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 아래 떨어지는 꽃이슬-5화 (5/11)

제5장

피어오르는 기억

남련에게 어느 날 갑자기 전환기가 찾아왔다.

“남련, 있어?!”

등 뒤의 큰 목소리에 놀라 남련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언제나처럼 딱히 할 일이 없어, 정원에 탁자와 의자를 내놓고 협죽도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영상이 찾아온 것이다. 아직 해도 높은 시간, 평소라면 정전에서 집무를 보고 있거나 병사에서 부하들을 훈련시키는 데 힘쓰고 있었을 텐데.

“그렇게 미지근한 차는 맛없으니 먹지 마.”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온 영상은 허리에 손을 대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남련을 내려다보았다.

“마…… 맛없지 않아요.”

영상이 말하는 대로 여수가 한참 전에 내준 차이기 때문에 이미 식어버리긴 했지만.

“꼭 지금 마셔야 할 만큼 맛있지도 않잖아. 자, 이리 와.”

“자…… 잠깐만요!”

영상이 손목을 잡고 자신을 끌자 남련은 당황했다.

“뭐하는 거예요? 설마 또 국왕을 알현하라고 하는 건…….”

어딘가 요괴 같은 위압감을 내뿜는 여봉왕과는 될 수 있으면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불안한 얼굴을 한 남련을 돌아보며 영상은 딱 잘라 말했다.

“아니. 일이야.”

“……네?”

“이제부터 너에게 일을 주겠어. 어차피 한가해서 죽을 지경이니, 뭘 시켜도 불평은 하지 말고.”

거드름을 피우며 그렇게 말하는 영상의 얼굴을, 남련은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일’은 불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거…… 이 산더미 같은 책은 대체 뭔가요……?!”

흥분해 목소리가 들뜨는 것을 남련은 억누를 수가 없었다. 영상이 데리고 간 곳은 정전의 한 구획에 설치된 넓은 서고였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크게 뛰었는데, 바닥에 한가득 깔린 멍석 위에는 작은 산더미처럼 책이 쌓여 있었다.

‘이건, 엄청나게 희귀한 고서야. 이쪽은 규조의 단편집 사정판……. 어, 정말? 『롱월백몽기담』의 초판까지 섞여 있어……!’

손에 든 책은 대부분이 지금은 입수하기 어려운 것들이거나, 아주 일부 호사가 사이에서만 전해지는 환상의 두루마리였다.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나는 오래된 종이 뭉치에 불과하겠지만, 남련에게는 황금 산을 눈앞에 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눈이 저절로 반짝였다.

“얼마 전에 죽은 어떤 귀족 할아버지가 있었거든. 재산을 탕진할 만큼 고서 수집가였나 봐.”

남련의 등 뒤에 서서 영상이 말했다.

“남은 가족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존하면 좋을까 난처하기만 할 뿐이니, 받아줄 사람이 있으면 꼭 기증하고 싶다고 해서 왕궁에서 받았어. 너는 이런 걸 잘 알잖아?”

“네!”

반사적으로 대답했다가, 남련은 문득 당황스러웠다. 영상이 어떻게 자신이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분명히 서고에서 만났고, 그 선녀 이야기책을 소중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겠지만…….

“너에게 이 책의 정리를 명하겠어.”

“네?”

남련은 귀를 의심했다. 이렇게 많은 귀중한 고서를……?

“내용대로 분류해서 책장의 알맞은 곳에 꽂아줘. 수선이 필요한 게 있으면 따로 분류해둬도 좋고. 직인을 불러 손질할게.”

“저어…… 저, 그것도 할 수 있어요.”

적극적으로 나서는 남련에게 영상은 정말 할 수 있겠냐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수선을?”

“네. 풀과 사포와 막대기, 침과 실이 있으면 대충은요.”

마음에 드는 책은 구멍이 뚫릴 정도로 많이 읽어서 그때마다 자신이 고쳤던 남련이었다. 너무 어려운 수리는 전문가에게 맡기더라도, 보물 그 자체인 고서를 앞에 두고,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설마 그런 것까지 가능할 줄이야.”

