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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9화 (9/175)

#9화

한동안 대한민국 정계를 파국으로 뒤흔들었던 국회의원 구학성의 불출두 사건은 당사자의 자진 출석으로 마무리되었다.

언론은 이것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여론의 압박에 못 이긴 결정이라 분석했지만, 이어 공개된 재판의 과정과 결과에 구학성의 백기 투항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의심의 여지를 남겼다.

그는 자신에게 드리운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업무상 배임, 뇌물 수수, 폭행 교사 및 협박 등등.

알려진 혐의 중 굵직한 혐의만 해도 이 정도다. 하나 같이 보통의 교양을 가진 사람이라면 발도 들이지 않을 심각한 범죄들.

모두가 국회의원직 상실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닌 심각한 범죄들이건만, 구학성은 변명하는 법도 없이 순순히 자백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기이한 소감을 느끼게 한다.

그만큼 정치인이란 직업에서 보기 드문 솔직하고도 통렬한 반성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저 구학성은 국민 여러분이 제게 주신 직분을 망각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아 실망을 안겨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리더라도 겸허히 수용하고, 남은 평생 반성하며 살아가겠습니다.’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정치 역사상 이보다 더 모든 걸 내려놓은 사죄가 있었던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자가 이토록 허심탄회한 적이 있었나,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반성을 모르는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실로 보기 드문 광경이라 하겠다.

그 안에 얽힌 속사정은 알려진 게 없어 여러 소문을 분분하게 했지.

그럴 법도 한 것이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정원의 정치 개입이라며 길길이 날뛰던, 오만 난리를 치던 사람이 저토록 무력하게 항복을 선언하니 떠도는 말이 많을 수밖에.

김철민의 협박이 거짓이 아니며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없다는 걸 확인한 구학성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다 놓아 버렸다는 걸 아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하겠다.

“꼭 직접 나서야 했나?”

그 숨겨진 사정을 아는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는 김철민에게 이렇게 물어온다.

타박보다는 걱정에 가깝다. 그런 저열한 인간 때문에 위험을 감수했어야 했느냐 묻는 건.

“그만한 일에 얼굴을 보일 필요가 있었느냔 말이야. 나중에라도 혹 문제가 되지 않겠나?”

경기도 인근에 위치한 한옥으로 된 별장이다.

시선이 형형하고, 어깨가 떡 벌어진. 누가 보아도 쓸 만하다 못해 위험하기까지 한 무공을 익힌 게 분명한 내공 사용자 여러 명이 별장 인근을 엄정하게 둘러싸 순찰 중인 곳이다.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이들의 허리춤에 언뜻 한 자루의 소검과 권총이, 손에는 기관단총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사각 따위 존재하지 않도록 촘촘하게 둘러싼 CCTV의 무기질 질감 역시 별장 곳곳을 비추고 있다.

이와 같은 과도한 경호의 중심에 있는 건 두 사람. 정갈하게 놓인 다과와 김이 살짝 식은 차를 앞에 두고 앉은 하나는 연화존자 김철민이요, 맞은편엔 도포를 입은 노인.

개중 김철민은 그렇다 치고 늙은 쪽은 마치 흘러간 옛 무협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외양이다.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뒤에 빠져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좀… 애들 보기 쪽팔리지 않습니까? 겁쟁이 새끼도 아니고.”

“하하. 그런가?”

“제가 하기로 마음먹은 일이니, 책임을 져도 제가 져야죠. 부하들 뒤에 숨어 지시나 내리는 거, 꼴사납습니다. 무슨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김철민의 다부진 말에 노인은 그제야 걱정을 거두고 빙긋 웃는다.

실로 신선 같은 풍모의 노인이었다. 눈이 내린 것 같은 흰머리는 가지런히 비녀로 틀어 올리고, 길게 늘어뜨린 눈썹과 수염에선 올 하나 삐져 나오지 않았다. 더불어 옥빛의 도포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그럼에도 세월을 빗겨 간 주먹의 마디마디가 툭툭 튀어나와 강맹한 느낌을 주는 노인.

강호에서 운하신권이라 불리며 추앙받는 그는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초고수 중 하나다.

“자네 성격은 나이를 먹어도 변함이 없군그래.”

“쉽게 변할 놈이 아니란 걸 아시잖습니까? 이렇게 살다 죽겠지요.”

정부에 가장 협조적인 스탠스로 대한민국 치안과 국방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문파, 현천문(玄天門)의 문주이기도 한 운하신권은 김철민의 오랜 후원자, 그 이상의 존재다.

