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자, 올해도 다들 무사 안녕하길!”
목청 큰 누군가의 선창으로 시작된 서울상공인모임회의 본격적인 술자리는 흥겨웠다.
술과 음식, 음악, 수다까지.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함에 부족함은 전혀 없이 뭔가 많았다.
그렇다고 기품이 있다거나, 품위가 있다거나 했다는 소리는 아니다.
조직폭력배, 흑도들의 모임 아닌가?
조직의 이권을 위해 칼부림도 서슴지 않는, 걸리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한 푼의 이익을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의 모임이 오늘이다.
거칠고, 상스럽고, 천박하다.
시간이 갈수록 더 그렇게 됐다. 술에 취해 구석에서 토를 하고, 손에 잡히는 데로 집어던져 부수고 깨고, 삿대질을 하며 시비를 걸고, 소수이긴 하나 가끔 취기가 올라 내공마저 써 가며 악다구니를 하고.
그나마 민간인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에선 공권력의 서슬이 퍼런 대한민국의 깡패들다웠다 할까?
서빙 하는 일반인들은 난리도 아닌 파티장 정경에 두려워 죽을 지경이었지만, 평소의 열 배가 넘는 일당이 공포를 이겼다.
그건 오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인 동시에 여기서 본 일을 발설하지 않는 침묵의 대가였다. 더불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들이 민간인에게 손대려는 자들을 제지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고.
이중 하나라도 지켜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각계각층의 좋은 ‘친구’가 많은 서울상공인모임회라 해도 대한민국 공권력에 의해 초토화가 됐을 터.
“그래도 가끔 이런 날이 필요하긴 하지.”
연회장 한쪽에는 따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서울상공인모임회의 지도부, 즉 깡패 두목들을 위한 자리가.
낯빛들은 생각보다 그리 좋지 못하다.
“애들 일하느라 고생도 많았는데, 이런 날도 있어야 스트레스가 풀리지. 안 그러냐?”
“…맞습니다, 회장님.”
가장 상석에 앉은 자의 말에 다들 고개를 조아리지만, 확연히 느껴진다, 그 심기 불편함이.
서로 만나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들이 아닌 것이다. 같은 모임에 속해 있다고는 하나 따지고 보면 상권 하나, 골목 하나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는 사이가 아니던가?
이 좋은 연말, 매년 꼴 보기 싫은 자들을 마주 보며 억지로 자리를 지키는 게 기분 좋을 리 없다.
“다들 오늘은 걱정 없이 마시자고.”
하지만 가장 높은 자리의 노인만은 예외다. 좌중을 돌아보며 험상궂은 얼굴로 연신 껄껄 웃어 대는 것이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인다.
얼굴에 지저분한 상처가 여럿이었다. 젊은이 못지 않은 덩치와 기력을 자랑하는 사람이었고, 또 내로라하는 범죄자들이 모인 이중에서도 가장 여유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에겐 그럴 자격이 있다. 그가 바로 이 모임을 주선한, 서울의 모든 폭력배를 무릎 꿇린 주인이었으니까.
서울상공인모임회의 회장이자, 서울 밤거리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그는 혈야쾌조 방무열이라고 한다.
거칠고, 잔인한 독재적 인물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부하들이 그의 발치에서 기침 소리조차 함부로 낼 수 없을 만큼, 무슨 말을 쏟아 내도 감히 말대꾸를 할 수 없을 만큼.
“그러니까 이 새끼들아, 웃어.”
당장 불만 많은 표정의 부하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짜고짜, 뜬금없이 화를 내는 으르렁거림에 누구도 반발하지 못하는 걸 보라.
“이 새끼들이 지금 누구 덕분에 호의호식하는 줄 모르고 건방지게… 야, 야! 표정 안 펴?”
혹자는 그가 기연을 통해 얻은 무공을 감춘 고수라고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흔하디흔한 밑바닥 인생을 살던 방무열이 어느 날 갑자기 두각을 드러내며 서울의 뒷골목을 접수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실제로 그의 전과 대부분이 폭행이기도 했다. 서울상공인모임회의 회장직을 맡고 나선 실형을 선고받긴커녕 재판장에 서는 일 자체가 없었지만, 그의 젊은 시절이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만은 사실.
물론 그게 방무열의 인생 후반부가 평화로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재판을 받지 않았다는 게 실제로 범죄가 없었음을 증명하는 건 아니지 않겠나?
