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별안간 왕궁 안이 술렁거리고 질서와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던 에블리야 국내도 단숨에 소란스러워졌다.
에블리야의 새로운 국왕으로서 즉위식을 거행하겠다고 발표한 레온하르트에게 도망 생활을 계속하던 살림 왕자가 정면으로 거부를 표시하며 무력으로 제압하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레온하르트와 수하들이 염려했던 대로 살림 왕자는 그의 직할령인 카마라일에 잠복해 있었다.
그는 왕족파 귀족들과 연락을 취하며 반란 준비를 착실하게 진행해온 듯했다.
살림 왕자가 우세에 서면 레온하르트의 혁신적인 방식에 불만을 품고 있는 귀족들은 물론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인근 제국들의 향방도 그저 관망할 수만은 없게 된다. 각 나라가 에블리야의 망명자를 받아들이고 있는 만큼 개입해올 가능성도 크다.
그렇기 때문에 레온하르트 측에서는 일이 커지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싹을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곧 레온하르트가 군대를 이끌고 카마라일로 향할 것이 급하게 결정되었다. 모든 분란의 씨앗을 없애는 것은 새로운 국왕으로서 겪어야 할 최초의 시련이기도 했다.
눈이 돌아갈 만큼 바쁜 와중에 레온하르트는 잠깐 시간을 내서 시그리드를 찾아왔다.
“밤에 출발할 거야. 아침까지 기다릴 시간이 아까우니까.”
레온하르트가 짧은 말로 작별을 고했다. 시그리드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시녀들은 작별인사를 하는 연인들을 위해 살며시 밖으로 물러갔다.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막을 수는 없었다.
아마 레온하르트도 그 부탁만큼은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반란군을 지휘하는 자는 바로 그 살림 왕자다.
“너무 걱정하지 마.”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부드러운 뺨을 어루만졌다.
“너만은 반드시 지켜줄게. 그러니까 왕궁에서 얌전히 기다려.”
시그리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레온하르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부드럽고 여린 포옹에 레온하르트는 다정한 입맞춤을 했다.
“곧 돌아올게.”
시그리드는 머뭇머뭇 어떤 물건을 꺼냈다.
작은 봉투에 재앙을 쫓는 부적과 향기 좋은 아크 잎을 말린 것을 담아서 목에 걸 수 있도록 가느다란 장식 끈을 단 것이었다.
“……이건?”
“부적이에요. 이 나라에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부적인데, 재앙이 찾아왔을 때 주인을 대신해준다고 해요. ……혹시 불쾌하지 않다면 받아줘요.”
레온하르트는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부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섬세한 자수는 본 기억이 있었다. 시그리드가 요 며칠 동안 한 땀 한 땀 정성껏 수놓은 것이었다.
“네가 만들었나?”
“네.”
레온하르트는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은 시그리드가 어릴 적 만났던 소년과 똑같았다.
강하고 거짓 없는 미소. 시그리드를 똑바로 응시하는 뜨거운 눈동자.
“최고의 선물이군. 꼭 무사히 돌아올게.”
“당신, 그리고 당신과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무운이 함께하기를.”
그러니까 빨리 돌아와요.
꼭 무사히 돌아와요.
시그리드는 레온하르트에게 언제나 솔직하고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 사랑스러운 몸짓으로, 눈빛으로, 말로.
너무 사랑스러워서 청년의 가슴을 태워버릴 만큼.
시그리드에게 이토록 사랑받고도 사랑에 미치지 않을 남자가 있다면 레온하르트는 진심으로 만나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그리드의 촉촉한 눈동자를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던 레온하르트가 탄식하듯 한숨을 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마치 뭔가를 참는 것처럼.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반지를 만들라고 재촉했을 텐데.”
남자가 반지를 선물하는 것은 청혼을 뜻한다.
왼쪽 약지는 심장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에 반지를 끼면 연인을 온갖 재앙으로부터 지켜주고 한없는 사랑을 전할 수 있다고 한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습이다.
“네?”
“여기에.”
레온하르트가 시그리드의 왼손을 잡았다.
성을 드나드는 상인에게 반지를 만들라고 명령했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가느다란 약지에 신성한 얼굴로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레온하르트는 문득 테이블 위의 꽃병을 바라보았다.
“……레온?”
레온하르트는 꽃병에 꽂혀있는 커다란 꽃을 뽑아서 손톱으로 줄기를 갈랐다.
약지에 줄기를 끼우자 시그리드의 왼손에 한 송이 꽃이 피었다.
“돌아오면 진짜 반지를 줄게. 그때까지는 이걸로 참아줘.”
“네……!”
정문을 지나 왕궁을 떠나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을 시그리드는 언제까지나 지켜보았다.
♥
“이상하군.”
불안한 듯이 푸릉푸릉 콧김을 뿜는 흑갈색 털의 애마에게 계곡에서 길어온 물을 먹이며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곧 해가 저물 무렵. 깊은 숲 속은 이미 어두컴컴했다. 병사들은 적당한 곳을 물색해서 풀을 깎고 능숙하게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본래는 사방에 짐승을 쫓는 화톳불을 피우고 싶었지만 섣불리 불을 피웠다가 살림 왕자 측에 들키면 큰일이기 때문에 아직 불을 피우는 것은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보초를 사방에 배치하고 굶주린 곰이나 늑대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주위를 경계했다. 부하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은 레온하르트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왕도를 떠나 살림 왕자의 영지였던 카마라일 근처의 숲에 머물며 먼저 상황을 살피기 위해 보낸 선발대의 귀환을 기다렸다.
말하자면 휴식을 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뭔가 마음에 걸리는군.
레온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레온하르트 옆에서 말을 쉬게 하고 있던 레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마라일 영지는 이 숲을 빠져나가면 말을 타고 30분 정도 걸립니다. 이제 곧 선발대도 돌아올 겁니다.”
“……너무 조용해. 묘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레빅.”
“네. 여기 도착할 때까지 당연히 방해공작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싸움이 당연한 시대이긴 하나 생과 사가 제일 생생하게 충돌하는 곳은 바로 전장이다.
이 감각에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 익숙해지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것을 한 번이라도 전장의 불길을 헤쳐 온 적이 있는 전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을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사랑하는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카마라일로 진군하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띄면 곤란하기 때문에 레온하르트의 군대는 야간에만 진군했다. 낮에는 야영지에서 수면을 취하며 예정대로 순조롭게 카마라일에 도착했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왠지 불길함을 느꼈다.
“……단순한 기우라면 좋겠지만.”
항상 예리한 직감을 자랑하는 레온하르트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끊임없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이런 직감은 옛날부터 레온하르트의 무기였다.
