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7화 (7/175)

#7화

흑응은 대뜸 나온 김철민의 지시를 명료하게 알아듣지 못했다.

“…어느 쪽을 불러 모아야 하겠습니까?”

되물어 확인해야 될 만큼 김철민이 거느린 조직과 사업체는 세계 곳곳에 퍼져 있었다. 애들이라는 지칭으론 정확히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지구 위, 여러 곳에.

유럽을 비롯해 미주의 지역 커뮤니티, 러시아와 구소련 지역, 아프리카와 중동까지.

은거하다시피 하며 개인의 대외 활동은 멈췄지만, 그것이 연화존자의 이름과 보호 아래 이루어지는 일들이 없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김철민은 번 돈을 은행 계좌 따위에 쌓아 놓지 않고 버는 족족 썼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사업체와 비영리단체는 세계 부호들이 건강을 위해 연화존자에게 지불한 돈으로 세워졌다.

무공저작권과 특허권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재산은 전 세계에 화폐가 아닌 다른 형태의 자산으로 존재한다. 깊은 인연을 맺은 그의 사람들과 함께.

그러니 단순히 부르라는 한마디로는 어디의 어떤 이를 데려오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일.

그렇지만 지레짐작으로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전부 다.”

김철민은 모호한 지시 따위로 권위를 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각 지역과 사업체에서 필수 인력을 제외하고 남는 인원 전부를 한국으로 불러. 진행 중인 사업도 거진 접어야 될 거야. 진행이 이미 많이 되어서 돌이킬 수 없는 장기 프로젝트, 이것만은 접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업들이 있거든 따로 보고 올리도록 하고. 세금이랑 자산 정리 같은 것도 전문 인력을 고용해서 나중에 말 안 나오도록 깔끔하게 처리해.”

명확한 지시는 뒤따라 왔으니, 이것으로 그간 연화존자에게 생각이 많았음을 알게 한다.

“귀화 신청을 해야 되는 인력들을 최우선적으로 입국시켜. 일반 귀화 조건을 채우려면 서둘러야 할 테니까. 한국에 소유 중인 회사에는 미리 인원 받을 준비를 시켜 놔.”

“PMC 쪽은 어떻게 할까요?”

“신입 교육시킬 인원이랑 현지 세력과 관계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인력 빼고는 거기도 입국시켜. 따로 문제되는 애들은 없겠지?”

“전원 범죄 이력 관리 중입니다. 문제없습니다.”

“좋아. 참, 돌아오기 전에 사람 죽이는 백정 놈들 죽이고 돌아와.”

“사람 죽이는 백정 놈들이라 하심은……?”

흑웅의 물음에 연화존자가 날카롭게 웃는다.

“선진국 지도자분들께서 방치하는 쓰레기 독재자, 군벌들. 손 닿는 데로 처리하라고 그래. 그동안에야 여기저기 눈치 보느라 참고 있었지만, 어차피 철수할 거면 그럴 필요 없잖아? 그래도 가급적이면 흔적 남기지 말라 하고. 동유럽 쪽 애들은… 잠시 보류하자, 조만간 마교 놈들 흔적 찾게 싹 훑어야 될 것 같으니까. 러시아 쪽은 특별 관리 해 주는 게 맞겠지.”

줄줄이 지시 사항을 늘어놓는 연화존자의 머릿속에 확고한 계획이 잡혀 있음이 분명했다.

실의에 빠진 이후 하루하루 버티는 게 전부였던 마음가짐이 한밤의 난동과 정의로운 검사와 불의한 권력에 무력한 공권력을 보며 바뀌었던 걸까?

선뜻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썩어 빠진 권력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고, 실로 오랫동안 연화존자는 침묵해 왔기에.

그리하여 김철민의 흐르는 물처럼 쏟아지는 말을 듣는 와중에도 흑응은 설마 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

진정 마음을 바꾸신 건가? 회(會)의 모두가 진심으로 바라던, 세상을 떠도는 은거를 깨고 속세의 일에 나서는 바람이 이토록 갑자기 벌어지는 것인가?

워낙 오랫동안 개인의 삶을 추구했던 김철민이었기에 긴가민가하는 마음은 크다. 연화존자를 끌어안고 더 높은 무학의 경지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 잡았던 깊은 상처가 나은 것인지, 어쩐 것인지.

확신은 다음 말이 있고 나서야 온다.

“한국에서도 할 일이 많지만,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건 국정원 인력들에 대한 설득이야.”

“설득이라 하시면……?”

“다들 국정원 그만두고 내 밑으로 오라고 해. 선택 사항이 아니라 아주 강력한 권고라는 걸 주지시켜.”

