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선두에 선 건 두툼한 몸집과 얼굴을 가진 중년 사내로, 강남 잠실 일대를 세력권으로 삼은 흑섬방의 방주다.
그들끼리 불러 주는 별호는 강남흑섬.
성명절기이자, 방파의 이름으로 삼은 흑섬공은 먹이를 삼키는 두꺼비의 모습을 본따 만든 것으로, 실상 강남흑섬은 일신의 재주보다 경쟁자를 제거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모습이 짝짓기 시기의 수컷 두꺼비처럼 저돌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남자였다.
덤벼든 세 사람 중 맏이의 역할을 한다. 굳이 따지자면 방무열의 오른팔 정도 되는 위치.
혈야쾌조의 비호로 세력을 성장시켰다. 그 대가로 돈을, 아주 많은 돈을 방무열에게 바쳐 왔다.
한편 김철민을 오른쪽에서 압박하는 남자는 사당 일대를 세력권으로 삼은 적혈문의 문주 추랑으로, 류가 팔극권의 파문제자다.
문파를 배신하고 뛰쳐나와 흑도에 투신한 뒤, 방무열의 직속 부하가 되어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몸 담았던 곳을 등진 경험이 있던 탓일까? 서울상공인모임회 중에서도 유독 뒤가 없게 독하고 냉정하여 자비가 없다는 소문으로 흉흉한 작자다.
그래서 방무열은 입이 가장 무거운 자가 해야 할 일을 추랑에게 맡기곤 했다.
그런 추랑의 반대편에서 덤벼드는 자는 그를 아는 이들에게 청비비라 불리는 자로, 통배권을 익힌 권사다.
개코원숭이를 닮은 얼굴과 더불어 팔다리가 길고 평소 푸른색 옷을 즐겨 입기에 이러한 별호가 붙었다.
성격은 별호와 같다. 사람도 습격하곤 하는 개코원숭이와 같이 매우 사나우면서도 영악하여 뒷세계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 방무열의 신임을 톡톡히 받았다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이들을 본 김철민의 머리를 스쳐 간 저들의 신상명세다. 창졸간이었다.
‘예상을 벗어나질 못하네.’
김철민은 서울상공인모임회의 대응이 예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강남흑섬, 추랑, 청비비가 한꺼번에 덤벼드는 건 그의 부하들과 현천문에서 예측한 일어날 확률이 가장 높은 상황.
연화존자 김철민이 아무 생각 없이 여기 오진 않았다.
김철민은 자신의 무공에 절대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작정 들이받고 난 다음에야 머리가 있었음을 자각하는 그런 성격은 아니다.
만약 그의 성품이 그랬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걸 일단 부수고 보는 인성이었다면 이 세상은 무척이나 다른 모습이었을 터.
하여 그는 휘하 수하들에게 서울상공인모임회를 쳤을 때의 예상도를 작성하게 했고, 지금까진 어느 정도 잘 들어맞아 흡족하다.
그만큼 저 세 사람의 합격이 나름 유명하기도 했다.
가장 먼저 달라붙은 건 추랑이다. 그는 김철민의 옆구리를 가격하고자 크게 발을 구르며 주먹을 뻗어 온다.
옆으로 피한다는 선택지는 고르기 힘들다. 뒤이어 반대편으로 따라붙은 청비비가 있기 때문이다.
직선적이고 묵직한 공격을 날려 발을 묶는 동료와 달리, 별호처럼 사납게 생긴 남자가 한 발짝 반 정도 떨어져 장법을 펼친다. 그것은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채찍처럼 날아온다.
뒤로 빠지거나 앞으로 피하기엔 몸을 활짝 펼쳐 덮쳐 오는 강남흑섬이 문제.
위력을 위해 내공의 제어를 어느 정도 포기한 것도 같다. 어깨와 목덜미에 검은 먼지 같은 빛을 흩뿌리며 기세도 좋게 직진하며 다가오니, 진신무공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눈에 담은 김철민은 곤란하지 않다.
되레 이런 생각을 한다.
‘예상보다 훨씬 시시하다.’
오랜만에 나서는 공개적인 행보이기에 저 정도론 영 성에 차지 않는다. 그의 눈엔 수준 이하다.
저건 그냥 함께 덤비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지 않나? 뒷골목에서나 고개 빳빳한 자들의 고만고만한 수준이란.
하여 그대로 부숴 버릴까도 고민했지만, 문득 그건 너무 재미없고 고상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바꾼다, 자신을 공격하는 세 사람의 위치를.
단말마의 비명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이유다.
“흡!”
“헉!”
“크악!”
김철민을 향한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도 모자라 동료를 친다.