영상은 그렇듯 작게 혼잣말을 했지만, 남련이 숨을 죽인 채 대답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필요한 도구는 준비시킬 테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아.”

“네!”

‘굉장해. 굉장해. 굉장히 기뻐……!’

이렇게 많은 고서를 자신의 재량으로 정리할 수 있다니, 이렇게 보람 있는 ‘일’이 또 있을까. 내용에 따라 분류하라는 것은, 물론 안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만나게 될는지. 가슴이 두근거려 몸 앞에서 양손을 꼭 맞대자, 영상의 입매가 누그러졌다.

“넌 그런 얼굴로 웃는구나.”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남련은 자신이 활짝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황해서 손을 대고, 싱글거리는 뺨을 억눌렀다. 원수인 남자 앞에서 이런 해맑은 표정을 보여 주다니, 실수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하…… 하하하하! 일부러 뾰로통한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잖아!”

열심히 점잖은 표정을 지으려는 남련을 보고 영상이 배를 잡고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구김이 없는 모습에 남련은 그만 눈을 빼앗기고 만다.

‘그쪽이야말로…….’

이런 얼굴로 웃는 사람이었는지 몰랐다. 침실에서 위협을 할 때 웃는 모습이나, 남련을 희롱할 때 히죽대는 표정은 몇 번씩이나 봤지만, 이렇게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다니.

“나중에 여수도 부를 테니 적절하게 쉬면서 하고.”

남련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영상은 떠나갔다. 남련을 혼자 둬도 도망갈 것이라고도, 자해할 것이라고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있다는 듯이. 조용해진 서고 안에서 남련은 당황했다.

‘나는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좋아하는 책을 앞에 두고도 바로 작업에 들어갈 기분이 아니었다. 영상의 웃음이 뇌리에 박힌 데다, 손이 닿은 어깨에 아직도 신기한 열이 모여 있는 듯해 남련은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남련이 고서의 정리를 맡아 서고를 드나들게 된 지 순식간에 두 달이 지났다. 진척은 순조로웠고, 손질이 필요한 책 대부분은 자신의 손으로 수리할 수 있었다. 내용도 한 권 한 권 검사하면서, 이야깃거리, 실용서, 학술서, 도판…… 등, 종류별로 책장에 꽂았다. 그건 정말 즐겁고 충실한 시간이었지만, 의외로 체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넓은 서고를 열심히 걸어 다녔고, 높은 단에 볼일이 있으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등, 악전고투를 하고 있으면 지나가던 하인 청년들이 보다 못해 도와주는 일도 있었다. 지금은 잡역들이 도와주고 있는데, 언젠가 등용 시험에 합격해 문관이 되려고 하는 향상심 왕성한 젊은이들이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남련을 궁녀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고서를 만지면 먼지투성이가 되니, 남련이 입고 있는 옷은 장식이 간소한 작업복이었고, 묻지도 않았는데 신분을 밝히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 그렇게 되어버렸다. 일단 이름을 물을 때는 본명을 말했지만, 관위가 없는 그들은 왕태자가 타국에서 데려온 공주의 이름이라고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청년들은 영상을 화제로 올리는 일이 많았다. 아무래도 서민인 그들이 등용 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된 것은, 태자로 책봉된 영상이 의견을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귀족이 아닌 자 중에도 뛰어난 두뇌를 지녀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넘치는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이 나라를 통치하게 될 사람으로서 그들의 지혜를 빌려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라고 했대. 그 사람은 정말 도량이 넓다고 할까, 생각이 유난하다고 할까……. 우리들처럼 신분이 낮은 사람도 공평한 눈으로 봐주신다니까!”

오늘도 책을 고르는 작업 사이에, 빙 둘러 앉은 청년들은 들뜬 목소리로 영상을 칭찬했다.

