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배신의 진상
새해가 밝아, 봄에 있을 혼례 준비도 점차 완료되어가던 어느 겨울 날.
“아…… 화요에서 사신이, 왕궁에 왔다고?”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영상이 하는 말에, 남련은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응. 우리들의 혼인에 축하의 말을 전하러 왔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래, 만날 거야?”
어떻게 되든 딱히 상관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한 영상은 궁녀가 옮겨온 참깨떡을 한 입에 넣고 호쾌하게 씹었다. 남련은 대답하지 못하고 손에 든 국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여봉의 속국이 된 현재의 화요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사신들을 만나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살아남은 유일한 왕족이면서, 적국의 왕태자의 아내가 되려고 하는 남련을 창피한 줄도 모르는 배신자라고 경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염려하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과거에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상의 인품을 알게 된 지금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만, 여봉에 막 왔을 때에는 이런 날이 올 거라는 말을 들었다 해도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알았어. 사신들은 내가 적당히 응대할게.”
남련의 망설임을 눈치채서인지, 영상이 안심을 시켜주듯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축하 인사라고는 하지만, 그런 건 겉치레 인사일 뿐이야. 결국 여봉에게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공물을 가지고 와서 겉모양을 갖추면 그만인 거지.”
신경 쓸 건 없다고 말하면서, 식사를 끝낸 영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오늘도 늦게 돌아올 거야. 먼저 자도 괜찮아.”
혼례를 앞두고 있는 탓인지, 최근에는 영상이 바쁘다. 하지만 그렇게 정무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은, 그 독거미 사건 이후, 남련의 주변에 눈에 띄는 이변이 일어나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다. 후궁의 경비는 더욱 엄중해졌고, 남련에게 도착하는 선물은 모두 세심하게 검사를 하게 되었다. 그 단계에 수상한 무언가가 발견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남련 자신에게 위험이 미치는 일은 없었다.
‘영상이 날 지켜주고 있는 거야.’
풀솜으로 감싸주는 것처럼 소중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은 매우 기뻤고 안심이 되었지만, 답답하고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 하다못해…….
“늦어도 괜찮아. 기다릴 테니까.”
“그렇구나.”
영상의 입에 기쁨이 떠올랐다. 그대로 식탁을 돌아 몸을 굽히고, 남련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한다.
“……!”
“다녀올게.”
새빨개져 몸이 굳은 남련에게 그런 말을 남기고 영상은 밖으로 나갔다. 시중을 드는 궁녀는 신경을 써주며 못 본 척을 해주었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날 점심. 자신의 방에서 책상 앞에 앉아 여봉의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왕통도를 읽고 있을 때였다. 좀 지쳐 있었는지 아무래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머리가 멍해서 같은 글자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읽기도 했다. 문득 그 시야가 뿌예져 원근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목의 안쪽이 밀려 올라오는 감각이 들었는데, 그게 구토감이란 사실을 깨달은 남련은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갔다.
“남련 님, 괜찮으세요?”
대기하고 있던 여수가 남련의 뒤를 쫓아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위 안의 것을 토해낸 남련은 아직도 메슥거리는 가슴을 억눌렀다.
“네……. 미안해요, 여수. 뭔가 상한 음식이라도 먹은 걸까요.”
남련은 입을 닦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여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그리고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맑은 눈을 하고 있었다.
“남련 님, 실례지만 달거리는……?”
“달거…… 어?”
질문의 의미를 이해한 남련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아프고 나른하고 귀찮은, 그것이 오지 않았다.
‘거짓말……. 정말로?’
머뭇머뭇 아랫배에 손을 대고 그 가능성을 생각하자,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바로 어의를 부르겠습니다!”
여수가 평소보다 더욱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제안했다.
‘회임하셨습니다.’
어의가 아주 확실하게 단언하자, 남련은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일을 오히려 믿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는 방 한가득 궁녀들이 몰려와 ‘축하드립니다!’라고 대합창을 했었다. 어딘가 안 좋은 곳은 없는지, 먹고 싶은 음식은 없는지 잇달아 질문을 받았고, 성미가 급한 궁녀는 ‘태자님께 알려드려야지.’라고 하면서 밖으로 달려 나가려 해서, 남련은 서둘러 말려야만 했다. 소중한 일이니 자신의 입으로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도 본심이었지만, 영상의 아이를 얻은 놀라움과 기쁨을 먼저 혼자서 절절히 되새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가고 조용해진 방에서 남련은 긴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 손은 계속 무의식적으로 아직 전혀 부풀지 않은 배꼽 아래를 쓰다듬었다.
