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 아래 떨어지는 꽃이슬-1화 (1/11)

BORI 공금갠소요게X

작가 소개

지은이 하즈키 에리카

작업 환경을 바꾸기 위해 컴퓨터를 새로 사고, 살짝 비싼 워크체어를 구입했습니다.

허리와 등은 매우 편해졌지만, 의자가 메시 재질이라 겨울엔 엉덩이가 휑~휑~한 게 미처 생각지 못한 단점이었습니다. 거기가 차면 피하지방이 들러붙는단 말이죠.

저서 : 『집사의 사랑에 신부는 괴롭다』

그린이 키라 카보스

책상에 액정 태블릿과 일반 태블릿을 같이 놓으니 원고도 그리지 못할 정도로 비좁게 작업을 했습니다. 이번에 큰마음 먹고 사이드 테이블을 샀습니다! 자료와 원고를 펼쳐 놓을 수 있어 감동입니다! 과자도 커피도 놓아야지!

서장

낙성의 불꽃

시야 한가득 하늘하늘 꽃보라와도 비슷한 붉은 불똥이 휘날렸다. 새하얀 비단 잠옷과 긴 검은 머리를 나부끼며, 남련(藍蓮)은 불타는 후궁의 복도를 맨발로 달렸다.

“공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남련 님?!”

등 뒤에서 필사적으로 부르는 유모를 향해, 남련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너는 먼저 도망가거라. 나도 금방 뒤를 쫓을 테니까!”

익숙지 않은 붉은 기둥이나 자색 기와에는, 불꽃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들러붙어 어두운 밤에 별처럼 밝게 춤을 추었다. 시야를 차단하는 검은 연기에 기침을 하면서, 남련은 가고자 하는 장소를 향해 갔다.

당장이라도 불에 타 무너질 듯한 후궁에는, 이리저리 도망치는 사람들의 모습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밤에는 남련의 아버지인 화요 국왕의 50회 생신 연회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비빈과 그녀들을 시중드는 궁녀들도, 연회 장소인 안뜰에 모두 모여 있었다.

한창 때인데도 불구하고 화려한 장소를 껄끄러워했던 남련은, 연회가 열리자마자 자리를 떠나 자신의 방에 들어가 쉬고 있었지만, 친어머니와 왕태자인 오빠, 그리고 두 언니들은 모두 연회 장소에 있었다.

무시무시한 참극은 그 장소에서 일어났다. 연회의 경호를 하던 위병들이 축하 검무를 연기하겠다는 말을 꺼낸 것은 예상외였지만, 모두가 새로운 여흥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투구와 가면을 쓴 병사들이 안뜰의 곳곳에 퍼져 칼을 빼들고 자세를 잡자 징이 울렸다.

다음 순간, 그 장소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연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왕후 귀족에서 신하들에 이르기까지, 위병들의 칼에 쓰러져 거의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어떤 경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연회에 있던 병사들은 모두 최근 몇 년간 적대 관계에 있던 이웃나라 여봉(黎峰)국의 적병들로 뒤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순간적으로 깨달은 남련의 부왕은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해 왕성 내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 보람도 없이 옥좌 쪽으로 내몰린 부왕은, 비열한 적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낫다며 스스로 목을 찔러 자해했다고 한다.

그것을 남련에게 보고한 사람은 부왕을 모시던 비서관의 아들이자, 남련의 소꿉친구이기도 한 조료안(曹遼晏)이라는 청년이었다. 평소에는 온화하고 냉정한 료안이 혈색을 바꾸고 침상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 남련은 무슨 일인가 하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서둘러 사태의 전말을 이야기해준 료안은, 왕족만이 아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 도망칠 것을 권했다.

“국왕 폐하도 정후 마마도, 왕태자 전하나 공주님들도 모두 살해당했어. 화요에 지금 살아 있는 왕족은 이제 너밖에 없어, 남련.”

“그럴 수가…….”

너무나 갑작스런 사태에 남련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중얼거렸다.

“나 혼자 도망가라니, 그럴 순 없어……. 하다못해 아버지와 가족을 묻어주지 않으면…….”

“안 돼. 너만이라도 살아야지!”

단정한 얼굴을 비통하게 일그러뜨린 소꿉친구는, 그녀를 시중드는 유모를 향해 강한 어조로 명령했다.