“이놈들이 배때지가 부르니까 대가리만 커 가지고… 실컷 먹고 놀자고 부른 자리에서 누구 하나 뒤진 것처럼 죽상을 하고 지랄이야, 지랄이? 엉? 이 새끼들아, 나 아니었으면 너희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이렇게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럴 수 있었을 것 같아? 어?”
무엇보다 방무열의 조직을 이끄는 사업적 수완과 감각이란 대단했다.
독재 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널리고 널린 용역 깡패에 불과했던 그가 실은 권력의 향방이 어디로 향할지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
이 말인즉슨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긴데, 긴 세월 자신을 향했던 수많은 수사의 칼끝을 모조리 피해 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부정한 돈을 벌어 인맥을 넓히고, 그로써 커넥션을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더 큰 돈을 벌고.
서울상공인모임회 자체가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단체였고, 그런 영향력을 쌓기 위한 단체였다.
그 아래에서 어떤 거래가 이루어졌는지,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방무열과 조직의 최고위층 몇몇만 아는 것일 테지만, 어쨌든 오늘과 같은 모임을 매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영향력을 보여 주는 하나의 일화다.
휘하 조직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외부의 개입을 틀어막을 수 있다는 확신 없이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모아 하는 행사를 열 수 있을 리 없다.
그만큼 방무열이 쌓은 서울상공인협회라는 아성은 공고해 보였지만, 그 자신감이 무색하게 균열은 어느새 바뀐 계절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잠깐, 이게 무슨 소리지?”
아무렇게나 떠들어 대며 화를 내던 방무열이 돌연 손을 들여 주변을 조용히 시킨다.
욕심 많은 요괴 같은 노인네라지만, 소문대로 고수는 고수라는 걸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다들 분분히 나서 파티장을 침묵시키니, 과연 고요 사이로 들려오는 소리가 있더라.
자리한 이들에겐 익숙할 다툼과 폭행의 소리였다.
물건 부서지는 소리, 몸과 몸이 부딪치는 소리, 비명, 마지막으로 들려서는 안 될 총소리까지.
기묘한 정적 속에 아스라이 들려오는 싸움의 소리였지만,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흥분하지 않은 채 듣고만 있다.
소음에 힘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닳고 닳은 깡패가 대다수인 이들은 알 수 있었다. 연회장을 중심으로 겹겹이 쌓은 호위망을 부수고 있는 상대는 단 한 명.
발소리는 한곳으로 몰렸고, 소음은 가까워지고 있으나 침입자는 거침이 없다.
아무도 막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소리만 들어봐도 그렇다. 비명, 오직 또 비명. 소란은 점점 커지고 그렇게 연회장으로 빠르게 다가오던 소음의 주인공은 머지않아 나타난다.
-쾅!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셋이 문을 부수며 파티장 안으로 날아왔다. 제 의지로 날아온 건 아니다. 하나같이 피를 토한 채 정신을 잃고 던져졌으니까.
하지만 누구도 기절한 자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었다, 좌중의 시선은 오직 문을 부수고 유유히 걸어 들어오는 한 남자에 머물었기에.
“서울 사는 나쁜 놈들은 여기 다 모였네? 반갑다, 이 깡패 새끼들아.”
남자는 손을 휘저으며 웃으며 걸어 들어왔다.
싱글거리는 얼굴, 장난스러운 말투지만 파티장에 모인 자들은 그가 보이는 기묘한 위압감에 입을 열지도,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다.
난투를 벌이며 여기까지 왔음이 분명한 남자의 모습이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깔끔하다.
“근데 나쁜 짓으로 먹고사는 것치고는 다들 힘아리는 없고 말이야. 너희 무공 익힌 건 맞니? 영 맥을 못 추리는 게 손맛이 별로다? 나약한 새끼들.”
파티장을 제 집처럼 거닌다. 옷매무새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남자에게선 불편한 기색, 긴장한 기색 따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테이블 위에 놓인 술 한 잔을 따라 마시며 자신만만한 미소로 주변을 돌아본다.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라 그런지 수련들은 열심히 안 하나 봐? 제대로 물지도 못하는 것들이 폼 잡고 짖는 게 전부인가 보지?”
그런 남자에게 위축당한다. 표정과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세. 주변을 짓누르는 강자의 자신감이 그에겐 있음이라.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디에나 부나방은 있지 않나?
“죽어, 이 개자식아!”
전부 폭력을 일상으로 삼는 자들이었다. 취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감정이 이성을 이기는 일이 왕왕 일어나곤 한다.