“선발대가 돌아온 것 같습니다.”
발이 빠른 말 중에서도 특히 준마만을 고르고 골라서 뽑은 소수정예 선발대가 숲의 어둠을 가르며 거침없이 달려왔다. 그 모습은 어딘가 다급하고 이상했다.
──적에게 쫓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레온하르트는 암흑 속에서도 잘 보이도록 훈련받은 눈으로 병사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지만 그중 몇 명은 눈에 띄게 안색이 좋지 않았다.
“놓쳤나……?”
질풍처럼 돌아온 선발대 대장이 레온하르트의 눈앞에서 겨우 애마의 고삐를 당겼다.
“레온하르트 님께 보고 드립니다!”
백전연마의 맹장인 선발대 대장은 무서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새파랗게 질린 채 굳어 있었다. 그래도 과연 대장답게 젊은 병사들처럼 허둥대지는 않았고 보고도 알아듣기 어렵지 않았다.
선발대장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말에서 뛰어내려 레온하르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보고를 시작했다.
대장에 이어 돌아온 선발대 병사들 중에는 귀대한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굴러떨어지듯 말에서 내려 구토를 하는 자들마저 있었다.
위생병이 허둥지둥 처치에 나섰다.
“선발대장. 뭐냐, 이 꼴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카마라일 영주관은 텅 비어 있습니다! 안에 남아있는 것은 여자와 어린아이들뿐. 그자들은 모두 참살당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모두 죽고 생존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뭐라고!”
그 말에는 레온하르트도 눈을 크게 떴다.
병사들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아마도 살림 왕자의 군대가 입막음을 위해 죽였을 겁니다.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도망쳤던 흔적이 아직 저택 안에 남아 있습니다. 마치 악몽 같은 광경이었습니다……!”
창백한 얼굴로 정확하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대장의 보고는 그야말로 지옥도를 연상시켰다.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곳도 있는 것을 보면 요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이 틀림없습니다. 살림 왕자가 잠복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지하실도 샅샅이 수색했습니다만, 이미 그곳에 숨어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수고했다. 먼저 쉬어라. 카마라일 영주관에는 후에 사람을 보내서 참살당한 자들의 장례를 치러주도록 하겠다. 인척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레빅.”
“알겠습니다. 왕궁에 연락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서 돌아온 선발대를 물러가게 한 후 레온하르트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살림 왕자라는 남자. 상상 이상의 악인이군.
그러나.
“……어쨌든 살림 왕자는 카마라일 영지에 잠복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불안하게 목덜미를 어루만지자 손가락 끝에 뭔가가 와 닿았다.
부적을 매단 끈이었다.
“……!”
레온하르트는 다음 순간 전속력으로 애마를 몰았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흙먼지가 일고 레온하르트의 검은 애마가 앞다리를 높이 치켜들며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레온하르트 님? 왜 그러십니까!”
“왕궁으로 돌아간다! 레빅, 너는 전군을 통솔해서 뒤따라 와라! 나는 먼저 간다!”
레온하르트가 왕궁에 없는 밤. 마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레온하르트가 군대를 이끌고 살림 왕자의 영지 카마라일로 진군한 지 며칠째.
카마라일에는 이미 도착했을까. 아니면 아직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리고 있을까.
시그리드의 상념은 멈추지 않았다.
──레온……!
그가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양손을 꼬옥 움켜쥐고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기도를 드렸다.
꽃반지는 꽃이 시들어버리지 않도록 손가락에서 빼서 작은 수반에 띄워놓았다. 이러면 레온하르트가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시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그리드, 따뜻한 차라도 마실래?”
푸셰르가 티세트가 놓인 작은 수레를 끌고 왔다.
상황이 상황인 데다 사람이 적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매일 밤 대부분의 시녀들이 시그리드의 처소에 모였다.
“레온하르트 님이 없으니까 너무 조용해서 쓸쓸하네.”
푸셰르가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침울해진 시그리드를 위로하듯 이것저것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담근 살구주는 어떻게 됐어? 잘 익고 있는지 세심하게 상태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엄마가…….”
그때 쿠웅 하고 벼락이라도 떨어진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꺄악!”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다.
시그리드는 창가에 놓여있는 1인용 안락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뭔가 이상했다.
어딘가에 벼락이 떨어진 걸까. 섬뜩한 예감에 재빨리 창밖을 살펴봤지만 하늘은 맑고 별도 보였다. 벼락이라기에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나머지 가능성은 폭격이었다.
에블리야 왕궁이 함락된 밤처럼.
“방금 무슨 소리지?”
푸셰르가 복도 저편으로 달려가서 상황을 살펴보았다.
“확인하고 올게. 시그리드 넌 여기 있어!”
“푸셰르, 안 돼, 혼자 가면 위험해!”
“신녀님.”
시그리드가 허둥지둥 뒤를 쫓아가려고 하자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 두 명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시그리드를 위해 살구나무 가지를 내려준 병사였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가는 김에 상황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부탁해요.”
시그리드가 그렇게 부탁한 바로 직후 회랑에서 푸셰르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악!”
“푸셰르?”
“신녀님, 방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위험합니다!”
병사가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문으로 달려가자 얼어붙어버린 푸셰르가 비명같이 외쳤다.
“시그리드, 오면 안 돼!”
“비켜라! 방해하는 것들은 모조리 베어버리겠다!”
왕궁의 소란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 있을 때 비밀 문을 통해 시그리드의 방 옆으로 침입해 온 모양이었다.
한 청년이 회랑 너머에서 장검을 휘두르며 고함쳤다.
청년은 분노에 미쳐 날뛰는 대신 웃고 있었다. 즐거워서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일그러진 파괴의 기쁨에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시그리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림 왕자……!”
♥
“어떻게 여기에…….”
살림 왕자가 시그리드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는 위협하듯 난폭하게 검을 휘둘러 푸셰르와 시녀, 그리고 병사들을 쫓아낸 후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시그리드와 푸셰르, 시녀들은 한곳에 모여 레온하르트가 남겨두고 간 경비병들에게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었다.
좀 전의 소동은 역시 양동작전이었던 모양이다.
살림 왕자는 왕궁 안의 지름길과 비밀통로를 낱낱이 알고 있다.
아직 왕궁의 모든 곳을 파악하지 못한 경비병의 허를 찌르는 것쯤은 분명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겨우 다시 만났군요, 신녀님. 보고 싶었습니다.”
“그 모습은……?”