‘신기해……. 이 안에 생명이 깃들어 있다니.’
그만큼 몇 번이나 맺어졌으니, 그 사이에 아이를 가질지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아기가 생겼다는 말을 들으니, 생명의 신비에 감동을 받아, 알 수 없는 누군가에서 감사하고 싶은, 기도를 올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영상은 뭐라고 말할까. 기뻐해주면 좋을 텐데…….’
그때 노대에 면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 남련은 고개를 들었다. 해가 진 어둠 속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서 있었다.
‘어?’
이곳은 2층인데, 왜 그런 곳에 사람이 있을까. 암살자일 가능성이 뇌리를 스쳐 얼어버린 남련이었지만, 실내로 들어온 인물의 모습에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료…….”
입술이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자, 절로 떨렸다.
‘설마. 왜 그가 이런 곳에.’
“나야, 남련. 큰 소리는 내지 마.”
쉿. 입에 손가락을 대면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남련은 무언가에 튕겨난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료안? 정말로 료안이야?!”
그곳에는 그 왕성의 날 밤 이후로, 생사를 걱정했던 료안이 있었다. 돌아가신 부왕 비서관의 아들. 어렸을 때부터 남련의 놀이 상대였던 박식하고 온화한 청년.
“왜 료안이 여기에…….”
“화요의 사신단에 섞여서 같이 왔어. 여기에 몰래 오는 건 힘들었지만, 꼭 남련을 만나고 싶어서.”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야.”
“남련도.”
료안이 남련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 뒤로 계속 얼마나 안절부절못했는지 몰라. 긍지 높은 네가 야만족인 여봉의 왕태자에게 납치되었으니, 목숨을 끊는 게 아닌가 하고.”
분명히 그렇게 하려고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문득 남련은 과거를 돌이켜보며 료안을 걱정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그의 손을 가볍게 맞잡아주었다.
“고마워, 료안. 하지만 나…….”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 나라에서 행복하다. 그렇게 전하려던 남련에게 료안은 어조에 힘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 남련. 너를 데리고 도망갈 계획을 세워서 왔어.”
“도망?”
“그 왕태자에게 심한 짓을 많이 당했지? 이제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돼. 자, 돌아가자. 남련, 나와 같이 우리들의 고향으로…….”
“자…… 잠깐만, 료안.”
감정이 북받친 듯 료안이 자신을 껴안자, 남련은 그저 당황스러웠다.
“도망치다니, 안 돼. 봄이 되면 혼례를 올려. 난, 여봉의 왕태자비가 되는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요가 어떻게 돼도 모른다고 협박했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남련만이 희생을 할 필요는 없어.”
료안은 남련을 생각해 하는 말이겠지만, 영상과 헤어지다니 생각할 수도 없고, 배 속엔 아기도 있다.
그렇게 설명하려고 했을 때, 료안이 갑자기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여봉의 왕태자에게 정든 건 아니지? 국왕 폐하를, 네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바로 그 남자인데.”
“……뭐?”
남련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료안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아버지는…… 자해하신 거잖아? 료안, 너도 그날 밤에 그렇게…….”
연회석에서 습격을 받아 도망치다 옥좌 쪽으로 내몰린 부왕은, 비열한 적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낫다며 스스로 목을 칼로 꿰뚫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료안이었다.
“폐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어.”
그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료안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봤어. 그 왕태자가 폐하를 쫓아가 목을 베어버렸어.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띠며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단숨에…….”
“거짓말이야!”
남련은 그 말을 물리치듯이 외쳤다.
“영상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아. 그 사람은…….”
남련이 좋아하는 것을 인정해주고, 사랑해준다고 몇 번이고 말해주었다. 그 넓은 가슴으로 안아주어 안심시켜주고, 잠자는 모습은 의외로 천진난만하고, 호기롭고 명랑한 그를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주고 있다.
“눈을 떠, 남련. 녀석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전쟁을 거치고 많은 사람을 죽여왔는지, 네가 모를 리 없을 텐데?”
“……하지만.”
그게 그의 일이니까. 그렇게 말을 하려던 남련은, 자신이 그 사실에서 눈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 남련에게 아무리 다정하더라도, 영상은 지금까지 무장으로서 살아왔다. 그리고 쌓아온 수많은 실적이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행동도 용서를 받고, 남련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도 결과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럼…… 설마, 진짜로?’
