 것처럼 피어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덕분에 우울한 기분이 조금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고마워요.”
시그리드가 수줍게 미소 짓자 시녀들은 안심한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시그리드를 이 방에서 내보내지 말 것.
시그리드에게 대신전 소식은 절대 전하지 말 것.
그리고 시그리드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해줄 것.
시녀들은 레온하르트에게 이 세 가지를 단단히 엄명 받았다. 하지만 이 신녀님은 본래 욕심이 없는 성격인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말수도 적어서 하루 종일 자수를 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때때로 창가에 서서 대신전이 있는 방향의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시녀들은 걱정이 돼서 견딜 수 없었다. 왕궁으로 끌려온 후로 시그리드는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섭취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가냘픈 몸은 한층 여위고 얼굴도 그늘이 드리워져 어딘가 생기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 밤 레온하르트에게 강제로 안겨야 하는 몸이다.
“오늘도 식욕이 없으신가요? 주방의 직인들이 솜씨를 발휘해서 만든 음식인데.”
값비싼 향신료를 듬뿍 넣은 고기 요리, 신선한 야채와 어패류를 우유로 하루 동안 끓여서 만든 스튜, 갓 구운 향긋한 흰 빵, 달걀과 설탕을 듬뿍 넣은 푸딩 등.
에블리야의 주방장이 복귀한 후 그녀에게 주어지는 요리는 모두 호화롭고 가짓수도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호화로운 요리를 봐도 좀처럼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혼자 먹는 식사보다 무녀들 몰래 숲 속으로 빠져나가서 푸셰르와 함께 먹었던 산딸기가 훨씬 맛있었다. 대신전의 무녀들도 예의범절에는 엄격했지만 식사는 함께해줬다.
시그리드는 시녀들의 권유로 식탁에 앉긴 했지만 결국 곧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혼자 먹는 음식은 맛이 없다. 도저히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먹지 않으면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은 알고 있지만.
“……미안해요.”
시녀들이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지만 도저히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럼 푸딩만이라도 드시면 안 될까요. 아니면 부드럽게 넘어가는 과일을 드릴까요?”
“뭔가 조금이라도 드시지 않으면 몸이 먼저 망가지고 말 거예요. 몸이 안 좋으시면 의사를 부를까요?”
걱정해주는 것은 안다.
레온하르트가 시그리드에게 아무 부족함 없는 생활을 제공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알고 있다.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에게 돈을 아끼지 않는다.
둘만 있을 때면 곧 입술을 막아버리기 때문에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내가 뭔가 말을 할 때마다 못마땅해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시그리드가 원하는 것은 호화로운 생활이 아니다. 호화로운 식사와 장식품 따위를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호화로운 새장에 갇혀있는 작은 새처럼 한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대신전 사람들을 지키고 싶은 것뿐인데.
그럴 수 없다면 혼자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럴 때는 푸셰르를 만나면 금방 기운을 되찾을 수 있을 텐데 그것도 불가능하다.
오늘도 밤이 되면 레온하르트가 찾아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현기증이 났다.
머리가 멍하고 의식이 몽롱했다.
시그리드는 망설인 끝에 머뭇거리며 말했다.
“잠시만 혼자 있게 해줄래요? 조금 쉬고 싶어요.”
시그리드의 표정을 간파한 것일까, 시녀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갔다.
“……뭐냐, 불도 안 켜고.”
레온하르트는 문을 열자마자 눈썹을 찡그렸다.
여느 때 같으면 아직 집무에 쫓기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일찍 일을 마쳤다. 서둘러 야식을 먹고 목욕을 한 후 시그리드의 방을 찾아왔다.
여러 개의 방이 이어져 있는 처소 안은 불빛 하나 켜져 있지 않았고 시녀들의 기척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신녀. 어디 있나.”
대답은 없었다.
“……?”
한순간 불길한 예감이 레온하르트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젊은 나이지만 수많은 전장을 헤쳐 온 경험이 있기에 그의 의식은 늘 날카롭고 예민하게 깨어 있었다.
──도망쳤나? 아니면 누가 데려갔나?
“어이, 누구 있나! 불을 가져와라!”
“네, 레온하르트 님!”
칼날처럼 날카로운 그의 외침에 회랑에서 대기하던 병사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레온하르트는 서둘러 실내를 돌아보았다. 탈출했다면 어딘가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하필이면 당장에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두터운 구름이 드리워져 있어서 촛불의 불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치솟아 오르는 초조함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은 채 대답해 달라고 기도하는 듯한 마음으로 외쳤다.
“신녀! 대답해라!”
문에는 항상 보초가 서 있고 정원과 이어져 있는 창문도 밖에서 단단히 빗장이 걸려있는 것을 똑똑히 확인했다. 그 이외에 출구는 없다. 비밀통로 따윈 없는 방이었기 때문에 레온하르트는 이 방을 선택한 것이다.
병사가 촛대에 불을 붙이기 위해 돌아다닌 끝에 겨우 불빛이 실내를 밝혔다. 그러자 레온하르트의 눈에 낯익은 하얀 비단이 뛰어 들어왔다.
방 안쪽에 있는 침대 근처에 뭔가 하얀 것이 떨어져 있었다.
“……? 뭐지?”
성큼성큼 달려간 레온하르트는 다음 순간 안색이 변했다.
“신녀?”
침대 옆에 시그리드가 무너지듯 쓰러져 있었다.
시들어버린 한 송이 하얀 꽃처럼.
♥
소곤소곤 나지막하게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있나……?
시그리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 시야가 어질어질 도는 듯한 불쾌함에 사로잡혀 얼굴을 찡그렸다.
실내에서 레빅과 심각한 얼굴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레온하르트가 흠칫 숨을 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침대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와서 시그리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정신이 드나?”
“내가 왜……?”
이마에 차가운 천을 얹고 침대에 누워있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시그리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표정이 너무나도 가련하고 가냘파서 레온하르트는 침대 위에 놓인 하얀 손을 꼬옥 움켜잡았다.
“기억나? 넌 고열로 쓰러졌다. 의사 말로는 몸과 마음의 피로가 겹쳤기 때문이라고 하더군. 뭔가 원하는 건 없나? 의사도 옆방에 대기하고 있으니까 주저하지 말고 뭐든지 말해라.”
레온하르트가 시그리드의 몸 상태를 생각해서 타이르듯이 잘 설명했지만 열에 시달리는 지금의 그녀는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얇은 막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흐릿하고 그의 목소리도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상할 만큼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서 고열에 시달릴 때 특유의 나른함과 괴로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그 사실이 신기하게도 불안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의 눈빛에서 자신을 걱정하고 염려해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매일 밤 찾아오는 레온하르트는 사나운 육식동물 같았지만 지금은 목소리도 눈빛도 부드러웠다. 그래서 시그리드는 안심하고 온몸의 힘을 뺐다.
어차피 의연하게 대치하는 것은 무리다.
지금 시그리드는 몹시 혼란에 빠져 있었다.
“3일 내내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어. 그렇게까지 무리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미안해. 너를 괴롭히고 싶었던 건 아니야.”
레온하르트의 커다란 손이 시그리드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만져주는 것은 좋다.
──언제나 이렇게 다정하면 좋을 텐데.
밤마다 폭풍 속으로 끌려들어가서 부서질 것 같은 격렬함 속에서 희롱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시그리드 자신도 레온하르트의 뜨거움에 휘말려서 언제나 해야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만다.
시그리드는 레온하르트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는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난 그저 밤 시중 상대니까…….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눈꼬리에서 진주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스스로도 자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강인함 속에 숨겨진 다정함에 끌리고 있었다.
병아리가 태어나서 처음 본 것을 부모라고 착각하는 것처럼 시그리드의 마음은 레온하르트에게 급속도로 매료되고 말았다.
무의식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에 굶주렸던 소녀니까.
온 나라의 경애와 사랑을 받는 신녀라 해도 시그리드의 마음은 연약하기 그지없었다. 그 연약함이 레온하르트의 뜨거움에 매달리고 말았다.
──이건 배신 이야, ‘그’에 대한…….
어린 시절,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진 소년이 있었다. 사랑은 전부 ‘그’에게 바치겠다고 줄곧 결심했는데.
그래서 몸만이라면 레온하르트에게 내줄 각오를 했었는데.
“울 만큼 괴로웠나. 그렇겠지. 미안하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았던 너를 손에 넣어서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뭔가가 귀를 막고 있는 것처럼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다.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의 기억 속에 있는 ‘그’와 꼭 닮았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머리카락 색도, 서늘한 눈매도, 의지가 강해 보이는 이목구비도.
──괴로워서 떠올리는 것조차 억누르고 있었지만…….
겨우 만났다.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잊고 시그리드는 잘 움직이지 않는 혀로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만나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을.
“미안해……. 나 때문에 죽게 해서.”
“……?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괜히 대답을 하는 바람에……. 계율을 어기고 너와 말을 하는 바람에 넌 무참하게 처형되고 말았어. 나는 아직 어려서 네가 죽게 될 줄은 몰랐어. 아무리 사과해도 이 죄는 결코 사라지지 않겠지…….”
레온하르트는 숨을 멈춘 것처럼 시그리드의 띄엄띄엄 흘러나오는 속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신녀……?”
시그리드의 죄.
결코 지워지지 않을 슬픈 기억.
시그리드의 비밀은 대신전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밖에 알지 못한다. 푸셰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죄 많은 나는 성스러운 신녀가 될 자격이 없어……. 하지만 신의 눈을 지닌 신녀가 달리 나타나지 않는 이상 나는 대신전을 나갈 수가 없어.”