“복도에서 어쩌다 만났어. 원래는 넙죽 절을 해야 하는데, ‘일일이 그런 짓을 하면 일에 지장이 있잖아.’라고 웃으며 말씀하셨다니까.”

“매일 정무가 바쁘신데 아침 일찍부터 단련장에서 검술이며 궁술 연습을 계속 하시고.”

“고지식한 고관 중에는 거북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와아. 나는 완전히 영상 님 편이야! 그야말로 남자가 반할 만한 남자니까!”

“멍청아. 너 따위가 반해봐야 뭐가 돼? 영상 님 정도의 멋진 분이라면, 어떤 미녀든 골라잡을 수 있을 거야.”

“그건 그렇네!”

웃음을 터뜨리는 청년들 사이에서 남련은 불편한 듯 몸을 꼼지락거렸다. 아랫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남편. 보통이라면 아내로서 기뻐해야 할 텐데, 영상과 부부가 되었다는 실감이 아직도 잘 나지 않았다. 영상은 여전히 침실을 찾아왔지만, 마지막 일선은 넘지 않은 채, 인내심을 가지고 남련을 애무했다. 변화라고 한다면 그 행동 뒤에, 매일 밤 침실에서 같이 잠드는 습관이 든 것 정도일까. 익숙함이란 무서운 것으로, 밤마다의 쾌락도, 듬직한 팔에 안겨 잠드는 것도, 남련은 최근 원래 이런 것이라며 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름대로 안정된 나날을 보내고 있어서인지, 좋아하는 책을 접하는 게 좋아서인지, 여수가 걱정했던 달거리도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 기간에는 역시 무리하게 애무를 하지 않았지만, 하반신을 차게 해서는 안 된다는 여수의 말을 들은 영상이 몇 겹이나 되는 이불로 남련을 감싸, 도롱이벌레처럼 됐을 때는 그저 질릴 뿐이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그의 가슴에 안겨 있으면 항상 따뜻한데.

“그건 그렇고 영상 님은 정실 문제를 어떻게 하시려고 그럴까.”

청년 한 사람이 그런 말을 꺼내자 남련은 다시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문제라니? 화요의 살아남은 공주님을 정실로 맞아들이실 예정이잖아?”

‘내 얘기야.’

남련은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아니, 그게 아무래도 잘 진행되지 않는 모양이야.”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자, 그만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말았다.

“그 뭐냐, 박 재상한테는 적령기의 조카딸이 있잖아? 사실은 원래 그녀가 영상 님의 정실로 주목을 받았대. 재상 일파의 반대가 심해 화요 공주를 정실로 맞아들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는 거지.”

“아아…… 아무리 영상 님이라도 재상을 적으로 돌리면 귀찮게 될 테니까. 안 그래도 박 재상은 죽은 형님에게 신뢰를 받던 분이고.”

“청상 님이지. 나쁜 분은 아니었지만 동생인 영상 님과 비교하면 패기가 없다고 할까…… 정무에도 소극적이고 조용한 분이셨어.”

“그게 좋았던 거지, 박 재상은. 청상 님이 임금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뒤에서 얼마든지 정무를 장악할 수 있으니까.”

“그럼 지금 박 재상은 영상 님에게 조카딸을 시집보내, 자신이 섭정을 하려고 하는 거구나.”

“국왕님은 뭐라고 하시는데?”

“글쎄. 그분의 생각만큼은 아무도 읽을 수 없으니까.”

‘정말 그 말대로야.’

무의식중에 남련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바라보던 청년 한 명이 문득 말을 걸어왔다.

“남련은 어때? 화요의 공주님과 박 재상의 조카딸, 둘 중에 누가 영상 님의 신부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응? ……그런 말을 들어도 난 잘…….”

당사자인데 대체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횡설수설하고 만다.

“나는 그, 재상의 조카딸이라는 사람도 잘 모르고…….”

“굉장히 요염한 미인이야. 영상 님보다 두 살 아래라고 하니 딱 좋지.”

