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서울상공인모임회에 대한 진압은 곧바로 그리고 널리 알려졌다.
이들에 대한 전격적인 진압과 체포가 바로 그날 밤 알려졌던 것인데,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통째로 빌린 호텔이라고는 하나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과 차가 몇 대였던가? 밤을 잊은 현대인은 또 얼마나 많단 말인가? 통신 매체의 발달은 얼마나 많은 사소한 일들을 서로에게 실어 나른단 말인가?
요즘 같은 시대에 서울,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서 일어난 소란을 감출 수 있을 리 없다. 경찰특공대와 군부대의 일부가 움직이는 바람에 놀란 시민들이 허겁지겁 목격담을 올릴 수밖에 없기도 했지.
어떻게 보면 감출 생각이 없던 것이기도 했던 것이니, 전부 연화존자의 오랜 친우이자 후원자, 운하신권의 솜씨.
김철민이 넘긴 현천공은 운하신권의 현천문을 통해 긴 세월, 거의 독점적으로 정부에 공급되어 왔다. 그 말인즉슨 공권력에 대한 현천문의 영향력이 지대함을 뜻하는 바, 작전의 날 운하신권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영향력을 발휘해 서울상공인모임회를 둘러쌌다.
여기에는 운하신권이 직접 진기도인하여 현천공을 사사한 육군 장성, 경찰 고위 간부들이 있었고 그 외에 영향력이 닿는 중소문파 여러 곳과 평소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기자들이 포함된다.
서울상공인모임회를 향한 몰락의 준비는 그야말로 철저했다 하겠다.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촘촘한 포위망이었고 실제로도 그렇다. 홀로 진입한 김철민의 신위와 전격적인 진압 작전에 질려 버린 범죄자들이 일찌감치 도주를 시도했음에도 성공한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부터가 말이다.
흠잡을 데 없는 일망타진이라 할 수 있으리라. 호텔에 모인 수뇌부뿐 아니라 사업장을 지키던 조무래기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인 건.
내력을 모두 잃고 쪼그라든 늙은이가 된 혈야쾌조 방무열이 수갑을 훤히 드러낸 채 기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몰락의 화룡점정.
그렇게 서울상공인모임회는 와해됐다. 그간 누구도 해내지 못한 위업이다.
김철민의 이름과 별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알려진다, 사태의 주도적 인물이자 급부상하는 무림의 고수로서.
[연화존자 김철민, 그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그를 몰랐는가?]
[광오한 별호에 걸맞는 실력과 배포. 무림에서의 위치와 막후의 후원자, 운하신권과의 관계는?]
[익명의 국정원 관계자, 그는 오래전 국정원을 퇴직한 국가 무림인의 전설이라고 밝혀.]
군부대가 도주하는 자들을 막기 위해 대로 한복판에 검문소를 차리고, 경찰특공대가 도망가는 범죄자 무림인들에게 고무탄을 쏘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앞서 홀로 먼저 간 남자가 있다는 소식은 초미의 관심사가 된다, 연화존자라는 옛 무림식 별호와 김철민이라는 이름 세 글자만이 알려진 누군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일반 대중에겐 그 실체가 제대로 알려진 적 없는, 그 어떤 정의로운 검찰도, 경찰도 잡아 가두기는 커녕 법정에 세우는 것조차 성공하지 못한 서울상공인모임회를 하룻밤 사이 무너뜨린 이가 누구인지.
운하신권과 연화존자는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정치권과 재벌들 일부가 접촉해 왔다네.”
“그렇습니까?”
좌우 앞뒤로 붙은 호위 차량의 가운데에 위치한 검은 차에는 운전수를 제외하고 두 사람뿐이다.
차 안의 보안은 확실하다. 기계적 도청은 물론이고 혹 귀 밝은 무림인이 근처에서 엿들을까 기막까지 펼쳐 놓은 상태.
운전수는 다음 세대에 현천문을 이끌고 갈 운하신권의 장문제자다. 스승을 존경으로 섬기는 이였고, 가끔 뵙던 연화존자를 우러러 보며 자라 믿을 수 있는, 과묵한 사람.
차 안에서의 대화가 밖으로 나갈 일은 없다고 장담해도 된다.
“똥줄이 탈 만도 했지.”
오고 가는 대화가 허심탄회한 건,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 짓는 운하신권의 말이 통렬한 건 아마도 그래서 그런 것일 테다.
