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화 (1/175)

#1화

혹자는 말한다.

[20세기 후반 지구를 절반으로 나눴던 소련과 미국의 냉전은 사실 천마신교와 나머지 세계의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다소 비약이 있는 발언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는 발언이기도 하다.

핵전쟁의 공포만큼이나 한때 세계인들을 떨게 만들었던 자들이, 바로 무시무시한 소비에트의 마교도들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메카시즘의 광풍이 불어닥쳤던 것도, 실은 자국 내에 잠입했을지 모를 마교도들을 두려워함이 원인 아니었나?

공산주의와 마교. 이들은 과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진영에 대한 실존적 위협이었다.

이러한 마교의 강렬한 존재감이란 비단 바다 건너 멀리를 볼 것도 없이 우리 대한민국의 현대사만 돌아봐도 알 수 있다.

북악산 세검정 고개 침투 사건 당시 끝까지 홀로 살아남아 북으로 돌아간, 마교지파 무극검문이 있었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참사를 일으킨, 마교지파 거력패부가 있었다.

분단 직후부터 지금껏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마교지파 환희낙락궁의 미녀 간첩 남파 사건들이 있다.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마교도가 대남 도발을 위해 휴전선을 넘었다. 대한민국의 안보는 그들과 싸웠던 역사와 다름없는 바.

심지어 소비에트가 무너졌음에도 평양으로 거처를 옮긴 위 일부 마교도들로 인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마교라는 조직이 비단 자유 진영에만 공포를 주던 것도 아니다.

스탈린 사후 일어났던 중소 분쟁부터가 실은 마교와 중국 본토 사파 연합과의 갈등이 시작은 아니었는지, 프라하의 봄을 핏빛으로 짓밟은 자들이 바로 저 잔인무도한 마교도들이 아니었는지.

그만큼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결합한 강자존주의자들은 적에게도, 배신자에게도, 경쟁자에게도 모두 두려운 자들이었다.

정마대전에서 패해 바이칼호에서 은거하던, 힘을 기르며 때를 기다리던 마교가 레닌의 전격적인 설득으로 볼셰비키에 합류한 날은 그렇기에 역사적이다.

그날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세계 현대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랬던 것이 현재에 이르러 북한을 제외하면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는 게 역사의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

소비에트는 천마의 의문스러운 죽음 이후 3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고, 그 후로 이십 년의 세월이 흘러 현재에 이르렀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은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야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자, 최후의 마교지파와 직접적으로 맞대고 있는 상황임을 다시금 자각해야 한다.

고로 우리 정부는 급변하는 동아시아, 세계 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의 위대한 자산인 무공 능력을 활성하기 위해 국정원 심처에 숨은 의문의 무림인 세력을 양지로 끌어내 전략 자산화 하는데 더는 머뭇거림 없는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며, 정부와 정치권은 서로 간의 다툼을 끝내고……

-2011년, OO신문의 ‘소련과 마교 붕괴 20주년’ 특별 기획 기사 중 일부 발췌.

* * *

특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항상 남들처럼 별다를 것 없이 살고자 했으나 늘 실패하여 믿기 힘든 인생을 되는 데로 사는 중인 대한민국 국적의 무림인 김철민은 그만 지쳐 버린 지 오래다.

일신에 지닌 절세 무공과 타고난 오성, 장난 같은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도달한 무의 경지, 천의무봉한 내공으로도 지쳐 버린 정신만은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다.

하여 하늘 아래 도무지 새로운 거라곤 없어 사람도, 풍경도, 사건도 지긋지긋한 김철민은 대한민국을 떠나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는데.

따지고 보면 이 짓도 그리 재밌어서 하는 짓은 아니다.

“아, 진짜. 인생 빌어먹게 더럽네, 이거.”

세상의 좋은 곳이란 좋은 곳은 전부 가 본 그였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물론이고 자본주의의 호화로움이 극에 달한 환락가까지. 김철민은 지구 곳곳 아니 가 본 곳이 없었다.

돈도 많았고, 무공마저 강했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조직은 크기에 비해 소수였지만 하나같이 충성스럽고, 유능하다.

재산은 이곳저곳 쓰고 있다. 금융 투자는 재산 규모에 비해 별로 하지 않는다. 나쁜 일도 더러 하긴 했지만, 좋은 일을 압도적으로 더 많이 하고 있는 편이라 할 수 있겠다.

