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6화 (16/175)

#16화

조력자를 찾아야 한다, 목적을 위해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을.

무공을 기반으로 펼치는 교전, 테러, 암살, 도청, 안전 보호 등이 아닌 다른 분야, 대한민국의 법과 행정 등의 전문가가 돌아온 연화존자와 새로이 창설될 무림 전담 기관엔 필요하다.

태생부터 무림인인 그에게는 애석하게도 지금은 21세기고,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사회이며, 법치국가이기 때문이다.

제도권에 편입된다는 건 원치 않아도 절차와 규정 속으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하는 바. 아무리 김철민이 무림인이라 한들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을 싹 다 죽여 가며 나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원하는 나라란 결국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었던가? 사람을 처벌하고 설령 죽일 지라도 아무렇게나 해서는 아니 된다.

무림의 방식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할 지언정, 최소한이란 걸 갖춰야만 한다.

죽어 마땅한 쓰레기들이 대상이라 해도 말이다. 가진 자들, 돈과 권력이 있어 죄가 있음에도 뻔뻔하기만 한 그들을 처단하고 의로움을 바로 세우는 데에는, 무림의 방식으론 한계가 있다.

몇 명 죽여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그렇기에 진정 이 나라를, 이 세상을 올바르게 하고자 한다면 사회의 규칙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잘못된 규칙들, 어리석은 규칙들, 구멍이 숭숭 뚫려 악인들로 하여금 빠져나갈 틈을 열어 주는 룰을 바로잡을 능력 있는 사람이.

유능하면서도 정의로운 사람이 필요하다.

뛰어난 악인은 더 큰 악을 세상에 풀어 놓을 뿐이라는 걸 잘 안다. 차라리 부족함을 채워 가며 끌고 갈지언정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래, 타협을 모르는 젊은 협객 같은 이가 돌아온 연화존자에게는 있어야 한다.

대의에 한몸 불살라 멸사봉공할 의지 있는,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그런 이가.

그러니 과연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이가 있는지 궁구하여 궁리하던 김철민의 뇌리에 얼마 전 만났던 정의로운 한 명의 검사가 떠오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뜻하지 않은 일을 겪으며 이제는 빌어먹을 공무원 때려치우고 자유를 찾아 뛰쳐나가리라 다짐했던 윤아영 검사는 그날의 굳은 결의가 무색하게 국민이 부여한 직분을 여전히 그리고 성실히 수행 중이다.

이래저래 검사 노릇 못 해 먹겠다는 지리한 감상과 조직의 배신자라는 낙인이 사라졌다는 건 아니다. 다만 돌이켜 생각했다. 그건 나가서 어떤 일을 해야 할 지를 떠올리자니, 차라리 여기가 덜 나쁘겠다는 타협.

법복을 벗고 변호사가 되는 순간, 그녀의 사명감은 모습을 바꿔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검사로서 공공의 이익,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하겠다는 마음가짐은 의뢰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는 생활인에게 알맞은 형태가 되겠지.

당연히 이것이 가진 함의야 잘 알고 있지만, 글쎄.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혈기 넘치는 마음가짐상 아직은 돈 잘 버는 변호사보다 힘 없는 검사가 마음에 드는 것이 사실이다.

애초에 많이 벌 생각이었다면 검사 생활을 이렇게 하지 않았을 터였다. 검사복 벗으면 전관예우는커녕 아는 척할 사람이나 있을지 모르겠네. 이거 정말 책이라도 써야 될 판국인데.

이유야 뭐가 되었든 간에 그런 고로 그녀의 처지는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던 것이 사실.

수사에 대한 엄정함이, 늘 해 오던 방식으로 같다.

“어이, 윤 검. 이거 뭐야?”

“…….”

“옛날 버릇 도졌어? 또 쓸데없이 아무데나 들쑤시고 다니게?”

서울상공인모임회가 무너지며 연관된 범죄 정황들이 여럿 수면 위로 드러났다.

그 과정에서 윤아영 검사는 잘나신 다른 동료들이라면 건드리지 않았을 어느 기업의 비리를 포착해 수사에 나선다.

계열사를 이용한 주가 조작 및 탈세는 이런 종류의 범죄가 그렇듯 사실관계가 복잡하게 꼬여 있어 기소가 쉽지 않았지만, 끈기를 가진 집요한 추적 끝에 그녀는 결정적인 증거와 증인을 확보했다.

한율 그룹 총수 일가의 대국민 사과와 경영권 포기 선언이 재계의 동요를 일으킨 와중의 일이었고, 이에 부장 검사는 칭찬은커녕 현명하지 못하다며 되레 면박을 주는 게 현재 그녀가 처한 상황의 전후 관계라 하겠다.