그렇다면 남련보다 한 살 위라는 이야기다. 백 명의 남자가 있으면 아흔아홉 명은 뒤를 돌아볼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남련은 눈썹을 모았다. 그렇게 아름다운 신부 후보가 있다면 영상이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게 되면 나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돼. 그러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침실에도 안 오게 될 거고…….’

이제 두 번 다시 희롱당하지 않아도 되니 기뻐해야 할 텐데, 어쩐 일인지 가슴이 답답했다.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몰라 당황해하는 남련에게, 청년은 말을 계속했다.

“재색 겸비로, 거문고며 비파도 명인급 실력인 데다, 몰래 왕비 교육도 받고 있다는 소문이야.”

“비밀 왕비 교육?”

“즉, 영상 님을 포로로 만들기 위한 밤일 말야…….”

이야기가 야한 쪽으로 흘러가자, 다른 청년이 당황한 듯이 끼어들었다.

“그런 건 남련 같은 여자애한테 해줄 말이 아니잖아.”

“그래. 남련은 순진하니까 아무것도 몰라도 돼.”

수수한 옷차림에 말수도 적은 남련을 보고, 그들은 청순하고 얌전한 아가씨라고 생각하는지, 가끔 이런 식으로 놀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뺨을 빨갛게 물들이며 어물어물 넘어가는데, 그것이 그들의 장난을 더욱 심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남련은 영상과 밤에 있을 일을 생각했기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물든 것이었다.

‘절대 말 못 해…….’

그들이 화제로 삼고 있는 영상에게 매일 밤 그토록 음란한 일을 당하고 있다고는.

“아, 이렇게 빨개져서는. 남련은 정말 순수하다니까.”

“조금은 남자에게 익숙해지는 게 좋아. 다음 쉬는 날은 언제야? 나랑 마을 찻집에라도 안 갈래?”

“너, 먼저 나서지 말라니까!”

왁자지껄 시끄럽게 떠드는 청년들 사이에 둘러싸여, 남련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친근하게 머리를 쓰다듬거나 들떠서 어깨를 안거나, 그저 장난을 치는 것뿐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만지는 사람을 남련은 단 한 사람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저어, 그만…… 그만하세요.”

오들오들 떨면서 호소해봤지만, 목소리가 작아서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남련이 난처해하는 것도 무시하고 점점 떠들썩해지는 그들이 뭔가 갑자기 무서워져 꼭 눈을 감았을 그때.

“뭐하는 건가, 너희들?”

배를 울리게 하는 낮은 목소리가 나서 그 자리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 영상 님……?!”

서고의 문 앞에 선 영상이 날카롭게 노려보자 일동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친근하고 소탈하다고 생각했던 왕태자가 이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다니, 그들은 처음 보는 것이겠지.

“죄송합니다. 저어, 일을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 이 여자아이를 돕고 있습니다. 혼자서 책을 옮기는 모습이 힘들어 보여서요.”

청년들이 변명을 하는 가운데, 영상이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갔다. 힉, 하고 겁을 먹은 그들의 눈앞에서 영상은 남련의 손목을 꽉 잡았다.

“내 아내가 신세를 지고 있군.”

몸을 돌리며 그런 말을 하자, 청년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 “네에에에에?!” 하고 경악스런 외침을 발했을 때에는 이미 남련이 영상에게 강제로 팔을 붙잡혀 서고를 나간 뒤였다.

“저어, 어디로 가는 거죠……?”

영상에게 이끌려 정전의 복도를 구르듯이 걸으면서, 남련은 당황해 그렇게 질문했다. 하지만 영상은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뚱한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남련은 성큼성큼 길을 재촉하는 그를 어쩔 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영상은 어딘가의 문을 열고, 그 내부에 남련을 밀어 넣었다.

“여기는……?”

긴 의자와 탁자, 칸막이 등, 대략적인 생활용품이 갖춰진 귀인을 위한 방인 듯했다. 구석구석까지 청소가 되어 있는데, 장식대의 꽃병이 텅 빈 것을 보면, 다른 나라의 내빈이 잘 때 사용되는 장소일지도 몰랐다.

