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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7화 (17/175)

#17화

건물은 주변처럼 시간 속에 낡았다. 하지만 깔끔하다. 세월이 내려앉아 오래 되었음에도 잘 관리된 느낌의 길거리처럼 우중충한 느낌 없이 산뜻하다.

낡은 건물뿐 아니라 주변 어디에도 쇠락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금이 가거나, 검어져 그늘진 곳 없이 풍경에 녹아 든. 다만 약간, 아주 조금 쓸쓸함이 전부.

보기 나쁘지 않다.

그건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어울리지 않게 정갈하여 평화로운 모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1층 전체를 쓰는 우드 톤 카페의 세련됨과 아름다움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애써 설명하는 간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 앞에 놓인 작은 입간판에 ‘카페 팀북투’라는 글씨가 적혀 있는 것이 미리 알 수 있는 전부.

알고 오는 이가 아니라면 이곳이 카페라는 걸 모를 정도였고, 설사 알고 왔다 하더라도 통창 너머 비치는 안쪽이란 손님은 하나 없어 들어오기 망설여질 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럴 거라고 윤아영은 생각해 본다, 어딘지 낯설어 자신에겐 어울리지 않다는 감상과 함께.

요즘 카페 중에 이런 곳이 더러 있다지만, 익숙하지 않다. 그녀에게 있어 카페인이란 노동을 위한 물질일 뿐, 또래 사람들처럼 예쁜 카페에 가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곤 하는 취미는 갖가지 투쟁에 지친 여검사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여유 있는 삶이 아니었다.

익숙한 건 연화존자 쪽. 그는 자기 집에 온 것처럼 편하게 문을 열고 들어선다. 윤아영은 겨우 따라 들어가는 게 전부다.

따로 주문을 하지도 않았다.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정중앙에 딱 하나만 준비되어 있는 네모난 테이블에 연화존자는 앉았고, 그녀에게 마주 앉길 권한다.

너무도 자연스러워 여기가 연화존자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으니, 그것은 부지불식간에 닿은 진실.

에스프레소 머신도 없는 카운터 앞에 서 있던 종업원 또한 들어서는 이들을 보고 인사가 없다, 기다린 것처럼 무심하게 그라인더의 원두를 갈아 낼 따름.

준비가 되었음을 알게 하는 광경이었다.

“아메리카노 차갑게 드시죠?”

조사해 왔다는 걸 알게 했다. 기분이 나쁘진 않다.

애초에 국정원 소속이 아니었던가? 아예 몰랐다면, 모른다면 오히려 놀라거나 실망했을 것도 같다.

어쩐지 이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적한 거리, 고요한 카페, 기이한 무림의 고수.

논리가 아닌 감상이 그렇다.

종업원이 조용히 드리퍼에 원두를 붓고 흔들어 수평을 맞춘 뒤, 그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을 부어 원두를 적신다.

침묵 사이를 기분 좋은 향이 스치며 채운다. 고소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듯한 향긋함이 빈 시간과 공간 사이로 스며든다.

이윽고 종업원이 두 잔의 커피를 내왔다, 발소리도 없이, 마치 그림자처럼.

윤아영은 그 한잔을 입으로 가져간 뒤 이렇게 생각한다, 이건 맛있다기 보다는 신기하다고.

“볼리비아에서 가져온 겁니다. 평소에 드시던 거랑 다를 거에요.”

맞다. 차갑게 마심에도 여전히 향미가 살아 있는, 그간 먹던 커피가 커피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화사하게 입과 목구멍 가득히 향기를 뿜어 대는 이 커피는 평소에 먹던 것과 달랐다.

“이번에 남미 쪽에서 들어온 애들이 개인 농장에서 구해 온 건데, 수확량이 얼마 안 돼서 한국까진 안 오더라고요.”

덕분에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제게 하실 이야기라는 게 무엇입니까?”

독특한 향미의 커피는 냉철함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 그것만으로도 이 매혹적인 음료의 역할은 충분하다.

기다렸던 본론의 시작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영입 제안입니다.”

연화존자가 비로소 웃으며 말하니, 참으로 길고 긴 길이었다 하겠다.

하긴, 그가 그녀에게 달리 할 말이 있었을까?