친구가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국적, 인종에 상관없이 그에게는 세계 이곳저곳의 친구들이 많다.

본인이 원한다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원하기만 한다면.

김철민은 친구를 사귈 마음이 오랫동안 들지 않았다.

김철민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세상에 없는 건 아니지만, 분명 위협적인 자들도 여럿 있었지만 정작 곤란에 처한 적은 한두 번 되었을까?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 당당한 무림인인 그는 겁이 없다. 그런 나약한 감정은 본인의 가슴이 아닌 적의 가슴에 심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놀라는 법이 드물다. 너무도 온갖 일을 겪은 덕에 삶 속으로 은거한 그는 어지간한 일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세상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오직 중요한 건 자신의 마음가짐, 그 하나.

바로 그 마음이란 것이 단단하게 굳은 지 오래라 그토록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스스로를 가둔 세월이 벌써 얼마인지.

김철민의 인생은 그로 하여금 불의와 야합을 너무도 많이 목격하게 만들었다.

세상으로부터 멀어졌다. 누구도 그가 세상에 다시 나오는 걸 원치 않았다. 그를 아는 자들, 그를 싫어하는 자들, 심지어 당사자 본인부터.

그렇지만 삶이 언제나 그렇듯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면면히 흘러 천변하는 삶이야말로 인생의 본질이 아닐지.

“이봐요, 아저씨.”

“사, 사,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아저씨, 그게 아니고 잠깐 내 말 좀……”

“원하는 건 뭐든 드릴 테니, 제…….”

“아, 좀 닥치라고! 나 말 좀 하게.”

군중 속에선 고독을 느꼈고, 사람이 없는 곳에선 이대로 픽 쓰러져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김철민은 내면의 고통으로 몸부림치곤 했다.

이건 외로움과 다른, 이룰 수 없던 것에 대한 한(恨).

이루어지지 않은 정의와 이상은 간 곳을 모르건만, 그럼에도 아직 가슴에 남아 괴롭히고 있다.

그런 김철민을 지탱하는 것이 있다면 몇 안 되는 책임감과 의무감.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책임감이 있었고, 무림인 또는 강호인이라 불리는 내공 사용자로서의 의무감이 그에겐 있었다.

거의 모두 사라져 미약하게.

“아저씨, 제가 말이에요, 무림인이거든요. 막 하늘을 날고, 기를 뽑아내고 막 그런단 말이에요? 살면서 본 적 있죠, 무림인?”

무림인. 격동의 근현대사를 겪으며 많이 쇠퇴하고, 무너지고, 사라져 흩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기이한 힘을 다루는 자들.

20세기는 거대한 전쟁의 연속이었고, 거기에 휘말린 무림 세력 대다수는 각 문파의 비전을 보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시중에 풀린 건 잡다한 장난질이요, 진짜는 보기 힘든 것이 21세기 세계 무림계의 현실.

하나 김철민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다. 그는, 그의 조직은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 어느 곳보다 깊은 수준의 무공을 여럿 보유하고 수집했으며, 능숙하게 사용한다.

그 어떤 세력과도 감히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아저씨가 저를 알고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저, 진짜 잔인하고 무식한 놈이거든요. 뵈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아쉬울 것도 없어요. 부모님은 돌아가신지 오래고, 만나는 여자도 없고, 당연히 애도 없네요? 그러니까 내가 진짜 없는 것투성이인 놈이란 말이에요?”

이 소동의 시작은 간단하다.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오니 국정원에서 김철민을 찾아와 한 가지 부탁을 한다. 정보를 다루는 조직으로서는 감춰 마땅할 보안 유출이 있었다며, 조용히 처리할 수 있게 부디 이번 한 번만 도와 달라는 간절한 부탁이 그것.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김철민에게는 대한민국에 대한 책임감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약소하게나마 국정원의 협조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 아닌가?

물론 김철민 또한 많은 것을 대한민국 정부에 제공한 것이 맞기에, 사실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었기에 이 같잖은 부탁에 짜증이 올라오긴 했다.

듣자마자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이다.

‘나를 뭘로 보고 이따위 하찮은 일을 나한테 부탁하지?’

