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강압적인 요구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김철민이 국정원에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한 것은 아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그는 애국심이라는 것과 함께 사리 분별이라는 게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것들을 낡디낡아 버려야 할 무언가로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김철민은 아니다.
아니었다. 그는 지상에 남은 정파의 마지막 후예라 자부하는 이였고, 이제와 던져 버리기에 대한민국 현대사에 얽혀 너무 많은 일을 해 온 사람이었다.
한강의 기적을 경험했고, 대대로 대한민국 정파의 기둥이나 다름없는 집안의 적자로 태어난 김철민에게는 실망으로 황폐화된 마음에도 차마 버리지 못한 책임감과 의무감이 있다.
되는 데로 막 사는, 그런 건 사파 놈들이나 하는 짓이지. 봐 봐. 그렇게 이익만 좇으며 사니까 공산당에 목줄 잡힌 개가 되어 구르라면 구르고, 짖으라면 짖는 것 아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막강한 힘을 지닌 사람임에도 스스로 지키는 기준이 있었던 것.
만약 연화존자 김철민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지닌 바 무위를 성격대로 뽐내는 사람이었다면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계 정치와 재계의 지형도는 지금과 사뭇 달랐으리라.
그런 그가 이 사태에 비추어 바라는 건 하나였다. 온전하고도, 사리에 맞는 대처. 원칙에 들어맞는 뒤처리.
쉽게 될 일은 아니었다.
“한 치의 예상을 못 벗어나네.”
국정원장은 장담했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건 허언, 그 자체.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었다.
김철민의 정체가 노출된, 그게 아니더라도 심각한 국보법 위반 사항에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기란 영 쉬워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가능했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으리라. 그렇기에 가해자의 사과는 언제나 변명처럼 느껴질 뿐이며,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한 줄기 기대를 버리지 못했던 것인데, 상황을 보니 헛된 기대로 허망할 따름이니……. 죄지은 자들에게 죄를 묻는 일은 아무래도 요원해 보인다.
먼저 현장에서 검거되었음에도 구진성이 제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과연 기득권층은 과(過)를 인정하는 일이 좀처럼 없더라. 세상 모든 죄인이 자신만은 억울하다 외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진성과 그의 사촌형은 결백을 주장하려 한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구진성의 변호인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며 의뢰인의 방어권 행사에 나선 걸 보면 말이다.
‘국정원 요원들의 목록을 유출하려던 것은 맞지만 상대가 마교도인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리송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논리다.
상대가 마교도가 아니었다면 죄가 아니라는 건가? 아니면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죄가 약해진다는 건가?
그러면 매달 받는 월급조차 국가 기밀로 취급되어 이혼 소송 같은 개인사와 관련된 재판에서조차 우위를 가져가는 국정원 요원들의 신상을 빼돌린 건, 범죄가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구진성의 변호사들은 명명백백한 범죄를 기술적으로 분리하여 흐릿하게 만든 뒤, 각각의 명제마다 다른 논리를 들이밀며 재판이라는 싸움에 임했고, 그것은 꽤 성공적으로 보인다. 국정원 내부에서도 쉽게 끝날 재판이 아니라고 추측하는 걸 보면.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비싼 수임료와 성공 보수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건 보람이 있나 보다.
김철민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무림인다운 담백한 취향인 그가 보기엔 불편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어쨌든 이러한 방어 논리를 바탕으로 재판은 시작되었다.
그에 맞춰 언론의 관심은 뜨겁게 불타올랐고.
정치권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실제로 이 재판의 끝은 구진성이 아닌 더 위에 있어, 치고 올라가야 하지 않나?
구진성의 사촌 형인 구학성과 그의 소속 정당은 이 재판을 정치 탄압으로 규정한다.
되레 공격적인 태도로.
‘국정원은 오래된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언동으로 국정을 기만하는 헌정 이래 최악의 정치 개입을 중단하고, 민주 질서를 어지럽힌 죄를 국민들에 사과하라!’
현세실업 사장인 구진성과 그의 사촌형이자, 4선 국회의원 구학성이 밀접한 이익공동체라는 사실은 기소 전 수사에서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본격적인 재판에 임하기 전 수사 과정에서 구진성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사촌 형을 보호하고자 했지만, 될 일이 아니었다. 뻔히 보이는 사실을 부정하는 거야 판사 앞에서의 이야기.