남련의 아버지를 죽인 게 영상이라는 그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떨리는 손끝으로 또다시 배 아랫부분을 쓰다듬었다. 혹시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원수의 아이를 가지고 있는 셈이 된다.
‘……정신 차려!’
남련은 망설임을 차내듯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영상을 믿어.”
의연하게 그렇게 말하자, 료안은 오싹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영상은 분명히 전쟁터에서는 무인이기에 많은 목숨을 빼앗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남련의 아버지를 죽였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거짓말을 하는 비열한 남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사실이 있다면, 그렇게 남련을 보고 순수하게 웃어줄 수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영상은 그런 사람이야.’
정신을 가다듬고 남련은 말했다.
“미안해, 료안. 이렇게 와줬는데……. 하지만 나는 영상을 좋아해.”
“……어째서 말귀를 못 알아들어?”
갑자기 목소리가 확 바뀌어, 료안은 어두운 눈으로 남련을 바라보았다.
“넌 화요의 마지막 공주로, 이런 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응……?!”
남련의 복부에 강한 충격이 날아들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료안에게 명치를 얻어맞은 것이라고,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남련은 어렴풋이 이해를 했다.
“누구 옆에 있는 게 올바른 건지, 내가 가르쳐줄게.”
어두운 유열에 물든 소꿉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남련은 몸에 힘이 빠져 기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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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련이 없어졌다고……?”
소식을 듣고 후궁으로 달려온 영상은 넙죽 엎드린 병사들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죄송합니다, 태자님!”
“경비가 허술한 틈을 노린 듯합니다. 말씀드리기 죄송하오나, 순찰 시간과 경로가 밖으로 새어 나갔다고밖에는…….”
남련이 돌연 사라졌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해서. 그 사실은 영상의 심장을 차가운 손으로 쓸고 지나갔다. 남련의 방에는 싸움의 흔적은 없었다. 옆방에 대기하고 있던 궁녀도 비명이나 외침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갑자기 약 냄새를 맡게 한 건가? 아니면 얼굴을 아는 자의 범행인가…….’
냉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만 계속 조급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태자님, 실례합니다.”
재빠르게 들어온 사람은 극도로 어두운 얼굴을 한 여수였다. 뒤에 묶여 있는 젊은 궁녀를 끌고 와서는 영상의 눈앞에 억지로 무릎을 꿇게 했다. 그녀는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고, 얻어맞았는지 뺨이 부어올라 있었다. 남련의 시중을 드는 젊은 궁녀 중 한 명이다.
“거동이 수상하여 추궁을 해보니, 이자가 자백을 했습니다. 돈을 받고 침입자가 남련 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요. 이전에 궤에 독거미를 넣은 것도 이 궁녀의 짓인 듯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궁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머리를 바닥에 조아렸다.
“어머니께서 병이라 약을 살 돈이 필요했습니다. 저 한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벌을 받을 테니, 집안사람들에게는 죄를 묻지 말아주십시오. 부디,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얼굴을 들어라.”
영상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궁녀에게 말했다.
“너의 처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결정하겠다. 누구의 돈을 받고 이런 짓을 한 거지?”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였지만, 궁녀는 영상의 격앙된 모습을 느낀 듯했다. 창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면서 포기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바…… 박 재상입니다…….”
“……역시 그렇군.”
영상은 화가 난다는 듯이 소리를 내뱉었다. 자신의 조카딸을 영상의 정실로 만들기 위해 획책하였으나, 그게 이루어지지 않자 남련의 목숨을 노렸다. 독거미 사건 때부터 그렇지 않을까 하고 의심을 했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추궁하지는 못했지만, 이 궁녀의 증언이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럼 남련은 재상에게 있겠구나?”
“아니요, 그게…….”
당장에 발걸음을 돌리려는 영상을 여수가 멈춰 세웠다. 남련을 눈앞에 두고도 납치를 당하게 만들었다고 후회를 하는 것인지, 자신을 탓하듯이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남련 님을 납치한 사람은 박 재상의 수하가 아닙니다. 이 나라 사람이 아닌 듯합니다.”
“……뭐라?”
영상의 미간에 더 이상 없을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욱신거리는 둔탁한 복부의 통증에 남련은 감았던 눈꺼풀을 부르르 떨었다.
‘배가 아파……, 배가……. 아기!’