시그리드의 아름다운 얼굴에 언뜻언뜻 드리워지던 체념 같은, 그리고 절망 같은 애매한 표정의 의미를 레온하르트는 이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시그리드는 처음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것은 죽임을 당해도 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줄곧 스스로를 책망해왔기 때문일까.
어린 시절의 아주 작은 과오 때문에.
“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결심했어. 이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괴로운 운명도 받아들이겠다고.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니까…….”
문득 시그리드의 목소리가 끊겼다.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후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의 손을 움켜쥔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마치 참회라도 하는 것처럼 깊고 깊은 고뇌에 찬 숨결을 내뱉었다.
“……너, 설마.”
벌써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대신전을 인질 삼아 지독한 취급을 했는데.
“나를 기억하고 있었나……?”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시그리드가 막 다섯 살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신녀로서 제사를 집행하기 위해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 리얀에 갔던 적이 있다. 철이 든 후로 대신전을 떠나는 것도 가마를 타는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그리드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시그리드는 본래 호기심이 많고 활발한 소녀였다. 교육 담당이 깜짝 놀랄 만큼 탐구심이 강하고 어른들도 어려워하는 책을 술술 읽는 반면 지독히 낯가림이 심하고 겁이 많은 구석도 있었다.
제사는 며칠에 걸쳐 치러졌고 그동안 시그리드는 이곳저곳을 탐험했다. 신관과 무녀들은 대부분 제사를 거행하느라 바빠서 감시도 느슨했다.
평소 혼자 산책할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없기 때문에 기뻐서 견딜 수 없었다. 무서움보다도 마음껏 행동할 수 있는 기쁨이 컸다.
숙소이기도 한 소신전의 언덕을 지나 울타리를 빠져나가자 맑은 강이 나타났다. 작고 얕은 강이었지만 바람도 상쾌하고, 물도 시원하고, 기슭에는 예쁜 꽃이 한가득 피어있었다. 시그리드는 하얀 드레스 자락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를 감시하는 무녀들은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놀이는 절대 허락해주지 않았다. 강가도 위험하다면서 좀처럼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
“야, 너. 어디서 왔냐? 못 보던 얼굴인데.”
작고 파란 꽃을 꺾어서 화관을 만들던 시그리드는 깜짝 놀라서 꽃을 떨어뜨렸다. 말을 걸어온 것은 시그리드보다 몇 살 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발목까지 오는 얕은 물속에 서서 시그리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물을 길으러 온 모양이다. 소년의 발밑에 낡은 통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성격을 나타내는 것처럼 살짝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소년은 시그리드의 얼굴을 본 순간 놀란 듯이 숨을 삼켰다. 그리고 물을 튀기며 시그리드 옆으로 다가왔다.
“……놀랍다. 이렇게 예쁜 눈을 가진 사람은 처음 봐. 넌 누구지?”
소년은 에블리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멋진 칠흑의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눈동자 역시 반짝거리는 흑단 같은 색이었다.
발목에는 삼베 끈이 몇 겹으로 감겨 있었다. 발목에 끈이 감겨 있는 것은 노예의 증거다.
노예계급은 대신전에 발을 들여놓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시그리드는 그가 어떤 처지인지 알지 못했다.
“거짓말. 하나도 안 예뻐.”
소년은 발끈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팔다리가 늘씬하게 길고 표정이 몹시 강했다. 괴로움과 고통을 맛본 자 특유의 단단한 강인함이 있었다.
팔다리에는 셀 수 없을 만큼 긁힌 자국과 베인 상처, 채찍에 맞은 자국이 새겨져 있었지만 그것은 옷에 가려서 시그리드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가혹한 처지에 놓인 소년의 눈동자 안에는 복수의 어두운 감정이 타오르고 있었다.
“난 거짓말 안 해.”
“그치만 공주님이랑 왕궁의 여자들은 다들 색이 다른 눈동자는 기분 나쁘다고 했는걸. ……괴물 같다고.”
아름다운 신의 눈을 가진 신녀를 모두 좋지 않게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어린아이니까 아무것도 모른다고 우습게 본 것일까. 왕족 여성들은 모두 시그리드를 대놓고 비꼬거나 험담했다.
본래 대신전의 권위 따위는 선민의식이 강한 왕족 앞에서는 하찮은 것이었기 때문에 신녀를 존경하는 마음 자체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시그리드는 좌우의 눈 색깔이 다른 사람을 자신 외에는 본 적이 없었다. 선대 신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쪽 눈의 색깔이 같다.
거울로 보는 자신의 얼굴은 오른쪽과 왼쪽 눈의 색이 뚜렷하게 달랐다. 아무리 신의 눈이라고 칭송받아도 시그리드는 자신의 눈이 싫었다.
“내가 보기엔 예뻐. 그러니까 다른 누가 뭐라고 하건 넌 예뻐. 아마 그 여자들은 널 질투해서 그런 걸 거야.”
시그리드는 깜짝 놀라서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아무리 봐도 시그리드보다 세 살 정도밖에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말투는 부자연스러울 만큼 어른스러웠다.
──저 색이 다른 눈동자를 보면 오싹해. 기분 나빠.
──어차피 신녀라서 대신전에 틀어박혀 있어야 되니까 딱 좋지 않아? 구경거리가 되는 것보다는 낫잖아.
대신전을 찾아온 여자들의 가차 없는 험담에 어린 마음에도 괴로웠던 시그리드는 소년의 솔직한 말이 기뻤다.
그의 눈에는 정말로 시그리드의 보라색과 은색 눈동자가 예뻐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자랑스러웠다.
자신도 조금은 이 눈동자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년은 살짝 허리를 굽혀서 시그리드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오른쪽은 자수정 같은 보라색이고 왼쪽은 별빛 같은 은색이야. 너한테 잘 어울려.”
이렇게 대놓고 눈동자를 칭찬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기쁨을 넘어 부끄러워졌지만 그래도 시그리드는 기뻐서 견딜 수 없었다.
──나도 이 애에 대해서 알고 싶어.
자신은 이 소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이름도 출신도. 이 애에 대해 아주 많은 걸 알고 싶어. 시그리드는 어린 마음에 그렇게 생각했다.
──화관을 만들어주면 기뻐할까. 대신전 사람들처럼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라고 말하지 않고 나와 함께 산책해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소년과 계속 함께 있고 싶었다.
“너, 이 나라의 왕족이냐? 이름은?”
소년도 같은 기분인지 재빨리 물었다.
왕족이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순간, 신전 방향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신녀님, 이런 곳에 계셨습니까!”
시그리드가 방에 없는 것을 보고 찾으러 온 젊은 무녀가 당황하며 외쳤다.
“꺄아아악, 신녀님! 아직 어리시지만 남자와 말을 하다니! 누가! 누가 좀!”
무녀의 목소리를 듣고 순찰을 하던 위병들이 달려왔다.
긴 창을 든 그들은 현재의 상황을 보자마자 험악한 얼굴로 소년의 몸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쳤다.
“더러운 노예 주제에 신의 눈을 지닌 신녀님께 감히 무슨 짓이냐!”
“꺄아아악!”
소년의 몸이 비명조차 없이 날아가서 진흙에 처박혔다. 위병들이 재빨리 소년의 팔다리를 우악스럽게 구속했다.
긍지 높은 소년은 분노의 눈빛으로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야, 이 애는 아무 잘못도 안 했어요!”
“이러지 마세요, 신녀님. 노예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노예……? 노예라니, 무슨 소리야……?”
“신녀님은 오직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더러운 노예 따위……!”
작고 가냘픈 시그리드가 계속 버티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시그리드는 시녀들에게 손을 붙잡혀 억지로 신전으로 끌려갔다.
그 후 교육 담당 무녀들에게 둘러싸여 지독하게 꾸지람을 들었던 것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직 어리시니까 이 일은 내밀하게 처리하겠습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하시면 안 돼요.”
이렇게 야단맞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후 시그리드는 그 소년이 불경죄로 처형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어려서 계율을 잘 모를 때였기 때문에 시그리드 본인은 별다른 벌을 받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쾌활했던 소녀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 후 시그리드는 단 한 번도 대신전 부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시그리드와 이야기를 나누는 바람에 그 소년은 죽고 말았다.
──내 눈을 예쁘다고 칭찬해준 그 소년은.
그 사건 이후로 시그리드는 변했다. 밝고 쾌활했던 성격은 모습을 감추고 조용하고 얌전한, 내성적인 소녀로 자란 것이다.
이제 그 사건을 기억하는 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당사자 외에는.
“……너는 나 같은 건 벌써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넌 아직 어렸고 그렇게 긴 시간 함께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아주 짧은, 그러나 선명한 기억.
그때부터 레온하르트의 인생은 변했다.
시그리드라는 희망의 빛을 발견한 후로 복수만을 바라던 시커먼 마음은 사라지고 조국의 재건을 꿈꾸게 되었다.
“설마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내가 죽었다는 얘길 듣고 그걸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나. ……가엾게도.”
레온하르트는 잠들어 있는 시그리드의 뺨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시그리드의 마음에 지금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새긴 소년은 바로 지난날의 레온하르트였다. 조국 에일린이 멸망하고 부모님이 참살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도한 후 그야말로 지옥 같은 고통을 맛보고 있을 무렵.
──물론 거의 처형당할 뻔했지만.
