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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2화 (2/175)

#2화

“…아저씨, 이러시면 진짜 곤란해요. 버티지 말고 빨리 주민등록번호도 불러 봐요.”

“진짜 애석하게도 이름 말고 다른 건 말 못 하는데요?”

조사관의 눈에는 짜증이, 입에는 한숨이 걸린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게 반복되는 질문이지만 눈앞의 무림인은 묵비권을, 아니 묵비권도 아니지. 얄미운 표정으로 깐족거림을 행사하고 있다.

가당치도 않을 일이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이봐요. 본인이 무공 좀 익혔다고 그렇게 뻗대시나 본데, 당신 진짜 그러다 큰일나요. 여기 검찰청이야, 대한민국 검찰청. 사람을 그렇게 조각내 죽여 놓고 그딴 식으로 나오면 어쩌자는 거예요? 어차피 지문 뜨면 다 나온다니까? 말 안 한다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네? 자꾸 그러시면 진짜 국정원으로 바로 넘기는 수밖에 없어요.”

이 말을 하는 조사관의 얼굴엔 귀찮음, 짜증, 피곤… 그러면서도 예민한 눈치와 걱정 같은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가득 했다.

가끔 이런 식으로 나오는 꼴통 무림인들이 얼마나 귀찮은 존재인지 경험으로 잘 알았던 것이고, 실제로 지금이 그런 상황이다.

단순 협박이 아니라 정말로 조사하면 다 나오는데, 대체 뭘 믿고 저렇게 까부는 건지 모를 일.

지문 뜨고 조회하면 감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데, 누가 민간 무림인 아니랄까 봐, 진짜.

‘제 실력에 자신 있다 이거지, 참나.’

검찰청 자체 인력뿐 아니라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국정원에 소속, 파견되어 검찰청에 머무르는 무림인만 해도 한둘이 아닌데, 혼자서 무슨 용 빼는 재주가 있다고?

지금이야 다른 일이 급해 옆구리에 낀 저 손을 피지 못하지만, 다른 강제적 수단을 사용하면 결국 버틸 도리가 없으리라.

그래도 머리가 있다면 설마 탈출한다는 선택지를 떠올리진 않을 거라고, 조사관은 생각하기도 한다.

탈출, 그런 건 지금보다 국가 공인 무인들의 수준이 떨어지던 예전에도 거의 성공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 성질 못 이기고 도주나 탈옥을 시도한 무림인 범죄자들이 팔다리를 하나씩 뜯긴 채 영원히 끝나지 않을 노역형에 처해지곤 한다는 게 9시 뉴스에 왕왕 나오곤 하지 않나?

“여기서 1차 수사하고 가는 게 낫지, 버티고 버티다 국정원에서 조사 시작하면 진짜 답 없어요. 그 사람들, 가혹하고 무자비해. 그러니까 빨리 하고 밥이나 먹읍시다. 이미 일어난 일을 뭐 어쩌려고 그럽니까? 힘만 빼고 나중에 괜히 공소장에 죄목 하나 추가하지 말고요.”

모두 공권력 행사에 대한 범죄자들의 저항 의지 분쇄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선택적 인권 타령자들은 대한민국의 이 확고한 공권력 확립 앞에 침묵을 선택한 지 오래.

그럼에도 오랜 공무원 생활 끝에 소명 의식보다는 퇴직 후 연금이 그리운 나이인 조사관의 마음이 떨리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본 게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

어쨌든 앞의 남자가 보기 드물게 고강한 무인이라는 사실 자체는 매우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해 놓은 걸 보면 보통 무림인은 아닌 것 같은데……. 이름만으로는 영 나오는 게 없네.’

그 잔인하면서도 고명한 솜씨엔 반박의 여지가 없다. 가타부타, 다른 어떤 말보다 몸이 정확히 8등분 난 채 곱게 쌓여 있던 시신의 언덕이 저자의 실력을 증명한다. 암, 그렇고 말고.

그 정도 대량 살인을 저질러 놓고 몸에 핏방울조차 찍히지 않은 눈앞의 남자가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까놓고 말해 국정원 파견 무인들이 여기 도착하는 게 빠를까? 아니면 조사관 건너편에 앉은 남자가 달려드는 게 먼저일까?

아무리 무림인 현행범들에게 채우게 되어 있는 내공 금제 수갑이 튼튼하다고 하지만, 세상에 만약은 있는 법이고, 그 효과도 완벽하지 않다.

