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적국의 땅에서
누워 있는 몸에 통증을 동반한 진동이 덜컥덜컥하고 끊임없이 울려왔다. 이 흔들림은 말이 끄는 마차에 타고 있을 때와 같다.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남련은 몽롱한 상태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자신은 어느새 밖으로 나온 걸까.
‘게다가 왜? 머리만은 덜컥거리지 않고 아프지 않아…….’
남련의 머리 아래에서는 옥으로 만든 베개보다는 부드럽지만, 순면으로 가득한 깔개보다는 단단한, 신비한 감촉이 느껴졌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대보니, 머리 위에서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유혹하는 건가? 얼굴은 청순해 보이는데, 대담한 공주인걸.”
‘……?!’
남련은 오싹하는 느낌에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좌석 위에서 스르륵 몸이 미끄러져 바닥에 굴러 떨어질 뻔했다.
“꺄……!”
“이런.”
아슬아슬하게 듬직한 팔이 등과 허리를 지탱해준다. 단정하지만 야성미도 겸비한 청년의 얼굴이 바로 가까이에 다가와, 남련은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일어나려면 좀 더 얌전히 일어나야지. 거의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으니까.”
“당신은…….”
남련은 기억이 떠올랐다. 머리의 중심이 욱신거리는 기세로, 모든 것이 갑작스럽게 되살아났다. 부왕의 생신 연회에 몰래 잠입해, 갑작스럽게 칼을 빼든 여봉의 병사들. 소꿉친구인 료안의 ‘도망쳐.’라고 하는 말과, 만류를 뿌리치고 되돌아가자 비명을 지르는 유모. 불바다가 된 장엄한 왕성. 눈앞에서 재가 된 많은 책.
그리고 지금 남련을 안고 있는 사람은 서고에서 만난 적국의 남자다. 불타는 들보에 깔릴 뻔한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것도 같은데. 모국을 습격한 원수 중의 원수이다. 그런 청년이 자신에게 밀착해 있어, 남련은 꼼짝을 하지 못했다. 그다지 넓지 않은 마차 안에서, 남련을 품에 안고 있던 그는 이미 손등 보호 장비나 갑충을 벗고, 복숭아빛 옷과 남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견갑골에 걸려 있을 만큼 긴 머리카락은, 목덜미 부근에 정리되어 묶여 있다. 그렇게 말쑥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의외로 고상한 분위기도 느껴졌다. 일개 졸병이 아니라, 나름의 신분과 계급을 자랑하는 무인일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남련은 아직도 얇은 잠옷을 두른 상스런 모습이다. 게다가 상황을 봐서는, 아무래도 이 남자의 무릎을 베개 삼아 잠들었던 듯하다.
“이거……, 놔!”
겨우 말이 트여, 남련은 청년의 어깨를 밀어냈다.
“함부로 만지지 마, 나는…….”
“화요의 셋째 공주잖아? 그건 이미 들었어.”
말을 듣지 않는 아기 고양이를 어르듯이, 청년은 남련의 손목을 천천히 잡고 필사적인 저항을 막았다.
“네 이름도 알고 있어. 남련.”
귓가에서 낮게 속삭이자, 청년의 입김이 피부를 스쳐가, 오싹하는 감각이 온몸에 휘돌았다.
그런 남련의 뺨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청년은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내 이름은 영상(瑛翔)이야. 여봉국의 왕 곽이상의 아들로, 주변 사람들은 왕태자라고도 부르지.”
“왕……태자……?”
남련은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거친 말투와 행동에 비해 신기하게도 위엄이 갖춰져 있었다. 달콤함과 날카로움을 동시에 지닌 양 눈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
‘영상…… 곽영상.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어. 원래는 여봉왕의 첩실의 둘째 왕자였지만, 정실이 낳은 형이 병으로 죽어 1년 전에 태자로 책봉됐다고 했던가……?’
책만 읽고 있는 탓에 세상사에 밝지 못한 남련도 그 정도는 알았다. 그도 그럴게, 최근 화요국은 북쪽에 위치한 여봉국과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봉은 역사가 오래된 대국으로, 역대의 왕들이 호전적인 성격이었던 탓도 있어 주변 나라들을 잇달아 병합해갔다. 하지만 화요국만큼은 유화 정책으로 일관했는데, 그 나라의 왕족이 몇몇 공주를 신부로 맞아들인 과거가 있기 때문인지 겉으로는 계속 우호관계를 유지해왔다.