“공주님을 반드시 무사히 모시고 도망쳐주게. 나는 여기서 추적자들을 막겠네.”

“아아, 이런 일이……. 남련 님, 정신을 바짝 차리십시오. 부디 서둘러주십시오!”

망연자실한 남련을 유모는 힘껏 침상에서 끌어냈다. 귀신처럼 비틀거리며 복도를 걷던 남련이었지만, 이윽고 수상한 느낌 때문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 냄새…….”

“여봉의 병사들이 불을 붙였나 봐. 오랑캐놈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두 사람은 불꽃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달렸다. 그러다 회랑의 갈림길에서 남련이 멈춰 섰다. 일각을 다투는 사태라는 사실은 잘 알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두고 가서는 안 될 물건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유모의 외침도 뿌리치고 맨발로, 남련은 초조함을 가슴에 안은 채로 달렸다.

‘제발 늦지 않기를……!’

꽃처럼 가련한 입술을 깨물면서, 숨을 헐떡이며 계속 달려 남련은 드디어 도착했다.

후궁 바깥에 있는 곳. 해 가리개 막을 몇 겹이나 둘러친 방 하나. 그곳은 남련이 마음에 들어 하는 책을 모아 혼자서 멋대로 만들어놓은 서고였다.

그 장서. 약 3천 권. 철이 들었을 때부터 외모를 꾸미는 것보다도, 사교보다도 독서를 좋아했던 남련에게 있어, 그야말로 자신의 둥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던 그 방은.

“아아……!”

남련은 절망스런 비명을 내질렀다. 자물쇠로 잠겨 있어야 할 문은 열 필요도 없었다. 덧문짝은 이미 불에 탔고, 바닥에 쓰러져 검게 그을려 있었다. 앞을 차단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시선의 앞. 책장에 늘어서 있던 책이 사악한 불꽃에 이글이글 불탔다. 수납 장소가 없어 바닥에 쌓아두었던 서적과 두루마리도 남김없이 불타, 재가 된 종이 파편이 열풍을 타고 공중에 날았다.

‘하지만……. 하지만, 그 책만은……!’

남련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았다. 3천 권이 넘는 책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보물인 책 한 권, 그것만은 어디에 있는지 파악을 해두었다. 다행히 그 책을 재빨리 찾을 수 있었다. 가장 앞 책장의 위에서 세 번째 단, 오른쪽. 다행히 아직 불이 붙지 않았다. 불똥이 잠옷을 태우고, 백옥 같은 피부를 그을리는데도 상관없이, 남련은 서고에 뛰어들었다.

‘늦지 않았어……!’

목판으로 본문을 인쇄하고, 정성스럽게 실로 엮은 그 책을 남련은 품에 안았다.

다른 모든 것을 잃어도 이것만은 안 된다. 남련의 첫사랑의 기억과 연결되는 책이니까.

안도한 찰나, 머리 위에서 끼익, 하고 불길한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든 남련은 봤다. 불꽃에 휩싸인 천장의 들보가 휘청 하고 기울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는 모습을.

“히익……!”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공포 때문에 다리가 떨려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 틀렸다. 그런 생각에 책을 안고 웅크리며 강하게 눈을 감은 순간.

“바보냐! 죽고 싶은가?!”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남련의 몸을 옆에서 낚아챘다.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들보에 깔리지 않을 수 있었다.

“……?!”

힘껏 이끌려 간 곳은 갑주를 두른 듬직한 가슴 안이었다.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는 밤의 호수를 반사한 듯한 흑요석 눈동자가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나운 표정의 청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남련을 내려다본다.

‘누구……?’

처음 보는 젊은 무인이다. 갑주 외에 정강이 보호대와 손등 보호대를 차고 있는데, 윤기가 도는 강철의 반짝임은 자국의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것과는 명백하게 달랐다. 아니, 그보다도 오른손에 쥐고 있는 칼날. 그것이 꽂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허리의 칼집에 그려진 청룡을 도안화해놓은 그림은.

‘여봉국의 문장……. 이 사람은 여봉의 병사?!’

남련의 아버지를 자해로 몰아넣고, 어머니나 형제들을 죽였으며, 이 왕궁에 불을 지른 오랑캐 중의 한 명이다.

“이거 놔라! 내가 화요국의 셋째 공주라는 걸 아느냐?!”