국정원의 무림인 인력에까지 손을 뻗으라는 말에 흑응은 의심할 틈이 없어져 마음이 다급해졌고, 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지시 사항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생각은 접어 둔다. 지금은 충심으로 모시는 이의 지시를 정확하게 수행하는 게 중요하니까.

질문은 이를 위해 나온다.

“그들이 그렇게 할까요?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사실상 국정원 인력이 대한민국 정부가 편하게 다룰 수 있는 무림인 전력의 절대다수입니다. 선택에 부담을 느낄 게 분명합니다. 거기다 그들을 스카우트하려는 걸 알면 정부에서도 가만 있지 않을 텐데요.”

“이 친구들이 내 밑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질 때쯤이면 그런 사소한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개인적으로 부담되거나, 압박을 느끼는 게 있다면 내가 전부 막아 주겠다고 해. 급여니, 상여니 사소한 조건들 전부 맞춰 줄 테니 뒷일 같은 건 걱정하지 말고 다만 결정하라고. 국정원을 나올 것인가, 아니면 나오지 않을 것인가?”

여전히 시선을 창 밖으로 두고 있는 김철민이었지만, 풍경을 감상하는 듯한 여상스러운 태도와 달리 말투는 단호하기 그지없다.

이제 확신하게 된다, 연화존자의 머릿속에 청사진이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이 나라, 국가 무림인들에게 앞으로 소속 같은 건 상관없어질 거야. 그렇게 될 거야.”

잠시 말을 끊은 김철민이 눈살을 살짝 찌푸린다. 구학성의 집 앞이 소란한 탓이다.

무언가를 주장하는 듯한 시위대와 그들을 밀치는 무공을 익힌 경호원들, 신나게 셔터를 누르는 기자들이 어우러져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그들에게 내세울 조건 중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야. 연화신공의 다음 단계를 알려 주겠다고 해.”

이 말을 들었을 때, 흑응은 숨을 들이쉰 채 멈출 뻔했다.

“혹 재능의 부족함을 느껴 연화신공을 익히지 않겠다면 다른 걸 가르쳐 준다고 해. 뭐가 되었든 간에 지금 지니고 있는 무위, 이상으로 끌어올려 주겠다고. 처음부터 무공에 재능 있고, 열의 있는 사람들로 가려 뽑았었으니, 이 정도 조건이면 혹할 테지.”

김철민을 연화존자로 불리게 만든 무공, 연화신공은 놀라운 절세신공이었다.

오행무극도의 몸을 쓰는 다섯 가지 방법보다도 칠색홍예수라는 내공심법이 특히 그랬다. 아무래도 초식의 중요성이 과거보다 떨어진 현대이기에 그런 것이겠지만, 일곱 단계로 나뉘어 차근차근 익히게 되어 있는 칠색홍예수의 신묘한 공능이란 전 세계 부자들을 모조리 사로잡을 만치 대단했다.

고작 입문 단계인 적홍수(赤虹手)를 진기도인하는 데 일억 달러를 태울 정도로 말이다.

그 대단함을 흑응 또한 익혔기에 잘 알고 있다. 칠색홍예수가 지닌 바다 같고, 산 같은 드넓음과 드높음은 경험해 본 이라면 모두 알 수밖에 없다.

이 심법은 다른 어떤 무공과도, 내공심법과도 충돌하는 법이 없었다. 더불어 일정 부분에선 현대 의학보다 나을 정도의 건강 유지와 운기요상의 능력을 지니고 있어, 익힌 자들은 잔병치레 없이 무병장수했다.

무엇보다 무공으로서 지닌 기능적 막강함, 자기 보호와 제압의 성능은 연화존자의 존재로 증명된다.

지상 위, 하늘 아래 누구도 연화존자와 싸워 이길 수 없고, 없으며, 없을 것이다.

“하면 그 이후에는……”

그런 그가 비로소 다시 세상에 나옴을 마음먹음에, 지난 세월 우울한 주군을 보며 애석한 마음을 달래야 했던 충직한 수하는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어디까지 보고 계십니까?”

하여 참지 못하고 묻는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보기 싫은 것이 있는 데도 아무도 치울 생각이 없고 치우지를 못하니, 어쩌겠어? 참지 못하는 사람이 직접 나서서 치워야지. 내 집은 결국 스스로 지켜야 하는 법인가 봐.”

어느새 돌아본 김철민이 그런 흑응을 보며 미소 지었고, 그날 밤 연화존자가 죄인의 집을 방문한다.

김철민이 구학성의 집 담벼락을 넘진 않았다.

세상으로부터 몸을 숨긴 채 은밀히 움직이는 건 김철민이 잘하는 일이자 쉬운 길이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다고?’