레온하르트의 행방을 알아낸 레빅과 에일린의 잔당이 달려와서 간신히 그를 구출했다. 시그리드에 대한 불경죄로 고문을 받다가 죽음 직전에 구출된 것은 그야말로 요행 중의 요행이었다.
레빅 일행은 에블리야에서 도망쳐서 살아남은 레온하르트의 행방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에일린의 왕족들은 모두 처형되고 유일하게 살아서 도망쳤다는 소문이 퍼진 레온하르트만이 작은 희망이었던 것이다.
이때 받은 고문으로 온몸이 채찍 자국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녹슨 칼에 베인 뺨에는 상흔이 남았다.
열 살이 될까 말까 한 나이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레온하르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시커먼 복수심뿐이었다.
그래도. 레온하르트는 생각했다.
“……그래도 살아 있는 게 제일이지.”
노예가 되어 리얀의 영주에게 혹사당할 무렵 시그리드를 만났고 그녀에게 첫눈에 매료되었다.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었다.
그 마음만이 레온하르트의 버팀목이자 빛이었다.
신의 눈을 지닌 소녀를 손에 넣기 위해 만신창이가 되어 빈사의 위기에 빠져도 기력 하나로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그 후로 검술을 수련했다. 각지를 전전하며 에블리야의 약점을 찾고 동료를 늘려나갔다.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천부적인 매력을 발휘하여 에일린뿐만 아니라 에블리야 백성들마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레온하르트의 마음속에 확고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그리드를 손에 넣는 것은 레온하르트에게 복수이자 숙제이기도 했다.
──에일린뿐만 아니라 에블리야의 모든 것을 손에 넣고 말겠어.
시간은 흘러 레온하르트는 충분한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힘을 사용하여 드디어 에블리야의 패권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일까, 레온하르트의 마음은 차츰 일그러졌다. 그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 총명한 소녀도 이제는 증오하는 에블리야의 왕처럼 타락했을 거라는 생각에 그녀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려 더럽혀주고 싶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손에 넣고 싶었어……. 하지만 방법이 틀리고 말았군.”
씁쓸한 생각이 가슴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래서는 에블리야의 왕족을 비난할 수도 없다.
욕망에 무릎 꿇은 레온하르트도 그들만큼이나 큰 죄인이다.
레온하르트는 의사가 처방해준 환약을 집어 들고 물과 함께 자신의 입에 머금었다.
탕약을 졸여서 만든 이 환약은 에블리야에서는 오직 왕족만이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정말로 왕족이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었군.
그리고 그 압박당하는 생활 속에서도 시그리드는 백성들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감시의 눈이 엄격한 가운데 몰래 왕도에 약초를 보내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그 의외일 정도의 강단에는 놀랄 정도다.
시그리드에 대한 탄원서는 대신전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서 레온하르트의 손으로 보내졌다. 그만큼 시그리드의 도움을 받은 백성들은 무척 많았다.
즉, 이 소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 맑고 청렴하고 솔직하고.
꿈을 꾸는 듯한 눈빛도, 의외로 고집스러운 성격도, 상냥한 말투도,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어린 레온하르트를 매료시켰을 때 그대로.
그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기쁘고 동시에 가슴 아팠다.
“상처 입혀서 미안하다.”
에일린의 왕가에는 재보를 비밀 장소에 숨겨두는 관습이 있다. 그 재산을 정식으로 상속한 레온하르트는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시그리드를 위해서라면 돈 따위는 물 쓰듯이 써버려도 아깝지 않았다. 어떻게든 시그리드의 건강을 회복시키고 싶었다.
그것이 지금 레온하르트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속죄였다.
레온하르트는 입에 머금은 환약을 열에 시달리는 시그리드의 입 안으로 살며시 옮겼다.
시그리드가 생명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의사가 이제 괜찮다고 말할 때까지.
그는 시녀들에게조차 맡기지 않고 계속 그녀를 간병했다.
♥
“아직 뜨거우니까 조심해라.”
레온하르트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상반신을 일으킨 시그리드는 그가 건네준 탕약 그릇을 받아들었다. 레온하르트의 간병은 놀랄 만큼 다정하고 세심했다.
온몸이 쇠약해져서 아직 몸을 일으키기도 힘겨운 시그리드를 위해 그는 그녀의 몸을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
“고맙습니다.”
겨우 열이 내린 시그리드는 독특한 맛이 나는 탕약에 천천히 입을 댔다.
이 탕약은 레온하르트의 명령으로 대신전의 무녀들이 달여 준 것이다. 해열 작용이 뛰어나고 몸이 쇠약해져 있을 때에도 효과가 좋다.
기억에는 없지만 처음에는 귀중한 환약을 먹였다는 얘기를 듣고 시그리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제 환약은 너무 효과가 강해서 오히려 독이 되기 때문에 대신전에서 달여 준 탕약을 마시고 있다.
약초에 관해 깊고 풍부한 지식을 지닌 시그리드는 환약이 얼마나 비싸고 손이 많이 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약초 신전에서조차 환약은 극소수의 사람들밖에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을 수 없으며 왕족 이외의 인간은 복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그 계율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얼마 전 시그리드가 고통받는 백성들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다는 오랜 꿈을 몇 마디 털어놓은 후로 레온하르트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했다.
대신전에서는 예전과 달리 탕약과 함께 환약도 만들게 되었으며 중증 환자에게는 무상으로 제공해주는 등 약초 신전 본래의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고 한다.
열이 내린 후 시그리드는 차츰 회복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레온하르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작은 강가에서 만났던 것도, 처형당하기 직전 레빅 일행에게 구출되어 목숨을 건진 것도, 레온하르트는 숨기지 않고 전부 털어놓았다. 레온하르트는 그 나름대로 시그리드가 이토록 괴로워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여러 가지로 서로 어긋나 있었다. 그 어긋난 것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고 풀어나갔다.
길고 긴 이야기였기 때문에 시그리드가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을 때까지는 며칠이 걸렸다.
시그리드의 용태가 안정된 후 레온하르트는 그때까지 방치해뒀던 일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밤이 되어서야 찾아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그리드에게는 그 정도 속도가 딱 좋았다.
덕분에 쉬엄쉬엄 천천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레온하르트도 딱히 서두르지 않았다.
“레온하르트 님이 그때 그 소년……?”
“응. 처형당하지 않았어. 보다시피 이렇게 살아 있어.”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닮아 보인 것도 당연하다. 어차피 동일인물이니까. 시그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기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패자와 패국의 신녀라는 관계뿐만 아니라 잊을 수 없는 옛 추억을 공유한 자들끼리 느끼는 안타깝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한, 그립기도 하고 수줍기도 한 그런 공기가.
“그럼 레온하르트 님은 절 기억하고 있었나요? 계속?”
“대신전에서 본 순간 첫눈에 알았어. 그때 그 소녀라는 걸.”
“그런데 일부러 밤 시중을 명령하다니……. 역시 절 아직 미워하나요……?”
“……미안. 사실은 그렇게까지 궁지로 몰 생각은 없었어.”
그러나 그녀와 다시 만난 순간 레온하르트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무너져 내렸다.
오랜만에 보는 시그리드는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고 기품이 흘러넘쳤다. 신사적으로 행동할 만한 이성 따윈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강제로라도 내 것으로 만들고 말겠어. 울건 싫어하건 상관없어.
그때 그 기분을 레온하르트는 지금도 잘 설명할 수 없었다.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게 성장한 꿈의 결정을 본 순간 온갖 이성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마음보다 입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괴롭혀서 미안해. 넌 당연히 화낼 권리가 있어.”
자신의 미숙함을 부끄러워하듯이 시선을 떨구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시그리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난 화나지 않았어요.”
그녀가 부드러운 팔을 뻗어 레온하르트의 단단한 목덜미에 매달리듯 끌어안았다.
“나야말로 고초를 겪게 해서 미안해요. 그리고 레온하르트 님은 조국과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잖아요. 이 나라가…… 많이 미웠겠죠……?”
시그리드는 에블리야가 멸망해도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지만 레온하르트는 그렇지 않았다. 그야말로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것이다.
부모님은 참살당하고 왕자의 몸에서 일개 노예로 전락했다.
이 긍지 높은 청년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맛보았을까.
“하지만 에블리야 사람들에게는 죄가 없어요……!”
그들도 희생자다. 부(富)를 누린 것은 일정 계급 이상의 귀족과 왕족들뿐이다.
“……알고 있어.”
레온하르트도 시그리드를 끌어안았다.
자신을 걱정하고 조국 사람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작은 강가에서 만났을 때처럼 시그리드의 눈동자는 지금도 한없이 맑았다.
시그리드가 어리광을 부리듯 레온하르트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소녀의 태도는 조금 변화했다.
조금씩이긴 하지만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몸짓을 할 때가 많아졌다. 그것이 레온하르트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에 강제로 끊겨버린 서로의 연심은 재회한 후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봉오리처럼 차츰 개화해 나갔다.
“레온하르트 님이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 순수한 기쁨은 거짓이 아니었다.
괴로운 경험을 한 것은 변함없지만 최악의 사태만은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정말로 기뻤다.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었다는 레빅 일행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하지만. 시그리드는 머뭇머뭇 뻗은 손가락을 닿기 직전에 거둬들였다.
레온하르트는 늘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청년의 오른쪽 뺨만은 가볍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럼 이 상처는 그때……?”
레온하르트의 단정한 얼굴에 뚜렷하게 새겨진 고통의 흔적.
시그리드에게는 죄의 증거 그 자체.
“이건 평생 지워지지 않을 거야. 녹슨 칼에 베인 데다 곧바로 치료하지 못했으니까.”
