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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3화 (3/175)

#3화

고함을 치는 구진성에 비하면 퍽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또박또박 말하는 윤아영 검사의 말에 김철민은 우렁차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이 웃음은 사무실 다른 이들이 그를 미친놈 보듯 하기 충분하도록 컸다.

‘이 새끼가 주화입마가 왔나…….’

‘이래서 무림인 놈들은 무공이 강할수록 상종을 말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예의상 차 준 수갑을 부여잡고 김철민은 끅끅대며 웃는다. 어깨가 들썩거려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내외공의 조화가 의념에 따라 어우러지는 경지임에도 터져 나오는 실소를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설마 이런 곳에서 정의의 검사를 만날 줄은, 그도 미처 몰랐다.

“야, 아직도 정의로운 검사님이 검찰청에 남아 있네. 멋있다, 영감님. 크크큭.”

“이봐요, 이봐. 거 목소리 좀…….”

“아니, 왜요? 멋있어서 멋있다고 하는데, 왜 사람 입을 막고 그럽니까? 눈물 나게 멋지구만, 진짜.”

조사관을 비롯한 검사실 사람들이 김철민의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건 가능한 일이 아니다.

긴 세월, 당당한 무림인으로 살아온 그는 하고 싶은 일은 하고,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어려운 일도 하고 싶으면 했고, 쉬운 일도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았다.

지금의 은거조차 그렇지 않나?

행동의 기준이란 오직 스스로의 마음가짐, 김철민의 삶은 그 하나로만 이루어진다. 설득이 불가능한, 참으로 무림인답게 자신만의 기준으로 움직이는 한 남자.

그런 그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렇잖습니까? 배울 만큼 배우신 분들이 재판장 바깥에서 아쉬운 소리 하고 다니는 걸, 세상 사람들이 모릅니까? 법정에서나 근엄하지, 밖에서 추한 꼴 보인 높은 분들이 어디 한둘이냐고요. 까놓고 말해 국회의원 사촌 형으로 둔 실업가 정도면 손바닥 비빌 만도 하잖아. 용돈도 받고, 골프도 같이 치고, 밥도 어울려 먹고. 역대 판검사님 중에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습니까? 근데 보세요, 저 노여워하는 일갈을. 야, 여기 검사님은 소명 의식 투철하시네. 검사복을 벗으면 벗지, 범죄자 새끼랑은 겸상은 못하겠다. 이런 의지가 말투 곳곳에서 팍팍 느껴진다 이겁니다.”

“아니, 제발… 제발 좀 닥치시라고…….”

“어허, 조사관님도 참, 모시는 검사님이 저리 훌륭하신 분이면 크게 외쳐 세상에 알릴 생각을 하셔야지. 안 그래요? 내 감히 추측해 보는데 여기 검사님, 사법 고시 붙으셨죠?”

김철민의 눈치 없는 주절거림에 조사관은 눈앞이 새하얘진다.

진작에 알고 있는 사실이긴 했다. 무림인이란 족속들 자체가 제멋대로이기 그지없는 무뢰배들이라는 건 검찰에서 일하면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시간이 갈수록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무공을 익힌 자들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

범죄자든, 아니면 이익 단체에 속해 활동하는 자들이든 몇몇 소수를 제외하곤 사회성을 밥 말아먹은 자들이 대다수라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그만큼 제 자신을 강호인이라 칭하는 인간들이 어느 정도 구제불능이나 다름없다는 건, 이 시대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힌 고정관념이나 다름없는 바.

요즘도 가끔 아침 방송 같은 데를 틀어 보면 이런 말을 하는 정신과 의사들이 나오곤 한다.

추상적이며, 도달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무공의 경지라는 목적에 집착을 하는 건, 그 자체로 병적이라고. 그렇기에 자신을 진짜 무림인이라 여기는 자들의 반사회적인 성향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며,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에 집착하며 좌절하다 보면 사람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는 법이라고. 그렇게 떠드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

이 치우친 주장들이 바로 지금, 분노 어린 볼멘소리를 나오게 한다.

“이봐요, 김철민 씨. 당신이야말로 지금 본인 처지를 모르는 것 아닙니까?”