머리에 피가 몰린 남련은 자신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더러운 적병의 팔에서 도망치려고 필사적으로 몸을 비튼다.

“무례하다! 아버지를……, 어머니를……, 모두를 돌려내라……!”

입에서 쏟아지는 오열과, 그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남련은 더욱더 몸부림쳤다. 흥분할수록 체온이 올라, 잠옷에 스며든 침향의 향기가 강해지자, 청년은 재채기를 참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시끄럽다. 잠시 잠 좀 자야겠다.”

속삭이자마자, 그의 주먹이 남련의 명치에 파고들었다. 통증이나 충격을 느낄 새도 없이 가는 몸은 금세 축 늘어졌고, 청년의 한쪽 팔에 안기게 되었다. 힘없는 손에서, 소중한 책이 바닥에 흘러내렸다. 청년은 그것을 주워 들고 잠시 바라보다가 휘도는 불꽃 안에서 남련의 어깨를 둘러업고 느릿하게 발걸음을 되돌렸다.

어느 조용한 봄날 밤. 화요국이라는 소국의 이름은 역사서에서 사라졌다. 건국에서 8대에 이른 왕국은 절멸되었고, 그 외의 왕족은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대국 여봉의 병사에게 살해당했다. 단 한 사람. 우연히도 참극의 장소에 남아 있지 않았던 공주 남련을 제외하고.

제1장

숲 속 첫사랑

“영차…… 여기까지 오면 괜찮겠지?”

남련은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뒤 땀이 맺힌 이마를 작은 손등으로 닦았다. 숲의 산책이라는 익숙지 않은 일을 한 탓에, 섬세한 수자직 신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흐릿한 복숭아색 상의도, 하늘하늘한 풀잎색 긴소매 옷도, 여기저기 나무에 걸린 탓에 잔뜩 상해 있었다.

‘분명히 나중에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혼날 거야.’

잔소리가 심한 두 사람에게 혼날 일을 상상하고, 남련은 목을 움츠렸다. 그런데도 키득키득 어린아이다운 웃음이 새어 나온 것은, 팔 안에 소중히 안고 있는 책 한 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우 혼자서 느긋하게 읽을 수 있겠어.”

한여름.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는 가운데, 남련은 가까운 나무뿌리에 걸터앉아 가죽 표지가 덮인 책을 부랴부랴 펼쳤다.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이런 장소에 남련이 온 이유는, 정실인 어머니나 친언니, 아버지의 첩들이 낳은 여자아이들. 알기 쉽게 말해, 후궁 여자들의 피서지에 같이 동행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의 신이 깃들어 있다는 아름다운 호수라든가,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고원이라든가, 그녀들은 여름이 되면 매년 찾아가는 장소를 바꾸어 답답한 후궁 생활의 시름을 잊었다. 그런 자유가 허락되어 있는 이유는 남련의 아버지인 화요 국왕이 대범한 인품이었다는 점과, 누구든 비빈이 될 수 있는 한 평등하게 대했기 때문에 그녀들을 가만히 놔두어도 분쟁이 일어날 염려가 없었던 것이다.

1년에 한 번, 마음껏 느긋하게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여자들은 모두가 들떠 있었다. 옆 나라 여봉과의 경계에 위치한 숲 근처 별장에 많은 궁녀와 호위를 이끌고 찾아가, 오늘로 이미 3일째를 맞이했다. 이 3일간, 남련은 참고 또 참았다. 사실은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싶었는데, 꽃따기다, 강에서 뱃놀이다 하면서, 내키지 않는 행사에 끌려 다니면서도, 다른 비빈이나 이복 자매들의 체면을 생각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짐 안에 몰래 숨겨 온 책은 그 사이 한 번도 열어보지 못했다. 같은 방을 쓰는 두 언니는 남련이 묵묵히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면, ‘이상해. 남련은 정말 이상한 아이야.’라고 입을 맞춰 웃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은 글씨만 읽으면 눈이 나빠져.’

‘눈이 나쁘면 눈초리도 날카로워져 시집도 못 가.’

‘얘, 남련, 책을 읽다니 이상해.’

‘다들 그러더라. 화요국의 셋째 공주는 별난 책벌레라고.’