레온하르트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하지만 시그리드에게는 그 말마저 마음을 베는 칼날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시그리드의 슬픈 표정은 레온하르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레온하르트가 엷은 금발 꼭대기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친애의 정이 가득한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시그리드의 이야기를 들은 후로 레온하르트는 한층 부드럽게 행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노력하는 눈치였다. 적어도 예전처럼 말도 없이 강제로 안지는 않았다.
“이제부터 너는 내 밤 시중 상대가 아니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를 끌어안고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혔다. 성적인 접촉에 익숙하지 않은 시그리드가 아직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레온하르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시그리드가 쓰러질 때까지 계속 참게 만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 레온하르트였으니까.
청년은 자조했다.
무구했던 시그리드를 실컷 짓밟고 유린했던 것은 다름 아닌 레온하르트다.
물론 책임을 질 생각이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시그리드의 마음속에 단단히 박힌 두려움을 풀어주고 싶었다.
서로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언제까지나 두려워해서는 시그리드가 너무나도 가엾지 않은가.
그녀는 연인들의 달콤한 결합을 아직 모른다.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연인이라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랑을 나누는 것은 신들에게 축복받은 행위라는 걸 하나하나 정성껏 가르쳐주고 싶었다.
어린 시절 일어났던 일은 시그리드의 책임이 아니다. 하물며 젊은 여자도 아닌 자신의 뺨에 새겨진 상처 때문에 시그리드가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들도 앞으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아직은 시그리드가 오랫동안 이야기하면 피곤해서 미열이 나기 때문에 좀 더 기다려야겠지만.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없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말해. 너는 지나치게 참는 경향이 있으니까.”
레온하르트는 그대로 침대에 등부터 쓰러졌다. 당연히 함께 쓰러지고 만 시그리드는 레온하르트 옆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밤에는 함께 잘 거야. 네가 쉴 곳은 내 품속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자신과 눈높이가 같아질 때까지 위로 끌어올렸다.
“난 이제 두 번 다시 너를 상처 입히지 않을 거야. 그것만은 잊지 마. 그리고 앞으로 나를 레온이라고 불러줘. 가까운 사람은 그렇게 부르니까.”
“레온 님?”
“님도 필요 없어.”
“레, 온……?”
“그래.”
레온하르트는 무의식적으로 긴장하는 가냘픈 어깨를 최대한 부드럽게 감싸며 끌어당겼다.
그리고 막 열이 내린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그러니까 빨리 내게 익숙해지도록 해.”
♥
두 번 다시 시그리드를 상처 입히지 않겠다고 선언한 레온하르트는 한 번 말을 뱉으면 반드시 실행하는 성격인 듯했다. 확고한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그의 성품을 시그리드는 물론 왕궁에서 일하는 시녀들과 나라 안의 백성들도 이제는 모두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새로운 나라로 다시 태어나려 하고 있는 에블리야에 있어서 레온하르트는 더할 나위 없이 듬직한 존재였다.
“이제 곧 레온하르트 님이 오실 거야. 15분 정도 시간이 나셨대. 지금 전령이 왔어.”
문 앞에서 전령으로부터 전갈을 받은 푸셰르가 쿡쿡 웃으며 시그리드 옆으로 달려왔다. 방 안에 있던 시녀들 사이에도 푸셰르를 따라 잔물결처럼 웃음이 번졌다.
푸셰르가 온 후로 시그리드의 방에는 밝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레온하르트 님도 참, 시그리드를 잠시라도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나 보네.”
다행히 상처는 크지 않았고 푸셰르는 건강하고 기운이 넘쳤다.
다만 대신전에서 떠나도 된다는 허가가 얼마 전까지 좀처럼 내려오지 않은데다 대신전 자체가 포위되어 있어서 시그리드에게 연락을 할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푸셰르는 처음에는 레온하르트를 경계했지만 시그리드를 대하는 헌신적인 태도를 보고 곧 생각을 바꾼 모양이었다. 그 후로는 에블리야의 영웅이기도 한 레온하르트에 대해 듣고 있는 시그리드가 조마조마할 만큼 가벼운 말투를 사용했다.
레온하르트가 대신전 사람들과 연락을 하는 걸 허락해준 것은 시그리드가 쓰러진 다음 날이었다.
그 후로 푸셰르는 시그리드의 전속시녀처럼 늘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시그리드는 그게 기뻐서 견딜 수 없었다.
──대신전에서 지낼 때처럼 숨어서 몰래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
레온하르트의 배려로 시그리드는 더욱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방에서 나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또 푸셰르 이외의 대신전 사람들과 왕래는 할 수 없지만 서신을 주고받는 것은 허락되었기 때문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볼 수 있었다.
대신관의 답장에 의하면 귀중한 약초가 심어져 있는 약초원은 짓밟히지 않았고, 손질도 허락되었으며, 대신전에는 백성들이 가볍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고 신관과 무녀들은 병자들을 치료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약초신전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시그리드가 걱정하던 약초창고의 천장도 즉각 수리되었다고 한다.
“다행이다…….”
“뭐가?”
오늘도 레온하르트는 시녀의 안내를 무시하고 직접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왔다.
바쁜 듯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레온하르트는 푸셰르와 시녀들이 완전히 물러가기도 전에 시그리드를 정열적으로 끌어안았다.
여전히 격무에 쫓기고 있었지만 시그리드의 향기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새롭게 기력이 솟아나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었다.
“뭘 보고 있었던 거지. 서신인가. ……누가 보낸 거지?”
시그리드는 들고 있던 서신을 레온하르트에게 숨기지 않고 보여줬다.
대신관의 서신은 현재의 상황을 차근차근 알려주는 것일 뿐, 레온하르트에게 보여줘서 안 될 이유는 없었다.
“대신관님이 보낸 거예요. 당신이 해준 일을 무척 감사하고 있다고 전해달래요. 그리고 나도 고마워요. 환약을 투여한 덕분에 여러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에블리야의 보물인 널 빼앗았으니 그 정도는 당연하지.”
레온하르트의 손에도 얼마 전 다른 서류가 도착했다. 신녀인 시그리드의 구명과 감형을 청하는 백성들의 탄원서다.
“탄원서를 무시할 수도 없고.”
“탄원서? 무슨 소리죠?”
에블리야의 상인들이 왕궁에 빈번하게 출입하게 되면서 시그리드가 왕궁에 있다는 사실이 전해진 모양이다.
민중들은 왕족이야 어쨌든 시그리드만은 벌하지 말아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예상 밖의 사태에 난처해진 레빅이 서류 형태로 정리해서 보고한 것이다.
물론 시그리드는 나라 안에서 그런 소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너를 벌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백성들이 줄기는커녕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더군. 이 나라 사람들은 너를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모양이야.”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이 나라 사람들이 착하기 때문이에요.”
“자신의 가치도 모르고 있나. 너는 너 자신에게 놀랄 만큼 무관심하군.”
그리고, 하고 말을 이으며 레온하르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즉위식 날짜가 결정됐어. 요란한 건 좋아하지 않지만 즉위한 것을 내외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는 이게 제일 빠른 방법이지.”
이제부터는 레온하르트가 에블리야의 정식 국왕이 되어 이 나라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 결의를 백성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라도 즉위식은 중요하다.
주변 각국의 국왕과 대사들을 초대하여 교류를 꾀하고 친교를 다질 필요도 있다. 에블리야의 기반은 아직 위태롭다.
도망친 에블리야의 왕족들을 숨겨주고 있는 자들을 견제하는 의미도 겸하고 있다.
“즉위식이 끝나면 너를 왕비로 맞이할 거야.”
꽃조개처럼 작고 귀여운 귓불에 뜨겁게 속삭이자 시그리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비……?”
그 물음에 레온하르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왜 놀라는 거지?”
“그거야…… 내가 왕비라니.”
“너 말고 누가 있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잖아. 게다가 너는 에블리야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신녀님. 아무 부족함도 없어. 걱정하지 마.”
──아니, 그게 아니라.
문득 뇌리에 떠오른 생각을 시그리드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레온이 정식 국왕이 되고 나면 당연히 정식 왕비를 맞이해야 돼. 내가 아니라 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을.
“저녁에 또 중신 회의가 있어. 그때까지 쉬러 왔어.”
매일 결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많은 것이 레온하르트는 조금 불만이었다.
물론 지력도 뛰어나긴 하지만 그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게 적성에 맞기 때문이었다.
“알았어요. 그럼 차 준비를……. 뭐라도 가볍게 드시겠어요?”
시그리드가 향초차를 끓이려고 일어서자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 그보다.”
이쪽으로 오라는 눈짓에 시그리드는 레온하르트가 앉아있는 긴 의자로 다가갔다.
1인용의 안락의자와는 달리 난로 앞에 놓여있는 이 의자는 시그리드 한 명쯤은 여유 있게 누울 수 있을 만큼 컸다.
이 천을 씌운 긴 의자는 며칠 전 레온하르트의 지시로 들여놓게 되었다. 두 사람은 종종 이 의자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차를 즐기곤 했다.
“왜 그러지?”
레온하르트가 재촉하듯 말했다.
시그리드가 망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가 가리킨 것은 그의 옆이 아니라 무릎 위였기 때문이다. 설마 저기 앉으라는 걸까.
“빨리 와.”
“……하지만, 저어.”
지금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그에게 안겼지만 장소는 전부 침대 위에서였다.