“혈야쾌조, 그놈과 연관된 자들이 이 서울 바닥에 한둘이겠는가? 그 늙은 뱀 같은 놈한테 돈 받아먹은 정치인, 공무원들은 물론이고 같이 사업한답시고 어울렸던 재벌들도 우리가 뭘 알고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해하고 있다네.”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한번 힘을 합친 두 사람은 곰팡이처럼 자라난 악한들을 처단하기로 마음먹었고,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혹시 모를 후환의 싹마저도.
호텔에 모인 서울상공인모임회의 수뇌를 김철민과 그 부하들이 처리하는 사이, 현천문의 정예가 그들의 본거지와 숨겨진 장소들을 털었다.
이것이 돈과 금품을 털었다는 소리는 당연히 아니다. 고작 재물 따위를 노리고 오랜 시간, 사회를 좀 먹어 온 서울의 조직폭력배들을 소탕한 것이 아니다.
돈? 그런 게 중요한 사람들이었다면 이렇게 바보처럼 괴로워하며 살지 않았겠지.
자료를 챙겼을 따름이다. 누구와 어떤 거래를 했는지에 대한 장부, 과세당국의 눈을 피한 은닉 재산에 대한 서류, 은폐된 범죄 및 불법적인 자금 세탁에 대한 단서 등을 현천문의 제자들은 챙겼다.
누군가의 안달과 누군가의 침묵, 또 다른 누군가의 관망은 그 결과.
“무림의 인사 중에도 말이야. 하지만 많지는 않아. 정말로 자네를 모르는 자들이 있어, 가만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네.”
“제가 한국을 떠나 산 게 벌써 몇 년입니까?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들도 분명 있을 테죠?”
“맞네. 자네를 아는 침묵하는 자들도 있네.”
운하신권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가 어떤 일을 했는지, 할 수 있는지 아는 자들은 예외 없이 입을 다물고 있네.”
이 땅엔 독재자가 하야한 후 배신감에 치를 떨며 한국을 떠난 김철민을 기억하는 자들이 있었다.
다시는 이 빌어먹을 나라에 헌신하는 일은 없을 거라 외친 그를 여전히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이후 하는 일이라곤 오며 가며 소수의 지인들을 만나고, 국정원의 무림인들을 가르치는 게 전부였던 연화존자의 옛 모습을 선명하게 떠올리는 자들이 무림엔 아직 남아 있다.
아직은 가만히 있는 자들이.
“두려운 게지.”
운하신권과 현천문이 대한민국 무림의 독보적인 문파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모두를 압도할 만한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서울상공인모임회 같은 쓰레기통은 진작에 없어졌을 것이다.
생겨나지도 못했을 테지. 언제나 애국과 대의를 위해 살아온 운하신권에게 보다 충분한 힘이 있었더라면, 무공이 아닌 다른 방식의 권력이 지금보다 강했더라면 악한들을 비호하는 정치권과 재계의 반발에 아랑곳 않고 두 주먹 불끈 쥐었을 터였다.
그러니 운하신권에게도 저 옛날을 그리워할 당위성은 있었다 하겠다. 예전의 그였다면, 잃을 것 없이 혈혈단신이던 과거였다면 혼자서라도 쳐들어갔을 테니.
혈야쾌조 방무열 같은 모리배는 진작 죽어 육신이 흩어지고, 그 수하들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토록 원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걸 오늘에서야 하게 된 게, 연화존자의 전격적인 개입과 지지 덕분이라는 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역시도.
“서울상공인모임회는 시작일 뿐이라는 걸 아는 게야.”
연화존자의 행보가 불러올 결과를 예측하는 건 그를 아는 자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거의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 이전의 중앙정보부 시절, 독재 세력의 의중에 따라 국내 정치에 개입하고자 했던 직원들이 어떤 결말에 도달했는지를 생각하면 쉽다.
연화존자는 그자들을 전부 죽이거나, 사라지게 하거나, 끄집어 냈다.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자들, 선량한 노력을 비웃던 자들은 발붙이지 못할 거란 걸 예감한 듯하이.”
그랬던 김철민이 지금 국정원 무림 파트의 독립을 원하고 있다.
현천문의 이름으로 언론에 출현한 주장이었고, 사회적으로 갑론을박을 부르는 중인 요구였지만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는지는 명확한 일.
무능한 기존 체계로부터의 분리가 연화존자는 절실하다고 보았다. 이미 강력했던 힘을 가지고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 자들로부터의 결별이야말로 이 순간, 가장 시급하다.