사정이 변한 것은 3년 전. 화요국 내에서 갑작스럽게 새로운 금광이 발견되었다. 욕심이 생긴 여봉의 왕은 화요의 토지를 통째로 손에 넣고 싶어 했다. 여봉을 종주국으로 섬기며 명실상부한 속국이 되도록 일방적인 요구를 해왔는데, 남련의 아버지인 화요국의 왕은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평소에는 대범하고 아내와 딸들에게는 다정한 인물이었지만, 계속되는 요구를 교묘하게 피하는 수완은 역시 일국의 위정자답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부왕을 남련은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아무리 흉흉한 소문이 들려도 아버지에게 맡겨두면 아무런 걱정도 없으리라 믿었다.
영상에 관한 일은 그 소문의 하나로서 들은 적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검술에 뛰어났고, 열여덟 살 때에는 둘째 왕자이면서 대장군에 임명될 정도로 용맹한 무인이었다는 것. 스무 살이 되자마자 형이 병으로 죽었지만, 그것은 야심가인 영상에 의한 모략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혹이 부상했었다는 것. 같은 편도 많지만 적도 많다는 영상은 자신의 입장을 반석에 세우기 위해, 화요국을 제압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네 조국은 이미 멸망했다.”
영상의 말을 듣고 남련은 얼어붙었다.
“왕성은 흔적도 없이 불탔고, 살아남은 왕족은 너 하나뿐이야. 앞으로의 일은 우리 아버지인 여봉왕의 판단에 달렸지. 일단은 그 사실을 가슴에 새겨둬.”
남련은 멍한 표정으로 영상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무공을 세우려고 혈안이 되었을 적국의 왕태자를.
‘이 왕자가 스스로 지휘를 하면서 화요를 멸망시키려 한 거야? 이 사람이 없었으면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거라는 거야……?’
끓어오르는 분노와 절망이 솟아올라, 눈앞의 청년이 피도 눈물도 없는 악귀처럼 보였다.
“당신이 우리 가족을 죽인 거예요?!”
눈물이 글썽한 눈동자로 노려보아도, 주먹을 쥐고 때려도, 수많은 전쟁을 겪어왔을 영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간을 찌푸리고, 불쾌한 표정으로 남련을 바라볼 뿐이다.
“절대 용서 못 해! 당신은 대체……!”
“입 다물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욕을 퍼부어주려던 찰나, 갑자기 무언가가 입을 뒤덮었다. 턱을 잡은 강력한 손가락의 감촉과 초점이 맞지 않을 만큼 가까이에 있는 영상의 얼굴. 깜짝 놀라는 남련의 입 안에, 따뜻한 무언가가 스스로 잠겨 들어왔다. 무엇을 당한다는 의식도 없이, 미지의 체험에 몸을 떨던 남련은 입 안을 유린하던 것에 바로 있는 힘껏 이를 세웠다.
“……!”
영상이 낮게 신음 소리를 냈고, 동시에 남련은 필사적으로 얼굴을 밀어냈다. 심장이 부서질 듯이 크게 뛰었고, 젖은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 지금 이 남자에게…….’
입맞춤을 당했다. 겨우 사태를 이해한 남련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입술을 하필이면 이런 남자에게.
“아프군……. 보기보다는 기가 센 공주라 다행이야.”
깨물린 혀를 작게 차며, 영상은 남련을 노려보았다.
“나를 깨무는 건 좋지만, 자신의 혀를 깨물지는 말라고.”
그런 선택지도 있었구나. 남련은 새삼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이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나를 데리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선한 목적은 아닐 거야.’
여봉에 도착하면 고문을 한 끝에 무언가 기밀을 발설하게 할 생각이라거나. 또는 승리의 기쁨에 취한 국민 앞에서, 본보기로 처형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런 짓을 당할 바에야 여기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게 나았다. 포로가 되어 염치도 없이 치욕스럽게 사는 것을, 부왕도 결코 원하지 않을 테니까. 단숨에 혀를 깨물려고 하던 순간, 커다란 손바닥이 남련의 뺨을 꽉 쥐어 자해를 막았다.