아직 밝고 눈부신 햇살이 비치고 있는데 어린아이처럼 그의 무릎에 앉기는 부끄러웠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답답해진 레온하르트가 시그리드의 손목을 움켜잡고 재빨리 끌어당겼다.
레온하르트의 무릎은 크고 딱딱해서 시그리드가 올라타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무겁지 않아요?”
시그리드를 무릎에 앉히고 겨우 만족한 레온하르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요거밖에 안 나가면서 대체 뭐가 무겁다는 거야.”
시그리드가 레온하르트에게 차츰 익숙해져서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레온하르트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점차 구김살 없는 표정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곧고 솔직할뿐더러 성실하고 음습한 구석이 없는 시원시원하고 남자다운 성격이니까.
──그런 사람이니까 에일린도, 에블리야 백성들도 그가 새로운 왕이 되길 바라고 있는 거겠지…….
레온하르트의 무릎 위에 옆으로 앉아 있을 때 청년의 손이 젖가슴으로 뻗어왔다.
순간 시그리드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런 짓은 밤에 은밀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나.
최근 레온하르트는 시간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는 사람이 있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나마 다른 사람이 있으면 시그리드가 울며 싫어하기 때문에 이제는 어느 정도 배려를 해주고, 그 전에 시녀들이 재빨리 방에서 물러가곤 했지만.
“이런 시간에……. 레온, 안 돼요.”
“연달아서 중요한 회의를 하고 왔단 말이야. 위로해주면 안 돼?”
레온하르트가 노골적으로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소년 같은 면모가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시그리드는 그런 그의 얼굴에 약했다. 도무지 완강하게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시그리드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성적인 접촉이 전혀 없었던 반동일까, 레온하르트의 짓궂은 장난은 나날이 농밀해져갔다.
물론 밤의 행위도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예전보다 훨씬 부드럽게 그녀를 안았다.
시그리드가 피곤해서 열이 나기라도 하면 세심하게 배려하고 걱정해줬다. 그 대신 기회를 포착하면 만족할 때까지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시그리드와 밤을 보내기 위해 낮에 미친 듯이 서둘러 집무를 처리하고 있다고 한다.
“편안하게 쉬고 싶으면 느긋하게 차라도…….”
“차 같은 건 필요 없어. 널 원해.”
시그리드가 차를 구실로 도망치려고 하자 레온하르트가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드레스는 이럴 때 불리하다.
크고 거친 손이 옅은 크림색 비단 드레스 속으로 주저 없이 파고들어 부드러운 가슴을 더듬었다.
젖가슴의 부드러운 감촉과 탄력을 즐기는 것처럼 희롱하는 손길에 차츰 달콤한 쾌감이 시그리드를 감쌌다.
“싫, 어요……. 레온.”
“그렇게 달콤한 목소리를 내면 역효과야. 멈출 수가 없잖아? 그건 그렇고 정말 부드럽군. 재미있어.”
“재미있어하지 말아요.”
그는 가슴을 세차게 주무르며 연분홍색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으응……!”
레온하르트의 메마른 손안에서 시그리드의 하얀 가슴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가냘픈 몸이 바둥거리며 허무한 저항을 시도했다.
시그리드의 저항을 찍어 누르는 것 따위는 식은 죽 먹기였다.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를 무릎 위에 앉힌 채 부드러운 가슴과 순진한 반응을 마음껏 즐겼다.
저항하는 시그리드의 귀 아래, 제일 피부가 얇은 곳에 유혹하듯 끈적끈적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시그리드의 피부는 얇고 민감하다. 레온하르트는 그 사실을 그녀 자신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 아앗……!”
음란하게 귓불을 핥을 때마다 달콤한 감각이 단숨에 고조되었다. 작은 입술에서 요염한 숨결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안 돼요, 레온……!”
레온하르트는 여유만만한 태도로 시그리드의 선명하게 도드라진 쇄골에 입을 맞추고 뾰족한 혀끝을 귀에 넣는 등 마음껏 유희를 즐겼다.
“자꾸 버둥거리면 옷이 흐트러질 텐데?”
다리를 버둥거리는 바람에 드레스 자락이 말려 올라가서 귀여운 무릎까지 드러나고 말았다.
──레온은 심술쟁이야.
시그리드는 홱 고개를 돌렸다.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색이 다른 눈동자에 당장에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왜 그래? ……어라?”
시그리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작게 흐느껴 울었다. 레온하르트가 당황하며 시그리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에 시그리드의 얼굴을 포옥 파묻었다.
“왜 우는 거야. 그렇게 싫어? 아팠어?”
정말로 슬프게 우는 모습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의 눈물에 약했다. 그녀가 울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정치나 분쟁 문제라면 얼마든지 해결방법이 즉각 떠오르건만 그는 시그리드에 관해서만큼은 너무나도 서툴렀다.
“그게 아니…….”
달래는 것처럼 등을 쓸어주자 시그리드는 단단한 가슴에 이마를 비비며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레온이 조금이라도 쉬었으면 좋겠어요……. 레온은 이 나라를 위해서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이렇게밖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고 슬퍼서…….”
시그리드가 훌쩍거리며 호소했다. 그녀의 말에 참을성 있게 귀를 기울이던 레온하르트는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녀가 근본적으로 고지식하고 결벽하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시그리드의 처소를 찾아오면 언제든지 그때그때 레온하르트의 몸 상태에 맞춰서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더운 날에는 산뜻한 음료수, 추운 날에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차, 몸이 조금 나른한 날에는 피로를 풀어주는 차.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마법처럼 준비되어 있는 바람에 눈치채지 못했다. 전부 시그리드가 준비한 것이다.
오직 레온하르트만을 생각하면서.
“용서해줘. 울지 마. 내가 장난이 조금 지나쳤어.”
♥
울음을 그친 시그리드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레온하르트는 느긋하게 긴 다리를 뻗었다. 집무실로 돌아갈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레온하르트가 타협안으로 요구한 것은 무릎베개였다.
아무리 긴 의자라지만 레온하르트의 긴 다리가 다 들어가기에는 부족했다. 무릎 아래는 팔걸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래도 레온하르트는 몹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말 이거면 돼요? 감기에 걸리지 않게 얇은 이불이라도 덮어줄까요?”
레온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것저것 챙겨주는 시그리드를 바라보았다.
시그리드는 서툴지만 열심히 레온하르트에게 애정을 표시하곤 했다.
지금도 이 행운이 믿어지지 않는다.
시그리드가 지위와 재산을 노리고 레온하르트를 유혹하는 마녀라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소문은 그의 귀에도 들려왔다.
에블리야에서 도망친 왕족들이 여기저기서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시그리드 혼자 후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에블리야 재흥을 위한 수단도 몇 가지는 악질적인 방법으로 방해받고 있다.
도망친 전 국왕과 왕세자들이 슬슬 기다리다 지쳐서 행동에 나서도 이상할 것은 없는 시기다.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예상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손에 처참하게 짓밟혔을 거라고 생각했던 에블리야가 눈에 띄게 활기와 질서를 되찾고 있기 때문이다.
──서둘러 챙겨간 자금 따위 대수롭지 않은 액수일 테고, 어지간히 바보가 아닌 한 내 방식이 궤도에 오르기 전에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초조해하고 있겠지.
본래 노령에 갑자기 쇠약해졌다는 전 국왕에게 에블리야를 되찾고자 하는 기력이 남아있다면 말이지만.
“왕세자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겁쟁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볼썽사납게 발버둥이나 치는 게 고작이겠지.
──왕궁 안의 사정을 알고 있다는 건 아직 내부에 내통자가 있다는 뜻. 정보가 어디서 새어 나가는지 파악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귀찮아지겠군.
물론 잔당을 포함해서 적들을 용서할 생각은 없지만──. 타국에서 얌전히 은둔하며 지낸다면 눈감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할 만큼 복수의 불꽃도 차츰 흐려지고 있었다.
모두 시그리드가 곁에 있기 때문이다.
“레온? 왜 그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의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이 매끄러운 금발의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시그리드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시시한 장난을 치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꿈만 같았다.
서로 색이 다른 아름다운 눈동자와 아름다운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마저도 아름다웠다. 시그리드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존재였다.
울리고 겁에 질리게 해서 억지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시그리드는 이제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때로는 울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게 되었다.
아직 몸을 겹칠 때마다 부끄러워서 울지만 마지막에는 레온하르트에게 몸을 맡기곤 한다.
시그리드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자신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그리드만 원한다면 이 세상을 전부 평정해도 좋다. 목숨을 걸고 그녀의 바람을 이루어줄 것이다.
그러나 시그리드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뿐인가, 그녀는 지나치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뭔가 원하는 거 없어?”
그렇게 물어보자 시그리드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소매로 입가를 막으며 쿡쿡 웃었다. 작은 새의 지저귐 같은 그 웃음소리가 기뻐서 상흔이 남아있는 레온하르트의 뺨에도 미소가 번졌다.
“뭐야. 뭐가 우습지?”
“레온은 매일매일 똑같은 말만 하니까요. 원하는 건 없냐, 부족한 건 없냐, 주저하지 말고 뭐든지 말해라……. 난 지금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어요.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예요.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처소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살풍경했던 벽지는 부드러운 색조로 칠해지고 장식과 세공도 엄숙한 모양에서 꽃을 본뜬 금세공으로 바뀌었다.
나무가 깔린 바닥 위에는 군데군데 푹신푹신한 직물이 깔려 있었고 정원으로 이어지는 창문은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도록 활짝 열려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동행할 때에 한해서지만 정원을 산책할 수도 있게 되었다. 바깥 공기를 쐴 수 있게 된 것이 쇠약해진 시그리드의 몸을 조금씩 건강하게 만들어줬다.
