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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0화 (10/175)

#10화

그리하여 연화존자가 운하신권에게 새로운 출발을 함께하자 제안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운하신권과 현천문의 독립과 속박, 새로운 투쟁을 의미한다. 국가기관에게 용역을 받아 움직이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기관의 탄생에 참여하자는, 그런 의미.

대한민국 무림계의 새로운 프레임을 짜는 이 일에, 운하신권은 가능하겠냐 묻지 않았다.

그는 안다, 세상 모두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김철민이 가능하다 했다면, 그건 할 수 있는 일이란 걸.

따르고 싶은 이유 또한 명백하다. 긴 실망 위에 쌓인 또 다른 실망이 있지 않나?

국가 공인 문파 제도라는 것이 있다.

무림인을 필요로 하는 정부 사업과 서비스를 위한 제도다. 국가사업에 고용되는 무림인의 최소 자격을 정해 수준을 높이는 걸 목적으로 한다.

군대, 경찰, 소방관 등에 임용될 때 공인 문파의 무공을 익혀 인증을 받으면 가산점 혹은 특채 T/O를 받는 식으로 운영된다.

국가 공인 문파들 간의 차이는 급수로 둔다. 개중 현천문은 대한민국 유일의 1급 문파로 국정원 및 일부 특수부대에도 무공을 납품할 수 있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문파.

그런 현천문의 주인이 국정원의 무능을 모를 리 없는 것이다. 밖에서야 동아시아 최고의 무림 전력을 보유했다느니, 선진화되었다느니 하지만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는지, 운하신권은 잘 알고 있다.

다른 건 볼 것도 없다. 국정원을 통한 현천공의 유출 시도만 몇 번이란 말인가?

정부는 늘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지만 말뿐이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할 뿐인 사과를 운하신권은 많이 받았다.

김철민의 물음대로 지겨운 일이다, 진절머리 나도록 반복되는, 그런.

사명감과 애국심이 더는 자랑이 아닌 시대이니 이젠 받아들여야만 하는 걸까? 그건 너무 서글픈데.

화가 치미는데.

운하신권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현천문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북한의 마교뿐 아니라 강대국 사이에 낀 채 신음하는 국운에 한 손 보태는 멸사봉공을 개파의 변으로 삼았었다.

그런 와중이니 김철민의 제안은 반가운 소리였고, 이것이 운하신권과 현천문이 김철민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게 된 배경이다.

무림의 방식대로 명성을 쌓아, 이름을 알려 원하는 바를 쟁취할 것.

그리하여 의기투합한 이들의 첫 번째 목표는 그간 누구도 손대지 못한 거악의 처단이다.

연말, 강남의 한 호텔.

비싼 외제차들이 줄을 서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차에서 내린 자들은 하나같이 명품을 몸에 두른, 어딘지 모르게 불량한 기색이 역력한 자들.

호텔 주변과 로비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로 꽉 차 있다. 무리 지어 돌아다니며 주위를 살피니, 흡사 순찰이라도 하는 모양새로 몰려다니며 위협적인 분위기다.

건들거리며 호텔로 들어가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좋은 일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 외양이다, 목과 손목 등에 보이는 문신부터 아무데나 쏘아보는 사나운 눈빛까지.

이들은 전부 ‘서울상공인모임회’ 소속 회원이다. 이 단체는 오늘 이 호텔을 통째로 빌렸고, 이것이 오늘이 처음인 단발성 행사인 것도 아니다.

매년 같은 날, 호텔을 빌려 다가올 새해를 다 함께 맞이하는 행사를 개최해 왔다. 소속 회원들의 한 해 노고를 위로하고, 단합을 이루기 위한다는 핑계다.

이 평범한 이름의 단체가 실은 서울에 위치한 조직폭력배들의, 그것도 무공을 익힌 흑도들의 연합이란 걸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말이다.

서울상공인모임회 소속 단체들이 종종 뉴스를 탄다, 민간인 폭행, 집단 난투, 불법 도박장 및 불법 대부업 운영, 탈세 등 온갖 범죄 행위에 연루되어.

심지어 이권 때문에 산하 단체끼리의 패싸움마저 종종 터지는 바.

그럼에도 ‘서울상공인모임회’라는 이름 여덟 글자 자체만은 어지간해선 언론을 타지 않는다.

저들은 친구가 많기 때문이다.

‘모인 숫자를 보니, 정치인들이 꿈뻑 죽는 이유를 알겠네.’

유독 정치인들과 사이가 좋다. 그들이 베푸는 도움이 좋아, 혹은 자신의 경쟁자를 돕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최소한 그런 척이라도 했다.