거기에 사실 저 정도 되는 강호인이면 내공 없이도 이미 온몸이 흉기.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까운 건 검찰청에서조차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어쩌죠? 진짜 말을 할 수가 없는데?”

그리하여 자신감 넘치는 저 남자, 이름 석 자 김철민, 하나만을 뱉은 그는 거듭되는 조사관의 재촉에도 그저 생글생글이다.

“좀 기다려 보세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서요, 이게.”

겁먹은 기색은 하나 없고, 협조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아, 진짜 짜증나네. 지금 여기서 시간 끌 때가 아닌데.’

사실 앞의 무림인도 문제지만, 한쪽 작은 방에 검사와 들어가 조사 중인 또 다른 피의자가 더 문제긴 했다.

오늘 밤의 갑작스러운 출동은 김철민이라는 정체 모를 무림인 때문에 한 게 아니다. 애초에 그가 누군지도 여태 모르지 않나?

사람 여럿 죽였다는 것을 현장에서 자백하고 가만히 기다리며 반항조차 않는 걸 고이 잡아 왔을 뿐, 목표는 처음부터 그가 아니었다.

현세실업 구진성. 그에게 걸려 있는 여러 가지 혐의 때문에 그가 모시는 어린 검사는 한밤의 출동을 감행했다.

이것이 감행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경남의 향토 기업 사장인 구진성의 사촌 형이 거물급 정치인이기에 그렇다.

구진성의 사촌인 민주정의당 원내 대표 구학성은 지역구 4선의 당 중진이자, 당내 지역 계파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철마다 돌아오는 큰 선거 때면 잠룡이니, 어쩌니 하며 언론에 더욱 크게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존재감이 확실한 인물이기도 하고.

하여 본래대로라면 제대로 된 수사는 시작도 못할 인물이었지만, 조사관이 모시는 어린 검사는 맡은 바 직무에 대한 신념이 굉장히 대단했고, 굽히느니 부러지는 정의로운 성질머리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구진성에게 걸린 혐의 중 밀수와 국가보안법 위반의 정황을 확인하자마자 시간 따위는 상관 않고 직접 나서서 잡아 온 걸 보면, 이게 결코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조사관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자기도 모르게 누른다.

‘그냥 출동하지 말았어야 했어. 무슨 정의감을 또 부려 가지고… 야밤에 이게 뭔 난리냐, 진짜.’

모신지도 시간이 꽤 흐른 젊은 검사가 그렇다고 줄을 잘 탔거나 했으면 또 모를 일이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절대.

이 검사실의 주인, 윤아영은 자타 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꼴통 검사이기 때문이다.

외압에 굴복하는 일 없고, 오직 죄 지은 자들에 대한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현실성 떨어진 신념만으로 움직이는, 드라마 속 강직한 검사 같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무사안일을 생각하기엔 그간 해 온 일들이 워낙 많았다는 소리다. 특히 얼마 전, 비리 혐의로 부장검사 하나를 잡아넣으려던 건 치명적이기까지 했지.

그 결과, 조직 내에서조차 배척받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정치인과 실업가, 무림인마저 엮인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살인 사건에서 무사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어 보인다. 빽도, 집안도, 학벌도 뭣도 없는 고졸 출신 여검사가 처리하기엔, 이건 너무 거물들의 잔치야.

되레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저 꼬장꼬장한 어린 검사 나으리가 이번에야말로 자리를 내려놓게 되진 않을까 걱정마저 되는 조사관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저 안에서도 고성이 터져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야! 너 나 누군지 몰라? 현세실업 몰라? 내 사촌 형님 모르냐고?”

아니나 다를까, 구진성의 호통 소리가 사무실을 넘어 복도까지 쩌렁쩌렁 울린다.

시체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벌벌 떨던 그 사람이 맞기나 한 건지,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목소리가 아주 우렁차기 그지없다.

“나 말고 저 살인마 새끼나 조사하란 말이야! 열심히 사업해서 국가에 이바지하는 선량한 시민 붙잡아 협박하지 말고! 어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 게 검사랍시고 까불어? 내가 아는 검사들 줄줄이 한번 읊어 봐? 엉? 내가 같이 밥 먹고 모임 갖는 친구들, 여기서 말해 봐?”

만년 공무원의 촉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어서, 딱 그가 예상한 시점에 소란이 안에서 터져 나온다.

미리 알았다고 뭘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애초에 말린다고 말려질 검사님이었으면 이런 수사는 하지 않았으리라. 대관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피곤한 인물을 야밤에 출동해서 잡아 왔겠는가?

