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 노여움이 정의로운 누군가를 보고 온 탓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사명감과 소명 의식이 넘치는 공무원을 보고 와서 가슴이 싱숭생숭한 걸지도 모른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얼마 전의 그라면 그저 한심하게 보며 넘어갔을 일들이 지금은 왠지 허술히 넘어갈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건 노기가 목구멍을 치는 가운데 느끼는 놀라운 경험이기도 했다. 조국에 대한 실망, 시대에 대한 실망으로 까맣게 죽은 줄 알았던 마음이란 것이 실로 오랜만에 꿈틀대며 용트림하고 있으니.
마치 젊었던 예전처럼, 뜨거운 열망이 속에서 울컥 솟구치는 것도 같아 김철민은 신기했지만, 동시에 맹렬히 기지개를 펴는 의념을 차분히 다스려야만 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코앞의 한심한 인간을 마음만으로 죽여 버릴 것 같아서.
“원장님.”
손을 들어 올리며 말을 막는 김철민을 보며 국정원장은 입을 꾹 다문다. 그 눈에 담긴 간절함과 불안감을 연화존자는 능히 알아보지만 불쌍한 마음이라곤 전혀 들지 않는다.
내부 단속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무능함과 올바르게 책임지기는커녕 무가치한 사과 따위로 어떻게 넘어가 보려는 한심함에, 김철민은 전혀 공감하고 싶지 않다.
국민의 세금으로 밥벌이하는 고위 공직자가 어디 구걸하는 거지처럼 동정을 사려 든단 말인가? 책임 있는 자에 대한 어설픈 위로는 싸구려로 남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라고 있는 자리도 아닌데, 그딴 혈세 아까운 짓이라니, 그것도 정보 조직의 수장이라는 작자가.
하여 질문한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에 대해서.
“대한민국이 제게 일 년 동안 지불하는 로열티가 얼마입니까?”
긴 시간 동안 변동 없던 수치였기에 대답은 금방 나온다.
“…3,000억입니다.”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는 일개 개인이 점유하기엔 너무도 큰 금액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아니다.
이건 무림계의 통상적인 시세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싼 금액이었다.
정말로 싼 사용료였다. 김철민이 제공하는 것들의 가치를 따져 보면 대한민국 정부 측이 압도적인 이익을 보는, 한참이나 기울어진 관계.
무림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후려치기도 이런 후려치기가 없다며 혀를 찰 일이다. 저 강대한 연화존자를 대한민국 정부가 자국민이라는 이유 하나로 많이도 뜯어먹는다면서.
무학이 끊어진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완성되고 검증된 무공은 그렇게 싼값에 거래되지 않는다.
“제가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 양보를 하는지는, 그 금액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 아닙니까?”
“…맞습니다.”
옛 강호와 문파는 사라졌지만 유산은 남아 상속되었다.
하지만 물려받은 이가 적법하고도 자격 있는 상속자였던 운 좋은 케이스는 아무리 따져 보아도 전체에 비해 별로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 장물이었다, 원래 누구의 것이었는지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산산이 조각나 파편만 남은.
혁명과 폭동, 전쟁과 약탈. 성난 군중 중 일부가 빼돌린 도난품,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강탈한 보물. 영웅을 허용치 않는 민주주의의 명령은 끊어지면 끊어지지 결코 밖으로 도는 법이 없던 무림의 무공을 외부로 유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에 널리 알려진 무공들이란 훼손된 게 대부분이다. 요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구결이라는 글자에만 집착한 자들의 손을 돌아다녔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
무릇 무림인이란 타협을 모르는 외골수 족속들이라 총알이 온몸을 헤집어도 문파의 비전을 순순히 내놓는 일이 없는 법이었으니, 제 손을 떠나게 된 무공서에 말도 안 되는 해석을 달아 익히는 이의 주화입마를 유도한 악랄한 무공서마저 존재할 정도.
보는 눈이 없는 자는 절대 알아볼 수 없는 것이 심법이요, 신공절학 아니던가? 옳고 그름을 모르는, 진실 따위에 별 관심 없는 현대 사회였다.
그러니 무학의 수준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는 법이란 옛말은 옳다 하겠다. 일반 대중이 접하는 무공은, 무림인은 그저 힘이 세고 높이 뛰며 몸이 튼튼한 것이 전부여서, 제대로 된 스승과 주석은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 문자 그대로의 사치.