김철민은 그를 아는 자들로부터 연화존자라 불리며 존중받는 남자였다. 동아시아 정파, 최후의 적자라 자부하는 이였으며 자신이 한 일에 한 번도 떳떳하지 못한 적이 없던 남자기이도 했다.

그런 그가 낯 두꺼운 죄인에게 죄를 물으러 가는 길이다. 어찌 쥐새끼처럼 담을 넘어야 한단 말인가?

쪽팔린 짓이다. 결심이 바로 섰음에야 더는 그러고 살 수 없지.

이러한 생각으로 그는 보무도 당당히 구학성의 집, 정문을 향해 걸어간다.

만나고자 하는 자가 안에 있다는 건 확인하고 오는 길이다, 아울러 누가 여기를 지키고 있는지 역시도.

벨을 누른다.

-딸깍

단지 그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럼에도 문이 열린다. 누구냐고 묻고, 누구라고 대답하는 과정은 없었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나며, 조용히 열려 한마디를 할 뿐.

“…들어오시죠.”

안에서 나온 정장 입은 경호원이 김철민을 안내한다. 돈 많은 국회의원의 거처답게 잘 꾸민 정원을 가로질러 침묵에 잠긴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들 사이에 대화는 없다.

정치인 구학성은 웬만한 가정집보다 큰 거실에 앉아 김철민을 맞이했다.

흉중에 지닌 욕망만큼이나 비대한 몸이었고 노련한 정치인답게 빛이 나는 눈빛이었지만, 최근 일어난 사태로 피곤함은 역력하다.

이해할 만하다. 그의 정치 경력 사상 최대의 위기가 바로 요즘이었고, 또 오늘 밤이었으니.

“국정원장이 보내서 왔다고?”

그럼에도 거물인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은근히 노려보는 가당찮은 모습에 김철민은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아니.”

“…뭐라고?”

“왜? 국정원장이 보냈으면 당신을 이 꼴로 만든 건에 대해 지랄 좀 하시려고?”

“이 무슨?”

앞뒤 뚝 자르고 내뱉는 김철민의 말에 주변으로 당황스러움이 퍼진다.

“뭐야? 이거 뭐 하는 놈이야? 이 팀장! 어떻게 된 거야?”

구학성의 일갈에 이 팀장이라 불린 자의 얼굴에도 당혹스러움이 어린다. 김철민의 전음을 듣고 안으로 들이자 주장한 게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부, 분명 전음으로는 국정원에서 왔다고…….”

앞선 대화는 남들에게 들리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문 앞에서 벨을 누른 김철민은 전음을 통해 집 안의 경호원들에게 국정원에서 왔다고 알렸다. 전음이라는, 현대 무림에서 보기 드문 고절한 솜씨는 이에 대한 증거로 여겨졌던 것.

구학성에게 고용된 경호업체는 대기업 계열의 회사로 꽤 괜찮은 수준의 무공과 무인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런 곳에 소속되어 거물급 정치인을 맡게 된 경호 팀장조차 전음이라는 수법은 무협지에서나 보았다.

전음을 쓰는 고수가 문 앞에서 국정원을 들먹이니,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란 소리다. 저 소설 같은 수법을 쓰는 고수라면 대기업 중의 대기업, 또는 국가기관에 속한 자일 수밖에 없지 않나?

마침 회사 측에서도 국정원 쪽에서 접촉을 해 올 거라 예상하던 차이기도 했고.

사실 이것이 그리 틀린 예측도 아니었다.

“국정원에서 나온 건 맞아. 굉장히 넓은 의미에서 말이야. 하지만 국정원장이 날 보낸 건 아니야. 아마 내가 여기 온 걸 알면 경기를 일으키며 뒤로 쓰러질걸?”

김철민이 히죽 웃으며 하는 말에 구학성의 얼굴에 노기가 어린다.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게 물든다.

“이 팀장, 자네 이거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죄송합니다.”

“사람 참…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이딴 실수를 하나?”

“면목이 없습니다.”

구학성은 이 팀장에게 화를 냈다. 근래의 곤란으로 가뜩이나 예민한 상태였는데, 어이없는 실수를 접하자 이성을 잃기 직전까지 간다.

주변에 부하 직원이 여럿이었음에도 이 팀장은 허리를 굽혀 가며 연신 사죄한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말과 함께.

김철민은 그 광경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그에게는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무공을 익힌 자가 부패한 정치인에게 허리를 굽히는 모습이란.

그래도 오래 볼 광경은 아니었다.

“다했어? 이제 나도 말 좀 해도 될까?”

연화존자는 오늘 할 말이 있어 여기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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