“너, 뉴스 안 봐?”

“…봅니다.”

“그럼 지금 분위기 안 좋은 걸 몰라? 한율 그룹 둘째가 무림인 암살을 시도했다가 반병신 돼 가지고 거기 회장이 사과 기자회견 하고, 경영권 손 뗀다며 주식 다 판다고 그러는 바람에 주식시장이 난리 난 걸 모르냐고? 이런 상황에서 재벌 하나 또 집어넣으려고 수사 중이라고 하면, 어? 그러다 누구 하나 수사 중에 뛰어내리고 그러면 어쩔 거야? 지금 정신이 있어, 없어?”

이에 윤아영 검사는 침묵으로 답하는 중이다.

검사가 죄를 수사함에 있어 여론의 눈치를 보는 게 옳냐며 상사에게 대들지도, 혹시 그녀가 수사 중인 효민 그룹과 부장검사가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게 아니냐며 싸우지도 않았다.

이 정도에 흔들리기엔 그녀도 겪은 일이 많다.

묵묵히 견딜 뿐이다. 바르지 못한 비난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견디는 것조차 검사의 직무라 여긴지도 이제는 오래되었다.

싸워야 할 것이 꼭 멀리만 있으란 법은 없지 않나? 익숙하다.

다만 다음 인사 발령 즈음엔 지방으로 쫓겨 날 거라는 예감이 시시각각 실체를 갖춰 갈 따름이다.

그러니 여느 때와 같은 오후였다 하겠다, 별 다를 것 없이 피로하고, 좋은 일 하나 없는.

“다른 사람들은 일 안 해? 당신만 검사야? 너 혼자 정의롭고, 너 혼자 유능해? 생각이란 걸 좀 하고 조직에 화합을 해야…….”

“와, 이거 내가 딱 좋은 시간에 왔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누군가의 방문을 제외하곤 그랬다는 소리다.

“우리 검사님이 상사들한테 이리 격하게 예쁨받는 스타일인 줄은 미처 몰랐네. 잘 있었어요?”

“당신……?”

“다시 봐서 반가워요, 검사님. 오랜만이죠?”

윤아영 검사는 문가에 서서 웃으며 손을 흔드는 저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와 관련된 소란이, 대체 얼마나 많은 소동이 있었던가?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는 김철민이 누구인지, 이제는 모를 수가 없다.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바빠서 이제야 왔습니다. 근데 시간 좀 있어요? 내가 검사님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

연화존자 김철민은 웃는 와중에도 또박또박 빠르게 말들을 쏟아 낸다.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왜 저리 태연한지, 무엇보다 대뜸 꺼내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따라가기엔 너무 급하다.

분명 그때, 한밤의 만남은 강렬했지만 솔직히 말해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지 않나, 라는 감상을 떠올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

그에 반해 다른 한 명은 화가 좀 났다.

“…뭐 하는 짓들이야!”

난입한 연화존자로 인해 소외된 부장검사는 금새 골이 난다.

“당신 뭐야? 무림인이라고 뵈는 게 없어? 엉? 어딜…….”

“어이, 검사.”

그런 그를 김철민이 상대해 준다.

윤아영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살벌하고 냉소적인 분위기로.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다 경우가 있지. 보통은 그래. 내 부모님께서 정파의 명숙이었다니까? 거기에 나도 곧 다시 나랏일 할 처지가 됐는데, 아무렴 검찰청 한복판에서 얼굴 붉혀 뭐 하겠습니까. 오고 가는 협조 속에 한 줄기 정이 쌓일 관계인데, 막 깽판 치긴 좀 껄끄러운 것도 사실이지. 똥 퍼먹는 개새끼도 제 집에선 한 수 먹고 들어가는 거, 모를 나이도 아니고 말이야.”

김철민은 부장검사에게 다가와 옷깃을 매만져 주고, 먼지를 호호 불며 털어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호의라 착각하는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근데 그것도 직분에 맞게 사는 사람한테 하는 거지, 검사 역할을 제대로 하는. 안 그래?”

“너, 너 지금 이 새끼가…….”

“장인 장모 돈이 좋긴 존나 좋나 봐? 옷 예쁘네, 부드럽고. 어디 브랜드야?”

갑작스레 나온 말에 부장검사가 몸이 굳은 사이, 김철민은 그의 앞뒤를 돌고는 옷을 뒤집어 가며, 라벨을 찾는다 어쩐다 하며 수선을 떤다.