“이미 아시겠지만 무공을 관리하는 국가기관을 창설하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무공과 관련된 일을 총괄할, 역량 있는 기관으로서의 성장을 지향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갈 길이 멀죠. 이제 시작이니까요. 아, 창설 자체는 거의 다 왔습니다. 국정원에서 무공 파트를 떼어 오는 것도 순조롭고, 정치권에서도 달리 반대가 나오지 않고 있거든요. 절차만은 쭉쭉 진행 중입니다. 인력 부족만 빼면 말이에요.”

찬찬히 털어놓는다, 그녀를 찾아오게 된 과정을.

그 필요성을.

“내공 사용자 쪽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습니다. 현천문의 문주이신 운하신권 선배를 비롯해 무림의 여러 선후배들이 참여하고, 참여할 혹은 시킬 예정이라서요. 하지만 싸움박질 잘하는 자들만 모아 놔서야 무슨 큰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받쳐 주고, 이끌어 주고, 함께 가지 못해서야 기껏해야 세상에 무익한 다툼만 늘 테지요. 문파를 하나 세우더라도 주변을 두루 살펴야 하는 법이거늘 국가기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될 조직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법임을 알고 있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했고, 자연스레 윤아영 검사님이 생각났습니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정의로운 사람을 좋아해서요.”

장난스레 웃는 김철민의 표정에도 윤아영의 얼굴은 굳어 있다.

그간 무수한 인내를 함양해 온 젊은 검사는 저 듣기 좋은 말을 마음 편히 받을 수만은 없었다.

“조만간 만들어질 ‘국가무공원’에 윤아영 검사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검찰청에서 파견을 오시는 형태이겠지만, 문제가 없다면 저희 소속으로 쭉 함께 가신다고 보시면 됩니다.”

마음 속에 어렴풋하게 자리 잡았던 예상이 가장 좋은 제안으로 형태를 갖췄건만, 윤아영 검사는 거기에 대한 반가움보다 큰 불편함과 언짢음을 느낀다.

그녀는 말을 믿지 않는다. 공허한 말, 듣기 좋은 말을 쉽게 믿지 못한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예쁜 말, 원대한 목표와 정의를 향한 진실된 선언이 그곳에서 그쳤던가?

얼마나 이용당해 왔던가?

다른 무엇보다 모든 걸 예비했다는 그 자신만만한 권력의 내음이 풍기는 낯섦이, 이 젊은 검사를 불쾌하게 했다.

그녀는 이런 종류의 힘과 그리 친숙하지 않다.

자기도 모르게 방어적이고, 전투적이 될 정도로 말이다.

“창설 초기이다 보니 바쁠 겁니다. 없던 일도 만들어 가며 해야 합니다. 규칙과 규범, 절차, 책임과 권한… 유능한 법률가가 필요한 이유죠. 법률 조항을 검토해 주셔야 할 거고, 그 일이 대충 끝나면 무림인 범죄자들에 대한 체포 등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에 더해…….”

“이 조직을 창설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런 그녀이기에 궁금증을 참지 않았다.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큰 권력과 큰 이익이 걸린 일이 마냥 올바르게 돌아갈 거란 기대가 없는 사람이었다.

너무도 잘 알아 진실과 진심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전 당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 지까지는 모릅니다만,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갑니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그만한 힘을 가진 사람이 왜 갑자기 나서는 겁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해 놓고, 왜 하필 지금입니까? 왜 접니까?”

경계심 가득하여 성마르게 모습을 드러낸 질문들을 김철민은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되레 재밌다는 생각을 한다. 보통 이런 제안, 제법 괜찮은 제안을 받으면 저런 반응이 아니지 않나?

딱히 무례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흥미롭다.

한편으론 기대대로였기 때문이다.

역시 저 검사는 쉽게 가는 법을 모른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습니까?”

선선히 묻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궁금하다.

“…저는 무림인이 싫습니다.”

대답은 이번에도 꽤나 직설적.

“그렇습니까?”

김철민은 거기에 선선히 웃으면서 답함으로써 용기를 북돋아 준다.

더 솔직해져도 된다고.

“무림인만 싫다는 건 아닙니다. 정치인 같은 사회 지도층… 한껏 부패한 권력자들, 자본가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검사 일을 하기 전에도 그랬고, 이 일을 하면서는 더욱 그렇게 됐습니다.”

“검사님도 사법 고시를 붙으신 사회 지도층 아닙니까?