이 모든 것이 남련에게 있어서는 ‘쓸데없는 참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철이 들 무렵부터 남련은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자장가 대신 옛날이야기를 “한 번 더, 한 번 더 해줘.” 하고 몇 번이고 졸라, 유모를 곤란하게 했을 정도다. 그 이야기를 기록해놓은 것이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그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닌데, 남련은 자연히 읽기와 쓰기를 익혔다. 그게 세 살 때의 일로, 부모님은 “이 아이는 엄청난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흥분했지만, 남련이 열 살이 되어서도 여성다운 취미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책만 읽는 모습을 보고는 반대로 많은 걱정을 했다.

그런 남련이었기 때문에, 3일이나 계속해서 독서를 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일은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근처의 마을로 장을 보러 나가는 여자들이 가마를 준비시키고 바쁘게 화장을 하고 있는 사이에, 남련은 몰래 방을 빠져나왔다.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을 통해 구입한 새로운 책을 옷 속에 숨기고, 별장 뒤편에 있는 숲으로 도망친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남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들, 설마 이런 곳에 혼자서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실려 있을까.”

가슴을 두근거리며 펼친 책을 바라보았을 때, 시야의 끝에 있는 수풀이 파사삭 하는 소리를 냈다. 본능적으로 오한을 느낀 남련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다음 순간 관목 아래에서 가늘고 긴 생물이 재빨리 뛰쳐나와 긴 겉옷의 옷자락 사이로 슬쩍 엿보이는 발목을 덥석 물었다.

“꺄아아아아!!!!”

온몸이 젖은 것처럼 미끌미끌한 푸르고 검은 줄무늬를 지닌 뱀이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부드러운 피부에 박아 넣고, 슈슈 하고 흥분된 숨을 내쉬고 있다.

“싫어, 싫다니까, 저리 가!”

무아지경이 되어 다리를 마구 휘둘렀더니 뱀은 갑자기 멀리 날아가, 지면을 스륵스륵 기어서 도망쳤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잠시, 몸에서 갑자기 힘이 빠져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조심조심 물린 상처를 보니, 뻐끔하게 깊은 구멍이 뚫려 있는 곳에서 선혈이 흘렀다. 놀람과 공포로 마비되어 있던 통증이 그제야 온몸을 꿰뚫었다. 그리고 남련의 시야에 어두운 안개가 끼었다. 눈을 감은 게 아닌데도 빛이 전혀 닿지 않게 되어, 급격한 어둠 속에 휩싸였다.

‘어……?!’

남련은 당황했다. 보이지 않는다.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 온몸에서 식은땀이 분출되었다. 그대로라면 분명 비명을 지르고 어린 아기처럼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괜찮아?!”

누군가가 달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숨을 헐떡이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련의 조금 전 비명을 들었는지 매우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아, 상처를 입었구나. ……뱀한테 물렸어?”

수수께끼의 소년이 옆에 웅크리고 앉는 기척이 났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남련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 검고 푸른 줄무늬 뱀이었어. 근데 갑자기 눈이 안 보이게 되어서…….”

이야기를 하면서 불안을 억눌렀지만, 목이 꽉 메었다.

“나…… 나, 이대로 여기서 죽는 거야……?”

“아니. 그 뱀의 독이라면 몇 시간 뒤면 효과가 사라져.”

목표로 삼은 먹이의 눈을 보이지 않게 만들어 그 사이에 집어삼킨다. 반대로 적이 상대라면 뱀 자신이 도망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사용되는 독이다. 소년은 그렇게 냉정하게 설명한 뒤, 남련의 발목을 들어 올렸다. 타인의 체온을 느끼고 잔뜩 힘이 들어간 그곳에, 뭔가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아……?!”

“가만히 있어. 조금이라도 독을 빨아내는 게 좋으니까.”

그렇다면 방금 닿은 것은 소년의 입술이다. 상처를 한껏 빨아들인 다음, 독이 섞인 피를 뱉어내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친절한 마음에서 우러나와 응급처치를 해준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타들어갈 듯이 부끄러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태어났을 때부터 후궁에서 자란 남련은 부왕이나 관료 이외의 남성과는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예외라면 부왕 곁에서 일하는 비서관의 아들인 료안 정도다. 어렸을 때 친어머니를 여읜 그를 남련의 어머니가 가엾게 여겨 나이차가 적은 셋째의 놀이 상대로 임명한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얌전하고 총명한 료안은 신분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듯 무례하게 남련의 몸을 만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 아이도 료안과 비슷한 또래일까?’