대신전에서 하루 종일 기도실에 틀어박혀 기도를 할 때보다 훨씬 몸이 가볍고 상태도 좋았다. 식욕도 많이 돌아왔다.
아침 식사는 레온하르트와 함께 먹을 때가 많았고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내서 저녁도 함께 먹기 때문이었다. 다른 때에도 푸셰르가 함께해주기 때문에 더 이상 혼자서 쓸쓸하게 식사하지 않게 되었다.
“……왕족만이 부를 독점하는 시대는 진작 끝났던 걸지도 몰라.”
그동안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왕족들은 혈통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따라서 백성들이 한마디라도 왕족을 비판하면 즉각 목을 베어버리곤 했다.
──최근까지는 약초도 왕족들이 독점해서 다른 나라에 비싸게 팔았다지……?
에블리야는 그야말로 멸망 직전의 상태였다.
시그리드 또한 왕족들에겐 더 이상 가망성이 없다고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조국을 잃은 슬픔은 기묘할 만큼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오히려 레온하르트에게 나라를 맡길 수 있어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당신이…… 레온이 이 나라를 다스리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나는 이 나라를 강탈한 침략자인데?”
레온하르트가 살짝 자조하며 말했다.
하지만 시그리드는 몹시 진지했다.
“레온이 이 나라를 위해 여러 가지로 애쓰고 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어요. 왕궁 사람들도 밝고 생기가 넘치는걸요. 왕도에도 요즘은 활기가 넘친다고 들었어요.”
“아직 멀었어. 하지만 너에게 칭찬받으니까 기분이 나쁘진 않군.”
“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시그리드는 저도 모르게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레온하르트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며시, 살며시, 레온하르트가 시그리드의 머리카락을 만질 때처럼.
문득 무릎을 베고 있는 머리가 한층 묵직해졌다.
레온하르트가 어느샌가 곤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시그리드는 옆에 걸쳐뒀던 얇은 옷을 끌어당겨 레온하르트의 어깨에 덮어줬다.
전사의 본능이 강하기 때문일까, 레온하르트는 다른 사람이 옆에 있으면 잠들지 못한다. 시녀가 들어오기만 해도 곧 눈을 뜨고 만다.
하지만 시그리드가 옆에 있을 때는 안심하고 잠들 수 있다고 한다.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항상 레온하르트에게 안식이 되어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이 평화가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이대로 레온하르트의 옆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바람이라는 것도 시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시그리드의 무릎을 베고 잠든 레온하르트의 오른쪽 뺨에 새겨진 상흔.
아직 그 상흔만은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시그리드의 죄였다.
레온하르트는 구 에일린의 영지까지 포함하여 황폐했던 에블리야를 놀라운 수완으로 재건해나갔다.
본래 실력 제일주의인 그는 신분에 관계없이 유능한 인재를 거침없이 등용했으며 우수한 인재를 모집함으로써 국내를 통치하는 것뿐만 아니라 제국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나라로 부흥시켜 나갔다.
오랫동안 암운이 드리워져 있던 에블리야를 찾아온 봄에 사람들은 모두 들뜨고 기뻐했다.
젊은 시절 에일린의 검이라 불리던 레빅은 깊은 밤 부하가 건네준 보고서를 홀로 훑어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날카로운 얼굴은 옛날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레온하르트 님의 눈에 들기 위해 눌러앉아 있던 에블리야의 귀족들은 나날이 강한 반감을 품고 있으며 곳곳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또한 왕족들은 대부분 망명했으나 살림 왕자의 행방은 좀처럼 파악할 수 없다.”
살림 왕자는 직계는 아니지만 왕위에 가까운 왕족이며 아직 젊고 혈기왕성한 나이기도 하다. 내버려두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픈 존재다.
“사전 교섭을 마친 어느 나라에도 망명하지 않았다면 아직 국내에 잠복하고 있지 않을까……?”
오랜 세월 무관으로 활약해온 레빅의 감이 적중했음을 알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
주군 레온하르트는 지금쯤 그동안 그토록 집착했던 신녀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보고는 내일 아침으로 미루기로 하고 레빅은 시그리드의 방을 향해 작게 경례했다.
“좋은 밤을.”
삐삐삐. 어디선가 종달새가 지저귀며 아무것도 가로막는 것 없는 새파랗고 넓은 하늘을 기분 좋게 날아갔다.
오랜만에 보는 눈이 시릴 듯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그리드는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태양의 향기와 초록 내음, 그리고 꽃향기가 가슴을 간지럽혔다.
“역시 왕궁의 정원은 넓군요. 게다가 한창 제철인 꽃이 한가득…….”
눈앞에 펼쳐진 멋진 풍경에 감탄이 흘러나왔다.
벽돌이 깔린 오솔길 주변에는 온통 꽃, 꽃, 꽃. 그야말로 꽃의 언덕이 펼쳐져 있었다. 약초원 외에는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어져서 검소한 분위기를 풍기는 대신전과는 달리 왕궁은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들에 파묻혀 무척 화사했다.
금을 흩뿌려놓은 장식 세공, 여기저기 자연스럽게 섞여있는 동양의 이국적인 장식물과 도자기.
요란하고 화려한 것들──특히 역대 국왕의 초상화나 조각──은 레온하르트의 지시로 전부 치워버리고 왕궁 내부는 산뜻하고 편안하게 새로 꾸며졌다. 시그리드의 처소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몹시 아늑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그중에서도 새롭게 단장하여 잔디를 아름답게 깎은 정원은 지금 꽃이 한창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내년부터 에블리야 백성들도 감상할 수 있도록 정원을 개방하겠다고 말했다. 확실히 왕궁 사람들만 독점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풍경이다.
활짝 핀 가지각색의 꽃들 속, 정원에서 후원으로 향하는 시그리드의 드레스 자락도 미풍에 실려 꽃잎처럼 흔들렸다.
시녀들이 가까운 곳에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했다. 무거운 짐은 경비를 담당하는 병사들이 가뿐하게 운반해줬다.
“푸셰르? 어디 갔지?”
화창한 날씨를 즐기기 위해 시그리드는 푸셰르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러 나갔다. 물론 레온하르트의 허락은 미리 받아뒀다.
후원은 왕궁에서도 아주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다.
게다가 오늘은 레온하르트가 경비병을 늘려서 산책길 부근에 자연스럽게 배치해놓았다.
등나무 바구니에 가벼운 음식과 구운 과자, 음료수 등 맛있는 음식을 담아서 키가 큰 꽃이 핀 길과 시원한 나무그늘을 들뜬 마음으로 걸었다.
“이쪽이야, 시그리드! 저것 봐, 저거!”
새끼 다람쥐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푸셰르가 하얀 에이프런을 나부끼며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이리 와봐!”
푸셰르가 시그리드의 손을 잡고 뛰어간 곳은 커다란 나무 아래였다.
“이것 봐. 벌써 열매가 열렸어!”
“세상에……! 이런 곳에 살구나무가 있을 줄이야.”
“조금 이르지만 벌써 익은 것 같아. 아마 햇볕이 잘 들어서 그런 걸 거야.”
푸셰르의 말대로 살구는 이미 잘 익어서 먹을 때가 되어 보였다. 짙고 맛있어 보이는 색이었다.
“기다려, 바구니 갖고 올게. 시그리드 넌 여기 있어.”
푸셰르가 시녀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 소중한 친구는 몸이 가볍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싹싹하고 귀여워서 시녀들과도 허물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푸셰르, 넘어지면 안 돼!”
시그리드는 다시 한 번 살구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보통 살구는 벌꿀에 절여 먹지만 씨앗 부분을 가공해서 만든 리큐르도 일반적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대신전에서도 종종 약초술을 만들곤 했다. 그러니까 달콤한 맛을 덜어낸 리큐르라면──.
“달콤한 걸 좋아하지 않는 레온도 기뻐할지 몰라.”
레온하르트는 달콤한 과자류를 전혀 안 먹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술을 더 좋아하는 듯했다.
──언제나 뭐든 받기만 하는걸. 나도 답례로 선물을 하고 싶어.
만드는 법은 왕궁의 시녀들이나 푸셰르의 어머니에게 자세히 물어봐야지. 레온하르트 몰래 만들어서 놀라게 해주는 것도 재미있을지 모른다.
시그리드는 팔을 뻗으면 손이 닿을 것 같은 가지에 매달린 살구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조금만 더……!”
까치발로 서서 필사적으로 손을 뻗자 가까이 있던 젊은 병사가 스윽 손을 들어 따기 쉽게 나뭇가지를 내려줬다.
“신녀님, 이러면 됩니까?”
“고마워요……! 닿았어요.”
싱싱한 살구를 따자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진한 향기가 감돌았다.
시그리드가 생긋 웃으며 인사하자 병사의 얼굴은 잘 익은 살구처럼 붉어졌다. 그리고 곧 창백해졌다.
손안에서 살구를 빼앗긴 시그리드는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보러 왔더니 이 꼴이군.”
그곳에는 무서운 얼굴의 레온하르트가 태양을 등지고 서 있었다.
“아, 싫어, 아앗……!”
질척질척 귓가에 울려 퍼지는 음란한 소리에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다리 사이 은밀한 곳에 레온하르트의 손가락이 침입하여 시그리드를 오랫동안 신음하게 만들고 있었다.
바지춤을 푼 레온하르트의 성기가 음부에 밀착되어 입구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클리토리스와 마찰되었다.