시그리드는 뒷걸음치면서도 살림 왕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본래 눈매가 서늘한 청년이었지만 지금 그는 말라서 뺨이 움푹 꺼져 있었고, 욕망으로 가득 찬 번들거리는 두 눈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잘린 채로 산발이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그리드를 가장 두렵게 만든 것은 훈장이 잔뜩 달린 군복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는 혈흔이었다.
“아, 이것 말입니까?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제 피는 아니니까요.”
살림 왕자가 쿡쿡 웃으며 입가를 섬뜩하게 일그러뜨렸다.
“잠복해 있던 카마라일 영주관에서 이쪽으로 향할 때 남아있는 여자와 아이들을 전부 베어버리고 온 것뿐입니다.”
“베어버려……?”
시그리드는 즉각 참상을 파악했다.
살림 왕자가 무정하게 백성들을 베어버리고 짓밟으며 걸어오는 광경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피에 젖은 군복이 그 증거다.
사람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잔인함에 충격을 뛰어넘어 바닥을 알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무서운 사람. 그게 인간이 할 짓이란 말인가.
“그런 끔찍한 짓을…….”
시그리드는 살림 왕자를 노려보았다.
“끔찍해? 어째서입니까? 카마라일에 있는 것은 전부 내 것입니다. 어떻게 하건 내 마음이지요. 영지민들이 멋대로 에일린 놈들과 내통하지 않도록 인질 대신 여자와 아이들을 영주관에 모아놓은 겁니다. 잠복해 있는 동안에는 적당히 시중을 들게 했지만 이제 볼일은 끝났으니까요.”
믿을 수 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그에게 시그리드는 현기증을 느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건가요……!”
그것도 저항할 힘도 없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카마라일의 남자들은 어떻게 됐을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참살당했다는 것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척후병 노릇을 하고 있을까.
“한동안 지하실에서 지내는 바람에 답답했는데 좋은 기분전환이 됐습니다. 아, 그래도 검이 녹슬면 곤란하겠군요. 이 나의 검이 아랫것들의 피로 더러워지는 것은 용서할 수 없으니까요.”
“당신은 미쳤어……!”
시그리드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왕궁에 침입한 살림 왕자의 군대가 그들을 차츰 포위했다.
겨우 몇 명의 병사들만으로는 도저히 그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자아, 신녀님. 모시러 왔습니다. 허둥지둥 국외로 도망친 대숙부님과 사촌형제들 따윈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신의 눈을 지닌 신녀님을 되찾고 이번에야말로 내가 에블리야의 새로운 왕이 되는 겁니다……!”
왕궁 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살림 왕자의 수하들이 미친 듯이 날뛰고 시녀들은 겁에 질려 도망쳤다.
곳곳에서 물건이 파괴되고 파편이 방 안에 흩어졌다.
화약 냄새도 났다.
“도와줄 사람 따윈 오지 않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시그리드를 바라보며 살림 왕자가 비웃었다.
몇몇 시녀들은 시그리드를 필사적으로 지키기 위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 내가 천한 에일린 놈들 따위에게 당할 것 같습니까? 놈들은 지금쯤 어슬렁어슬렁 카마라일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자아, 신녀님. 나를 따라오십시오. 어서 복종의 맹세를. 그렇지 않으면 이자들을 한 사람씩 죽여 버리겠습니다!”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그리드의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왕궁의 모두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 살림 왕자는 정말로 이들을 죽일 것이다. 자신의 영지민을 참살하고 비웃을 수 있는 인간이다.
시그리드는 눈을 감고 살림 왕자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시그리드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그 시선이 지독히 무겁게 느껴졌다.
의기양양한 웃음소리가 왕궁 안에 울려 퍼졌다.
“겨우 체념했습니까. 그건 그렇고 왕궁에서 지내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그 증오스러운 애송이에게 귀여움을 듬뿍 받은 것 같군요…….”
위에서 아래로 핥는 듯한 시선에 시그리드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흐음. 그 애송이가 갖고 논 몸을 저도 충분히 맛보도록 하죠. 오래전부터 신녀님 당신을 안아보고 싶었습니다. 틈을 봐서 덮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만, 대신전은 신관들의 경계가 워낙 엄중해서…….”
몰랐다. 그렇다면 대신관들이 줄곧 시그리드를 지켜줬던 것일까.
살림 왕자가 시그리드의 미모에 새삼 감탄의 말을 늘어놓았지만 당사자인 시그리드에게는 소름 끼치게 느껴질 뿐이었다.
“아름다워. 한때는 당신을 내 아내로 삼으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대신전에서 궁색하게 사는 것보다는 내 곁에서 교태를 부리고 잠자리 시중을 들면 질릴 때까지 귀여워해줬을 텐데. 그래서 그때 일부러 데리러 갔습니다만……. 스스로 부귀영화를 누릴 기회를 차버리다니, 어리석기는. 이것도 전부 이 내 손을 거부한 죄입니다……!”
흡족해하며 말을 잇는 살림 왕자를 시그리드는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조용하고 예리하게 가라앉은 보랏빛과 은빛 신의 눈이 살림 왕자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범하기 어려울 만큼 맑고 깨끗한 뭔가가 시그리드의 온몸에서 흘러나와 주위를 압도했다.
“……레온과 당신은 전혀 달라요.”
“당연하죠. 나는 에블리야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자입니다. 그런 야만스러운 놈과 똑같이 취급하면 곤란하지요.”
“그분은 고결하고 이 나라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있어요. 당신 따위와 비교하는 건 그분에게 실례예요.”
“……뭐라고?”
살림 왕자의 안색이 변했다. 주위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시그리드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이 나라를 염려하고 있어요. 당신과 똑같이 취급하지 말아요……!”
“잠자코 듣자 하니 이 건방진……! 이제 됐다. 귀여워해줄 생각도 사라졌다. 그 목을 베어주마!”
시그리드에게 살림 왕자는 에블리야 왕가의 상징이었다. 욕심 많고 선악도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
살림 왕자의 광기는 이제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을 정도였다.
직계 왕자가 아닌 그는 왕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부터 뭘 잘못 생각한 걸까. 왕궁이 함락됐을 때 살림 왕자의 상태는 이미 이상했다.
──그때는 이미 마음이 병들기 시작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살림 왕자는 왕족으로 태어났으면서도 결코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자신의 출신에 분노와 좌절을 품고 있었으며 에블리야 함락은 그 계기가 된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그러진 정욕.
그것이 인간이 지닌 약한 면이라는 것을 시그리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아, 신녀, 마지막이다. 각오해라!”
피에 젖은 살림 왕자의 장검이 목을 겨눴다.
──레온……!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뇌리에 떠올리며 시그리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인간은 분명 나약한 생물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놀랄 만큼 강해질 수 있다.