그것으로 시끄럽던 사무실엔 침묵이 고인다.

“처갓집이 좀 살긴 해도 이런 옷 척척 사 줄 만큼 넉넉한 성품들은 아니신 것 같던데……. 결혼했을 때 꼴랑 차랑 집 받고 끝 아니었나? 평소에 검사 사위 대접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불만이 많으시더니, 이거 참. 다 엄살이셨나 봐? 공무원 월급으론 죽어도 못 사는 이리 비싼 명품을 줄줄이 두르고 다니시는 걸 보니 말이야. 부잣집 사위 좋네. 어? 좋아.”

“…그, 그게…….”

“뭐, 그래요. 우리 부장검사님이 대화해야 될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굳이 이 자리에서 따지진 맙시다. 부하 직원 앞에서 위신이 있지. 어차피 내 볼일은 여기 윤아영 검사님한테 있으니까, 그쪽은 저 친구들하고 따라가서 고생 좀 하세요. 아까처럼 힘 한번 내보시고. 네?”

여기까지 말한 김철민은 부장검사의 볼을 톡톡 쳤지만, 상대방은 그 모욕적인 제스처에도 저항하지 못했다.

뒤따라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윤아영 검사를 쥐 잡듯이 잡던 부장검사는 힘없이 끌려갔다. 그는 뇌물수수 등으로 인한 비위 혐의로 감찰 및 징계를 받을 예정이다.

없는 혐의가 아니었고, 징계 재가자와의 이야기도 미리 되어 있다.

이렇게 김철민은 윤아영 검사의 스트레스 요인 중 하나를 손쉽게 제거한다. 피차 바쁜 사람들이니만큼, 용건이 시급한만큼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빨리 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것이 커피 한잔하자는 요청이 곧바로 따라온 이유다.

“식사하기엔 좀 이른 시간이니까, 커피 한잔 어떠십니까?”

그렇게 윤아영 검사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검찰청을 빠져나온다. 검사로 재직하며 한번도 없던 사태에 이래도 되나 싶지만, 이전에 받았던 강렬한 예감과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가 상황을 만들었다.

언제고 다시 만날 사이 같다던 근거 없던 예상은 이루어졌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응당 들어 보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김철민, 그가 피할 수 없는 이라는 건 처음 본 그날 이미 알았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어찌 무 자르듯 단칼에 정리될 것인가? 이어진 침묵 속에 윤아영 검사의 마음은 한없이 복잡하여 혼란스럽다.

연화존자가 암약하던 마교도를 격살한 걸 잡아 왔다. 국가 반역자를 몰락시키고 암살 시도를 어떻게 되갚아 주는지 뉴스를 통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순식간에 부장검사를 날려 버린 권력을 코앞에서 목격했다.

그런 자가 긴히 할 말이 있다는데, 편하게 생각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녀가 다른 법률가들처럼 영악하게 살지는 못할 성격일지언정, 절대로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나쁜 의도로 이러는 것 같지는 않다지만, 진심이야 모를 일. 범죄와 싸우는 국가의 의무를 수행하며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어디 한둘 보았던가?

의심은 직업병이나 다름없다. 인간은 모두 거짓말을 한다, 제 자신조차 속이는 거짓말을.

그렇지만 한편으론 알고 있다, 자기를 속여 얻을 이익이 없다는 걸. 조직에서 배제된 한낱 평검사를 거짓으로 대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런가? 저 정도 되는 사람에게 그런 이익이 있을 거라 생각하긴 어렵다.

그리하여 이런 고민을 하는 그녀에게 마음 한 켠이 속삭인다, 너 그거, 자의식 과잉이라고.

조직에서의 처우는 둘째치고 검찰 전체를 통 틀어 그녀만 한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는 건 오만이다.

사법고시니 뭐니 하는 그런 건 검사라는 직업군에선 최소 요건이 아닌가? 세상에 잘난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개중 권력과 힘에 굴복하는 사람이 그러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많으리라. 부리기에는 그쪽이 훨씬 나을 테지.

윤아영은 자신이 명백히 굴하지 않는 쪽에 속한 사람임을 잘 안다. 권력에의 굴종은 쉽지 않다.

이런 생각으로 속이 시끄러운 그녀를 태운 차가 멀리 가진 않았다. 서울 한복판, 어느 허름한 건물 앞에 조용히 차를 세웠으니까.

사람 없는 동네, 고즈넉해 카페 하나 간신히 있을 뿐.

[카페 팀북투]

멀리 보아야 할 이야기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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