귀에 들린 목소리로 남련은 그렇게 추측했다. 자신보다 두세 살은 나이가 많겠지만, 열 살이나 많은 오빠처럼 나직한 목소리는 아니다. 그런 이성이 맨다리를 만지고, 입술을 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매우 긴장되었다. 소년이 동물의 어미가 자기 새끼를 돌보듯이 혀끝으로 상처를 핥자, 남련의 어깨는 움찔 하고 흔들렸다.

“일단 이 정도면 될 거야. 지혈을 해줄 만한 약초를 찾아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소년이 멀어져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련은 마음이 불안해 저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호……, 혼자는 싫어. 부탁이야, 여기에 있어줘…….”

“하지만 그래선……. 그럼 이렇게 할까?”

소년이 다시 웅크리는 기척이 났다. 그리고 “자, 잡아.”라고 하더니, 그와 동시에 남련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허벅지 뒤로 소년의 손이 파고들어, 그의 등에 업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꺅……!”

“발버둥치지 마. 떨어지니까.”

깜짝 놀라는 남련을 무시한 채,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걸음을 내디뎠다. 소년의 등은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목덜미에서는 따뜻한 양지 내음이 났다. 목덜미를 덮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남련의 코끝을 간질여, 숨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뱀의 생태나 약초를 잘 아는 걸 보면,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일까. 예를 들면 사냥꾼이나 나무꾼의 아들이라든가. 남련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소년이 “오, 있다.”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지혈 효과가 있는 약초를 찾은 모양이다. 남련은 다시 그 장소에 앉았고, 소년은 잘게 짓이긴 약초를 상처에 발라주었다. 약초의 즙이 차갑게 스며들었지만, 더 이상 꼴불견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남련은 우는 소리를 하지 않고 참아냈다. 마지막으로 손수건 같은 천으로 발목을 동여매 치료가 모두 끝났다. 이제는 안정을 취하고, 독이 옅어지기만을 기다리면 그만인 듯하다. 조금 지나면 다시 눈이 보일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남련은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넌 집이 어디야? 바래다줄게.”

소년이 그렇게 말하자, 남련은 마음이 뜨끔했다. 아무 말 없이 별장을 빠져나와 뱀에게 물린 것도 모자라, 낯선 소년에게 업혀 돌아가기라도 한다면 잔소리를 듣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괘, 괜찮아.”

남련은 일부러 냉담하게 말했다.

“앞으로 몇 시각만 지나면 눈이 보인다며? 그때가 되면 알아서 돌아갈 테니까, 괜찮아.”

날이 저물지도 모르지만, 산책을 나왔다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대략 얼버무릴 수 있을 듯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소년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너……, 단순히 가출한 여자애는 아니지?”

“아, 아니야.”

“글쎄.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로밖에 안 보여서, 가만 놔둘 수 있어야지.”

긁적긁적, 하고 목덜미를 긁는 듯한 모습이었다. 남련의 옷차림을 보면, 나름 지위가 있는 집안의 여자아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던 듯하다. 그렇다고 이 나라의 공주라고 말을 할 수는 없어, 남련은 말을 우물거렸다. 물론 진실을 이야기해도 상관은 없지만, 그렇게 하면 이 소년이 지금까지의 태도를 확 뒤집어 당황하며 무례를 사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소년이 거리를 두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소년의 말투는 세련되었다고는 하기 힘들었고, 쉽게 몸을 만지는 데에는 당황했지만 남련에게는 그것이 불쾌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거짓말을 하기에는 거북해서, 남련은 띄엄띄엄 말을 해줄 수 있는 데까지는 해주었다. 가족과 여행으로 멀리까지 왔는데, 혼자 있고 싶어서 숙소가 있는 곳에서 멀리까지 나왔다고.

“혼자 있고 싶어? 왜?”

“……이게 읽고 싶어서.”

남련은 계속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우리 집 사람들은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별로 달가워하지 않아. 그 외에도 해야 할 게 많다면서 혼을 내시거든.”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야?”

소년이 불쑥 책을 빼앗아 남련은 깜짝 놀랐다. 팔락팔락,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났다.

“와아……. 의외로 술술 읽히네.”

소년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남련은 내심 놀랐다. 편견이겠지만, 이런 변경에 사는 서민 아이가 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오만한 생각이 부끄러웠지만, 그 이상으로 남련은 분한 마음이 들었다. 남련도 아직 읽지 않은 이야기를 소년만이 먼저 읽어버리다니.