시그리드는 레온하르트의 강인함을 동경했다.
그렇게 유연하고 결코 꺾이지 않는 강함이 있었더라면.
“설령 죽더라도 당신 뜻대로 되진 않을 거야, 절대로!”
살림 왕자의 뜻대로 될 바에는 지금 여기서 죽는 게 낫다.
그때.
“시그리드……!”
누구보다도 강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그리드는 흠칫 숨을 삼켰다.
──이 목소리는…… 레온……?
한순간의 침묵 속에서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그 한순간이 지난 후, 비틀거리며 뒷걸음친 것은 시그리드를 향해 칼을 휘두르던 살림 왕자였다.
손에 움켜쥐고 있던 검이 떨어지고 몸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크…… 악……!”
시그리드는 멍하니 눈을 크게 떴다.
화살 한 대가 살림 왕자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하고 있었다.
털썩. 살림 왕자의 몸이 곧 소리를 울리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살림 왕자의 손목은 뼈가 부러지고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가 화살을 쏜 것인지 시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멀리서도 뼈를 부술 만큼 강력하게 활을 쏠 수 있는 사람.
그런 용감한 청년이 그리 흔할 리가 없다.
드레스 자락이 흐트러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시그리드는 후원을 가로질러 말에서 뛰어내린 그 사람에게 달려갔다.
“레온……!”
“늦지 않았군……!”
레온하르트가 달려오는 시그리드를 한 팔로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는 아래위로 격하게 들썩거렸고 단정한 얼굴에서는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허리에는 사벨, 그리고 왼손에는 지금 막 화살을 쏜 활을 움켜쥐고 있었다.
꼬박 하루 밤낮을 쉴 새 없이 말을 달려서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것이다.
“레온, 레온……!”
──구하러 와줬구나……!
시그리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발돋움을 하며 레온하르트의 몸에 매달렸다. 레온하르트의 몸에서는 바람과 땀 냄새가 났다.
다시 한 번 살아서 레온하르트를 만난 것이 기뻤다.
“레온하르트 님, 어떻게 여기에…….”
푸셰르도 놀라며 물었다. 그것도 당연하다.
레온하르트는 카마라일 영지로 향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 사실에 의문을 느꼈는지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레온하르트가 돌아왔다면 함께 떠난 군대도 돌아왔을 것이다.
우두머리가 화살을 맞자 겁을 먹은 것일까, 살림 왕자의 병사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소동을 가라앉힌 후 달려온 왕궁의 병사들에게 포위되어도 저항할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살림 왕자는 지혈을 하려고 하는 위생병의 손을 난폭하게 뿌리치고 미친 듯이 날뛰다가 결국 구속당했다.
“레빅 님은……? 그리고 다른 측근들은……?”
자신도 지칠 대로 지쳤으면서 시그리드를 한 팔로 가볍게 안아들고 있던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카마라일 영지에 들어서자마자 곧 살림 왕자의 음모를 눈치챘어. 당장 전군을 이끌고 돌아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나만 한발 먼저 돌아온 거야.”
애마에게 조금 무리를 시키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며 레온하르트는 안심한 것처럼 또다시 시그리드를 끌어안았다.
왼손에 아직 활을 쥐고 있어서 오른손으로밖에 그녀를 만질 수 없는 레온하르트는 그 대신 야성적으로 뺨을 비볐다.
“손이……. 내 손이……. 젠장, 네놈……!”
살림 왕자가 입에서 거품을 뿜을 기세로 레온하르트를 노려보았다. 겁에 질린 시그리드를 등 뒤로 감싸며 레온하르트는 냉혹하게, 그리고 잔인하게 대답했다.
“손이 뭐 어쨌다는 거지. 설마 그 정도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나……?”
시그리드를 병사들에게 맡긴 후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온몸에서 시커먼 분노가 뿜어 나왔다. 분노에 사로잡힌 레온하르트는 허리에 찬 사벨을 뽑았다.
조금 전에는 시그리드를 구하기 위해 화살로 참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숨통을 끊어버릴 생각이었다.
“네놈, 누구 허락을 받고 시그리드에게 손을 대려고 한 거지……? 게다가 칼까지 들이대다니 용서할 수 없어……! 지금 이 자리에서 깨끗하게 숨통을 끊어주마!”
“레온! 안 돼! 그러지 말아요!”
시그리드는 말리는 병사들을 뿌리치고 갑옷으로 감싼 레온하르트의 팔에 매달렸다.
“시그리드, 말리지 마. 이 녀석은 널 위협하고 게다가 죽이려고 했어. 물러서 있어. 여긴 위험하니까.”
“난 살아 있어요! 레온이 늦지 않게 와줘서!”
시그리드는 가냘픈 몸으로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레온하르트는 차마 난폭하게 뿌리치지 못하고 씁쓸한 표정으로 신음하듯 말했다.
“비켜.”
“안 돼……. 레온하르트가 괴로워하는 건 싫어요……!”
“내게 널 죽이려고 한 남자를 죽이지 말라는 거야……?”
“레온이 무익한 살생을 하는 걸 원치 않아요. 이 사람에겐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 처벌이 있을 거예요.”
그녀의 필사적인 설득에 레온하르트는 겨우 살기를 거뒀다.
“……그래. 하긴 이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 되긴 싫군. 게다가…… 편히 죽게 해주는 것보다 굴욕을 주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군. 망명한 왕족과 거래를 할 때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몰라.”
“웃기지 마, 지금 당장 죽여라! 네놈들에게 동정 따윈 받고 싶지 않아!”
고함을 지르는 살림 왕자에게 던진 레온하르트의 대답은 어떤 의미로 죽음을 선고하는 것보다 더욱 냉혹했다.
“누가 편하게 해주겠다고 했나? 실컷 굴욕을 맛보고 괴로움에 몸부림쳐라. 네가 저지른 죗값을 실컷 맛보도록 해라.”
레온하르트는 씻으면 금방 낫는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양손 손가락 끝에 난 상처는 꽤 심했다.
너무 오랫동안 고삐를 쥐는 바람에 생긴 찰과상 외에도 지름길로 오느라 가시덤불에 긁힌 상처까지, 상처가 없는 손가락이 드물 정도였다. 손등까지는 갑주에 감싸여 있지만 손가락 끝만은 보호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죽장갑을 낄 수도 있지만 손가락 끝의 감각이 둔해지는 것 같아서 레온하르트는 장갑을 싫어했다.
무엇보다도 전장에 선 적이 있는 사람에게 이 정도는 상처 축에도 끼지 못하는 일상다반사였다.
그 자잘한 상처를 시그리드는 들통에 담긴 물로 정성껏 씻어서 핏자국을 닦아냈다.
