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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8화 (8/175)

#8화

썩어 빠진 국회의원과 대기업의 피고용인 처지인 노동자 무림인, 이 두 사람은 김철민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긴 했다.

“저놈이나 내 집에서 치우게. 쯧.”

“…죄송합니다.”

분기를 감추지 못하는 구학성에게 다시금 사과한 이 팀장이 김철민에게 다가온다.

정중하면서도 조심스러운,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미약한 분노를 참아 가며 요청한다.

“그만 나가 주시죠.”

이 팀장은 눈앞의 남자가 엄청난 고수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겁을 내진 않았다. 억울하고, 화가 난 감정을 모두 숨기진 못한 얼굴이긴 해도 비교적 담담한 태도인 건 그래서 가능한 일.

상대방의 무위에 겁먹지 않고, 틀어졌음에도 정중한 것이 마치 무림인이라기 보다는 연륜 있는 직장인의 태도에 가깝다 하겠다.

전음이라는 기예로 엿볼 수 있는 김철민의 무위를 생각하면, 침착함은 현명한 태도였다. 그것은 쓸모없는 분쟁을 피하기 위한, 소모적인 싸움보다는 대화로 일을 해결하기 위한 첫 단추였으니까.

무림인의 싸움도 싸움이라 붙어 보기 전엔 모르는 법이다. 김철민은 혼자인 반면 좁은 실내에 가스총 등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이 여럿.

하지만 어쨌든 피를 볼 이유는 없지 않나?

적어도 이 팀장이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고, 상대가 자신의 제안을 따를 거라 믿고 있기까지 하다.

이게 단순히 머릿수와 기업의 이름값만을 믿는 건 아니다.

“국정원에서도 국회의원을 핍박한다는 말 나와서 좋을 게 있습니까? 이번 일은 저희 측 실수이기도 하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들어가시고 다음에 정식으로 방문하시죠.”

무릇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지만 그것도 상대를 가리는 것이 세상의 이치.

예전의 강호가 아닌 것이다. 화가 난다고 금나수를 펼쳐 무기를 빼앗고 너 같은 놈은 죽어야 된다며 칼질을 하는, 그런 현대사회가 아니다.

아무리 대단한 무공을 익혔다 한들 함부로 굴었다간 그대로 끌려가 재판장의 망치질에 영어의 몸이 되기 십상이다. 정치와 기술, 사회 발전의 수혜를 오롯이 입은 공권력의 강력함은 무림인들에게 더 이상 관무불가침의 호사를 누릴 수 없게 만들었다.

하여 아무리 정체 모를 엄청난 고수라지만, 국정원 소속이라지만 현역 국회의원을 상대로 무공을 행사할 수 없는 거라고, 이 팀장은 생각했다.

어디 감히 국민의 대표에게, 어허.

“나가십시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그가 예상한 모든 것들이 연화존자 김철민에겐 해당 사항이 아니다.

“그러니까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나 저기, 저 양반한테 긴히 할 말이 있다니까 그러네?”

싱글싱글 웃으며 손가락질하는 김철민은 아직 방문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사람이 어려운 걸음을 했는데 말이라도 들어 봐야 되는 거 아니야? 여기 계신 너희 고용주, 방탄 국회 최대 수혜자분께 내가 권유드릴 게 있어. 매우 중요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제안 말이야.”

“이봐, 당신. 여기가 어디라고… 크헉!”

그러니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뻗고야 만 이 팀장이란 자의 손목을 잡아채 꺾어 버린 건, 연화존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겐 전혀 뜻밖의 일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경호원이 아니라 국회의원님하고 할 말이 있대도. 자꾸 나서지 마, 할 말을 못 하잖아.”

“크윽… 제압해!”

그래도 유수의 대기업 소속 경호 팀답기는 했다. 팀장이 잡혀 있음에도 망설임 없이 제압에 나서는 걸 보면 말이다.

상대가 나빴지만.

“크악!”

“으억!”

이들 경호 팀이 소속된 대기업, 유성 그룹은 국공 내전을 피해 한국으로 피신한 비형 태극문의 일파에게서 무공을 샀다.

표현이야 샀다고 했지만 실은 이 두 집단, 한 몸이나 다름없다. 유성 그룹 선대 회장의 막내딸이 비형 태극문의 당대 장문인과 결혼했으니, 유성 그룹에 투신한 다른 여러 문파에 비해 비형 태극문이 가장 앞서 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

이런 전적인 신뢰 관계의 형성 덕에 유성 그룹은 경공술에 일가견 있는 비형 태극문의 진수 일부를 전수받을 수 있었다.