지켜야 할 존재를 떠올리고, 남련은 초조함에 휩싸여 눈을 떴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한 남련이 누워 있는 곳은 언제나 잠을 자는 후궁의 침대가 아니라, 단단하고 거친 침상이었다. 나무가 그대로 드러난 벽과 천장. 음식물의 시큼한 냄새가 떠도는 방 한켠에 등불이 불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 남련. 이제 일어났어?”
남련의 얼굴을 들여다본 청년이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폭력을 쓰다니. 익숙지 않은 일을 하다 보니, 힘 조절을 못한 모양이야. 아프게 해서 미안해.”
“료, 안…….”
이마에 달라붙은 남련의 앞머리를 료안이 천천히 쓸어 올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소꿉친구의 손을 뿌리치고 남련은 몸을 일으켜 뒷걸음질을 쳤다.
“여기는 어디야?”
“여봉의 도읍 내의 싸구려 숙소야. 얼른 화요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기절한 널 데리고는 좀처럼 멀리 갈 수가 없어서.”
그럼 자신은 후궁에서 강제로 납치되었단 말이다.
‘영상이 걱정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침상 아래로 내려가려던 순간, 얻어맞은 명치가 욱신거리며 아파 남련은 몸을 꺾고 숨을 헐떡였다. 부축하듯이 몸을 감싸 안은 료안이 정답고도 간살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 돼, 남련. 어디 가는 거야?”
“영상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거야. 부탁이니까 보내줘, 료안.”
이런 사태에 직면해서도 남련은 료안을 설득하길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돌아가면 아마 그렇게 큰 소란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나도 료안의 이름은 꺼내지 않을 테니……, 부디 이대로 화요로 돌아가줘.”
“날 걱정해주는 거야? 정말 다정하구나, 남련은.”
가엾다는 듯이 그렇게 말한 료안은, 남련의 턱을 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 다정함이 역효과가 나서 그 왕태자에게 이용당했구나. 더 빨리 데리러 왔어야 했는데. 늦게 와서 정말 미안해.”
용서를 구하는 그 입술이 남련의 그것에 겹쳐지려고 했다. 남련은 당황해 서둘러 고개를 돌린 뒤, 료안의 포옹에서 벗어나려고 양팔을 힘껏 내뻗었다.
“그만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널 사랑하기 때문이야. 모르겠어, 남련?”
뜻밖의 고백을 받고 남련은 깜짝 놀랐다. 가만히 료안을 바라본 뒤, 어금니를 꽉 물었다.
“……거짓말이구나.”
“너무하네.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상처받았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료안에게 남련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영상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은 그렇게 온도가 없는 눈을 하지 않아.”
“온도……?”
료안은 허를 찔렸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 얼굴에는 볼 때마다 차가운 거짓 웃음이 번져갔다.
“이런,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 그냥 속아 넘어가면 될 것이지. 쓸데없이 감이 좋은 여자는 행복해지기 어려워.”
그렇게 말하자마자 료안은 남련을 침상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허리띠가 풀린 남련은 혐오감에 비명을 질렀다.
“싫어, 이거 놔!”
“그 왕태자에게 안길 대로 안기고 농락당했잖아?”
남련을 넘어뜨리고 내려다보면서 료안이 비웃었다.
“고귀한 공주님인 주제에, 육욕의 기쁨을 만족시켜주는 남자라면 누구든 좋은 거지? 그럼 나도 받아들여줄 수 있겠지?”
료안은 남련의 상의를 벗기고는 직접 가슴을 만지기 시작했다. 땀으로 흥건한 손바닥의 감촉에 남련은 공포로 인해 몸을 떨었다. 영상이 같은 일을 하면 쉽게 녹아들어가는 몸이 료안의 존재를 생리적으로 거부했다.
“부탁이야, 그만해! 내 배 속에 영상의 아이가 있어!”
그렇게 소리를 지르자, 료안이 경악했다는 듯이 눈을 번쩍 떴다.
“……정말이야, 남련? 정말로 그 왕태자의 아이를?”
“정말이야! 그러니까 부탁해, 심한 짓은 하지 마. 나를 영상이 있는 곳으로 보내줘!”
“젠장, 이게 무슨 일이야!”
료안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적국의 남자에게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다리를 벌린 것도 모자라, 아이를 가져? 웃기지 마! 이래선 이용 가치가 없잖아. 내가 너를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알아!”
‘……이용?’