시그리드의 방은 살림 왕자 때문에 엉망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 밤은 레온하르트와 함께 집무실 옆에 있는 방에서 자기로 했다.
시그리드는 푸셰르를 통해 대신전에 연락해서 서둘러 필요한 물품을 가져왔다.
등받이가 달린 의자에 레온하르트를 앉히고 정성껏 치료했다.
“……아파요?”
“아니.”
“아프면 말해요.”
깨끗한 물로 씻은 후에는 마른 천으로 꼼꼼하게 물기를 닦았다. 시그리드의 손놀림은 매우 능숙했다.
레온하르트는 기분 좋은 듯이 시그리드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능숙하군.”
“대신전이 폐쇄당하기 전까지는 저도 치료를 할 때가 많았으니까요.”
레온하르트는 흥미로운 듯이 시그리드의 손을 응시했다.
시그리드는 지금 막 조합한 약을 손가락에 묻혔다.
“상처가 곪는 걸 막으려면 이 마트 뿌리 즙이 최고예요. 하룻밤 이대로 두고 손에 물이 묻지 않게 조심하세요. 될 수 있으면 아침까지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재빨리 약을 바르고 청결한 붕대로 손가락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레온하르트의 양손을 살며시 움켜잡고 가슴에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날 구해준 이 손이 빨리 낫기를…….”
그때까지 잠자코 정성스러운 간호에 몸을 맡기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아침까지 손가락을 쓸 수 없다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침까지 움직이지 못하는 건 곤란해. 레빅과 수하들이 돌아올 때까지 할 일이 아주 많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도와줄게요. 사양하지 말고 말해 봐요.”
심복 레빅과 병사들 같은 일은 할 수 없겠지만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고 싶었다. 레온하르트의 손가락을 대신하고 싶었다.
“이럴 때만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너도 피곤할 텐데 그만 쉬어. 또 열이 나는군.”
레온하르트가 달래듯이 말했지만 시그리드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명령서를 몇 장 쓰고 싶은 것뿐이야. 물을 사용하진 않을 거야.”
“알겠어요. 명령서 말이죠?”
시그리드는 옆의 집무실로 달려가서 깃털 펜과 잉크병, 휴지와 양피지를 끌어안고 돌아왔다. 시그리드도 대신전에서 서류에 사인을 한 적이 많기 때문에 절차는 잘 알고 있었다.
백단으로 만든 작은 책상 위에 재빨리 대필을 할 준비를 갖추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던 레온하르트가 낮은 목소리로 즐거운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못 당하겠군…….”
그리고 곧 그 웃음을 거두고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카마라일에서 벌어진 일은 들었나.”
시그리드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네.”
살림 왕자만 욕심을 버렸더라면 구할 수 있는 목숨이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아팠다.
──난 너무 무력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레온하르트 같은 힘이 있었더라면 살림 왕자와 맞서 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스스로가 한심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제안은 시그리드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너에게 대신전의 신녀로서 희생자들의 추모를 부탁하고 싶어. 그들도 에블리야의 백성이니까 너의 추모가 무엇보다도 큰 위로가 될 거야. 받아들여주겠어?”
시그리드에게 레온하르트는 길을 밝혀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길을 잃고 헤매면 손을 끌어주고 때로는 등 뒤에서 든든하게 지켜주는 존재.
늘 시그리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켜주면서 한편으로 자유로운 날개가 위축되지 않도록 배려해준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 차마 참극의 현장으로 데려가줄 수는 없지만 당신이 기도해주면 희생자들의 영혼도 조금은 위안을 얻을지도 몰라.”
레온하르트에게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면 시그리드는 얼마든지 그에 응할 생각이었다.
──나도 레온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시그리드는 레온하르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
소동이 일어난 지 일주일 남짓이 지났다.
살림 왕자는 결국 국내에서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게 되었다.
부상은 잘 치료받았고 의식주도 부족함 없이 제공되었지만 왕족의 긍지가 산산조각 난 후에는 독기가 빠진 것처럼 얌전해져서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한다.
“……슬슬 찾아오실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조용한 오후.
시그리드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레빅이 은밀하게 할 말이 있으니 시녀들을 모두 물려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시그리드의 방은 서둘러 수복되었고 겨우 평소의 일상을 되찾았다.
레빅은 시그리드가 권하는 의자에 앉으려고 하지도 않은 채 고뇌에 찬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의 결의는 굳어 보였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 흔들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시그리드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레빅은 얼핏 안쓰러운 눈빛으로 시그리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빅의 주인은 레온하르트다. 시그리드가 아니다.
충실한 부하 레빅은 애써 냉정하게 통보했다.
“레온하르트 님은 곧 정식으로 국왕의 자리에 즉위하실 겁니다.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왕에게는 왕비가 필요합니다. 주군께 어울리는 배필은 위기가 닥쳤을 때 이 나라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아무도 트집을 잡을 수 없는 고귀한 신분의 여인입니다.”
시그리드가 레온하르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레빅도 잘 알고 있다.
처음에는 시그리드를 의심하기도 하고 방해물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워낙 감정표현이 솔직해서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딸과 비슷한 또래의 신녀가 가엾기는 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레빅의 충성은 오직 레온하르트만을 위한 것. 조국을 빼앗긴 슬픔과 육친을 살해당한 증오를 레빅은 모두 레온하르트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꿔서 살아왔다.
조국을 재건하고 레온하르트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지기 위해서라면 레빅은 악마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떠나주십시오. 죄송하지만 당신은 레온하르트 님의 약점입니다. 그분은 패왕입니다. 약점이 있어서는 안 되는 분이십니다.”
새로운 왕은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보다도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그리드는 아무리 생각해도 레온하르트의 약점이다.
살림 왕자 때처럼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무모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제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에블리야 왕족들에게 알려지면 눈 깜짝할 사이에 악의의 손길이 뻗어올 것이다.
시그리드만 방패로 삼으면 약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레온하르트는 살림 왕자 사건을 통해 입증하고 말았다. 이 절호의 미끼가 호시탐탐 에블리야를 노리는 자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그렇게 되도록 두고 볼 수 없지……!
시그리드도 계속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레온에겐 비전하가 필요하겠죠. 지금은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제국도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면 외척이 될 테고, 그러면 레온에게 무엇보다도 든든한 힘이 되어줄 거예요.”
총명한 시그리드도 자신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를 위해 지나치게 무모하게 행동한다.
시그리드는 늘 그것이 불안했다.