혹시 모르지. 이름 없는 산과 들에, 무너진 폐가의 어느 한구석에 위대하고도 이해하기 쉬운 온전한 무공이 숨겨져 있을지도.
아무튼 이러한 사정에 의하여 완전하고, 안전한 무공일수록 그 가치가 천문학적으로 뛰어오르는 게 현대 무림의 경향이다.
뛰어난 효능의 무공을 보유한 이들이 대체로 강대국의 정부, 천문학적인 재산을 지닌 재벌 기업 집단, 부유한 개인이란 건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였고.
당장 연화존자의 다음 말만 들어 봐도 알 수 있다.
“중동의 부자들이 제게 무공을 제공받는 대가로 인당 1억 달러를 지불합니다. 그런 자들이 중동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적으로 한두 명인 것도 아니죠. 내 얼굴, 내 손길 한번 받아 보려고 다들 그만한 가격을 기꺼이 낸다, 이 말입니다.”
“그 또한 알…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제가 국정원에서 일하고 있는 27명의 요원들에 대한 대가로 얼마를 더 받아야 했겠습니까? 재직 중에 만들어 건넨 현천공에 대한 계산을 제외하고도 말이에요.”
그래서 저작권과 특허권은 현대 무림 세력의 가장 큰 자산이자 수익 창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어렵지만은 않게 무공을 접할 수 있는 시대다. 비록 싸구려 길거리 무공, 어디서 발원했는지 모를 불완전하고 위험한 무공의 파편일지언정, 인구 십만 이상의 도시라면 예외 없이 작은 무관이 하나씩은 존재하는 세상.
하지만 오래된 형태, 구결이라는 수단을 통해 전수되곤 하는 진짜배기 내공심법은 일반인들에게 멀고 먼 거리감을 가지게 했고, 시중에 떠도는 심법 대다수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강력한 무공에 대한 갈망을 더욱 크고 뜨겁게 만들었다.
“제가 국정원에서 무림인을 기른지도 벌써 이십 년이 지났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것들을 상당 부분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여전히 북한과 싸우고 있고, 불우한 이웃이 많은 대한민국 현실에 일조하고자 희생을 했어요. 그런데, 그 모든 걸 감수한 대가가 이딴 등신 취급입니까?”
하여 제대로 된 문파라면 보유한 무공의 지적재산권을 출원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된다. 문파의 수익을 창출하고, 혹 있을지 모를 문파 간 분쟁 등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저작권과 특허권에 대한 작업은 필수적.
국가의 힘이 강력해진 시절의 단편이라면 단편이겠지만, 무공 유출 가능성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질색을 하던 예전이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긴 했다.
이것은 다른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타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만약 고수를 보유하고 있다면 이러한 불안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방법이 하나 있다.
“만약 제가 그동안 행사하지 않은 저의 권리를 찾겠다면 어쩌실 작정입니까? 금액은 둘째치고라도 국가에 협조적인 무림인 중에서 진기도인이 가능한 고수가 저와 운하신권 어르신 말고 있기는 합니까? 존재해요?”
“…….”
“표정만 봐도 알겠습니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준비가 없군요, 아무것도.”
상승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 타인의 내력을 이끄는 방법인 진기도인은 효과적인 수익 창출과 더불어 무공 유출 방지와 저작권 보호의 수단이 되었다.
재능이 없고 무리(武理)에 대한 이해가 떨어져도, 극단적으로 말해 구결 한 글자 보지 않고도 내력을 각인시킬 수 있는 방식이, 바로 진기도인이 아니던가?
느낌만으로 내공심법을 설명할 수 없는 일이고, 베끼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만약 그게 가능한 가공할 재능의 소유자라면, 이미 이런 건 문제가 되지 않을 테지.
그러니 진기도인은 저작권에 대한 최선의 보안이다.
가르치는 쪽뿐 아니라 배우는 쪽에서도 이 방법이 훨씬 나았다. 나중 일은 차치하더라도, 일단 내공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늘을 날고, 홀로 수백을 상대하는 게 아닌 건강과 미용의 목적으로 익히는 현대사회의 내공심법이라면, 그 정도면 충분하다.