추랑의 발길질이 강남흑섬의 정강이를 강타하고, 청비비의 손바닥이 추랑의 관자놀이를 후려치며, 강남흑섬의 두 주먹이 청비비의 가슴에 틀어박힌다.
전부 김철민의 왼손과 오른손이 부드럽게 교차한 직후의 일이니, 김철민의 독문무공이 보이는 신위.
그가 가문의 유산을 이어받아 창안해 익힌 연화신공의 칠색홍예수와 오행무극도는 각기 따로 익혀도 이미 훌륭한 일곱 개의 심법과 다섯 개의 무공이었지만, 진정한 위력은 그 모든 것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 드러나는 법.
지금 보인 모습이 정확히 그러하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에 산이 쓸려 나가고, 천년을 버틴 거석도 끝없는 파도에 깎여 나간다.
김철민이 세 사람의 공격을 흘리며 동시에 쏠리게 만든 건 바로 그와 같은 이치여서, 연화존자의 영역에 갇힌 자들은 와류에 휩쓸린 모래알만치 쓸리고 밀리며 제 뜻을 잃어버렸다.
부드러우면서도 강맹하게, 유유하면서도 단호하게 연화존자의 손과 내력이 움직였다.
추랑과 청비비, 강남흑섬은 자신들의 공격이 틀어지는 것도 모자라 몸 자체가 알 수 없는 흡입력으로 끌려감을 느꼈지만, 반항은 어불성설, 이루어지지 못한 상상에 불과한 바.
속수무책으로 흐름에 빨려 들어간 것이었고, 결과는 참혹하다.
강남흑섬의 정강이는 댕강 부러졌으며, 청비비는 입에서 연신 피를 토한다. 머리가 깨진 추랑의 상세는 심각해 기식이 엄엄할 지경.
“으으… 이게 대체…….”
부러진 다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은 강남흑섬의 눈에 황망함이 깃든다.
대체 이 낮도깨비 같은 작자는 누구길래 이와 같은 사술을 부리는지. 그의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온갖 흉험하고 더러운 싸움터를 누벼 온 그였지만, 이러한 수법은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다.
고작 손과 손이 교차했을 뿐인데 그대로 끌려가 버리다니? 어중이떠중이도 아닌 조직 내에서 무력으론 수위권에 달한 자신들이 어찌?
정신을 잃은 추랑이나, 꺽꺽대며 피를 뱉는 청비비 모두 이런 식으로 쓰러질 자들이 아니었는데…….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자각하고 나니, 다리의 고통보다 가슴의 불안감으로 더 두려워진다. 이 정도 되는 고수라면 필시 그가 상상도 못할 세력에 속한 자가 분명하리라.
그런 강남흑섬의 상념은 스쳐 가는 누군가의 노호성으로 끊어진다.
“네 이놈!”
혈야쾌조가 몸을 일으켰다. 부하들이 쓰러진 직후를 노려 몸을 일으켜 과감한 기습을 감행한 것.
의리나 복수심의 발로는 아니라 하겠다. 그보단 비열하지만 적절한 기회의 포착이라 칭함이 옳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시의적절한 기습을 감행하게 된 건 용기보단 두려움이 그 동기다. 소문대로 무공을 숨기고 있던 노회한 무림인인 그는 금방 알아보았던 것이다.
다짜고짜 난입한 정체불명의 남자는 혈기 넘치는 협객 지망생이 아니라 이 자리 누구도 제대로 상대할 수 없을 엄청난 고수라는 걸, 그 신기막측한 수법을 목격하며 깨달았다.
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강호의 도리에 취한 애송이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던 처음과 달리, 간담이 서늘하여 손발이 떨리기까지 한다.
두려움이 몸과 마음을 잠식한다. 젊었을 적엔 그래도 빛나던 투지와 웅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기에 더 그렇다.
이제는 결단코 아니다. 혈야쾌조 방무열은 권력과 악명, 세력만 믿고 수련을 언제 마지막으로 했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퇴물이 다 된 지 오래.
겁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돈과 권력으로 지배하던 믿음직스러운 부하들이 단박에 쓰러지지 않았나?
비겁한 기습이 아니면 다른 기회가 오기는 할는지.
그가 알고 있는 고수들의 면면을 떠올려 보아도 도통 정체가 짐작가지 않아 두려움은 배가 된다.
국정원에 의해 주화입마의 부상을 입고 종적을 찾기 힘든 다도선객과 극악의 사이비 교주인 동방요선을 제외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이름 난 고수 중 저만한 자를 방무열은 본 적도, 떠올릴 수도 없다.
세상에 실망해 은거했다는 청해마도는 저렇게 경박하지 않고, 한국 화교의 젊은 수장 적혈부와는 성별부터 다르다.