“저요?”

“그렇잖아요. 댁이야말로 지금 이름 말고 다른 건 하나도 말 안 하고 수사에 협조를 안 하고 있잖습니까?”

“어떤 게요?”

“하, 이젠 모르는 척까지 하는 겁니까? 이보세요. 당신이 대체 왜 그 자리에 갔는지, 그 사람들을 왜 죽였는지, 하다못해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여태 한마디도 안 하고 있잖아.”

김철민은 조사관의 반박에도 여전히 빙글 웃는 얼굴이었다.

배알도 없는 건지,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모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라며 중얼거려 듣는 이들을 질리게 만든다.

“에이, 참. 조사관님도. 제가 말 못하는 게 다 조사관님과 이 방에 계신 여러분을 위해서라는 걸 왜 모르세요?”

“뭐요?”

그렇지만 이다음에 나오는 말은 전과 다르다.

한마디로 방 안의 소음을 모두 제거했으니까.

“내 진짜 신분을 알게 된, 허가되지 않은 사람은 다 죽어야 된단 말입니다.”

그의 말에 모두가 굳어 버린다.

김철민의 저 말을 들은 모두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농담도, 장난도 아닌 다만 온전한 진실이라는 걸.

“나랏일 열심히 하는 분들한테 엄한 피해가 올까 두려워 최선을 다해 입을 다물고 있다, 이 말입니다, 제가. 아주, 진짜,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는 김철민은 더 이상 웃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입은 물론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눈이, 무시무시하게 빛을 발하는 그 눈빛이 아까와는 사뭇 다르다.

무섭도록 번쩍이며 빛나는 눈동자가 좌중을 오시하며 바라본다.

분명 앉아 있음에도 왜 내려다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지, 조사관을 비롯한 검사실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두려울 따름이다. 그 안에 담긴 진실의 힘, 확고한 사실의 선언, 미증유의 위압감이 그들의 몸을 떨게 만든다.

저것이 무림인인가? 힘만 센 양아치 범죄자가 아닌, 진짜배기 무림인?

“…뭐라고?”

침묵은 또 다른 소음으로 깨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느새 문을 박차고 나온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윤아영, 직업은 검사.

이 방의 주인이다.

“이건 또 무슨… 지금 감히 검찰청에서 협박하는 건가?”

햇빛을 오래 보지 못한 푸석한 얼굴이었다.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었고, 어딘지 모르게 피로하면서도 방금 전까지의 설전으로 얼굴이 벌겋게 물든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왜소하거나, 작아 보인다는 말은 아니었다. 활활 타오르는 눈빛과 기세가 있었으니까.

그만큼 윤아영 검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김철민을 응시한다.

김철민은 그 얼굴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피륙의 이유가 아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또 왜 해야 하는지 아는 그 얼굴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고. 한편으론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 않느냐는 상념을, 그는 다시 입을 열기 전에 잠시 했다.

“그럴 리가요, 검사님.”

그런 생각을 하며 킬킬 웃었고, 던져진 물음과 의문을 단박에 부정한다.

“나랏일 열심히 하는, 사명감 넘치는 검사님을 감히 어떻게 협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도리가 아니죠. 제가 말씀드린 건 그저 담담하고도 솔직한 사실이랍니다.”

이와 같은 말에 여검사의 눈빛은 갈수록 매서워지지만, 김철민은 여전히 거리낌이 없다.

하나 뺄 것 없는 완전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전 오직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답니다. 오랜만에 검찰청에서 보는 제정신 박힌 검사님께 어떻게 야바위를 치겠습니까? 제가 그렇게까지 무도한 놈은 아닙니다.”

“당신 지금……?”

“전 정의로운 사람을 좋아해요, 내 부모님께서 정파의 무인이셨거든.”

김철민은 여유 있게 다리를 꼬아 앉으며 등받이에 기대 몸을 풀었다.

기다리던 자들이 오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귀가 밝은 그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제 어머니께선 늘 말씀하셨답니다. 올바르게 살아라. 그리고 옳은 길을 가는 자들에 대한 존중을 잊지 말아라. 이제는 어머니께서도 작고하신 지 오래지만 여전히 전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가의 안보를 외국에 팔려는 쓰레기와 그 친척 따위에게는 보일 일 없는 감정이지만요.”