──이 나라는 아직 불안정한 입장……. 레온하르트는 앞으로도 전장에 서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만약 강한 나라가 힘이 되어준다면 레온도 훨씬 싸우기 편해질 거야. 분쟁도 줄어들 게 틀림없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은 레온하르트 곁에 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출신조차 모르는 처지인걸.
과분한 꿈을 꿨다.
언제까지나 곁에 있고 싶다는 주제넘는 꿈을 꾸고 말았다.
──나도 어느새 욕심이 많아졌구나…….
어린 시절 그 소년이 살아 있기만 하다면,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더 이상은 아무것도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시그리드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왕궁에서…… 그분 곁에서 떠나겠습니다. 도와주시겠어요……?”
씁쓸한 뒷맛을 삼키면서도 레빅은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감사, 합니다.”
단 한 사람, 이 자리에 남아있을 것을 허락받은 푸셰르가 하얀 에이프런 자락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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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시그리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먼저 얇은 침의의 허리끈을 풀었다.
“어떻게 된 거야? 꽤나 적극적이군.”
레온하르트는 조금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딱히 불만은 없어 보였다.
그는 시그리드가 아무리 애원해도 침대 옆의 촛불만은 끄지 않았다. 불을 모두 꺼버리면 밤의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난 오히려 불을 환하게 밝히고 널 안고 싶은데?」
그가 몹시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 후로는 시그리드도 더 이상 불을 꺼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방 안의 촛불을 모두 밝혀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얇디얇은 옷자락을 어깨 아래로 스르륵 떨구자 시그리드를 응시하던 레온하르트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유혹하는 건가.”
시그리드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품에 끌어안기고 말았다. 입술에, 어깨에, 가슴에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레온하르트의 옷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건만 시그리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지독히 선정적이었다.
서로의 윤곽을 어렴풋이 비추는 촛불의 불빛은 시그리드와 레온하르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일렁거리며 음영을 만들어 침실의 농염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새하얀 시트의 물결. 때때로 귀에 들려오는 밤바람 소리.
레온하르트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시그리드는 몸을 움츠렸다.
두려움 때문이 아닌, 오싹오싹한 음란한 예감에.
평소 레온하르트는 제일 먼저 시그리드의 가슴에 관심을 보이곤 했다.
정성껏 어루만지기도 하고, 주무르기도 하고, 시그리드가 이제 그만하라고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뾰족해진 젖꼭지를 빨기도 하고.
단순한 젖가슴에 이토록 관능의 샘이 숨어있을 줄은 지금까지 몰랐다.
레온하르트는 언제나 질리지도 않고 시그리드의 가슴을 탐했다. 덕분에 시그리드의 가슴은 그녀 자신보다 레온하르트에게 더욱 순종적이었다. 언제나 그의 손안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음란하게 변화했다.
시그리드는 네발로 엎드린 자세로 등 뒤에서 주어지는 자극에 특히 약했다. 그는 짐승 같은 자세로 시그리드의 몸을 뒤덮은 채 끊임없이 가슴을 애무하고 완전히 발기한 성기를 허벅지에 비비거나 천천히 삽입을 하는 척하며 그녀를 신음하게 만들었다.
시그리드의 질벽은 레온하르트의 움직임에 일일이 환희하며 잡아먹을 듯이 그의 성기를 조이곤 했다.
클리토리스를 집요하게 희롱하고 단단한 성기로 자극하며 붉게 충혈된 젖꼭지를 움켜쥘 때마다 시그리드의 몸은 음란할 만큼 움찔움찔 느끼며 애액을 흘렸다.
그리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된 시그리드가 기다려달라고 울며 애원해도 레온하르트는 단숨에 그녀의 몸을 꿰뚫곤 했다.
그리고 마음껏 탐했다.
짐승처럼 엎드린 자세로 안기면 팔도 다리도 짓눌려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주어지는 관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꿰뚫리고 흘러넘칠 만큼 정액을 받아들였던 밤이 대체 몇 번이었던가.
그러나 오늘 밤은 달랐다.
레온하르트는 가슴을 애무하기보다 먼저 똑바로 누운 시그리드의 다리를 느닷없이 활짝 벌리며 남자답게 웃었다.
“절경이군. 번들거리며 날 유혹하고 있어. 너에게도 보여주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야.”
“그, 그런 건…… 보고 싶지 않아요……!”
“아직 부끄러워하는 버릇은 낫지 않았나? 그만큼 안겼으면 이제 슬슬 익숙해져도 되잖아?”
온몸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부끄러워하는 시그리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차례 웃은 후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시그리드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레온……?”
처음에는 레온하르트가 뭘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뜨겁고 축축한 혀가 민감한 입구를 핥은 순간 시그리드는 화상이라도 입은 듯한 감각에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런 곳을……!”
당황해서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를 유혹하는 것처럼 새하얗고 살짝 붉어진 눈가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요염했다.
“여기서 그만둘 수 있는 남자는 없을걸.”
레온하르트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처럼 시그리드의 허리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일부러 시선을 마주치며 보란 듯이 혀를 뻗었다.
시그리드는 비명을 질렀다. 레온하르트의 혀는 지나치게 음란했다.
그가 클리토리스를 격렬하게 핥으며 입구 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싫어……!”
“걱정 마. 기분 좋아질 때까지 해줄 테니까.”
“그런 곳에 얼굴을 대고 말하지 말아요……!”
후욱──. 뜨거운 숨결이 클리토리스에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오싹오싹 소름이 끼칠 만큼 자극적이었다.
일부러 클리토리스에 숨을 불어넣은 레온하르트는 혀를 꿈틀거리며 입구 주위를 할짝할짝 핥았다. 음순이 젖혀질 듯 말 듯 한 절묘한 애무에 시그리드는 누운 채로 살짝 등을 휘었다.
“안 돼, 안 돼, 그만해요…….”
“난 즐거운데.”
“응, 으응……! 잠깐만요, 레온, 잠깐만……!”
시그리드는 달콤하고 촉촉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오늘 밤만은 곧바로 쾌락의 파도 속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사랑을 나누며 레온하르트와 함께 보내는 마지막 밤을 기억에 새기고 싶었다.
“앗……. 아.”
뜨겁고 축축한 레온하르트의 혀가 츄웁츄웁 소리를 울리며 이번에는 클리토리스를 희롱했다.
믿을 수 없는 쾌감과 욱신거림과 뜨거움에 시그리드는 하얀 나신을 뒤틀었다. 아름다운 이마에 진주 같은 땀방울이 맺혔다.
──혀, 혀로…… 핥다니……!
이런 감각은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침대 위의 행위는 이제 전부 맛본 줄 알았는데. 연인들의 행위를 잘 알고 있는 레온하르트에게는 아직 연습 정도에 불과했겠지만.