“그러니까 그러지 말라고 말했잖아. 귀찮게 하지 마.”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 영상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재빨리 남련에게 재갈을 물렸다. 멋대로 풀지 못하도록 손목도 뒤로 묶었다.
“응응……, 으……!”
“다리까지 묶이고 싶지 않으면 이대로 얌전히 있어.”
입을 봉인당해 발버둥치는 남련을 영상은 무릎 위에 앉히고 껴안았다. 멸망했다고는 하지만 한 나라의 공주였는데,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처럼 대했다.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자유지만, 네 가족을 죽인 사람은 내가 아니야.”
등 뒤에서 그가 그렇게 속삭이자, 남련은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진실이란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어. 게다가…….’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영상이 적국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런 남자의 품안에 있다는 사실이 그저 두렵기만 해, 남련은 몸을 떨었다.
“그렇게 쉽게 죽으려고 하지 마, 남련.”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영상은 나직한 목소리로 위협하듯이 속삭였다.
“여봉이, 내가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밉다면 차라리 복수를 위해 살아가야지.”
‘복수……?’
그 말은 남련의 가슴속에 투욱 떨어져, 이윽고 서서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 작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뜨거운 숯불처럼.
그리고 약 한나절이 지나고, 여봉군은 모국으로 개선을 이루었다. 이미 저녁때였지만 왕성으로 이어지는 대로에는 발을 들여놓을 곳이 없을 만큼 사람들이 모여, 자국군의 승리를 축하했고, 그 소리는 끊기는 일 없이 파도처럼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마차의 창문을 통해 그 모습을 바라본 남련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봉은 오랑캐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왕도는 놀라우리만치 훌륭한 거리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민가와 상점이 흰 벽에 검붉은 기와를 얹어 매우 튼튼해 보였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청결하였으며, 여성들의 치장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화려했다. 거리는 모두 포장용 돌이 깔려 있었고,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에 더해 거리 악사들이 연주하는 악기 소리가 공기를 쾌활하게 진동시켰다. 그만큼 시끌벅적한 대로를 군마에 탄 영상이 대열의 가장 앞쪽에서 이끌자, 길거리에서는 용맹한 왕태자를 칭송하는 함성으로 가득 찼다. 특히 젊은 아가씨들의 새된 비명은 더욱 엄청나 이 나라에서 영상이 얼마나 인기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여자아이들에게 꺄꺄 하는 함성을 듣고 싶어서 일부러 모습을 보인 건 아니겠지?’
남련은 살짝 주눅이 들었다. 재갈을 물린 데다, 손목도 묶인 채, 마차 안에 방치되어 있는 상태. 왕도의 문을 빠져 나가기 직전에, ‘서툰 짓은 하지 마.’라고 말한 영상은 남련을 두고 곧장 말에 올라탄 것이다.
시가지를 빠져나가 일행은 이윽고 광대한 왕성의 부지 내에 도착했다. 그때 남련은 자신이 어떻게 될까 불안해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아무리 심한 짓을 당해도, 화요국의 마지막 왕족으로서 꼴사납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 각오를 했지만 지금까지 책에서 읽은 잔혹한 고문이나 처형에 관한 예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저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갑자기 마차가 멈추고, 밖에서 문이 열렸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 남련에게 말을 건 사람은 예상과는 달리 영상이 아니었다.
“남련 님이시죠?”
침착하고 다정하며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였다. 잇달아 눈을 깜빡이는 남련의 눈동자에 비친 사람은 긴 흰 비단 옷을 입어 공손한 모습으로 인사를 하는 궁녀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남련보다 대여섯 살 정도 위일까.
“저는 여수(麗樹)라고 합니다. 긴 시간 이곳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목욕물과 갈아입을 옷을 준비할 테니 자, 이쪽으로…….”
마치 손님을 대접하는 듯한 말투에 남련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함정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여수라고 이름을 밝힌 여성이 온화한 표정을 짓고 기다리고 있어, 겁먹은 토끼가 굴에서 모습을 드러내듯이 조심조심 마차에서 내렸다. 도중에 머리 위를 짓누르는 듯한 건축물이 시야 가득 들어와 남련은 그대로 압도되고 말았다. 황금기와가 파도처럼 늘어서 있는 지붕이 올라간 전당은 끝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고, 굵고 멋진 붉은 기둥, 우아한 조각이 새겨진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남련이 서 있는 곳은 이 건물로 이어지는 계단 아래로, 등 뒤에는 지붕이 달린 회랑에 둘러싸인 널찍한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수만의 병사들도 모두 들어올 수 있을 듯한 공간이었지만, 화요를 점령했던 귀환병들은 다른 장소로 간 것인지, 이곳에는 마차를 끌고 온 말과 마부밖에 없었다. 그 대신이라는 듯이 여수의 뒤에는 그녀보다도 수수한 옷차림을 한 여성들이 줄지어 있었다. 여수가 궁녀 중에서도 지위가 높은 데 반해, 그녀들은 그 시중을 드는 부하라고 할까.