발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방 안의 다른 사람들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간간이 고함 소리 비슷한 것과 함께.

그러는 와중에도 검사 윤아영과 김철민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피하지 않는다.

“검사님을 보니 어머니 말씀이 생각나네요. 제가 마땅히 보여야 할 존중이 무엇인지 실로 오랜만에 기억이 났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협조의 태도가 심히 불량한데?”

“그래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진실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요.”

여러 명이 뛰는 소리가 이제 검사실 문 앞까지 다가왔다.

그 소리를 들은 다른 이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대화는 멈추지 않았다.

“강호의 도리가 떨어진 시대 아닙니까? 무림이 무와 협을 잊고, 세상이 의무와 정의를 비웃는 시대에 이런 공무원이 있으니, 그저 기꺼울 따름입니다. 어찌 아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한 김철민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와 더불어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난다. 손목을 구속하고 있던 내공 금제 수갑이 산산조각 나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진다.

천천히 걸어 윤아영 검사의 앞으로 다가간다. 볼 수 있다, 김철민의 눈동자에 어린 일곱 색깔의 오묘한 빛을. 마치 비가 그친 후의 무지개처럼 유려하게 일렁이는 신비로운 빛을 그녀는 말없이 쳐다보았다.

입을 열 수는 없다. 영혼과 육신을 꿰뚫어 보는 시선도 시선이었지만, 어느새 문을 박차고 검사실을 가득 메운 낯선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그들이 누구인지는 금방 안다. 내민 신분증과 곧이어 들어온 한 고위 공직자의 얼굴을 보니 모를 수가 없더라.

국정원장이 그녀의 방을 직접 찾아왔다. 벗겨진 머리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왜 김철민, 저자가 자기 이름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다 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된다.

김철민이 어디에서 온 자인지 역시도.

이후 김철민이 자유를 되찾고, 검찰청을 빠져나가는 일련의 과정에서 윤아영 검사가 관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대로 된 설명조차 없었다.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녀 쪽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아무튼 재수 없는 부장검사와 차장검사 또한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번엔 또 뭔 짓을 한 거냐며 은근히 물어오는 모양새가 그랬지만, 그녀 쪽에서도 해 줄 말은 없다.

그만큼 이 일은 검찰청의 가장 높은 곳에서 이루어졌다. 어쩌면 그보다도 더 높은 곳에서.

결과적으로 김철민은 사라졌고, 구진성은 국정원으로 끌려갔다. 구진성의 사촌 형인 구학성 의원은 여당의 원내 대표 자리도 내놓고 일단 칩거하는 것으로 알려진 게 전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언론을 통해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었지만, 매우 이상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국정원 입장에서는 창피스러웠을 요원 목록 유출이라는 사건과 죽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한동안 일언반구 언급도 없더라.

사건은 그대로 묻히는 것처럼 보였다. 윤아영 검사의 지난 몇 달 간의 야근과 과로도, 단단한 각오도 다 쓴 휴지처럼 쓸모없게 되어 버린 채.

허무했다.

“검사님, 좋게 생각하세요, 좋게. 또 괜한 생각 하시지 마시고요.”

그녀와 함께 이 모든 과정을 목격하고 겪은 조사관이 상심한 그녀를 애써 달랜다.

어조는 심각하면서도 조심스럽다. 왜 아닐까? 국정원 소속의, 소문만 무성하지 실체는 확인된 적 없는 자를 보았는데.

본 것 같은데.

“잊으세요. 이런 건… 멀리해야 오래 살 수 있어요.”

쉽지 않았다.

처음엔 그래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잊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무지개가 실린 눈동자를 보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알 수 없는 흡입력을 가진 그 강렬함이란.

이상한 기분마저 들더라. 어쩌면 이번 일로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변해 버린 것 같다는 느낌과 함께, 그를 다시 볼 것만 같다는 기이한 느낌이 말이다.

이대로 끝은 아니지 않을까?

그렇게 예감은 내면에서 확신으로 무르익어 간다. 돌이킬 수 없는 확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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