“흐읏, 아…… 으응.”
지나치게 강렬한 쾌감에 발끝을 펴며 맨발로 시트를 휘저었다.
혀도 연인을 애무하기 위한 기관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두터운 혀는 뜨겁고 축축하게 살갗을 핥으며 시그리드의 몸을 그야말로 구석구석 맛보았다.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는 것과도, 뜨겁게 부풀어 오른 성기로 꿰뚫리는 것과도 다른, 약한 불로 살짝살짝 그을리는 듯한 쾌감이 느껴졌다.
타액에 흠뻑 젖은 혀가 음부를 핥았다.
“흐읏……!”
입술에 키스하는 것처럼 흥건하게 젖은 입구에 입을 맞추며 혀를 밀어 넣었다.
“으응.”
달콤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억누를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가느다란 발목을 움켜잡고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을 때마다 시그리드는 허리를 움찔움찔 떨었다.
달콤한 저릿함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부풀어 올랐다.
욱신거리는 듯한 감각은 눈 깜짝할 사이에 클리토리스에서 온몸으로 퍼졌다. 이윽고 베개를 움켜쥐고 있는 손가락 끝까지 쾌락으로 물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쾌락의 정점 가까이 치달았지만 레온하르트는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기 직전, 레온하르트는 애무를 멈췄다.
완전하지 않은 완만한 절정이 이어졌다.
평소의 시그리드라면 이미 항복하고 이제 그만하라며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그리드는 저항하지 않았다.
스스로 몸을 벌리고 레온하르트의 애무를 전부 순순히 받아들였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때로는 애가 타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시간을 들여 정성껏 시그리드의 몸을 녹였다.
차라리 단숨에 꿰뚫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레온하르트는 시그리드의 달콤한 신음 소리마저 즐기는 것 같았다.
“으, 으응…….”
설마 이런 짓을 당할 줄이야.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먼저 유혹한 이상 뿌리칠 수는 없었다.
“……웃. ……으응……. 흐윽!”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하반신이 흠뻑 젖고 허벅지가 움찔움찔 경련할 때까지 레온하르트의 음란한 희롱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강렬한 쾌감에 눈 안쪽에서 빛이 점멸했다.
시그리드는 숨을 헐떡이며 농밀한 애무를 필사적으로 견뎠다.
어느새 옷을 벗어 던진 레온하르트가 커다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에 누운 시그리드의 눈동자를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듯 들여다보았다.
“레온……?”
멀어져가는 레온하르트의 체온이 왠지 쓸쓸해서 팔을 뻗자 곧 그가 시그리드를 끌어안았다.
벌거벗은 팔다리가 뒤얽히고 시선이 마주쳤다.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온몸을 맞대는 순간, 시그리드는 언제나 땅속으로 꺼져 들어갈 만큼 부끄러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몇 번을 경험해도 레온하르트의 뜨겁고 단단한 맨살에는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단련된, 압도적인 강인함으로 시그리드에게 열기를 옮기는 피부.
“……뭔가 숨기고 있군.”
“네?”
“네가 나한테 거짓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얼굴에 다 적혀있어. 말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게 아무것도 아닌 얼굴인가? 무리하고 있는 주제에. 평소의 너라면 이런 짓을 하자마자 울면서 화를 냈을걸.”
레온하르트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며 시그리드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나? 무슨 생각하는 거지? 나는 널 알고 싶어. 가르쳐줘. 아무것도 숨기지 마.”
레온하르트가 문득 생각난 듯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눈동자 때문에 사람들이 수군거렸을 때에도 혼자 참았었지. 그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그 부드러운 말에 시그리드는 울고 싶어졌다.
아무리 부드럽게 말해도 이것만은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은 불안으로 떨리는 마음을 털어놓고 매달리고 싶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 품에 다른 누군가를 안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자의 본능이 격렬하게 질투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정식 왕비로 맞아들일 여성을.
대관식을 마칠 무렵에는 레빅이 수면 아래에서 진행하고 있다는 새로운 왕비 선발도 끝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레온하르트의 옆에 서는 것을 유일하게 허락받은 여성은 분명 그의 품속에서 정열적으로 사랑받으며 기쁨을 맛볼 것이다.
얼굴은커녕 이름도 모르는 그 여성을 미워하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야.
시그리드는 레온하르트를 위해 이별을 선택했다.
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괴로워도 분명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견디고 말 것이다.
──오늘 밤이 마지막이야. 이제 다시는 레온을 만날 수 없어.
오늘 밤만이 앞으로 보물이 되어줄 소중한 시간이다.
레온하르트에게서 한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고 온몸으로 레온하르트를 기억하고 싶었다.
결코 잊지 않도록 레온하르트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기억 속에 새기고 싶었다.
──마지막이니까.
“……레온.”
울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숨기며 그의 품에 달콤하게 기댔다.
“……고집쟁이. 솔직하게 털어놓을 때까지 듬뿍 귀여워해주지.”
레온하르트가 코끝과 코끝을 가볍게 부딪치며 달래듯이 눈을 들여다보았다.
루주를 칠하지 않아도 붉은 입술을 살짝 움직여 입맞춤을 조르자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넌 대체 얼마나 날 휘둘러야 직성이 풀리는 거냐.”
레온하르트는 입을 맞추며 시그리드의 손을 잡고 흥분해서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자신의 성기로 이끌었다.
뭘 만지게 하려는 것인지 깨달은 시그리드의 얼굴은 가엾을 만큼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그래도 손을 떼지는 않았다. 직접 그의 성기를 만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손을 움직여봐. 천천히 움직여도 돼.”
레온하르트의 요구에 시그리드는 머뭇머뭇 손을 움직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의 가벼운 자극은 레온하르트에게는 오히려 역효과였다. 흥분은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부풀어 올라 어떤 극상의 술보다 수컷의 본능을 취하게 만들었다.
레온하르트가 뜨거운 숨을 내쉴 때마다 그의 욕망이 손안에서 꿈틀꿈틀 날뛰었다. 시그리드는 두려움에 숨을 삼켰다.
막상 만져보니 정말로 뜨겁고 단단했다.
이렇게 강하고 단단한 것이 정말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온단 말인가.
가느다란 손가락이 깃털로 만지는 것처럼 가볍게 성기를 애무했다. 레온하르트의 성기는 서툰 애무에도 반응하여 시그리드의 손안에서 미끌미끌한 액을 흘리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떼어버리자 레온하르트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이 정도로 겁을 먹는 주제에 유혹을 하는 건 아직 한참 일러. 익숙한 여자들은 좀 더 대담한 짓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데. 너라면 아마 수치심으로 졸도할지도 몰라.”