“……치사해.”

“뭐? 뭐가 치사해?”

“계속 읽고 싶었던 책인데, 난 눈이 안 보여서 못 읽고 너 혼자만 읽었잖아. 치사해…….”

“너 말이야……, 그게 울 정도로 분하니?”

“내, 내가 언제 울었다고……!”

부정했지만, 울상이 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염원하던 독서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남련에게 있어 그만큼 괴로운 일이었기도 했지만, 친절한 소년에게 무의식적으로 응석을 부린 것인지도 모른다. 소년이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읽어줄 테니까 울지 마.”

“……어?”

“내가 소리를 내서 읽으면 너도 내용을 알게 되잖아. 어차피 눈이 보이게 될 때까지 곁에 있어줄 생각이었어. 시간도 때울 수 있으니 딱 좋아.”

어안이 벙벙해 있는 남련 앞에서 소년은 정말로 낭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남련도 금방 이야기의 내용에 열중하게 되었다.

주인공은 너무나 따분해 봉래에서 인간계로 내려온 미모의 선녀다. 교만해서 미움을 받는 부자를 돼지로 만들거나, 어떤 노부부의 부인만을 몇 십 살이나 젊게 만들거나. 소원을 빌면 어떤 것이나 튀어나오게 해주는 박을 부모가 없는 형제에게 만들어주거나……. 많은 변덕과 장난을 반복하던 끝에 선녀는 우연찮게 화가를 꿈꾸는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청년은 선녀의 정체를 모른 채 그녀와 맺어졌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선녀를 그린 그림에는 신기한 매력이 깃들어 있었기에, 청년은 금방 화가로서 큰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사람은 변하는 법. 부와 명성을 손에 넣은 청년은 화려하게 노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점차 그림을 그리는 정열을 잊어갔다. 또 사랑하는 아내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그래도 선녀는 청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언젠가 분명히 자신을 사랑해주던 순박한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라 믿고,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계속 기다렸다. 하지만 봉래의 주민이었던 선녀는 인간계에 계속 머물 수 없었다. 봉래의 물과 음식을 먹지 않으면 언젠가 몸이 약해져 죽고 만다. 이윽고 선녀는 힘이 다했고, 그때야 비로소 그녀의 애정과 헌신을 깨달은 청년의 품안에서 숨을 거둔다. 청년은 깊게 후회하며 통곡하였고, 그녀의 시체를 매장했다. 선녀를 잃은 청년은 기력을 잃고 산송장이 되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선녀의 무덤에 참배하러 갔을 때, 사랑하는 아내를 묻은 장소에는 심은 기억이 없는 부용이 자라 있었고, 활짝 펴 있던 꽃 안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여자 아기가 태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 얼굴은 죽은 선녀와 청년을 딱 반씩 섞어놓은 듯했다. 작은 아기는 젖 대신에 꽃의 꿀을 먹고 성장해, 평범한 아이들과 다르지 않을 만큼 크게 성장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긴 청년은 성실해졌고, 다시 붓을 잡게 되었다. 그렇게 그림으로 그려진 추억의 선녀는 언제나 빛날 것처럼 아름다웠고, 딸도 그림을 보면 꺄악꺄악 하며 잘 웃었다.

“수십 년 후, 이 세상 사람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미모를 자랑하는 딸은 세 나라의 왕자들로부터 청혼을 받아, 남편을 선택하기 위해 고민했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

마지막 한 문장을 소년이 다 읽었을 때, 남련은 “어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뭐야? 왜, 왜? 거기서 끝이야? 정말로?”

“응, 그런가 봐.”

“거짓말! 이제부터가 재미있어질 대목인데!!”

지금까지의 이야기도 충분히 재미있었고, 선녀가 죽는 장면에서는 옅은 눈물이 번졌지만, 이렇게 끝나다니 아무래도 마음이 답답하다.

“아…… 혹시 속편이 나오는 거 아니야?”

명백하게 ‘납득할 수 없다’는 남련의 모습을 보고, 소년이 위로를 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남련은 양손을 찰싹 하고 맞부딪쳤다.

“그럴지도! 어디서 살 수 있을까?”

“아,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니까.”