더군다나 오늘 이 자리, 어떤 자리인가? 조직의 최고위층이 모두 모여 있는 자리 아닌가?
정체 모를 침입자를 격퇴하여 두목들의 눈에 든다면, 그렇다면 앞으로 이 생활이 탄탄대로일 거라는 생각을 취중임에도 누군가는 했다.
객기를 부려 봄 직했다. 저자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했다면 못 그랬겠지만, 상대가 연화존자 김철민이 아니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컥!”
하나 헛된 꿈은 짧았음이라. 손에 든 술병을 깨고 달려들던 야망 있는 누군가는 달려든 속도보다 배는 빠르게 튕겨져 나가 정신을 잃는다.
그 과정을 제대로 본 자는 거의 없지만, 도구로 무엇이 쓰였는진 금방 밝혀진다.
작은 유리 술잔 하나. 자신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며 덤빈 자를 향해 김철민은 빈 잔을 쏘아 보냈다.
고요가 다시금 깊어지는 이유다.
“용기 있는 돌진이었어. 무모하지만 쥐새끼 중에선 그나마 기개 있네.”
김철민은 여전히 여유가 있었고, 움츠러 들었던 이들의 어깨는 더욱 구겨진다.
술이 깨는 기분을 느끼며, 의문이 든다.
저자는 누구인가? 어디서 저런 고수가 모습을 나타냈는가? 무엇을 이유로? 무슨 짓을 하려고?
고민 많은 이들의 발치로 사람을 날려 보내고도 깨지지 않은 유리컵만 데구르르 구르며 요란하다.
“협객 나셨네. 정의의 협객 나셨어.”
이 모든 것이 방무열에겐 거슬린다.
“어디서 또 무협지 좀 읽고 왔나 본데……. 이 새끼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는 저런 자들을 여럿 보았다.
방무열을 노리는 자들은 대부분 같은 업계의 선후배가 대다수였지만, 간혹 뜬금없이 저렇게 정의감에 불타는 애송이들도 있었다.
이른바 협객 지망생들.
권력의 비호 아래 호의호식하는 그를 증오하는 자들이 많았던 것이지만, 개중 성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의? 협? 세상에나, 아직도 그런 걸 믿나?
하나 애석하게도 오늘 찾아온 이는 그저 그런 협객이 아니다.
“네가 방무열이구나?”
김철민의 거침없는 말이 좌중에 불을 지른다.
“서울에서 쓰레기 놈들 뒷구멍 닦아 주는 양아치 두목이 너라며? 딱 걸리지 않을 정도로만 개 같은 짓 저지르는 데 전문가라던데.”
“…이 미친 자식이.”
“네가 주는 돈이 달달한가 봐, 들개 같은 놈들 우정이 돈독하더라고. 그래서 너희 쓰레기들을 치우자면 뒷처리가 피곤할 거래서 나도 그런가 보다 하고 마음에 안 들어도 여태 넘겨 왔었는데…….”
말꼬리를 늘린 김철민의 웃음이 깊어진다.
그는 즐거워 보였다. 사람들 앞에서 호호탕탕 멈춤 없는 모습이란 그랬다.
실제로 그랬다. 김철민은 기쁘다, 벼르고 벼렸던 이 나라의 똥 무더기 중 하나를 치울 기회가 비로소 왔음에.
무림의 방식이 무엇인지 세상에 보일 기회가 오늘 왔음에.
“그것도 정도껏이어야지. 넌 오늘 잡혀가 죗값을 치른다. 여기 있는 놈들 전부, 너희 친구들까지 모두. 이번엔 못 피할 거야.”
“뭣들 하고 있어? 치워!”
하지만 방무열은 앞선 자들이 그랬듯 저 앞의 젊은 녀석도 곧 사라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는 단 한 번도 이와 같은 일에 실패한 적이 없다. 정의? 그런 건 믿는 쪽이 멍청한 거지. 현실감 없는 놈.
“하아압!”
방무열의 외침에 준비한 것처럼 몸을 던지는 자들이 있다. 흉신악살의 몰골로 달려드는 세 명의 그림자.
심복이라 불러도 좋을 자들이었고, 덤벼드는 속도는 전광석화와 같다. 아까의 침묵이 마치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동시에, 순식간에 김철민을 향해 쇄도한다.
하나 그렇게 뛰쳐 들어오는 이들을 보며 김철민은 겁먹지 않는다, 전혀, 하나도.
오직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