하던 일이 있기에 방무열은 재벌가의 전력을 살필 기회마저 있었지만, 그래도 개중 저만한 자는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세상은 물론이고, 강호에도 알려지지 않은 고수라면 비밀스러운 권력에 속한 자일 수밖에.
뭐가 되었든 때려눕혀야만 살 길이 열리리라. 여기서 쓰러지면 정말 죽도 밥도 되지 않을 테니, 우선은 사로잡고 봐야 할 터.
붙잡는다면 적어도 협상의 재료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제압하지 못하면 그대로 끌려갈 것이 뻔하다.
이것이 혼신의 힘을 다해 양손가락에 공력을 모아 달려드는 방무열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이다.
“죽어라!”
함부로 밖에 보이지 않던 음울한 내공이 그의 전신을 돈다.
아주 예전, 우연과 우연이 겹쳐 몰래 손에 넣은 사악한 무공이었기에 제대로 수련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동안엔 이 정도로도 충분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다.
다급한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끌어올린 내력이 광폭하게 휘몰아쳤고 이 순간, 뜻밖에도 방무열을 찾아오는 한 줄기 기연이 있다.
거칠게 전신의 혈도를 흐르던 내력의 흐름이 예상했던 고통이 아닌 의외의 희열을 전하는 것이다. 몸 내부가 찢길 각오로 급하게 끌어올린 내공이 되레 온몸의 악기(惡氣)를 씻어 내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환희를 부른다.
감각이 봄날에 꽃이 피듯 활짝 만개한다.
표현으로 그칠 게 아니라 진실로 그랬다. 마치 처음 무공을 익혔던 그때처럼,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적들과 생사를 걸고 싸웠던 예전처럼 둑이 터진 내공이 영혼을 휘어잡는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싸움에 임했던 게 언제였더라?’
새삼 느껴지는 신선한 기분에 방무열은 상황에 맞지 않은 기쁨마저 느낀다.
시간이 느려지는 착각마저 드니, 알 수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그를 밀어주고 있다는 걸. 긴 시간 정체되었던 바닥을 박차고 더 높은 곳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결코 넘을 수 없을 거라 여겼던 높디높은 벽을 뛰어넘고 있다는 것을.
이제 그는 코앞의 적을 잠시 잊는다. 그러곤 후회한다,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지난 시간의 야속함을.
그래. 강호인이라면 목숨을 건 혈투 속에 성장해야 하거늘, 주색잡기에 빠져 시간을 허비했다니. 남들은 꿈도 못 꾸는 대단한 무공을 얻은 채 왜 하찮은 것에 정신이 팔려 오만함으로 태만했던가?
‘그것만으로 난 이미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눈물이 흐를 것도 같다. 반성한다. 이기적인 깡패 두목답게, 강호의 무뢰배답게 악행이 아닌 태만했던 지난날만을 통렬히 반성한다.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으리라. 미련하게 살지 않으리라. 눈앞의 적을 치우고, 다시 태어나리라.
이 무공, 구음백골조를 대성하고 말리라!
“아아아악!”
그렇지만 봄날의 꿈 같던 행복감은 너무나도 짧았다.
딱 달콤했던 그만큼 아프도록 한순간.
“손, 손… 내 손!”
방무열의 온 힘이 집중된 손가락은 김철민의 가벼운 손짓에 속절없이 꺾인다.
숨겨 왔던 사공, 구음백골조의 내력을 차갑게 비웃은 김철민이 두 줄기 쌍무지개를 띄웠다.
그로써 오랫동안 아무도 잡지 못한 자를 꺾어 버렸다. 부러진 손가락이 손등과 맞닿을 정도였고, 다시는 고치기 힘들어 보인다.
하나 아픈 손보다 방무열을 더 괴롭게 만든 건 박살 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순간의 깨달음과 평생의 적공.
위대한 신공과 부딪친 상처가 육신에만 남진 않았음이다.
“사특한 무공을, 어디 감히.”
김철민은 혀를 찼다,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는 혈야쾌조의 육신이 쪼글쪼글해지는 걸 바라보며.
그릇된 것은 바른 것을 이길 수 없는 법이라. 수백 년 전 강호를 피바람으로 물들인 뒤 사라졌던 구음백골조의 삿된 내력이 정순함에 무너진다.
저자가 평소에 수련을 열심히 했다면, 그래. 어찌 버텼을 지도 모르지만 빌빌대며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고.
결국 모든 것은 인과응보.
쓰러진 노인을 냉혹하게 내려다보는 김철민의 귓가로 길고 긴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서울상공인모임회가 무너진 날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