“어머나……, 태자님도 이렇게 험한 짓을 다 하시다니.”
남련의 모습을 보자마자 여수는 눈썹을 찡그리며, 입과 손목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겨우 답답함에서 해방된 남련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고……, 고마워요. 저어…….”
“여수라고 불러주십시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뭐든지 저에게 말씀해주시기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하지만.” 하고 여수가 말을 계속했다.
“충고를 하나 드리지요. 부디 이상한 생각은 품지 마십시오. 저희들은 이렇게 보여도 모두 무술을 익힌 몸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수단을 가리지 말고 남련 님을 제지하라고, 태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자해나 도망을 하지 말라고 못을 박아둔 것이다. 겉보기에는 우아해 보이는 여수가 나름의 무술을 익혔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지만, 가늘게 뜬 눈동자 안의 날카로운 빛에, 남련은 빨려 들어가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몰골이 초라한 남련에게, 여수는 자신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얇은 천을 걸쳐주었다. 그렇게 그녀에게 이끌려 남련은 여봉의 왕성에 발을 들였다.
솔직히 어디를 어떻게 걷고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위아래, 좌우. 어느 방향을 봐도 금색과 붉은색의 호화찬란한 장식이라 눈이 피곤했다. 숨이 헐떡일 만큼 걸어 몇몇 계단을 오르고 내리고, 얼마나 많은 모퉁이를 꺾어 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남련은 어느새 욕실에 도착했다. 화요의 욕실은 살마루 아래에 달군 돌을 물에 담가 그 증기로 충만한 한증탕이 주류였지만, 여기서는 노송나무로 만든 욕조에 맑은 물이 찰랑찰랑 담겨 있었다. 남련은 그곳에서 몸을 씻고, 머리를 빗고, 따뜻한 피부에 치자나무 향이 나는 향유를 한껏 바르게 되었다.
욕실에서 나와서는 제비붓꽃 자수가 들어간 감청색의 상의에, 광택이 나는 연분홍 치마를 입은 뒤, 금색 실, 은색 실로 수놓아 매우 화려한 장식 허리띠를 감았다. 궁녀들은 정성스럽게 말려 빗은 머리카락을 세세하게 땋고 정리해주었다. 진주 가루가 섞인 흰 분을 발라주었고, 눈썹을 그려주고, 눈매와 입매에는 희미한 붉은 연지로 화장을 해주었다. 다른 사람이 목욕을 하거나 옷을 갈아입을 때 시중을 들어주는 것은 공주로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여수와 궁녀들이 왜 자신을 꾸미는 데 도움을 주는지 몰라 남련은 난처하기만 했다.
한 시각이 지났을 무렵, 남련은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모습이었고, 궁녀들에게 이끌려 어느 방의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여수가 앉아 있었는데, 잠시간 이곳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옆에 있는 탁자에는 이제 막 내온 차와 함께 과일과 과자 등, 공복을 채울 만한 음식이 놓여져 있었지만, 도무지 먹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제 무슨 일이 있으려고 그러는 걸까?’
남련은 안절부절못하며, 침착하지 못하게 관자놀이를 긁었다. 궁녀들은 비취 귀걸이를 모양이 예쁜 귓불에 흔들리게 해주었고, 홍옥과 흰 마노를 사용한 목걸이와 팔찌까지 몸에 걸쳐주었다. 지금까지 책만 읽으며 방에 틀어박혀 있던 남련에게 있어서, 이런 호들갑스러운 모습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그 선녀 이야기책은 결국 불에 타버리고 말았을까……?’