지금 경호 팀이 보이는 몸동작, 마치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날쌘 몸놀림과 같은 것을.

아무리 구학성의 집이 넓다 하나 십여 명의 장정으로 꽉 차 있어 운신의 폭이 제한되어 있음에도, 그런 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듯 부드러운 몸짓으로 김철민을 사방에서 압박한 모습에 명가의 기품이란 걸 느낄 수 있게 했다.

연화존자조차 이를 인정할 정도였다.

“비형 태극문이 사람을 제대로 가르칠 줄 아네. 괜찮은데?”

하지만 그리 큰 소용은 없다. 김철민의 좌우 앞뒤에서 들어가던 자들 모두가 달려든 것보다 배는 빠르게 날아가 뒷열의 동료들과 부딪쳤으니까.

방법은 단순하다. 다가오는 자들을 잡아, 순서대로 던져 버린 것이 그가 한 전부.

그저 속도가 빨랐다. 단련된 무림인의 눈으로도 따를 수 없는 엄청난 속도.

김철민은 오직 한 손만으로 이와 같은 신위를 보인다.

자리한 누구도 이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아볼 눈이 없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달려든 사람들을 일일이 쳐 내는 모습을 눈에 담을 이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서로 부딪친 자들은 순식간에 기절하고, 정신이 남아 있는 건 이미 제압된 이 팀장과 뜻밖의 사태에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국회의원 구학성.

여전히 이 팀장의 손목을 잡은 채 우뚝 서 있는 김철민의 모습에 구학성은 뒷목이 비쭉 서는 느낌마저 받는다.

김철민은 그 와중에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봐, 당신! 유성 그룹을 이렇게 무시하고도… 끄르륵.”

다음 순간엔 구학성 하나만 남는다. 몸을 벌떡 일으키려던 이 팀장의 수혈이 잡힌다.

“이제야 좀 발전적인 대화를 할 여건이 마련됐네. 안 그래요, 부패 의원 아저씨?”

“너, 너, 너…….”

방금 전까지의 기세등등한 태도는 어디로 간 것일까? 구학성은 자리에 주저앉아 덜덜 떨었고, 확장된 동공에 보이는 건 공포와 두려움밖에 없다.

그 나약한 모습을 보며 김철민은 한심한 기분이 든다. 고작 이런 자들이 이 거대한 나라, 커다란 사회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실망스럽다.

기개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저 몰골이라니.

“긴장 풀어요, 정치꾼 아저씨. 죽일 거였으면 진작 죽였지.”

그래서 김철민은 남는 의자를 구학성 앞으로 끌고 온 뒤 달래야 했다.

조금은 풀어 줘야 할 필요를 느꼈다. 저따위 허약한 담력을 가져 이대로는 말도 제대로 못 붙일 상황 아닌가?

연화존자는 대화를 위해 이 자리에 왔다.

“다, 당신… 누구요?”

“내가 누구인지는 지금 시점에선 알 필요가 없어요, 구학성 씨. 중요한 건, 이렇게까지 해서 여기 앉은 내가 무슨 권유를 댁한테 할 거냐는 거지.”

여기까지 말하곤 웃는 김철민을 보며 구학성은 침을 꿀꺽 삼켰다.

“본론부터 말할게요. 난 당신이 재판에 성실히 임해 줬으면 해서 왔어요.”

이 말은 구학성의 정신을 현실로 붙들어 왔다.

“더는 피하지 말고, 국회의 방패에 숨지 말고, 법원으로 직행하라. 이 말입니다.”

“…너 어디서 보낸 놈이야? 야당인가? 그런 건가?”

그 결과가 김철민의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구학성은 이 일련의 행위가 자신을 해하고자 하는 정치적 공작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 같다. 평생을 정치판에서 뒹굴던 사람다운 진부하고도 편견에 가득 찬 예상이었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이 들며 자신도 모를 힘이 돌연 솟아나는 것도 같다.

금새 기력을 찾아 윽박지르는 모습이 그렇다.

“너, 이거 감당할 수 있어? 현직 국회의원 집에 함부로 침입해서 사람들을 때려눕히고 한다는 말이, 뭐? 재판에 임하라고? 이 새끼가, 내가 누군 줄… 알고.”

말꼬리는 금방 잦아든다. 다시 찾은 구학성의 기세등등함이 마음에 들지 않은 김철민, 그가 의자의 손잡이를 그대로 뽑아 맨손으로 쥐어짜는 광경이 만용을 앗아 간다.

두 손으로 생톱밥을 뽑아내는 광경은 구학성이 공손한 경청의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만든다.

“당신이 누군지야 잘 알지. 알고 왔지. 부패한 국회의원, 상종 못할 쓰레기, 세금 도둑. 아냐?”