놀리는 듯한 눈빛에 시그리드는 조금 발끈했다.
레온하르트가 여자와 사귄 적이 있다는 것은 시그리드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도 다른 여자와 비교당하는 것은 시그리드의 작은 긍지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같은 여자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을지 몰라.
무엇보다도 수치심 때문에 죽게 된다면 벌써 예전에 죽었을 거다. 그러한 부끄러운 일은 레온하르트 탓에 몇 번이나 경험했다.
“나도 할 수 있어요……!”
저도 모르게 오기를 부리는 바람에 결국 시그리드는 침대 위에 책상다리로 앉은 레온하르트의 무릎 위에 스스로 허리를 내려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누운 자세로 삽입하는 것과는 달리 상반신을 일으키자 시그리드의 모든 것이 레온하르트에게 훤히 보였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치심이 밀려왔다.
그리고 우뚝 솟은 힘이 흘러넘치는 성기를 계속 응시해야 하는 것도 부끄러웠다.
“우…….”
시그리드는 차마 용기를 쥐어짜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가느다란 허리를 움켜잡힌 채 눈물을 글썽거리며 망설이는 시그리드를 레온하르트는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애액이 흘러내리는 음부는 레온하르트의 혀에 이미 녹아내려서 남자를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했던 태도는 어디로 간 거지? 역시 항복인가?”
레온하르트는 그러게 내가 뭐랬어, 라고 말하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순간 시그리드의 오기에 불이 붙었다.
“할 수, 있어요…….”
이렇게 부끄러운 짓을 강요당할 줄은 몰랐다. 쾌락의 행위에는 한도가 없는 것일까.
이 자세로는 시그리드가 레온하르트의 것을 삼키는 모습이 그의 눈에 훤히 보이게 된다.
머뭇머뭇 떨며 허리를 내리자 곧 뜨겁고 미끌거리는 선단이 입구에 닿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애무했던 성기는 흉포할 정도로 우뚝 솟아서 쾌락을 기다리며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으응, 앗!”
부풀어 오른 선단이 살짝 삽입된 순간 시그리드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 이상은 도저히 허리를 내릴 수 없었다.
──무서, 워……!
꿰뚫리는 것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두려웠다.
“흐윽…….”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버린 채 시그리드는 어쩌면 좋을지 몰라서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레온하르트의 눈앞에서 무릎을 꿇고 볼썽사납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 따윈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마지막만큼은 레온하르트가 놀랄 정도로 요염하게 행동해서 그를 만족시켜주고 싶었는데.
“울 것까진 없잖아. 갑자기 능숙해지려고 애쓰지 마. 너는 네 페이스에 맞춰서 익숙해지면 돼. 순진한 여자를 취향대로 길들이는 것은 남자의 즐거움이기도 하니까.”
레온하르트는 달래듯이 입을 맞춘 후 시그리드를 다시 무릎 위에 앉히고 천천히 삽입을 시작했다.
사납게 부풀어 오른 성기로 가장 약한 부분을 정확하게 자극한 순간 시그리드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앗!”
“멋진 목소리로군. 요염하고 청아하고……. 내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너는 아직도 더러움을 모르는 처녀 같아. 네가 무서워하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더럽히고 싶어질 만큼.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칠 만큼 한계를 초월한 쾌감을 안겨주면 너는 얼마나 사랑스럽게 교성을 지를까.”
“아아……. 그런…….”
레온하르트가 어처구니없는 말을 귓가에 뜨겁게 속삭였다. 순간 수치심과 동시에 왈칵 흘러나온 애액이 하반신을 뜨겁게 적셨다.
몸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불꽃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시그리드의 가냘픈 몸은 레온하르트가 원하는 대로 흐트러지며 춤을 췄다.
어느샌가 시그리드의 가느다란 허리도 레온하르트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율동이 서로 어우러지며 또 다른 관능을 자아냈다.
“아앗, 아……. 싫어, 거긴……. 너무 깊어요……!”
차라리 망가져버렸으면. 레온하르트의 품 안에서 망가져버리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수 있을 텐데.
미련이 넘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아직이야. 제일 깊은 곳까지 나를 삼켜줘…….”
무엇 때문인지 시그리드의 질벽이 그의 성기를 세차게 조인 모양이다.
낮게 신음하며 미간을 가볍게 찡그린 채 땀에 젖어 허리를 흔드는 레온하르트는 무서울 만큼 아름다웠다. 어떤 조각상보다도 아름다운 근육과 탄력 있는 피부 위에서 땀이 촉촉하게 빛났다.
──몸도 마음도 아름다운 사람. 이 사람의 뺨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새긴 건…… 바로 나야.
레온하르트와의 행위는 끝이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시그리드의 젖가슴에 물어뜯을 듯이 입을 맞췄다.
절정에 이은 절정. 상상을 초월하는 농밀한 쾌감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 으응…….”
사랑해요.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애욕에 사로잡힌 입술은 교성을 지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크윽……!”
레온하르트에게도 사정의 순간이 찾아왔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고백했다.
──사랑해요, 당신을. 진심으로.
레온하르트의 품속은 달콤한 감옥이었다.
시그리드를 붙잡고, 가두고, 기쁨을 함께하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연옥.
앞으로 시그리드는 레온하르트 이외의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전부 레온하르트에게 바쳤다. 그러니까 다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두근. 레온하르트의 성기에서 정액이 흘러나왔다. 쾌락의 정점과 끝을 똑똑히 보게 된 시그리드는 한순간 숨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시그리드의 몸 안에 정액을 토해낸 후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만족스러운 듯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사랑해.”
처음으로 들은 사랑의 말은 몸을 칼에 베이는 것처럼 안타까웠다.
기쁘지만 그 말에 응할 수는 없었다.
진주색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땀과 뒤섞였다.
끝나지 않는 밤은 없는 것처럼 이 사랑도 이제 곧 마지막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레온…….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당신이 있어서 나는 앞으로도 혼자 살아갈 수 있어요.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다. 떠나는 것만이 시그리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증거니까.
──레온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만 알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어요. 사랑을 버린 것도 아니고 포기한 것도 아니에요. 나는 레온 곁에 있을 수 없어요.
하지만.
사랑하는 것만은 자유다.
레온하르트는 레빅의 계략대로 구 에일린 성의 부름을 받고 이른 아침부터 성을 비웠다.
흘러넘치는 감정을 마음에 품고 시그리드는 소지품조차 거의 놓아둔 채 살며시 왕궁에서 모습을 감췄다.
주인이 사라진 방의 수반 위에는 반지 대신 선물 받은 꽃이 시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