강호의 고수답게 순식간에 말꼬리를 잡는 김철민의 작은 반격에, 윤아영은 부지불식간에 쓴웃음을 짓는다.

“저에 대해 알아보시고 오셨을 텐데요? 고졸 여검사, 그것도 조직의 눈밖에 난 배경 없는 평검사입니다. 사회 지도층으로 살기에는 눈치가 많이 없는 편이죠.”

그래도 이 한마디에 분위기가 조금은 부드러워진다.

“가진 사람들은 참 살기 쉽더군요. 큰 도둑은 작게 처벌받고, 작은 도둑은 크게 처벌받습니다. 언더도그마에 빠져 가난하고 힘없는 범죄자를 변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은 합니다. 가진 것에 따라 차등이 있는,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지 못한 현실을 국가를 대신해 기소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내용은 아니었지만.

“저는 무림인 중에 불의에 맞서 싸우는 자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사뭇 통렬하기까지 하다.

“의로움을 위해 옳지 못한 일과 싸우는 무림인을, 힘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국가에 속한 공무원조차도 말입니다. 항상 피하고, 외면하고, 모른 체하더군요. 싸우는 건 어렵고, 눈을 감는 건 쉽기 때문이란 걸 압니다만… 글쎄요. 무림인도 사람이라 힘과 권력에 무릎 꿇고, 달라붙어 그 단물을 빨기 급급했습니다.”

윤아영의 실망과 좌절 또한 이유가 있다 할 것이다.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진 시대를 사는 정의로운 검사는 세상의 정의, 무림의 협의에 아무런 기대가 없다.

연화존자가 대한민국을 놀라게 하긴 했지만, 그게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는 회의감이 그녀에겐 있다.

“그래서 새로 창설된다는 국가무공원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윤아영의 말에서 김철민은 깊은 좌절을 읽어 낸다.

익숙한 것들이다. 연화존자의 젊은 시절과 얼마 전까지를 지배했던 감정은 반갑기까지 하다.

“검사님, 제가 보기보다 나이가 많아요. 반로환동을 했거든요.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뭐,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설명한다.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건 제 젊은 시절이 윤 검사님 같아서 그렇습니다. 한때는 제게도 정의에 대한 열정 같은 게 있었지만, 세상은 그런 걸 알아 주지 않더라고요. 더럽고, 썩었고, 비열하고.”

연화존자는 윤아영의 저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안다.

아주 잘.

“그래서 그냥 조용히 살자, 어차피 사람들은 안 바뀐다, 세상이 그렇다. 이렇게 살고 있었는데… 얼마 전 검사님 하시는 걸 보고 내가 가만히 생각을 해 봤어요.”

그는 얼마 전, 좌절에서 한 걸음 내딛은 참이며.

“쪽팔리더라고.”

지금 허심탄회하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나름 무공을 익힌 고수에, 공부도 많이 했고 가진 것도 많은데, 실의에 빠져 잘못된 걸 방관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장강의 앞물이 뒷물에 밀린다지만 흘러가 버리더라도 무언가 하나 제대로 된 걸 남겨야 하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을 내가 해 봤어요.”

연화존자는 들어오는 햇살을 등지며 말했다, 전과는 달라질 거란 걸.

달라지게 할 거란 걸.

“나쁜 놈들이 처벌받고, 선한 자들이 피해받지 않도록 할 겁니다. 나라를 튼튼하게 하고, 내부와 외부의 적들을 무찌르고, 군대를 튼튼히 하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자들이 대우받도록 만들 겁니다.”

그는 예전의 포부를 되찾았다. 자신감을 찾았고,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동원해 다시 한번 열정을 발휘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 준 사람에게 손을 내민다.

“대한민국을 바꿀 겁니다. 적어도 썩은 놈들이 뻔뻔하게 고개 들고 다니지는 못하게 할 거에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 난 거기에 검사님이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연화존자의 눈에 다시 한번 무지개가 어린다, 난폭하고 사납지만, 무섭도록 빛이 나는.

“다시 한번 부탁하겠습니다. 부디, 새로이 출범하는 국가무공원이 큰 뜻을 이룰 수 있게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검사님?”

잠깐의 침묵 후, 여검사는 답한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답이었다.

창가에 머물러 있던 햇살은 어느새 발치에 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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