김철민의 아버지와 나이를 뛰어넘은 막역지우였던 그는 김철민의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는 성실한 보호자의 역할을 자처했다.

친우의 아들을 보호하고, 지지하고, 가르치고, 도왔으며, 협력했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만일 운하신권의 전적이고도 희생적인 노력이 아니었다면, 연화존자라는 꽃은 채 피어 보지도 못한 채 지고 말았을 게 분명할 터.

“하지만 오랜만에 예전 모습이구나.”

“그렇습니까?”

“그래. 거침없는 걸 보니 너도 나도 젊었던 예전이 생각날 정도야.”

“전 그래도 아직 겉모습은 젊은데요.”

“그래서 그놈의 경박한 말버릇은 여즉 고칠 생각이 없고?”

“반로환동이 어디 육신만 젊어지는 것이겠습니까? 대저 음양의 이치란 모든 것이 면면히 이어지는 것이니, 이쯤 되고 보니 정신과 육신의 부조화만큼 두려운 게 없습니다.”

“하면?”

“젊은 육체에 젊은 정신과 젊은 버릇이 깃드는 것이 자연한 일이다, 이 말이죠. 젊은 얼굴에 늙은 말투라니. 그거야말로 섭리를 거스르는 부조화 아니겠습니까?”

그런 운하신권이기에 지금 보이는 김철민의 저 당당하고도 발랄한 모습이 한때 잃어버렸던 옛 모습의 회복이란 걸 안다.

인간에게, 세상에게 배신당한 후 실의에 빠져 목적 없이 떠도는 게 전부였던 김철민에게, 돌아온 자신감과 패기가 기꺼운 건 그래서다.

“또 그렇지 않습니까? 앞에서 점잖은 말, 좋은 말 꼬박꼬박 내뱉는 인간들이 뒤에서 꼴깝 떨며 구린 짓해 대는걸요. 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짓고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묻게 된다.

이제는 연화존자라 불리며 자신보다 강할, 죽은 친우의 아들에게.

“그래. 무슨 생각인 게야?”

오늘 만남은 김철민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두 사람이 한국에 들어오면 거의 빠지지 않고 만나는 사이이긴 했지만, 긴히 할 말이 있다는 말에 운하신권은 현천문이 보유한 부동산 중 가장 보안이 철저한 이곳을 약속 장소로 잡았다.

기대감과 함께 말이다. 그도 얼마 전 국정원에서 소란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개하긴 했지만, 설마 하니 김철민이 직접 나서서 못난 국회의원을 응징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었다.

가족만큼이나 가까운 오랜 지인이기에, 그것만으로도 심경의 변화를 알 수 있었다.

“다시는 세상에 나서지 않겠다던 마음이 바뀐 게냐?”

“바뀌는 건 결국 구름도, 파도도 아닌 마음뿐이지 않겠습니까?”

운하신권의 말에 김철민은 살짝 미소 지은 뒤 말이 없다.

식어 버린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두 사람 다 생각이 많아진다.

오욕의 세월이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다 변하기 마련이니까요.”

앞서 말했듯 운하신권이 이끄는 현천문은 현재 대한민국 공권력의 거대한 한 축을 지지하고 있다.

김철민이 한국을 떠나며 현천공에 대한 권리 일체를 운하신권과 현천문에 넘겼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렇게 시작된 현천문은 국정원과 군대, 경찰 등에 소속 무인들을 파견하는 국가 공인 문파 중 가장 크고, 강성하며, 유명하다.

전부 저 예전, 덜 무르익었던 젊은 날의 김철민 혼자서는 현천공을 지킬 수 없었기에 일어난 일.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음이라. 김철민이 만들어 낸 현천공은 어려운 국가 상황을 반전시키는 데 지대한 공을 한 희대의 역작이었다. 기존에 무림인 공무원들이 쓰던 파편화되고 조악한 내공심법에 비해 익히기 쉬웠고, 안정적이었으며, 축기의 속도 또한 빨라 비교를 불허할 정도.

문제는 좋은 건 다들 알아 욕심을 낸다는 점. 이 심법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쓰길 원하는 자들이 세상에는 많았다.

돈과 권력, 여자로 어르고 달래며 현천공의 심법을 빼돌리려는 자들이 정말 말도 못하게 많았다는 소리다. 오죽하면 독보 강호하며 긴 세월, 명성이 자자한 고수로 이름 높았던 운하신권조차 이 훌륭한 심법을 탐내는 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을까?