하지만 결코 삽입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시그리드를 애태우고 괴롭게 만들었다.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의 손목을 움켜잡고 방으로 강제로 끌고 왔다. 그리고 곧 허벅지까지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렸다.
선 채로 한쪽 무릎을 들어 올린 자세가 된 시그리드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레온하르트에게 희롱당했다. 레온하르트의 행위는 첫날밤보다 훨씬 난폭하고 용서가 없었다.
엄지손가락이 클리토리스를 자극하고 또 다른 손가락이 동시에 질 안을 휘저었다.
허벅지 사이에 사납게 일어선 성기를 억지로 끼우고 부드러운 피부를 감질나게 자극할 때마다 이 뜨거운 덩어리가 언제 몸 안으로 파고들지 모를 두려움에 온몸이 떨렸다.
아니, 차라리 단숨에 꿰뚫리는 것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이 잔혹하기 그지없는 전희보다는.
애액이 하반신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릴 만큼 미칠 듯한 애무가 쏟아졌다.
시그리드의 온몸이 땀에 흠뻑 젖고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호흡이 거칠어져도 레온하르트는 용서해주지 않았다.
몇 번이나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시그리드를 절정으로 몰고 갔다.
시그리드의 가냘픈 허리는 수컷을 갈망하며 마치 울부짖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흔들렸다.
그래도 은밀한 틈새에 밀착된 성기는 아직 내부를 자극해주지 않았다.
도톰하게 부푼 클리토리스에서 애액이 실을 끌며 흘러내렸다.
“그, 그만……. 아, 으응.”
“……잠시 눈을 뗀 사이에…… 왕궁의 남자를 유혹할 생각인가? 나만으로는 부족해?”
레온하르트가 목 안으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지만 과연 시그리드에게 그 말이 전해졌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시그리드를 방으로 끌고 온 레온하르트는 침대로 갈 시간마저 아까웠는지 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지금 시그리드에게 매달릴 곳은 레온하르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단한 어깨에 매달린 채 시그리드는 무릎부터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자신을 필사적으로 지탱했다.
하반신은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 있었다. 가슴에도, 부드러운 팔에도, 목덜미에도, 귓불에도.
빠짐없이 물어뜯을 듯한 격렬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질척질척, 귀를 막고 싶어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레온하르트의 움직임에 맞춰 시그리드의 풍만한 가슴도 출렁출렁 흔들렸다.
“이제 그, 그만, 싫어……!”
쾌감에 이성을 잃은 시그리드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녹아내렸다.
“레온, 제발……!”
“이 정도로 약한 소리를 하면 끝까지 버티지 못할 텐데. 오늘만은 나도 봐주지 않을 거야. 하긴, 원래 봐줄 필요도 없었던 것 같군.”
레온하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흘러넘치는 애액을 손가락 끝에 묻힌 후 경악스럽게도 보란 듯이 혀끝으로 핥았다.
“싫어……!”
시그리드의 눈앞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어떻게 저런 짓을. 그런 걸 태연하게 핥는 레온하르트의 신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레온하르트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시그리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산책을 하는 것은 어제 허락받았고 경비병을 늘리는 것도 동의했다.
──그러고 보니 그 살구 열매는 어떻게 됐을까……?
너무나도 날카로운 쾌감에 온몸이 달콤하고 저릿저릿했다.
한쪽 무릎을 들어 올린 채로 얕은 호흡을 되풀이하며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 레온하르트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직도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남아있나 보군. 그렇다면 나도 사정 봐주지 않고 즐기도록 하지.”
“아……?”
음부를 희롱하는 손가락이 또 하나 늘었다. 시그리드는 충격에 하얀 목을 젖히며 몸을 뒤틀었다.
“앗, 시, 싫어!”
머릿속에 불꽃이 튀었다. 너무나도 강렬한 쾌감에 귀여운 발끝이 동그랗게 움츠러들었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가느다란 허벅지는 레온하르트의 망막에 각인될 만큼 새하얗고 눈부셨다. 흐트러진 옷깃 위로 흘러나온 동그랗고 하얀 젖가슴이 남자를 유혹했다.
“청초한 신녀님께선 이제 완전히 남자를 알게 된 모양이군.”
남자를 유혹하는 것처럼 움찔거리는 음부를 가리키며 레온하르트는 그 민감함을 비웃었다.
그리고 일부러 애를 태우는 것처럼 뜨겁게 부풀어 오른 욕망을 음부 입구에 갖다 댔다.
너무해. 시그리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시그리드의 몸을 이토록 음란하게 만든 것은 바로 레온하르트인데.
“하지만 그런 것도 마음에 들어.”
레온하르트가 시그리드에게 보여주듯 자신의 성기를 한 손으로 훑었다.
하늘을 꿰뚫듯이 우뚝 서 있는 성기는 시그리드의 애액에 젖어 번들번들 빛나며 임전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이런 자세로……? 싫어, 싫어!”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쳐봐. 오늘은 필히 네 몸에 나를 철저하게 새겨주지. 두 번 다시 다른 남자에게 웃어주지 않도록.”
그 의도를 깨달은 시그리드가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며 도망치려 애썼지만 레온하르트는 한쪽 무릎을 안아든 자유롭지 못한 자세로 그녀의 몸을 단숨에 꿰뚫었다.
“아아아아앗……!”
하얀 사지가 움찔움찔 튀어 올랐다.
무지막지하게 시작된 삽입은 시그리드에게는 지나치게 자극이 강했다.
벚꽃색 발끝이 뻣뻣하게 긴장하고 불규칙적으로 경련했다. 난폭하게 꿰뚫린 몸이 비틀거리며 기울었다.
잘 단련된 탄탄한 팔로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당기며 아래에서 쳐올리듯 더욱 깊숙이 성기를 파묻자 시그리드가 산호색 입술을 떨며 애원했다.
“으응, 그만……. 레온……. 기다, 려요…….”
하다못해 몸 안에 침입한 성기에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줬으면.
이대로는 너무 느껴서 머리가 이상해질지도 모른다.
“망가질 것, 같아……!”
“아직이야. 아무리 울어도 아직 용서할 수 없어. 너는 내 앞에서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눴어. 겨우 과일 하나 때문에. 내가 아무리 선물을 해줘도 조금도 웃지 않았던 주제에.”
시그리드는 겨우 자신의 어떤 행동이 레온하르트를 화나게 했는지 깨달았다.
──경비병에게 고맙다고 말한 거……?
“하지만, 그건…… 응응.”
숨 막히는 입맞춤이 그녀의 말을 삼켰다. 레온하르트가 그대로 허리를 종횡무진 흔들며 몸을 꿰뚫을 때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으응…….”
목소리는커녕 숨결마저 레온하르트의 입술에 빼앗겨서 자유롭게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해져 있는 피부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괴로웠다.
군복의 딱딱한 장식버튼에 긁혀서 피부가 빨갛게 물들었지만 그것마저도 거친 애무로 느껴졌다.
“아니, 야. 그건…… 그건, 아, 아으응.”
“뭐가 아니지? 말해봐.”
레온하르트는 처음부터 시그리드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렇게 억지로 흥분시키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게 될 것은 당연한 일. 그건 레온하르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 아…….”
레온하르트의 성기가 한층 격렬하게 그녀의 몸을 꿰뚫으며 태내에 뜨거운 정액을 뿌렸다.
지나치게 강렬한 쾌락에 시그리드는 한순간 정신을 잃을 뻔하며 눈을 감았다.
“아직이다. 아직 끝낼 생각은 없어. 이 음란한 몸에 최고의 쾌락을 가르쳐주지.”
거칠고 사나운 격정이 농밀한 움직임으로 바뀌었다.
안 그래도 괴로울 만큼 민감해져 있건만 사납게 일어선 성기가 일부러 가장 약한 곳을 비틀고 휘저었다.
“흐, 윽…….”
시그리드의 몸은 그녀의 의지를 무시하고 레온하르트의 명령대로 움직였다.
하얀 피부가 붉게 물들고 허리가 쾌감을 갈구하며 흔들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무서울 만큼 요염하군. 이 요염함 앞에서 손가락만 물고 있을 남자가 과연 있을까. 정말 잠시도 방심할 수 없군. 나는 누가 내 것에 손을 대는 게 제일 싫어.”
좁은 입구 근처를 사나운 성기 끝으로 자극하듯 음란하게 움직이며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의 가슴에 입을 맞췄다.
실컷 희롱당해서 붉은색으로 물든 귀여운 젖꼭지를 가볍게 깨문 후 일부러 츄웁츄웁 소리를 내서 핥았다.
“시, 싫어……! ……으응!”
절정의 순간이 덮쳐왔다.
그 순간이면 시그리드는 언제나 숨을 쉴 수 없다.
쾌감의 정점에 달하기까지의 시간이 몹시 길게 느껴졌고 그만큼 덮쳐오는 쾌락도 몹시 날카롭거나 때로는 무시무시하게 달콤했다.
시그리드를 실컷 희롱한 후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전념하기 시작했다.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강인한 허리에 시그리드의 가냘픈 허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그래도 레온하르트는 농밀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크윽……!”
레온하르트가 부르르 등을 떨며 관능적인 신음을 흘렸다.
그래도 끝은 찾아오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사정을 억지로 늦추면서까지 시그리드의 몸에 관능을 퍼부었다.
작은 구멍은 레온하르트의 성기를 머금고 한계까지 벌어져 질척하게 젖어 있었고, 사타구니에는 정액과 애액이 흘러넘쳐 거품이 일고 있었다.