“언제부터지?”

난폭하게 문을 닫은 영상이 남련을 내려다보며 무턱대고 그렇게 물었다. 그 표정은 평소와 달리 매우 험악해 남련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친근하게 대하는 녀석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지?”

“……보름 정도 전부터예요.”

딱히 어울린다고 할 정도로 친밀한 교류를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한가할 때 가끔 들러서 도와주는 정도였을 뿐이다. 그런 설명을 하는 남련에게 영상은 계속 질문을 던졌다.

“서고 이외의 장소에서 만나지는 않았겠지?”

“네.”

“그 녀석들 중 누군가와 둘만 있었던 적은?”

“없어요.”

잇따른 질문에 남련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렇게 위압적으로 추궁을 하다니, 설마…….

“혹시 그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었나요?”

“……응?”

“그냥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척을 하지만, 실제로는 국가 전복을 노리는 반역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라든가. 요인 암살을 꾀하는 암살자라든가…….”

남련의 그 진지한 발언에, 영상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읽었어.”라고 얼굴을 찡그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까…… 나쁜 벌레들이지.”

“벌레?”

“아무리 봐도 녀석들은 너에게 마음이 있으니까. 멋대로 몸을 만지고 있는데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짜증이 난다는 듯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에 남련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설마. 설마라고는 생각하지만…….

“혹시…… 질투하세요?”

말을 해놓고도 아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남련은 자신의 말을 후회했다. 영상에게 있어 자신은 형식상의 아내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우쭐대는 데도 정도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 나는 질투하고 있어.”

영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다.

너무나 강력한 선언이어서, 순간 그 의미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넌 내 아내야. 걱정을 하는 게 뭐가 나빠!”

순간 어조를 강하게 내뱉었지만, 남련이 깜짝 놀라 어깨를 떨자, 영상은 큰소리를 낸 것을 후회한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네 마음이 나에게 향해 있지 않다는 걸 아니까, 불안해서 그래.”

‘불안……?’

도무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워 남련은 당황했다. 영상은 언제나 당당하고, 싸움이며 정무에 있어서도 뒤로 물러서는 법을 모르는 남자라고 생각해왔다. 사소한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호탕한 성격이라고도. 그런 그가 남련이 다른 남자와 조금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진심으로 흥분하고 있다. 그 사실은 남련의 마음을 기묘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몰라 난처한 듯한, 우스운 듯한, 달콤씁쓸하고 괴로운 듯한. 지금까지 다른 누구에게도 가진 적이 없는 기분이었다.

“난폭하게 끌고 나온 건 미안했어. 하지만 더 이상 늑대들 무리에 혼자 뛰어드는 경솔한 행동은 하지 말아줘.”

호들갑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니, 그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알겠어요. 하지만…….”

“하지만, 뭐지?”

“제가 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건 작업의 도움을 받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그 사람들이 당신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에요.”

“내 이야기?”

영상은 의표를 찔렸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모두 당신을 칭찬하고 호의를 보였어요. 관리가 되기 위해 수험 자격을 받았다는 것이라든가, 무술의 단련에 힘쓰고 있다든가…… 그 외에 여러 가지.”

그들의 눈을 통해 남련이 모르는 영상의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매일처럼 그런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남련은 어느새 영상의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기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다.

“분명 저는 알고 싶었던 거예요……, 당신에 대해서.”

“어째서지?”

“말은 잘 못하겠지만, 저도 잘 모르겠지만…….”

남련은 머뭇거리며 영상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저를 제대로 봐주고 계셨잖아요?”

목이 메어 말을 잇기 어려웠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는 사이에, 초조함이나 망설임이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맑게 걸러진 솔직한 마음만이 남게 되었다.

“제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서 정리를 맡겨주셨어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우울했는데, 그 일을 하게 해주셔서 저는 정말 기뻤어요.”