결국 조사관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안절부절못하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고, 그건 사무실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얇은 벽 너머 고성은 점점 커져만 갔다.

한편 사무실을 가득 채운 당혹 속에서 김철민은 순간 살짝 웃음을 잃는다.

우울한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범죄자 새끼가 검사를 안 무서워하네. 나라 꼴 잘 돌아간다.’

김철민은 한때 대한민국의 공무원이었고, 국가 무림인으로 활약했던 인물답게 천리지청술을 극성으로 익혔다.

내공의 힘으로 먼 곳의 소리를 예민하게 잡아 내는 이 기술은 북한이 땅굴을 파던 시절부터 무림인 공무원들의 기본 소양으로 여겨졌기에, 김철민은 이 작은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대화를 똑똑히 귀에 담을 수 있었다.

그로써 돌아가는 상황의 조각을 맞출 수 있었지.

죽여 버리려던 구진성의 범죄 자체는 그도 알고 있다. 애초에 국정원장이 직접 부탁한 일 아닌가?

그러니 여기서 신기해야 할 건 다른 게 아니다. 일개 검사가 구진성에 대한 조사를 개인적으로 해 왔고, 그것도 국정원과 비슷한 수준으로 했다는 걸 재밌게 여겨야 한다.

가만히 들어 보니, 이 긴급 체포는 영장을 받고 한 것도 아니더라. 상황이 급박하면서도 확실하니, 사후 영장을 받을 각오로 움직였다나, 참.

나이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던데, 과감한 조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끗발 있는 국회의원 사촌 동생을 상대로 세게 움직이는 모습이 그랬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름을 날리고 싶었나? 출세? 야망? 그런 것치고는 사무실 분위기가 영 조촐한데.

추측의 단서는 그제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어디 햇병아리 검사가 주제를 모르고……”

“구진성 씨, 내가 가만히 듣고 있으려고 했는데, 그만 말조심 좀 하시죠.”

진짜배기 대화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뭐라고?”

“제가 당신이 예뻐서 존댓말 하며 존중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아직 당신의 범죄가 판결에 의해 확정된 게 아니라서 존칭 좀 써 주고 있는 거긴 한데… 그것도 이제 못 해 먹겠네. 주제 파악을 못하는 건 잘난 사촌 형 믿고 까부는 그쪽 아닌가?”

“이, 이……!”

“잘 생각해 봐. 애초에 여당 중진 사촌 동생이 무서웠으면 이렇게 잡아 오기나 했을지를. 인생 편하고 쉽게 살다 보니까 머리가 너무 꽃밭인 거 아니야? 아니면 범죄자 새끼 주제에 너도 내가 좆밥 같아 보이니?”

“…이거 완전 미친 거 아니야?”

구진성은 여검사의 당돌하면서도 단호한 말에 어처구니없어 한다. 붉으락푸르락 변한 안색이 마치 성난 개구리 같기도 하다.

온몸의 감각을 열고 상황을 듣고 있는 김철민은 이제 슬슬 강한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미친 건 국정원 정보를 외국으로 유출하려던 너겠지. 그래 놓고도 큰소리치는 꼬락서니라……. 당신, 지금 몇 년 형 살아야 할지 영 계산 안 되지?”

“증,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그건 법정 가서 확인해 봐, 개같은 궁금증이 아주 싹 풀릴 테니까. 아, 댁의 잘난 사촌 형이랑 같이 오붓하게 손 잡고 들어오게 만들어 앉혀 놓을 테니까, 기대 많이 하시고.”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바로 이쯤에서 김철민은 알 수 있었다. 저 여검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삶에 있어 칼을 갈며 살아왔다는 걸.

극에 달한 감각, 막강한 내공의 힘으로 포착한다, 씹듯이 내뱉는 음절마다 배어 있는 어떤 결기를.

“무사하고 무탈하게 살고 싶으면 당신 같은 사람들 쳐다도 안 보고 살지, 검사는 왜 했겠어? 아, 진짜 못 해 먹겠네. 그러잖아도 내가 검사 노릇 더러워서 조만간 때려 치려고 했는데. 장담한다, 너 새끼는 내가 꼭 처넣고 옷 벗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알았어? 어디 정신머리 돌아가지고 국가 기밀을 유출한 범죄자 새끼가 검사한테 목소리를 높여, 목소리를 높이긴? 어? 내가 잡아넣은 너 같은 놈 누구누구 있는지, 여기서 한번 말해 봐?”

“푸하하하하.”

김철민은 바로 이쯤에서 크게 웃어 버렸다.

그만 참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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