아울러 무공의 수준은 먼 옛날만 못해도, 그 중요성만큼은 전보다 커지고 있는 강호 무림을 국가 권력으로 흡수하기 위해서라도 조직의 규모를 키울 필요가 있다.
언제나 무협지를 보면 나오곤 하는 강호일통, 그것을 김철민은 원한다. 형태와 방식은 전과 다를지라도 궁극적인 지향점이란 옛것과 진배없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배제되거나, 굴복하거나… 사라지리라.
“똑똑하군요.”
“제 운명을 아는 놈들인 거야. 무슨 꼴에 처할지, 놈들은 알아.”
이러한 대화를 하는 김철민은 자신의 조국이 썩었다고 생각한다.
세상 어디라고 다르겠느냐라고 물으면 사실 할 말은 없었다. 긴 시간, 지구 위를 마음껏 돌아다닌 관광객인 그였기에 개인적인 감정만 접어 둔다면 이 나라가 제법 살 만한 곳이란 걸 잘 알고 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다 한들, 거짓말은 할 수 없지.
부유하여 없는 게 없는 나라였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건대, 안전한 나라였다. 마찬가지로 시민 의식이 높은 나라라고도 할 수 있는 나라였다.
하지만 정의로워 희망이 있는 나라인가, 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답하리라.
그것만은 그렇지 않다고.
사람 사는 땅 위 여느 곳이 그렇듯, 이곳에도 부조리와 부정의가 판을 친다고.
단적으로 말해 이 땅에 희망이 넘쳤다면 이 나라 출산율이 이 모양, 이 꼴일 리 없지 않나?
보이는 현상만 보더라도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된 것이고, 긴 침묵을 깨고 돌아올 연화존자는 이제 그런 꼴을 두고 볼 수 없다고 다짐했다.
지금 가는 이 길은 바로 그걸 위한 길이다.
“청와대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전해 듣기로는 긍정적이야. 하지만 노파심에 말하건대, 방심하지 말게. 정치인만큼 가격에 자기 편향적으로 민감한 직업군은 없으니.”
지금 그들은 대통령을 만나러 가고 있다. 언급한 제안, 국정원 소속이 아닌 독립되어 대한민국의 무공에 대한 모든 것을 총괄하는 기관의 설립을 위해.
혹자는 이에 대해 현천문이 자격 없다 비판했지만, 뭘 모르는 이들의 반발이다.
무공과 무림인에 대해서라면 대한민국에서 연화존자와 운하신권보다 더 자격 있는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지닌바 무공에서도, 세력에서도 그런 자가 있을 리 없다.
뭘 좀 아는 축에 속하는 현 대통령은 그래서 긍정적이다. 역대 대통령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룬다는 건 정치인에게 있어 거부가 불가능한 욕망이기에, 강호 무림의 보다 강한 국가 귀속에 구미가 당긴 모습이 역력하다
공식적인 청와대 초청이 그 증거였고, 국정원은 이러한 대통령의 의중에 동조하여 찬성한다.
전적인 항복 선언이다. 조직을 구성하는 가장 큰 파트가 떨어져 나가게 생겼건만, 더는 뭐라 할 말이 없는 그들은 수용했다. 앞으로 꾸준히 교류할 거라는 소식만이 유일한 위안이다.
연화존자와 운하신권은 이 우호적인 분위기에 무임승차하진 않았다.
이 일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사실들을 수집했다. 주로 남들에게 밝히기 부끄러운 개인사가 재료다. 밝혀지면 많이 곤란해질 구설수의 재료.
이를 통한 은밀하고도 적극적인 설득 덕에 새로운 기관 창설에 영향력을 끼칠 만한 힘 있는 자들은 오직 긍정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게 된다.
그러니 별일이 없다면 국정원 무림 파트의 독립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별일이 없다면.
“반발은 무림에서 나올 수밖에 없군요.”
“그렇지. 다시는 지금처럼 살지 못할 텐데, 누가 쉽게 받아들이겠나?”
무전기 너머 소란이 들려온다. 이동 노선을 따라 대기하던 호위 인력들 사이에 무전이 바쁘게 오고 가며 시끄럽다.
소란의 이유는 곧 등장한다. 엄청난 크기의 트레일러를 실은 트럭이 앞을 막는 것들을 모조리 부순 채 달려오니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로 과감할 줄은 몰랐습니다.”
두 사람은 그걸 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