게다가, 남련은 생각했다. 창피해서 말은 할 수 없지만, 영상은 침실에서도 남련을 배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남련이 아프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면, 더 이상은 절대 무리하지 않았고, 쾌감의 싹이 트려고 하면 그것을 자라게 해 만족시켜주었다.

“모국을 습격한 여봉군을……, 그들을 지휘한 당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은 아직도 남아 있어요.”

하지만, 남련은 말을 계속 이었다.

“아마 당신은 제가 처음에 생각했었던 것처럼 난폭한 분은 아니에요. 그걸 모르고 당신을 거부하는 것은 뭔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갑자기 숨을 쉴 수 없게 되어 남련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영상이 팔을 등에 두르고, 등이 부러져라 꼬옥 힘을 주어 포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갑자기 애원하는 말을 속삭였다.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겠어?”

“이…… 이름?”

“내 이름 말이야. 불러줘, 남련.”

뭔가 맥락이 없는 흐름이었지만, 그의 절실한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어서 남련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영상……?”

아아. 소리가 날 듯, 나지 않을 듯한 그런 입김이 귓불을 스쳤다. 다음 순간, 남련의 뺨에 영상의 손이 닿았다. 그에 이끌려 영상을 바라본 남련의 입술에 뜨거운 것이 뒤덮였고, 영상은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격렬하게 남련의 입술을 탐했다.

“음…… 아후…… 으응……!”

그가 깊게 뒤섞인 혀를 빨아들이자, 몸의 중심에 불이 붙은 듯해, 손끝에까지 찌릿한 관능이 전해졌다.

“남련…… 더 해줘. 더 너를 맛보게 해줘…….”

목의 각도를 바꾸어 침입하는 깊이를 바꿔가며 영상은 반복해서 입술을 겹쳤다. 목덜미에 닿은 손가락이 위로 올라와 머리카락을 흩뜨렸고, 다른 손은 등을 쭉 끌어올렸다.

‘어쩌지…… 싫지 않아…….’

길고 긴 입맞춤에 취해, 남련의 의식은 서서히 몽롱해져갔다.

겨우 입술이 해방되어 살짝 눈꺼풀을 떠보니,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달콤한 눈빛을 품은 눈동자로 영상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왜…….”

“모르겠어? 기뻐서 그래.”

“기뻐요?”

“남련이 내 이름을 불러줬어. 나를 알고 싶다고 생각해줬어. 기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당연하다고 말을 하지만, 남련으로서는 아직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어째서…… 중얼거렸을 때, 허리에 감긴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내가 너를 좋아하기 때문인 게 당연하잖아?”

“꺅?!”

남련을 안은 채 영상은 칸막이 끝을 향해 갔다. 그곳에는 아무래도 손님용으로 보이는 넓은 침대가 있었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 생각인지 깨달은 남련은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아, 안 돼요……. 아직 낮인데.”

“밤이면 나에게 안겨줄 건가?”

“안기다니……!”

그렇게 말한 남련을 침대에 누이고, 영상이 천천히 몸을 뒤덮어왔다.

“오늘이야말로 널 안겠어. ……안 돼?”

그냥 껴안는 것으로, 평소처럼 피부가 닿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그런 의지를 뚜렷하게 느껴 남련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사랑해, 남련. 너와 처음으로 만났을 때부터.”

영상의 뜨거운 속삼임을 남련은 힘없이 부정했다.

“믿을 수 없어요…….”

처음으로 만났을 때 자신은 상스럽게도 잠옷 차림이었고, 머리도 묶지 않았다. 들보에 깔릴 뻔한 자신을 구해준 영상을 보고, 감사는커녕 ‘무례하다’고 호통을 쳤다.

“그럼 가르쳐줄게. 내가 얼마나 너를 원하는지.”

또다시 뜨거운 입술이 떨어져 내려와 남련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목을 부서뜨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해주었으면 했다. 자신의 의지는 그 어디에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고 포기하면, 이 남자를 받아들이는 데 이토록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될 텐데. 남련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절하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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