여당, 야당 가리지 않고 그랬다. 서울상공인모임회 쪽에서도 생존과 이권을 위한 인맥 다지기에 돈 쓰는 걸 아까워하지 않았으니, 정말이지 힘 있고 돈 많은 불량한 친구라는 생각을 김철민은 한다.

근처 빌딩 옥상에서 턱을 괸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가 축사를 마치고 떠나는 차들을 확인하면서 든 생각이다.

여당과 야당을 가리지 않고 중진급 의원이 고루 섞여 있다는 사실에 혀를 차기도 했다.

세상 참 좋아지기도 했지.

‘나도 늙었나? 옛날 생각이 아직 새록새록 한데.’

범죄를 저지른 무림인들이 군인들의 총칼에 참회와 반성의 팻말을 목에 쓴 채 거리 행진을 해야 했던 이야기를 듣고 자란 그리고 정부의 심기에 거슬리던 이들이 재판도 없이 끌려가 두들겨 맞고, 고문받다 죽고 했던 역사의 목격자인 김철민은 당연한 격세지감을 느낀다.

자유민주주의가 이리도 좋다, 되도 않는 양아치 깡패 새끼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호텔을 통째로 빌려 친목을 다지다니.

저 돈이 다 무슨 돈인지 하나하나 따지면 모임은 호텔이 아니라 교도소에서 해야 될 것 같은데.

‘증거재판주의, 죄형법정주의… 이런 것만 아니었으면 귀찮게 이럴 것 없이 모조리 그냥 잡아다 쳐 넣었을 텐데 말이야.’

이럴 때면 무림의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조금은 안타깝다.

죽어 마땅한 놈들을 죽일 수 없는, 그럼에도 인간이란 이름이 어느 때보다 가벼운 이 시대가.

하나 생각은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

정파의 후예가 무공을 익힌 흑도 무리를 두고 보는 건 실의에 빠져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

이제는 달라질 것이다, 김철민도, 무림도 그리고 세상도.

연화존자가 은거를 깬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호텔의 정문 앞, 기도 역할의 무인들이 다가온 김철민에게 신분을 물어온다.

태도가 정중하다. 좋은 날이기 때문일까?

아마도 맞으리라. 문제가 있어서는 곤란한 오늘 같은 날이 아니라면,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껄렁껄렁하게 걸어오는 낯선 이에게 저리 공손할 리 없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는 신경 쓸 거 없고……. 너희가 그렇게 쓰레기들이라며? 썩은 내가 진동해서 그냥 지나갈 수가 없더라.”

오는 말이 퍽 고왔음에도 가는 말은 곱지 않다.

하지만 연화존자는 악한들에 대한 존중을 모른다. 그런 타협을 그는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참 좋아, 양아치 잡놈들도 부자 되는 길이 활짝 열려 있고. 꿈과 희망이 넘쳐, 그치?”

문지기들의 인상이 험악해지며 기세가 뿜어져 나온다. 아마 무림인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저런 말을 면전에서 듣는다면 화가 나리라.

놀랍게도 여전히 대답은 여전히 정중했지만.

“…죄송하지만 견문이 짧아 귀인께서 누구신지 모르겠습니다. 성함이나 별호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여전한 도산검림의 강호, 21세기가 열렸음에도 살아 숨쉬는 강호무림에서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괄시하는 우를 범할 수는 없는 법이란 걸 흑도의 문지기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울의 흑도 무림인 거의 전부가 모인 날 보이는 태도가 저따위라면, 뭔가 믿는 바가 있지 않겠느냐. 그리 짐작하는 신중한 태도에는 김철민 또한 조금은 감탄한다.

이를 악물며 눈가는 매서워지지만 말투와 태도만은 정말로 예의 바르기 짝이 없지 않나?

이런 말을 듣고도 인내를 보이는 흑도인이, 아니 무림인이 있다니!

칭찬을 아니 할 수 없다.

“대단한데? 근데 이거 다 사람 많아서 사람인 척하는 거지?”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잖아. 보는 눈이 많으니까 사람 행세 하는 거잖아. 뒤에선 온갖 나쁜 짓 다하고 다니는 개자식들이 옷 쫙 빼입고 사람 흉내 내는 걸 보니, 내가 다 대견하네. 뼈다귀 핥아먹는 사냥개들 주제에 교육이 잘되었어.”

김철민은 여기 그냥 오지 않았다. 설령 그러려 했다 해도 그의 부하들이 그리 두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가겠다는 설득에 조심스러운 반대가 몇이었던가?