현장범이었고, 증거가 명백하지 않나? 죽은 러시아인 사업가가 마교도라는 증거가 거처에서 속속들이 수집된 상황이다.
개중 구진성이 국정원 내부의 부패한 직원들과 접촉할 수 있던 교두보가 구학성이라는 진술은 결정적이기까지.
이에 따라 사건의 참고인에서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된 국회의원 구학성이었지만 그는 검찰의 소환에도, 법원의 출석 요청에도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
국회는 소환에 응하지 않은 구학성의 체포 동의안을 부결했다.
“…구학성이 당 대표를 찾아가 독대했습니다. 절대 혼자 죽지는 않겠다고 하더군요.”
김철민의 부하들은 이에 대한 전후 사정을 파악했다.
“아무래도 국정원 요원과 인맥, 그 이상의 관계를 맺은 건 당 차원에서 벌어진 일인가 봅니다.”
“한두 명 비리가 아니라는 건가?”
“본질은 정당과 공무원의 후원 관계로 보입니다만, 문제의 소지는 다분하죠. 같이 밥만 먹어도 문제 삼을라면 얼마든지 삼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국정원 요직에 있는 사람이면 쓸모가 많을 테니, 정권을 잡았을 때 써먹으려고 따로 관리를 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사고 친 국정원 직원은 구학성과 구진성이 개인적으로 손을 뻗은 것 같고요. 이유는, 당연히 돈입니다.”
김철민은 구학성의 집 근처 골목에 세운 차 안에 앉아 있다. 창문 쪽에 몸을 기울인 채 기자들과 경찰, 시위대의 어울림을 바라보며 보고를 듣는다.
돈과 권력을 지닌 범죄자의 반발에 쩔쩔매는 국정원을 보며 답답해 직접 알아보는 중이다. 상황을 보고 들으면서는 귀를 씻고 싶은 마음에 내친 걸음을 후회 중이었고.
그에게 보고를 하는 사람은 뒷좌석에 함께 앉은 남자로, 얼굴은 분명 웃는 상임에도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구두 보고를 올리는 이 사람은 오랫동안 김철민을 지근거리에서 모신 개인 비서이자 호위로, 강호의 사람들은 흑응이라 부르며 두려워한다.
창공을 나는 검은 매라 불릴 만큼 눈이 좋고, 실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구학성은 다가올 총선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방대한 조직을 움직일 편하게 쓸 수 있는 돈을 가져오라고 사촌 동생에게 시켰더군요. 더 얘기가 이어지지 않아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일을 처음 하는 것만은 아닌 게 확실했습니다.”
“그래?”
“예. 나머지는 수연이가 파고 있으니, 금방 보고가 올라올 겁니다.”
김철민이 직접 사사한 천리지청술과 은잠술을 사용해 CCTV와 블랙박스, 경호 인력의 눈을 피한 흑응은 국회의 반발이 나오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아 왔다.
구학성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치 일각, 그 이상을 뒤흔들 거대한 스캔들이 이 아래에 숨어 있으니.
하지만 김철민은 생각한다. 이유를 알았음에도 마땅히 따라와야 하는 개운함은 어째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마음은 더 어둡기도 힘들게 갑갑하다.
“윤현아.”
“…예.”
흑응(黑䧹) 지윤현은 김철민의 착잡한 표정에 순간 마음이 쓰라려 온다.
이것은 그가 진심으로 연화존자를 모시는 사람이었기에 그렇다. 흑응이 지닌 바 능력이면 독립하여 일가를, 세력을 만들어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떠나지 않는 건 김철민에 대한 진실된 존경 때문.
그러니 연화존자에 대한 크나큰 존경의 반대급부로 대한민국을 증오에 가깝게 싫어하게 됐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조국은 이미 연화존자를 배신한 전적이 있다. 언제나, 늘 그래 왔다.
“네 생각은 어때? 국정원이 이걸 수습할 수 있을까?”
“못합니다.”
물음에 곧바로 나오는 대답이 단호한 이유다.
사감으로 마냥 하는 폄하는 아니다.