불에 타는 서고에 뛰어들 만큼 지키고 싶었던 책을 생각하며, 남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7년 전, 뱀에게 습격당한 남련을 살려준 소년이 읽어주었던 책이다. 그 뒤로 몇 번이나 혼자서 반복해서 읽으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소년과의 추억을 반추했다. 업혔을 때 느꼈던 등의 온기. 손을 쥐어주었을 때의 다정한 손가락의 감촉. 지금도 확실히 귀에 남아 있는 온화한 낭독과 그 목소리…….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흐려지기는커녕 더욱 선명해져, 소년을 생각할 때마다 남련은 이글거리며 가슴이 타는 듯했다. 그와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휘도는 그 생각을 밝힐 수가 없어서, 잠들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최근 이삼 년간은 그렇게까지 절박한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부모님이 혼사를 권유할 때 그다지 내키지 않았던 이유는 틀림없이 그 소년의 존재 때문이었다.
‘이제 만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정말 미련을 못 버린다니까.’
한숨을 내쉰 그때, 방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복장을 한 남성이 들어왔다. 남련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
“와, 멋지게 모양을 냈구나. 그러니 확실히 공주님처럼 보여.”
“당신……?!”
남련은 경악했다. 그의 말을 그대로 그에게 되돌려주고 싶었다. 눈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남련을 잘났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착각할 정도로 잘 차려 입은 영상이었다.청룡 자수가 들어간 장포 위로 아름다운 단풍의 허리띠를 묶고, 허리춤에는 수많은 보석을 박아 넣어 장식한 칼을 차고 있다.
마차 안에서 봤을 때는 아무렇게나 묶었었던 머리카락도, 지금은 잘 정리해 묶었고, 머리 위에는 정밀한 금세공이 된 관을 쓰고 있었다. 큰 체격과 함께 실로 남자다운 풍채다. 늠름하면서도 아리따울 뿐만 아니라, 자신감과 활력도 넘쳐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야말로 언젠가 대국을 짊어질 왕태자라고, 자연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나는 이렇게 호들갑스러운 치장은 싫어하지만 말이야.”
남련이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자 영상은 어깨를 들어올렸다.
“친아버지를 만날 때는 일일이 복장을 새로 고쳐야 하거든. 궁중예절이라는 건데, 참 귀찮아. 너희 쪽은 어땠지?”
“우리는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허물없는 질문에 그만 대답을 하고 말았지만, 남련은 바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영상이 지금 대체 뭐라고 한 거지?
“아버지를 만난다……라니, 혹시 저 말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굳이 몸치장을 하지 않아.”
가벼운 대답에 핏기가 가셨다. 자신은 이제 여봉의 왕과 대면을 하게 된다. 실제로 손을 더럽힌 사람들은 영상이 이끄는 병사들이었지만, 화요를 멸망시키라고 명령을 내린, 이른바 원수 중의 원수.
“무엇 때문에…….”
“그건 와보면 알게 돼.”
영상은 짧게 대답하고 따라오라는 듯이 발걸음을 돌렸다. 남련은 망설였지만, 어깨에 손을 올린 여수의 재촉을 받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현장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장소보다도 화려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렇지는 않았다. 단, 화려하지 않다는 것과, 사치스럽지 않다는 것은 다르다. 검은 대리석이 깔린 바닥은 밤하늘을 비춘 것처럼 빛났고, 남련의 앞에서 걷는 영상의 장화 발소리가 타악타악 하고 맑게 울려 퍼졌다.
등 뒤에서 닫힌 문은 모두 옻나무로, 동서남북 방위를 관장하는 사신이 칠공예를 이용해 그려져 있었다. 보면 볼수록 높은 격자 천장에는 거대한 연꽃을 중심으로 천 명이나 되는 천녀가 비파나 호궁을 손에 들고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긴 통로의 좌우에는 이 나라의 중신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쭉 늘어서 앉아 있었다.
당당하게 걸어가는 영상에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그 뒤에 따라오는 남련을 눈을 치뜨며 살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긴장과 불편함에 다리가 엉킬 것 같았지만, 남련은 힘껏 가슴을 펴고 의연한 태도를 보이려 했다. 그러는 사이에 거대한 팔각 보물 거울이 걸린 곳 아래, 한층 높은 바닥 위에 금 나사(羅紗)로 뒤덮인 옥좌가 보였다. 향로 연기로 흔들리는 발 너머에, 여봉의 국왕으로 보이는 인물의 가슴 아래쪽만이 엿보였다.
‘저게 원수인 왕…….’