물론 여기에도 단점이 없는 건 아닌데, 가장 큰 문제로 진기도인을 행할 만한 고수가 세상엔 그리 많지 않다는 게 크다.
애초에 무림이 생생히 살아 있던 옛 시절에조차 자주 행해지던 행위가 아니다. 문파의 미래를 짊어진 동량이나, 핏줄로 이어진 혈족이 아니고선 해 줄 생각조차 않았다.
타인의 육신에서 내기를 붙잡아 이끌고 가는 건 힘들다 못해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자칫하면 양쪽 모두의 주화입마를 부를 수 있는 방법이다. 실제로 예전보다 의학이 발달한 지금 시대에도 진기도인 중 폐인이 되는 고수들이 왕왕 나올 정도.
하지만 연화존자 김철민은 아니다.
한반도의 전통 무맥과 근현대사의 혼란을 피해 도망친 중원 명문 거파의 일맥을 이은 그는 진실로 상대 없는 막강한 고수다.
“나 없이 마교를 상대할 수 있습니까? 중국과 일본, 러시아를 상대할 자신이 있습니까?”
비단 무림이 몰락한 지금 시대가 아니라 기나긴 무림의 역사 전체를 통 틀어 손에 꼽히고도 남을, 비교를 불허하는 재능으로 새로운 신공을 만들어 낸 대종사의 반열에 오른 절대 고수.
“입이 있으면 다물고만 있지 말고 대답을 좀 해 보세요. 강대국들 사이에 낀 조국이 안타까워 국가 소속 무림인들을 진기도인해 주는 것도 모자라 몇 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아무 대가 없이 무공을 가르쳐 주는 이 호구 짓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그것에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과…….”
“군말 없이 해 달라는 데로 다 해 주니까 내가 모자란 놈으로 보이나 봅니다. 그럼 요즘도 미국 같은 나라에서 귀화할 생각 없냐고 연락 오는, 그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원장? 이런 모지리 취급을 받느니, 이참에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나는.”
국정원장은 턱을 괸 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말하는 김철민의 모습에 사시나무 떨 듯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에,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진실에 입을 열 수 없었다.
“이놈의 나라는 늘 그럽디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은 호구로 보고, 묵묵히 제 할 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바보 취급을 하고. 참으로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군대 간 젊은 친구들 취급하는 꼴만 봐도 아주 가관이 아니던데 말이에요.”
이제 국정원장은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김철민이 왜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하는지 억울해하는 지경에 이른다.
“공무원들은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되든 말든, 대충 뭉개다 퇴직하면 끝인 겁니까?”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이 빌어먹을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 뭐 합니까? 병신 취급도 이런 병신 취급이 없는데요. 하늘 아래 누구도 날 이리 취급하지 못하는데, 내 조국만 내게 이러는 겁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국정원장은 알고 있다.
김철민이 얼마나 무서운 자인지, 또 얼마나 두려운 자인지.
그는 국정원 내부의 쓰레기를 처리한 자였다. 국가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을 혼동한 자들은 김철민의 손에 모두 죽어 실종으로 처리됐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좀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했으리라.
그는 북한이 가장 증오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자였다. 북한 정찰총국 주도의 폭탄 테러에 대한 항의로 홀로 휴전선을 넘은 김철민은 평양 인근 세 개 부대를 하룻밤 사이에 지웠다.
백두혈통의 위엄은 그날 이후로 함부로 내보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는 연화존자라는 이름으로 무림에 군림하는 자였다.
옛것을 온전히 물려받아 새로이 만들었다. 권(拳), 장(掌), 지(指), 보(步), 검(劍)을 다루는 다섯 가지 방법인 오행무극도(五行無極道)와 자연의 기운을 다스리는 일곱 가지 방법인 칠색홍예수(七色虹霓手)로 이루어진 연화신공(緣化神功)을 창안한 놀라운 고수가 그였다.
무엇보다 무림사 전설로나 내려오던 반로환동의 경지에 이른 이가 바로 저 남자, 연화존자 김철민 아니었던가?
“그러니 나는 봐야겠습니다, 이 일의 주범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는 꼴을요.”
그러니 자격도, 능력도 충분한 그 선언에 고개만 끄덕이는 것이 국정원장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당장을 모면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