“지금이 민주화 시대 이전이라면 모를까, 국정원에서 국회의원과 정당에 죄를 물을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체포 동의안이 통과되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쉽지 않을 겁니다.”
흑응 또한 무림인이지만 연화존자 김철민의 곁에서 보고 들은 게 많았다. 시야가 넓고 깊이가 있지 않았다면 애초에 쟁쟁한 수하가 많은 김철민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 붙어 있지 못했을 터.
그만큼 흑응의 상황에 대한 분석은 합리적이다.
“재판에서 시간을 끄는 방법이야 여럿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시간을 끌고, 구학성을 보호하며 여론의 관심이 식기를 기다릴 겁니다. 나중이 되면 정치 탄압의 희생자임을 운운하겠죠. 어차피 그때쯤 되면 사람들은 제대로 기억도 못할 겁니다.”
“국정원장은?”
“국정원장이 국정원은 아니니 만큼, 아마 회주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책임을 묻는 식으로 꼬리 자르기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편이 조직을 살리는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요.”
김철민은 흑응의 명료한 보고가 옳다는 걸 안다. 수많은 불의한 사건이 그렇듯, 흐지부지되어 사라져 갈 거라는 가정은 틀리지 않다는 걸.
하여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자문이 먼저다. 요구한 것이 주제를 넘거나, 바르지 않았나?
아니다. 올바르게 처리해 달라는 자신의 요구는 상식적이다. 그가 말하지 않더라도 철저하고도 공정한 수사로 마무리되어야 할 일이다.
마교의 일 아닌가? 북한의 저들은 명백한 주적이 아닌가?
긴 세월, 북한은 마교의 힘을 등에 업고 대한민국에 대한 도발을 감행해 왔다. 북한이 파키스탄과의 밀월을 통해 만들어 낸 핵미사일과 함께 남북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잔존한 마교.
부정할 수 없이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6‧25전쟁 이후 꾸준히 이어진 대남 도발과 화전양면, 그 자신감의 원천이 누구인지는.
젊은 시절, 북한과 최전선에서 싸운 바 있는 김철민은 북한과 마교를 추종하는 자들이 대체 이 나라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러니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죄지은 구진성과 구학성의 반응은 상식적인가?
이 역시 전혀 아니다.
그들은 반성을 모른다. 재판에 임하는 태도와 여론을 호도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진실 따위 상관없다는 뻔뻔한 태도엔 이러한 종류의 일관성이 있다.
그래, 십분 양보하여 구진성, 저 더러운 사업가가 법적인 조력을 받을 권리를 적극 행사하는 건 그렇다 치자. 그건 민주 사회에서 보장되어야 하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지켜져야 하는 권리니까.
그렇지만 국회의원인 구학성은 그러면 안 됐다. 최소한 국민이 뽑아 준 대표라면, 특권을 방패 삼아 숨어서는 아니 되었다.
그건 너무 역겹다.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이 나라, 이 정부의 대응은 상식적인가?
김철민이 가장 실망한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공권력의 부재, 강약약강의 태도, 무너진 원칙의 증거.
이 광경이 연화존자로서 대한민국에 무공을 제공한 것에 회의감이 들게 했다.
이러라고 절세의 신공을 국가에 바친 게 아니었다. 고작 이런 꼴을 보려고 대한민국을 지킬 무림인을 키운 게 아니었다.
서울의 봄 이후 한국을 떠난 그가 IMF 사태 이후 그가 스스로 만들어 익힌 신공, 연화신공(緣化神功)의 오행무극도와 칠색홍예수의 일부를 국정원 요원들에게 익히게 한 건,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마교의 북한, 공산당의 중국, 여전한 강대국인 러시아와 일본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위기를 기회 삼아 창궐한 약탈적 금융까지.
깊은 배신감에 조국을 떠났던 김철민은 고국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을 목격했고, 조금이라도 이를 덜 수 있기를 바랐다.
언젠가 흉탄에 쓰러진 민족의 지도자가 말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했다. 침략하는 나라가 아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진 나라.
지금의 대한민국은 과연 그가 바랬던 그 모습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윤환아, 애들을 모아.”
적어도 이 모양, 이 꼬라지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