“이 책을 팔았던 가게에 물어볼게. 만약 글쓴이에게 연락할 방법이 있으면 편지를 쓰겠어. 남편을 고르는 이야기, 굉장히 읽고 싶거든!”

“……정말 책을 좋아하는구나.”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열변을 토하는 남련에게 소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남련은 주먹을 쥐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인생은 누구나 한 번뿐이잖아? 하지만 책을 읽으면 다양한 사람의 삶을 몇 번이든 경험할 수 있어. 굉장히 즐겁고 이득이잖아?”

남련 자신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공주라는 신분에서 도망칠 수 없었지만, 책을 읽을 때만큼은 외국의 바다를 건너는 선원이 될 수도, 전설의 검객이 될 수도, 벚꽃이나 매화의 정령이 될 수도 있다. 나이와 성별도 관계없이 사람이라는 틀마저 뛰어넘어, 한없이 자유로운 세계를 구가할 수 있다.

“나는 그런 기분으로 책을 읽었던 적은 없으려나.”

소년이 뭔가 감개무량하다는 듯이 중얼거려 남련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자신만 일방적으로 흥분한 사실이 갑자기 창피했다.

“미……, 미안해. 너한텐 이 이야기가 재미없었어?”

“아니, 재미있었어. 이 선녀 남편의 태도는 좀 그렇지만. 나라면 소중한 것을 손에 넣으면 절대로 눈을 떼지 않아.”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한마디였지만, 소년의 올곧은 성격을 나타내주는 듯해, 남련은 기뻤다. 동시에 그에게 해야 할 말을 겨우 떠올렸다.

“저어, 상처를 치료해줘서……, 그리고 책을 읽어줘서 고마워. 굉장히 멋진 낭독이었어. 굉장히 잘 읽는구나.”

“내가?”

당황한 소년에게 남련이 “그래.”라고 하면서 웃었다.

담담했지만, 결코 무뚝뚝하지 않았고, 연기가 과장되지 않았는데 등장인물의 인품이 잘 전달되는, 계속 듣고 싶은 그런 목소리였다.

남련은 답답한 기분으로 눈시울을 매만졌다. 소년이 책을 읽어주는 사이에 꽤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시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불안이 아니었다. 이 소년이 ‘보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으니, 순순히 믿고 회복을 기다릴 수 있다. 단지 그가 어떤 얼굴인지 알 수 없어 아쉬웠다. 분명히 이번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소년과 목소리로만 만난 채 헤어져버리는 게, 아주 아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있잖아, 네 이름은…….”

하다못해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질문을 했을 때였다.

“남련 님! 어디 계십니까, 남련 님?!”

“너희들은 더 안쪽을 찾아라! 발견하면 큰 소리로 알리고!”

멀리서 어른 남녀의 목소리가 울렸고, 남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 사라진 자신을 찾으러 온 하인들이다. 예상대로 꽤 빨리 수색을 당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데리러 왔나 보네.”

소년이 일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남련은 저도 모르게 소년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허공을 갈랐다.

“여기다.”

따뜻한 손이 남련의 손끝을 꼭 잡았다.

“이거, 재미있었어. ……그럼.”

멀어져가는 손 대신에 소중한 책이 다시 돌아왔다. 남련은 “기다려!” 하고 외쳤지만, 멀어져가는 발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난 아직 네 이름도 모르는데…….’

멍한 남련의 시야에 사물의 윤곽이 조금씩이지만 흐리게 비치기 시작했다. 소년이 떠나갔을 것으로 생각되는 방향을 필사적으로 응시해보았지만, 땅거미가 지는 나무들이 수런거리며 바람에 흔들릴 뿐, 모든 것이 늦고 말았다.

“아아, 남련 님! 이런 곳에 계셨습니까!”

책을 안고 웅크려 앉아 있는 남련을 발견하고 젊은 궁녀가 달려왔다.

금방 다른 하인들도 달려와,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잇달아 질문을 던졌지만, 남련은 생각해둔 변명을 입에 담지도 못했다. 남련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환상처럼 사라지고 만 소년으로 가득했다. 얼굴을 본 것도 아니고, 이름조차 묻지 못했던 그와의 추억은 그 후로도 몇 년이 지났지만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윽고 남련이 크게 성장해 혼담이 오가는 나이가 되었어도. 여전히 책밖에 흥미가 없다고 말하며 혼담 하나 없는 화요국의 셋째 공주가, 남몰래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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