몸을 웅크리는 남련을 료안은 증오스럽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남련, 넌 이상하지 않았어? 그 연회가 있던 날 밤, 왜 그렇게 쉽사리 화요가 함락되었는가. 왕궁에 왜 그렇게 불이 빨리 번졌는지 생각해보지 않았어?”
“그건…… 내통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소문을…….”
거기까지 중얼거린 남련은 눈을 번쩍 떴다.
“설마, 료안? 거짓말이지?”
제발 거짓말이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렇잖아. 그런 짓을 해서 뭐가 돼? 화요가 멸망하면 너도…….”
“그 나라에서 내가 얼마나 출세할 수 있었을까?”
료안은 자조하듯이 그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국왕의 비서관까지 올라갔지. 하지만 나는 몇 십 년이나 꾸준히 무언가를 할 마음이 안 들었어. 세상 물정 모르는 널 적당히 꼬드겨서 왕의 사위가 되는 것도 좋았겠지만, 어차피 셋째 공주의 남편으로는 큰 실권을 얻지 못하니까.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료안은 무언가에 씐 사람처럼 막힘없이 말했다. 애초에 혐오스러운 매국노는 료안뿐만이 아니었다. 현재의 화요에서는 영달을 바랄 수 없는 자나, 법을 어기고 관위를 박탈당해 국왕을 반대하고 원망하는 자. 그런 자들이 무리를 이뤄, 적국인 여봉의 박 재상과 비밀리에 손을 잡았다고 한다.
박 재상은 약속했다. 여봉이 언젠가 화요를 병합한 뒤에는, 자치령이 된 그 토지에서 그들을 요직에 앉혀주겠다고. 달콤한 먹이에 달려든 사람들은 화요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날 밤에, 계획을 결행하기로 하였다.
비서관의 아들로서 수많은 정보를 쥐고 있는 료안을 우두머리로 해서, 경비를 서기로 했던 경비병들의 식사에 독을 탔다. 광대나 상인으로 위장해 입국한 여봉의 병사들이 살해당한 병사들 대신에 연회장에서 일제히 검을 빼들어…….
“박 재상은 처음에 우리들을 화요의 영주에 앉혀주겠다고 약속했지. 하지만 그건 ‘화요의 마지막 왕족’을 아내로 맞아들여야 한다는 조건부였어.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 같이 젊은 신분인 사람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게 부자연스러울 테고, 주변에서도 납득하지 않을 거 아냐? 그 혼란 속에서 너를 도망치게 하고, 목숨을 걸고 몸을 지킨 남자가 되면 가족을 잃고 상처받은 남련은 쉽게 나를 받아들이리라 생각했지. 그런데 설마 여봉의 왕태자가 등장해 널 데리고 갈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지.”
“그럴 수가…….”
남련은 핏기가 가신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것을 위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한 거야?!”
“그래. 참고로 더 말하자면, 폐하는 자해를 하신 게 아니지.”
남련의 비난을 이제는 태연하게 받아들이며, 료안은 노래하듯이 말했다.
“박 재상은 그 왕태자 한 사람이 모든 공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어. 우리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한 의미도 있었겠지만, 확실히 화요왕의 목숨을 끊으라고 명령했지. 즉.”
“……그만.”
남련은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그것을 들어서는 팽팽하던 무언가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도망치는 폐하를 옥좌가 있는 곳까지 몰아넣은 뒤, 자해로 위장해…….”
“그만하라니까!”
“내가 네 아버지를 죽였어.”
아무리 귀를 막아도 그 말은 잔혹하게 남련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
남련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딘가 멀리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었는데, 짐승이 포효하듯이 통곡을 하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였다.
“시끄러워, 닥쳐!”
찰싹, 하고 료안이 있는 힘껏 뺨을 내리쳤고, 남련은 입이 찢어져 입 안에 피가 퍼져 나갔다.
그 사이에 료안은 품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남련에게 재갈을 물렸다. 뒤이어서 풀어낸 허리띠를 두 개로 찢어 손목과 발목을 속박했다.
공물처럼 뒹굴게 된 남련은, 훤희 드러난 가슴을 바라보는 료안의 눈빛에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비열한 남자에게 범해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난 너를 안을 생각이 없으니까.”
료안은 질렸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이미 다른 남자의 애를 배고 있는 여자에게 아무리 씨를 뿌려봐야 무의미하잖아? 화요의 왕통을 잇는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야 비로소, 내 지위는 반석에 올라. 그러니 그 배 안에 있는 것을 먼저 어떻게든 손써야지.”
마치 번거로운 병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듯한 매우 가벼운 말투였다.