“개 냄새는 진동하는데 사람 모습이라니, 참 재밌지 않아?”

그는 서울상공인모임회에 속한 모든 간부의 신상명세를 받았고, 외웠다.

숙지는 하루면 충분했다.

그렇기에 말과 행동엔 자신감이 있다. 엄한 사람 잡는 건 아니라는 확신은 확고하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그럼 왜 너희들 이름은 흑견단이라고 지었니? 충실한 사냥개가 되어 사람 구실 포기하겠다는 의미 아니었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그리 말하니 뒤에서 화를 참던 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에워싼다.

서울상공인모임회 내에서도 손꼽히는 무인들다운 쾌활한 몸놀림.

흑견단이라 이름 지은 이들은 강북을 휘어잡은 흑도 방파, 무수방의 무력 단체다. 김철민의 기준으론 무력 단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수준이지만, 무수방의 수완이 좋은 건지 아니면 운이 좋았던 건지 현재 서울의 흑도 중 가장 잘나가는 곳 중 하나다.

이 말인즉슨 남들한테 말 못 할 짓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감히 그따위로 주둥이를 놀려?”

“오, 알지. 하진영, 별호가 광견이라지? 버러지 깡패한테 어울리는 별호야. 물어 뜯고 피를 보는 게……”

“놈!”

결국 광견 하진영은 인내심의 끈이 끊긴다.

날이 날이니만큼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 했다. 애초에 매년 호텔 전체를 빌려 민간인을 내보내고 자기들끼리만 모이는 짓을 왜 하고 있던가? 언론과 공권력의 괜한 주목을 받는 걸 피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흑견단이 문지기를 맡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의 연장선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흑견단 정도면 혹시 모를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할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어떻게든 말이다.

그러나 눈앞의 놈은 너무 심했다.

‘뭐지, 이 미친놈은?”

그는 분노와 함께 자신을 흑도 바닥에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고수로 만든 귀랑공의 내력을 끌어올린다. 붉은 기가 섞인 내력이 번쩍이며 두 주먹에 은은하게 어린다.

고양감이 광견을 감싼다. 이제 곧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꽂은 멍청한 녀석의 얼굴을 박살 낼 수 있으리란 흉포한 쾌감이 그를 감싼다.

기대는, 산산이 부서진다.

“조상님 중에 외국분이 있나 보네? 공산당 무공이 몸에 맞는 걸 보니… 되놈 핏줄인가?”

광견은 언제 주머니에서 손을 뺏는지도 모르게 자신의 내공 어린 주먹을 가볍게 잡고 히죽 웃는 김철민을 보며 경악에 빠진다.

조직에서 엄청난 거금을 투자한 심법이 이리 쉽게 꺾일 거라고, 그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이게 얼마짜린데!’

경악은 타당하다. 그가 익힌 귀랑공은 중국 최대 무공상회, ‘순천’의 것이기 때문.

김철민 역시 잘 알고 있는 무공이다. 타국의 무공을 입수하여 분석하고, 파훼법을 연구하는 건 연화존자의 취미.

다만 뜻밖의 장소에서 찾은 뜻밖의 발견이 이해하기 힘들 따름이다.

‘정가 12억짜리를 가족도 아닌 부하한테 태워?”

돈만 주면 누구나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 세계 범죄자들에게 가장 각광받는 순천의 무공이라지만, 그래도 중국 공산당이 뒷배라는 의심을 받는 무공상회의 무공을 아무나 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고작해야 권력에 줄을 댄 채 서민들 피나 빨아먹는 놈들에겐 과분한 물건이란 소리.

이건 따로 파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느라 머리는 바쁘지만, 그와 달리 몸은 부지런히 움직인다.

광견의 팔을 뽑아 그대로 돌려 틀어 버린 게 시작이었다.

“으아아악!”

“씨발! 형님!”

“쳐!”

오른팔이 뒤틀려 피가 튀고, 부러진 뼈가 보이는 광견의 모습에 다른 사냥개들이 달려든다.

하나 연화존자에겐 다만 우스울 뿐.

“어억!”

“컥!”

강남 한복판에서 신위를 보인다.

허벅지를 차고, 팔과 다리를 관절 반대방향으로 꺾고, 배와 가슴을 난타하니. 흑견단은 바닥을 뒹구는 게 할 수 있는 전부.

무협지에나 나오던 이형환위가 바로 이런 것일까? 잔상만 남아 아지랑이처럼 스러진다.

놀라운 광경을 목도한 목격자들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걸 뒤로 한 채, 연화존자는 정신을 잃은 광견의 머리를 붙잡고 유유히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시끄러운 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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