결코 유쾌하게 나선 길은 아니라 하겠다. 멍청하게 국정원 요원들의 신분이 노출된 것도 노출된 거지만 그걸 스스로 바로잡을 의지도, 능력도 없는 걸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흘러나오더라.

하긴, 이놈의 나라가 언제는 안 그랬나? 무능한 윗대가리들 같으니.

그래도 김철민은 움직여 줬다, 남은 의무가 있음을 애써 상기하며.

거기엔 최소한의 기대도 없었다. 부패와 무능, 뻔뻔함이 어우러진 게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설마 마교도를 만날 줄은 정말로 몰랐다.

“그래서 내가 누굴 죽이고 죽는 데 별 미련이 없어요. 알아요, 이 씨발 새끼야? 너 때문에 이제 몇이나 죽을 것 같애? 이 개똥 같은 꼴통 새끼. 제 작업하겠다고 덤벼드는 마교 놈도 못 알아보고 이따위 짓을 벌여? 네 친척이 누구라고? 그 새끼 목부터 따 버린다, 이 개자식아. 무슨 소린지 알겠어?”

전 세계를 돌아다녔음에도 제대로 된 마교도를 만나지 못했던 그였다. 마치 세상의 마교도들이 그의 그림자만 보면 도망이라도 가는 것처럼 코빼기도 구경하지 못 했었는데, 이 빌어먹을 종자를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만나다니.

한탄은 이런 순간을 위함이던가? 기가 막혀 어이 마저 없다.

감히 누구 앞이라고 마교도 따위가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살려 주…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어흐흑… 살려 주십시오!”

“됐어요. 그냥 뒈지세요, 짜증나니까.”

김철민은 생각한다, 이 정도면 정말 참을 만큼 참았고, 할 만큼 했다고.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 무슨 아름다운 꼴을 보겠다고 더 살아야 되는지도 모를 만큼, 그는 오욕의 세월을 보낸 참이 아닌가?

정말이지, 이젠 지쳐 버렸다.

그의 눈이 자신을 보자마자 자살해 버린 마교도를 본다.

‘저놈이 누구인지는 이 인간도 모르긴 했을 거야. 아무리 돈에 눈이 멀어도 상대가 마교도라는 걸 알고도 엮이기엔… 욕심만 많은 심약한 인간이군.’

국정원의 요원 목록을 입수해 외국에 팔아 넘기려던 거래의 현장이었다. 부정한 이익이 오고 갈 예정으로 끈적한 욕망이 샘솟던 그곳에선 이제 피비린내만이 흐른다.

사업가로 위장한 마교도 중 우두머리는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김철민을 알아보았고, 곧바로 죽음을 선택했다.

나머지는 그의 손에 다 죽었다.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로 무력하게, 토막 난 시체로.

계절이 변했음에도 여전히 추운 산속에 붉은 피 위로 하얀 김이 올라온다. 그럼에도 김철민의 몸에는 빨간 점 하나 찍혀 있지 않았으니, 보이는 건 오직 노여움.

‘국정원장은 이놈을 살려 와 달라고 했지만, 어림도 없지. 이딴 간첩 새끼를, 내가 왜?’

지긋지긋했다, 저렇게 동정을 구하고, 용서를 구하고, 반성을 하는 척하는 꼴을 보는 것도.

인간은 반성을 하지 않는다. 반성은 순간이며, 태도의 관성과 향상성은 유지되기 마련이다.

빌어먹을. 사람이 바뀌긴 하나? 이렇게 오래 살아도 난 도통 본 적이 없는데?

얄밉게도 다 늙은 정신은 그에게 답을 속삭인다, 그런 기적은 거의 없다고.

‘다시는 안 돌아온다, 이놈의 나라.’

김철민은 더는 이 더러운 나라의 더러운 짓거리, 저열한 꼬락서니에 이용되는 삶을 사는 것도 끝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참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고 눈 앞의 머저리, 꼴 보기 싫은 인간의 죽음은 결심의 종지부를 찍으리라.

…그리 됐을 터였다, 마침 어떤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와 같이 드높은 경지에 도달한 무림인, 대한민국 최고 보안 그 자체일 남자의 감각에 겨우 잡히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전과는 다른 그 소리가, 애처롭도록 요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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