“힘껏 때리면 유산이 되려나? 하지만 그 뒤에 내 애를 낳지 못하게 되면 그건 또 곤란한데. 역시 약이나 어의려나? 제대로 된 사람을 구할 수 있으려나.”
“으응……!”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방을 나가려는 료안에게 남련은 거절하는 신음 소리를 뱉어냈다.
“남련, 얌전히 있어. 금방 돌아와서 내 아이를 밸 수 있는 몸으로 되돌려놓을 테니까.”
문이 닫히고 밖에서 철저하게 열쇠를 잠갔다. 어떻게든 도움을 청할 수 없을까 하고 열심히 목에 힘을 주었지만 재갈이 목소리를 흡수했다.
‘어쩌지……, 어떻게 하면…….’
남련의 등에 땀이 배었다. 이대로 가면 귀하게 얻게 된 영상의 아이를 정말로 잃게 된다. 그것만은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했다. 남련은 필사적으로 생각을 하다가, 문득 방구석에 있는 무언가에 눈길이 멈췄다.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다. 남련은 손발이 묶인 채로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면서 목표를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싸구려 기름 냄새가 코를 강하게 찔렀을 때, 역시 공포가 느껴졌지만,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부디 잘되기를……!’
그렇게 기도하면서 자유롭지 못한 발끝으로 등을 힘껏 쓰러뜨렸다. 곧바로 기름이 흘러 넘치면서 퍼졌고, 그 위를 핥듯이 광포한 붉은 불꽃이 춤을 추었다.
남련은 서둘러 바닥을 굴러 불길에서 될 수 있는 한 먼 곳으로 이동해 몸을 둥글게 말았다. 다른 숙박객이라도, 숙소의 주인이라도, 밖의 통행인이라도 좋았다. 여기서 화재가 났고, 안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준다면. 료안이 돌아오기 전에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전에 남련이 타 죽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아니, 그보다도.
‘숨을…… 못 쉬겠어……. 눈이 아파…….’
방 안의 연기를 들이마시고 남련은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눈의 점막에 통증을 가져오는 연기에,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그러는 사이에도 불길은 더욱 기세 좋게 타올라 발밑에까지 번져왔다. 피부를 태우는 따끔따끔한 통증에 남련은 도박에 실패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기를 태우는 가마 속에 갇힌 것처럼 의식이 점차 몽롱해졌다. 처음으로 불이 붙었을 때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미안해, 영상…….’
남련은 원통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포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마도 자신의 목숨은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자신이 잉태한 아이에 대해서 알리지도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하다니.
‘미안해……. 미안해. 계속 같이 있겠다고 약속했는데…….’
마지막 딱 한 번, 그를 만나고 싶었다.
생리적인 눈물과는 또 다른 눈물이 눈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때…….
“거기에 있는 거야, 남련?!”
방 밖에서 무엇보다도 듣고 싶었던 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환청이라고 생각했는데,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의식이 현실로 다시 돌아왔다.
틀림없다. 와주었다. 그가 이곳에, 자신을 구하러 와주었다.
“으응……!”
힘껏 소리치고 싶은데 소리칠 수 없었다. 답답해서 몸부림을 쳤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신음 소리를 내자, 드디어 문이 부서지고 절박한 표정으로 영상이 뛰어 들어왔다. 반쯤 불꽃의 바다가 되어버린 방 안. 무참하게 묶여 있는 남련의 모습을 발견하고, 영상의 표정이 경악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남련, 괜찮아?!”
입에 물린 재갈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남련은 듬직한 남편의 가슴에 힘껏 안길 수 있었다.
“……영……상…….”
그의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안도감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어째서 영상이 이곳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와주었으니, 더 이상 무서울 게 아무것도 없다고 의심 없이 믿었다.
“태자님, 이 연기는?!”
“남련 님은 계셨습니까?!”
열린 문에서 여봉군의 병사들이 일제히 쏟아져 들어왔다. 료안을 잡으려고 했는지, 모두가 검을 차는 등, 무장을 했다.
“남련은 무사하다! 너희들은 어서 불을 꺼라!”
남련을 옆으로 안은 영상이 힘껏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 듬직하다는 생각에, 이런 때이지만 새삼 반할 것만 같았다.
‘살았어. 나도……, 이 아이도.’
따끔거리며 아픈 눈꺼풀을 감으니, 긴장의 끈이 풀려 남련의 의식은 파도가 빠져나가듯이 점점 흐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