이보다 더 음란한 광경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짐승처럼 야만적인 교합에 시그리드는 이대로 죽어버릴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레온……!”
그러자 순간.
레온하르트가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
깊은 곳에서 연결된 채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시그리드의 허리 언저리를 어루만졌다. 그 외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그리드는 거친 숨을 필사적으로 가다듬었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그 바로 직후였다.
“아……?”
가냘픈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그 변화를 코끝과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재미있는 듯이 바라보았다.
──뭐지……? 뭔가, 이상해……!
태내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각에 가느다란 허리가 움찔 튀어 올랐다.
“꺄아아악!”
별안간 체내를 관통하는 자극에 시그리드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저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올 만큼 날카로운 쾌감이었다.
“싫어, 이, 이게 뭐죠……!”
레온하르트는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도 시그리드의 하반신에서 피어오르는 어떤 감각이 있었다.
한쪽 다리를 끌어안겨 있어서 그 모든 것이 레온하르트에게도 훤히 보였다.
“공들여 애무했으니까. 날 갈망하며 네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거야. 빨리 움직여서 실컷 꿰뚫어달라고.”
“아니야……. 그런……!”
“아니라고? 그럼 다시 한 번 해 볼까?”
이럴 때에도 한 번 말을 뱉은 이상 반드시 실행하는 성격은 여전했다.
시그리드는 또다시 가장 깊은 곳을 꿰뚫린 채 가만히 있을 것을 강요당했다. 이번에는 아예 레온하르트의 팔이 시그리드의 몸을 힘껏 끌어안고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작은 태내를 가득 채운 레온하르트의 성기가 뜨겁게 맥박 치는 감각마저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의 성기는 오랫동안 참아온 해방의 순간을 갈망하며 뜨겁게 달아올라 질벽을 통해 시그리드에게까지 전해질 만큼 세차게 맥박 쳤다.
이 참고 참은 정액을 분출할 때 얼마나 격렬한 관능이 시그리드를 덮칠까──.
공포가 아닌 탐욕스러운 기대로.
다음 순간, 또다시 그 무시무시한 절정의 징조가 찾아왔다.
──싫어……. 또……!
“싫어, 놔줘요……. 레온하르트, 제발, 이제 그만해요……!”
시그리드가 울부짖으며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긴 머리카락이 마구 흐트러졌다. 그러나 그녀의 달콤하게 잠긴 목소리에도 남자는 음란한 장난을 치며 그저 엷게 웃을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찾아온 감각은 지금까지 맛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레온하르트의 품에 한층 꼬옥 끌어안긴 채로 시그리드는 커다랗게 몸을 젖혔다.
“아……아……. 더 이상은…… 아아!”
시그리드가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셨다.
망가진 인형처럼 팔다리가 부들부들 경련했다.
딱딱하게 긴장한 채 숨을 몰아쉬었지만 달콤한 절정의 감각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그녀를 덮쳤다.
평소의 감각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쾌락도 평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계속되는 절정의 감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그리드는 어쩔 줄 모른 채 눈물을 그렁거리며 신음했다.
이렇게 강제적으로 절정을 맛보게 하는 방식은 괴롭고 슬프다. 그리고 안타깝다.
“이제, 그만……. 용서, 해줘요……!”
훌쩍. 시그리드는 커다랗게 훌쩍였다.
“──.”
레온하르트가 시그리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괴로운 듯이 혀를 찼다.
“좀 더 괴롭혀주려고 했는데.”
그리고 가볍게 소리를 내며 눈꼬리에 입을 맞췄다.
“나는 네 눈물에 약해……. 항상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남자를 유혹하니까 곤란한 거야.”
어린아이처럼 훌쩍훌쩍 우는 시그리드를 벽에 기대게 한 후 레온하르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뺨에 입술을 대고 눈물을 핥았다.
“……이제 나도 한계야.”
레온하르트의 성기가 느닷없이 격렬하게 몸을 꿰뚫었다. 시그리드는 숨을 삼켰다.
신음하며 도망치려고 했지만 레온하르트가 버둥거리는 팔다리를 붙잡았다.
막 절정을 맞이해서 민감해진 몸을 또다시 자극당한 시그리드는 목이 쉬어서 이제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불꽃처럼 사나운 욕망이 움찔움찔 떨리는 질 안을 드나들었다. 단단한 성기로 민감한 질벽을 음란하게 자극하며 레온하르트는 손가락 끝으로 클리토리스를 비틀었다.
아플 만큼 거친 애무가 단숨에 시그리드의 의식을 앗아갔다.
귀를 막고 싶어질 만큼 질척한 소리와 레온하르트의 거친 숨소리가 뒤섞여서 울려 퍼지고 하얀 몸 안에서 뭔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레온하르트의 품에 안긴 채 시그리드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흐읏……! 앗……!”
이런 감각은 모른다.
이런 쾌락은 모른다.
그녀의 몸은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쾌락마저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강렬한 애무에 시그리드는 성기가 빠져나가자마자 그 자리에 주르륵 무너져 내렸다.
“아직이야. 난 아직 만족하지 못했어. 좀 더 상대해줘야겠어.”
옆으로 안아들고 침대로 옮겨간 후 행위는 밤새 계속되었다. 그동안 시그리드는 줄곧 신음하며 울었다.
“흐읏…… 아아아……!”
그날 레온하르트는 마치 시그리드의 몸을 부숴버리려는 것처럼 집요하게 그녀를 시트의 바닷속으로 억지로 끌어들였다.
질투에 미친 남자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의 다리를 믿을 수 없을 만큼 활짝 벌려서 어깨에 걸친 후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다.
온몸이 레온하르트의 애무로 물들었다. 시그리드의 몸은 마치 레온하르트가 원하는 소리를 연주하는 악기 같았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그 끊임없는 쾌감에 시그리드는 부들부들 허리를 흔들며 두려움에 떨었다.
움찔움찔, 하반신에서 음란한 경련이 멈추지 않았다.
쾌감이 지나치게 강해서 신경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쾌락의 불꽃이 온몸의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숨결마저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답해. 널 안고 있는 건 누구지?”
“레…… 레, 온…….”
지나친 쾌락에 의식이 아득해져도 곧 새로운 쾌락이 그녀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달콤한 시그리드의 입술이 레온하르트의 이름 외에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될 때까지.
“아아, 또……. 아아……!”
레온하르트의 등에 손톱을 박으며 매달리자 그도 시그리드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것만은 평소의 레온하르트와 똑같아서 왠지 마음이 찡했다.
시그리드는 물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정신없이 레온하르트에게 매달렸다.
♥
그 후 시그리드는 당연하게도 몹시 분개하며 항의의 행동을 취했다.
“아직도 화났어? 이제 그만 기분 풀어.”
한밤중이 되어서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한 레온하르트가 찾아와도 침대 위에 앉은 시그리드는 고개를 홱 돌렸다.
무언의 항의를 시작한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그동안 시그리드는 레온하르트와 몸을 겹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푸셰르를 비롯한 시녀들도 모두 시그리드 편이었다. 난감해진 레온하르트의 늠름한 눈꼬리가 처량하게 추욱 처졌다.
“시그리드.”
움찔. 시그리드의 어깨가 떨렸다. 이름을 불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레온은 치사해.
시그리드는 입술을 쀼루퉁하게 내밀었다.
이런 식으로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면 애써 다잡은 마음이 무너지게 되지 않는가.
무리한 짓을 당해서 화가 나 있는데도 괜히 어리광을 부리며 기대고 싶어진다. 그런 목소리로 말하는 건 비겁하다.
레온하르트가 등 뒤에서 긴 팔로 시그리드를 감싸고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행위는 거부해도 몸이 닿는 것 자체를 거절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시그리드는 매일 밤 레온하르트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옆에서 보면 단순한 사랑싸움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심각한 문제다.
하지만 계속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시그리드는 한숨을 쉬며 레온하르트를 돌아보았다.
“겨우 내 얼굴을 쳐다보는군.”
레온하르트가 안심한 듯이 찡그린 얼굴을 폈다.
“……사실은 화가 났던 게 아니에요.”
“응?”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의 어깨에 턱을 얹으며 이야기를 듣는 자세를 취했다.
“……나, 그때 살구열매를 딴 게 기뻤어요. 레온하르트가 말했던 것처럼 유혹을 하거나…… 그런 불순한 생각을 했던 게 아니에요.”
이상한 오해를 받은 것은 진심으로 슬펐기 때문에 울음을 터뜨리지 않도록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심각한 얼굴로 시그리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다음 말을 재촉하듯 가느다란 손가락 끝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살구 열매가 잔뜩 열려서 그걸로 살구주를 만들려고 했어요. 나는 늘 레온한테 받기만 하고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고 있으니까……. 하다못해 답례로 살구주를 만들어서 선물하면 기뻐해주지 않을까 해서요. 달콤한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살구 리큐르를 만들려고 했어요.”
아아, 안 되겠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자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레온을 위해 살구를 따서 기뻤는데.
“레온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는데 결국 화나게 하고 말았어요……. 하지만 맹세해요. 난 레온이 아닌 다른 남자와 그런 짓을 하고 싶단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어요.”
거기까지 말했을 때 갑자기 레온하르트가 시그리드를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힘껏 끌어안았다.
“레온……?”
“미안해.”
오해를 하고, 오해를 풀고, 연인들의 시간은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하고 부드럽다.
살림 왕자가 에블리야를 탈환하겠다고 레온하르트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