모욕적인 언사에도 예의 바르게 다음 말을 기다릴 만큼의 인내심과 함께.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본전 건지겠다며 사촌 동생을 비롯한 다른 가족들을 동원해 온갖 비리를 저지른 범죄자. 사실은 그전부터 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던, 널 뽑아 준 지역구 주민들의 이익이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위해 국회의원 자리를 놓지 않는 이기적인 인간. 이 모든 걸 위해 정당의 주요 자리를 꿰찬 뒤 놓지 않고 뒤흔드는, 자기밖에 모르는 쓰레기. 그게 너지.”

여전히 김철민은 웃고 있지만, 이 웃음은 아까의 비웃음과 결이 조금 달라 매섭다.

꾹꾹 눌러 왔던 분노가 올올이 풀려 나온다.

이것이 비단 눈앞의 썩어 빠진 정치인 하나만을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김철민은 연화존자로 살며 봐야 했던 것들이 많았다.

“세상 참 좋아졌어. 만약 내가 아주 예전에 태어났더라면 너 같은 놈들 수도 없이 때려죽이며 마음 편히 살았을 텐데, 시대가 이렇다 보니 함부로 가진 힘을 쓸 수도 없네. 너, 이게 얼마나 갑갑한 일인 줄 알아?”

말투만 담담한 이것이, 그의 진심이다.

“진짜 말도 못하게 갑갑해. 세상에 나쁜 놈들을 때려 죽이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 참 좋을 텐데, 또 그렇지가 않아요. 세상의 선과 악은 구분이 모호하고, 심지어 변하기까지 하더라고. 안 그래? 저기 국회의 다른 썩어 빠진 정치인 중에도 한때는 분명 올곧았었던 사람이 있었단 말이지. 이제는 곁에만 가도 악취가 진동을 하는데 말이야.”

“그, 그것은…….”

“아, 너한테 하는 말은 아니야, 넌 아니지.”

김철민은 씩 웃었다.

“넌 애초부터 썩어 빠진 인간이었잖아?”

어깨를 툭툭 친 김철민은 말을 이었다.

“만약 네가 법원에 출두하지 않겠다면, 그것도 좋아. 자유민주주의 시대고, 개인의 자유가 있는 시대니까. 이래도 정 버티겠다면 말리진 않을게.”

그가 단순히 요구 사항만을 들고 온 건 아니다.

“대신 나도 내 자유를 행사하겠어. 그러니까 너라는 인간과 네 가족들이 해 온 모든 불법적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해 주겠다는 거야.”

김철민의 수하들은 유능했다.

연화존자의 무공을 이어받고, 함께 세상을 떠돌며 온갖 일을 겪은 그들에게 국회의원의 숨은 범죄를 캐는 건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화려하더만? 이미 잡혀 간 당신 사촌 동생은 빼더라도. 뒷돈을 받은 대가로 부정입찰을 하고, 개발 지역을 미리 알아내 땅을 미리 사 놓고, 경쟁 업체를 말려 죽이려고 공무원들을 동원하고. 하지 말라는 짓은 아주 다했더라고. 이 정도는 해야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건가 봐?”

조롱 가득한 말에 구학성은 반박하지 못한다.

모두 진실이었으니까.

입을 열 수 없기도 했다, 김철민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세가 평생 거짓만을 일삼은 그 입을 막았기에.

“전부 책임지게 해 줄게. 시간 끌 거면 끌어 보고, 비싼 변호사들을 고용할 거면 고용해 봐, 이런 데 쓸 시간과 돈이라면 나도 많거든.”

“…….”

“국회의원 임기 끝날 때까지 버텨도 좋아. 근데 당에서 당신을 구하려고 버텨 줄까 싶네, 나는. 이미 한번 막아 준 걸로 유통기한 다 된 의리 아닌가?”

그러니 구학성의 입에서 나온 건 변명이 아닌 질문이었다.

“…이런다고 누가 알아줘?”

그는 억울했다.

“세상에 나 같은 놈이 한둘이야? 나쁜 놈이 나 혼자냐고.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거야? 네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런다고 누가 알아줄 것 같아? 어차피 대중은 개돼지라고!”

발작하듯 외치는 구학성에게 김철민은 여전한 웃음을 보인다.

“그래,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세상 쓰레기가 어디 한둘이냐고 탓할 수도 있어.”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 감옥 갈 놈이 너 하나뿐은 아니란 건, 나도 잘 아니까.”

거기엔 오직 무지개가,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난폭한 무지개가 맺혀 있을 따름이다.

“그냥 먼저 맞았다고 생각해, 친구들 곧 보내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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