남련은 꿀꺽 침을 삼켰다.
용이 투각되어 있는 팔걸이에, 장년으로 보이는 남자의 혈관이 불거진 손이 올라가 있었고, 황금 반지를 몇 개나 낀 손가락이 수를 세듯이 천천히 불이 붙은 담뱃대를 흔들고 있었다.
그때 영상이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조금 망설였지만, 남련도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힐끔 이쪽을 바라본 영상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다시 앞을 보고 단상의 부왕을 향해 입을 얼었다.
“지금 귀환하였습니다, 폐하.”
“수고했다.”
살짝 갈라진 남자의 목소리가 느긋하게 되돌아왔다. 그것만으로 더 이상 말은 없었고, 침묵만이 그 자리를 지배했다. 남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여봉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남련은 식은땀이 배어 나왔지만, 여봉은 딱히 주눅 드는 모습도 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가까운 시일 내에 보고 올리겠습니다. 내……, 아, 제 부가 적당히.”
‘잠깐, 대체 무슨 태도가 그래?’
남련은 오싹한 심정에 슬쩍 영상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도 여기는 그렇게 허물없는 말투로 말을 해도 되는 곳이 아닐 텐데.
“아무튼, 그런 일이니, 앞으로의 통치에 관해서는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게 다인가?”
재미있다는 듯한 목소리가 발 안쪽에서 울려 퍼졌다.
“얼마 전의 성과를 자랑하지도, 상을 조르지도 않는구나. 내 아들이지만, 그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나는 읽을 수가 없다.”
“엄청난 생각을 하고 있진 않습니다.”
영상은 정말로 그렇게 보이기도, 뭔가 숨기고 있는 듯이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장군직을 임명받았으니, 주어진 일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일을 하게 된 이상, 저는 제가 무능하다는 평판은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련의 입장에서는 겨우 그런 이유로 모국이 멸망당했는가 해서 도무지 참기가 힘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영상은 옥좌를 향해 다짐을 받듯이 말했다.
“단 하나. 그 약속은 지켜주실 생각이신지요?”
“그래. 군주는 두말하지 않는다.”
“그거 다행이군요.”
약속이 뭔가 의심스러워하는데, 갑자기 영상이 남련의 팔을 잡고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일에 깜짝 놀라 당황하는 남련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영상은 “그럼.” 하고 말을 꺼냈다.
“그 외의 상이라고 한다면, 원하는 것은 바로 이 여인입니다. 화요국 셋째 공주 남련을 제 정실로서…….”
“……?!”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남련만이 아니었다. 잠시 뒤, 쭉 늘어선 중신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왜 하필이면 적국의 딸을…….”, “그것도 정실로?”, “이 나라의 명문 귀족의 딸을 맞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는지.”, “지금까지 비를 선택하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셨는데.”, “정신이 있으신 겁니까, 영상 님!”
많은 목소리가 겹쳐 하나하나가 뚜렷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모두 혼란과 비난이 섞인 말이었다. 하지만 영상은 그런 것은 모기 소리만큼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태도로, 목을 돌리지 않은 채 시선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웅성거림이 서서히 작아졌고, 이윽고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불만과 의문이 휘도는 분위기까지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나서서 영상에게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지, 이 사람……?’
남련 자신도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영상의 정실, 즉, 아내가 된다. 설마 그렇게 갑작스럽고 의미 없는 일을 여봉국의 왕이 허락할 리가 없다고, 남련은 매달리듯이 옥좌를 올려다보았다. 상대는 부모의 원수인데. 하지만 은으로 된 뱀이 둘러져 있는 담뱃대를 흔들면서, 그 왕은 확실히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전리품이다. 마음대로 하거라.”
“네,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는 너무나 간단했다.
“이렇게 된 거야. 들었지, 남련?”
“아……. 저어, 내려주세요!”
남련은 공황 상태가 되어 외쳤다. 갑자기 등과 무릎 뒤에 손을 대더니 영상이 자신을 옆으로 안아 올렸기 때문에, 공주로서의 긍지를 운운하거나 새침하게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포기를 모르네. 너는 지금 이 순간부터 내 여자야.”
“대체 왜 이런 짓을……. 설명해달라니까요!”
남련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큰 웃음소리뿐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버둥거리는 남련을 안은 채, 영상은 알현장을 태연하게 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