“얼마 전에 일본 우익 세력에게 현천공을 유출시키려 시도하던 제자를 처리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 그랬지.”

가장 최근까지도 말이다. 현천문의 2대 제자 중 일부가 현천공의 구결과 주석을 가지고 오사카로 밀항을 시도하다 걸려 ‘처분’된 게 얼마 전 일이다.

그리고 운하신권은 이제 이런 일들을 담담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비단 그가 강한 사내이기에 가능한 것만은 아닐 터였다.

“지겹지 않으신지요?”

현천문의 주인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옅은, 하지만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는 게 끝.

그러나 김철민은 안다. 그의 부모 같고, 삼촌 같고, 친구 같은 눈앞의 남자 또한 변하지 않는 현실에 온몸으로 부딪치며 왔다는 걸.

당당한 무공과 굳건한 심지에도 목이 졸릴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지 오래라는 걸.

세상에 공동체의 선이란 건 무너져 있다.

“전 지겨웠었습니다. 독재자가 하야를 결정한 직후, 더는 쓸모가 없어졌다며 우리를 밀어내려는 자들을 보면서,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에 가치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마저 듭니다. 대체 우리는 그때 무얼 한 겁니까?”

“…그 당시엔 그게 최선이지 않았느냐? 사람 하나 바뀐다고 봄은 오는 게 아니란 걸 배웠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헛된 짓거리를 한 셈이군요. 독재는 가고 민주화가 왔건만, 이 땅에서 정의는 여전히 찾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허심탄회한 자리였다. 나이를 떠나, 세월을 떠나 한때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던 동지이기에 할 수 있는 대화.

찻잔을 매만지며 김철민은 속마음을 고백한다.

“바로 옆에 마교에 먹힌 북한이 있고, 또 사파를 굴복시킨 중국이 있습니다. 전범국이었던 이웃은 이제 정상 국가가 되겠다 연일 떠들어 대고, 저 추운 러시아에는 새로운 차르가 등극해 철권을 휘두릅니다. 그나마 믿을 만한 동맹은, 당연하게도 완전하게 믿을 수는 없겠지만서도, 어쨌든 가장 큰 우방 중 하나는 먼 바다 건너에 있고요.”

“…….”

“한데 대체 다들 왜 이리 태평한 겁니까? 왜 아무도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를 지켜야겠다 마음먹지 않는 겁니까? 내가 아니어도 남들이 할 것 같은 겁니까? 나라야 무너지든 말든, 나 하나만 잘살면 된다는 겁니까?”

김철민의 눈에 사나움이 어린다.

“그게 가능은 합니까?”

“…….”

“국가는 허약해지고, 사회가 붕괴합니다. 아, 그래요. 다들 확실히 잘살게 되었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썩어도 한참을 썩었습니다. 아이는 태어나지 않고, 희망의 범위는 바늘구멍보다 좁아져 보이질 않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헐뜯으며 손가락질하지만, 그 손가락은 결국 휘어 있어 스스로를 가리키게 됩니다. 그뿐입니까? 죄지은 자들은 하염없이 뻔뻔하여 뭐가 문제냐고 되레 큰소리라 듣고 있자면 이제 뭐가 옳고 그른 것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오랜 시간 조국으로부터 눈 돌렸던 연화존자는 이제야 눈이 트인 사람처럼 군다.

그가 꿈꾸던 나라가 도래하지 않았음에 묻어 두었던 실망과 분노로 열변을 토한다.

“높은 사람들은 국가의 자산을 내 것으로 삼으려 여념이 없고, 시민들은 힘이 없어 무관심하기까지 합니다.”

“…….”

“그래서 떠났었습니다. 가끔 들른 이 나라는 제가 떠나던 그때와 변한 게 없었고요.”

연화존자의 눈에 다시금 무지개가 피어오른다.

“하지만 이제 돌아오고자 합니다.”

“…돌아온다?”

“네. 얼마 전에 재밌는 사람을 봤거든요. 그걸 보고 가만히 누워 생각해 보니… 부끄러웠습니다. 무공을 익힌 놈이 고작 힘들다고, 더럽다고 포기해 버린 게요.”

운하신권은 은은한 미소로 연화존자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오랫동안 바라마지 않던 귀환의 순간을.

“더는 참을 수도 없고, 두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 나라를 바꾸겠습니다. 다시 한번, 저와 함께 해 주세요.”

말을 마친 연화존자가 손을 뗀 식어 버렸던 찻잔에선, 어느새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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